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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

“네, 원해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

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

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대표님.”

“가자.”

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

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

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감옥?”

“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

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

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

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

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

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

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이준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대표가 낯선 여자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강 대표님께…… 말을 건 거야? 대표님도 받아준 거고?’

이준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의 뒤를 밟으며 유진의 월세방 문 앞까지 따라갔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린 끝에 대표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이준도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다. 모든 수단을 이용해 유진의 신원을 낱낱이 조사했다.

“임유진…….”

지혁은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유진의 이름 세 글자를 읊조리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밌네.”

지혁은 진 씨 집안의 큰딸인 진애령과 결혼을 약속한 것도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다. 진애령 정도면 그에게 한평생 같이 살 여자로 괜찮은 상대였다. 하지만 그랬던 세연이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죽을 줄은 몰랐다.

‘임유진…… 나와 진애령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어떤 여자가 자신의 손을 잡고, 그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 약간 떨리면서도 확실한 목소리로 자신을 원한다고 말한 여자는 유진이 처음이었다.

“고 비서가 볼 땐, 어떤 여자가 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뜬금없는 물음에 이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건 대표님이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에 달린 거 아닐까요?”

그리고 한참 뒤 들려온 그의 대답에 지혁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중에 임유진의 자료를 다 정리해서 내 사무실에 놔둬.”

“네.”

‘대표님 설마…… 임유진 씨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

유진은 퇴근 후 아버지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출소했으니 어머니의 제사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유진은 그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감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그녀의 가족은 연을 끊으려 안달이 나 있었고, 지난 3년 동안 면회 한 번을 온 적도 없었다. 유진과 그녀의 가족들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유진의 친어머니는 그녀가 3살이 될 무렵 젊은 나이로 유진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방미령과 결혼하여 임유라를 낳았다.

유진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새엄마가 유라와 자신을 차별한다는 것을 알아채 남들보다 빨리 철이 들었고,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학업으로 부모 속을 한 번도 썩인 적 없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녀의 아버지도 어느 순간부터는 남들 앞에서 성적 우수한 그녀 자랑을 하고 다녔다.

유진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을 때는 소민준과 사귀게 된 그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새어머니는 그녀를 살뜰히 챙겼으며 이복동생인 유라도 그녀를 추켜세우기 바빴다.

그녀는 이 모든 게 소민준이 SY그룹의 후계자였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가족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나며 모든 것이 그녀의 허황된 꿈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방미령의 목소리는 생각에 잠겨 있던 유진을 다시 현실로 끌고 왔다. 유라가 연예계에 어렵게 발을 들였는데 더 좋은 역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유진아, 우리 집이 어렵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근데 네 여동생은 지금 돈이 필요해. 혹시 돈을 좀 빌려줄 수 있겠니? 우리 유라가 성공하고 나면 꼭 갚을게.”

“돈 없어요.”

퉁명스럽게 툭 내뱉은 한마디에 방미령의 표정은 이내 굳어버렸지만, 이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넌 돈이 없어도 소민준은 있을 거 아니야. 그 애는 너랑 잘 만나고 있다가 고작 그런 일로 널 버렸는데, 솔직히 보상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아줌마랑 아빠 그리고 유라까지 그 일이 생기자마자 저를 병균 취급하며 피해 다녔던 건 기억 안 나요?”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가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왜 지난 일을 갖고 운운하는 거야? 애초에 네가 사람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네 여동생은 애초에 여주인공이 되고도 남았어! 벌써 대스타가 되어 있었을 거라고!”

유진의 입가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유라가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도 SY그룹이 드라마 제작사에 투자하며 민준이 여주인공으로 유라를 꽂아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유진과 민준이 헤어지며 유라의 여주인공 자리는 자연스레 무산됐다.

“언니, 혹시 우리가 면회 안 갔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유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언니가 건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진 씨 집안과 강지혁이었어! 가진 게 그렇게 많은 소씨 집안도 영향을 받을까 봐 소민준더러 언니랑 헤어지라고 했잖아. 우리가 거기서 뭘 할 수 있겠어? 우리가 맞소송이라도 했어 봐, 언니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진 씨 집안과 강지혁을 공격하는 거랑 똑같은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겠어?”

“일리 있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유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땐 내 곁에 아무도 없었어. 당연히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날 지켜줄 생각도 없었지. 근데 내가 뭐 때문에 당신들한테 돈을 갖다 바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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