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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작가: 유진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

“네, 원해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

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

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대표님.”

“가자.”

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

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

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감옥?”

“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

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

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

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

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

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

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이준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대표가 낯선 여자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강 대표님께…… 말을 건 거야? 대표님도 받아준 거고?’

이준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의 뒤를 밟으며 유진의 월세방 문 앞까지 따라갔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린 끝에 대표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이준도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다. 모든 수단을 이용해 유진의 신원을 낱낱이 조사했다.

“임유진…….”

지혁은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유진의 이름 세 글자를 읊조리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밌네.”

지혁은 진 씨 집안의 큰딸인 진애령과 결혼을 약속한 것도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다. 진애령 정도면 그에게 한평생 같이 살 여자로 괜찮은 상대였다. 하지만 그랬던 세연이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죽을 줄은 몰랐다.

‘임유진…… 나와 진애령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어떤 여자가 자신의 손을 잡고, 그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 약간 떨리면서도 확실한 목소리로 자신을 원한다고 말한 여자는 유진이 처음이었다.

“고 비서가 볼 땐, 어떤 여자가 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뜬금없는 물음에 이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건 대표님이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에 달린 거 아닐까요?”

그리고 한참 뒤 들려온 그의 대답에 지혁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중에 임유진의 자료를 다 정리해서 내 사무실에 놔둬.”

“네.”

‘대표님 설마…… 임유진 씨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

유진은 퇴근 후 아버지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출소했으니 어머니의 제사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유진은 그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감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그녀의 가족은 연을 끊으려 안달이 나 있었고, 지난 3년 동안 면회 한 번을 온 적도 없었다. 유진과 그녀의 가족들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유진의 친어머니는 그녀가 3살이 될 무렵 젊은 나이로 유진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방미령과 결혼하여 임유라를 낳았다.

유진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새엄마가 유라와 자신을 차별한다는 것을 알아채 남들보다 빨리 철이 들었고,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학업으로 부모 속을 한 번도 썩인 적 없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녀의 아버지도 어느 순간부터는 남들 앞에서 성적 우수한 그녀 자랑을 하고 다녔다.

유진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을 때는 소민준과 사귀게 된 그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새어머니는 그녀를 살뜰히 챙겼으며 이복동생인 유라도 그녀를 추켜세우기 바빴다.

그녀는 이 모든 게 소민준이 SY그룹의 후계자였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가족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나며 모든 것이 그녀의 허황된 꿈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방미령의 목소리는 생각에 잠겨 있던 유진을 다시 현실로 끌고 왔다. 유라가 연예계에 어렵게 발을 들였는데 더 좋은 역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유진아, 우리 집이 어렵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근데 네 여동생은 지금 돈이 필요해. 혹시 돈을 좀 빌려줄 수 있겠니? 우리 유라가 성공하고 나면 꼭 갚을게.”

“돈 없어요.”

퉁명스럽게 툭 내뱉은 한마디에 방미령의 표정은 이내 굳어버렸지만, 이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넌 돈이 없어도 소민준은 있을 거 아니야. 그 애는 너랑 잘 만나고 있다가 고작 그런 일로 널 버렸는데, 솔직히 보상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아줌마랑 아빠 그리고 유라까지 그 일이 생기자마자 저를 병균 취급하며 피해 다녔던 건 기억 안 나요?”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가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왜 지난 일을 갖고 운운하는 거야? 애초에 네가 사람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네 여동생은 애초에 여주인공이 되고도 남았어! 벌써 대스타가 되어 있었을 거라고!”

유진의 입가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유라가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도 SY그룹이 드라마 제작사에 투자하며 민준이 여주인공으로 유라를 꽂아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유진과 민준이 헤어지며 유라의 여주인공 자리는 자연스레 무산됐다.

“언니, 혹시 우리가 면회 안 갔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유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언니가 건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진 씨 집안과 강지혁이었어! 가진 게 그렇게 많은 소씨 집안도 영향을 받을까 봐 소민준더러 언니랑 헤어지라고 했잖아. 우리가 거기서 뭘 할 수 있겠어? 우리가 맞소송이라도 했어 봐, 언니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진 씨 집안과 강지혁을 공격하는 거랑 똑같은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겠어?”

“일리 있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유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땐 내 곁에 아무도 없었어. 당연히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날 지켜줄 생각도 없었지. 근데 내가 뭐 때문에 당신들한테 돈을 갖다 바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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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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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임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한 입 남은 찐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예전 같았으면 맛없다고 투정 부렸을 테지만, 지금 그녀에게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우리는 많이 닮았으니까?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이잖아. 어쩌면 그 누구도 우리를 원하지 않을 거고, 관심을 주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말을 마친 그녀는 강지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희망과 기대 속에 김장감도 섞여 있었다.“그런가? 하긴, 우리가 비슷한 부류긴 하지…….”진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그의 눈은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진혁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가질 수 있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유진의 말은 꽤 흥미로운 게임으로 다가왔다.“누나.”그는 유진이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순간, 유진의 미소는 봄에 핀 꽃들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저녁을 먹고 난 뒤, 유진은 지혁을 데리고 야시장으로 가, 그가 입을 옷을 샀다. 분명 세일하는 싼 옷을 골랐지만 금액은 10만원을 훌쩍 넘었다.하지만 유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지혁에게 새 패딩을 입혀줬다.“따뜻하지?”“응.”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신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아담한 유진을 바라봤다.“사실 안 사줘도 돼. 원래 있던 옷으로도 충분해.”“충분해도 새 옷을 입을 순 있잖아. 물론 돈이 없어서 많이는 못 사주지만, 적어도 너한테 옷 한 벌 정도는 사줄 수 있거든?”“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진혁은 나지막이 물었다.“그야 내가 네 누나니까.”유진은 싱긋 웃으며 지혁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우연히 닿은 차가운 그의 손에 유진은 양손으로 감싸 입김을 불어주며 이리저리 비벼댔다.“손이 너무 차가운데? 이렇게 문지르다 보면 좀 따뜻해질 거야.”스스럼없는 여자의 행동에 지혁은 약간 굳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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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딴 영광 필요 없어.”임유진의 말에 하 감독은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달려들어 뺨을 갈겼다.“내가 마시라면 마실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비싼 척은!”이윽고 욕설을 퍼붓더니 옆에 놓인 와인병을 들어 유진의 입에 마구 부어 넣었다.유진은 상대방을 밀쳐내려고 애썼지만, 여자 혼자서 건장한 남자를 힘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임유라까지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으니.하 감독은 유라의 눈치 있는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유라 씨, 가만 보면 참 기특하다니까. 내가 유라 씨 분량 꼭 늘려준다. 총감독님한테는 내가 말 잘해볼게.”그 말에 임유라는 더 신이 나서 열심히 옆에서 도왔다.“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저희 언니가 이런 데 좀 서툴러서 그러니 감독님이 이해해주세요.”한편, 유진은 자기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도 몰랐다. 주량이 약하다 못해 거의 알코올 쓰레기라고도 불리었기에 벌써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의식이 꺼지지 않도록 본인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나…… 나 집에 갈래…….”“그래, 이따가 데려다줄게.”하 감독은 술에 취해 나른해진 그녀를 얼른 끌어안았다.유진은 화려한 미녀는 아니지만 일전에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다는 것만 생각하면 하 감독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 감독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솔직히 전화를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액정에 뜬 총감독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수신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총감독은 그의 큰 형인 데다 그가 감독의 자리를 꿰찬 것도 총감독인 형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었다.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급기야 호흡마저 가빠졌다.“그…… 그럴 리가 없어. 이, 이 여자…… 이 여자는 환경미화원인 데다 백도 없다고. 전 남자친구인 소민준과도 헤어진 지가 언젠데, 게다가 지금 소민준은 약혼녀까지 있잖아.”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여자친구가 환경미화원으로 길바닥 청소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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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강지혁의 뇌리에는 어제의 일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임유진을 침대에 눕힐 때, 유진이 갑자기 자기를 깔아 눕히던 기억.그 순간만 떠올리면 놀랍기만 하다. 자기가 방심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만약 상대가 지혁의 목숨을 노렸다면 아마 반항도 못 하고 바로 죽었을 거다.언제나 경계심이 많던 지혁이었기에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유진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덮고 있던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두 눈을 소중하다는 듯 어루만졌다.“혁아, 너 눈 진짜 예뻐…… 마음에 들어…… 좋아…….”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잇따라 귓가에 들려왔다.“좋다고?”이 단어는 그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단어라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다 지혁에게 좋아한다 눈이 마음에 든다 등과 같은 말을 해왔었으니까.지혁의 두 눈은 아마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은 부분일 거다.그리고 지혁이 어렸을 때, 지혁의 아버지는 매번 지혁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리곤 했다.“이런 눈은 다정해 보이지만 제일 매정해. 혁이 넌 앞으로 다정할지 매정할지 모르겠네.” 하고 말이다.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유진의 대답이 들려왔다.“응…… 왜냐하면…… 딸꾹…… 아주 맑고 깨끗해.”‘깨끗하다고?’지혁은 피식 웃었다. 지혁의 눈이 깨끗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유진이 처음이다.“마치…… 죄악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엄청 깨끗해.”유진은 술에 취한 모습으로 자기의 얼굴을 지혁의 얼굴에 바싹 붙인 채로 읊조렸다.“혁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 보호해 줄게…….”그리고 말을 채 끝마치지도 않고 지혁의 가슴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날 보호한다고? 자기도 보호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보호한다고 그래? 진짜 바본가?’“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고꾸라져 자던데?”지혁은 어제의 기억을 접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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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9시가 넘도록 강지혁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그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고 마음 졸였지만, 하필이면 지혁한테 핸드폰도 없는지라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었다.이윽고 아예 집을 나와 동네를 둘러보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지혁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도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먼발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유진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혁아!”지혁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그리고 유진이 앞에 도착했을 때에야 지혁은 유진이 숨을 헐떡이는 건 물론 얼굴도 얼어 벌겋게 물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오히려 예쁘게 반짝거렸다.“돌아와서 다행이다.”“혹시…… 나 기다렸어?”지혁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로 보아 유진이 밖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지 짐작이 갔다.“응.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유진은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그런 유진의 눈에서 지혁은 유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혁이지 GH 그룹 대표 강지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의 신분이 밝혀져도 유진이 자기를 이렇게 걱정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전단지를 돌리는 게 생각보다 늦게 끝났어. 손 차갑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이윽고 싱긋 웃더니 유진의 두 손을 잡은 채로 지난번 유진이 했던 대로 유진의 손을 살살 비벼주기 시작했다.점점 따뜻해지는 손에 유진의 마음에도 점차 온기가 차올랐다. 분명 추운 날씨임에도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있어서 참 좋아.”지혁은 유진의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 말 꼭 기억해. 앞으로 절대 후회하면 안 돼.”“당연하지. 절대 후회하지 않아. 이제 됐어, 나 이제 따뜻하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자. 저녁 다시 데워줄게.”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9화

    “대표님, 저택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면…….”“서흥구로 가.”병원에서 나오기 바쁘게 물어 오는 고이준의 물음에 강지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서흥구는 바로 임유진이 살고 있는 동네다. 이준도 자기의 상사가 그 자그마한 단칸방에 얼마나 더 머물 예정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서흥구로 향하던 중, 신호등이 바뀌는 찰나 이준은 갑자기 지혁을 불렀다.“대표님, 저기 임유진 씨가 있습니다.”아니나 다를까 지혁이 고개를 돌려 봤을 때, 맞은편 거리에서 바닥을 쓸고 있는 가느다란 그림자 보였다.형광색 작업복에 질끈 묶어맨 머리를 한 채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유진의 입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그리고 그때, 스쿠터 한 대가 적색 신호등에 걸리지 않기 위해 쏜살같이 유진의 곁을 지나면서 유진의 다리를 스치고 가는 바람에 유진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하지만 스쿠터 주인은 잠시 멈칫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쌩 지나가 버렸다.지혁과 이준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대표님, 저 차주에 대해 조사하고 책임을 물을까요?”이준은 자기의 상사가 유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데다 지난번 클럽에서도 유진을 위해 나섰기에 이번 일도 당연히 나설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길 건너편에 넘어진 유진을 보는 순간 지혁의 뇌리에는 할아버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오늘 네가 한 말 꼭 기억해 두거라 영원히. 네 아비처럼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그래, 난 절대 아버지처럼 여자 때문에 인생 망치는 짓 안 해.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야.’게다가 지혁은 지금 평소의 자신이 아니기에 유진이라는 환경미화원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참견하지 마.”지혁은 눈빛을 거두며 담담하게 명령했다.하지만 그 명령을 받은 이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건가? 대표님이 유진 씨한테 마음이 없나?’전방의 적색 신호등은 어느새 녹색으로 변해 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시각, 서미옥이 넘어진 유진을 일으켜 세웠다.“유진 씨,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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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실망할 일은 없을걸?”임유진은 이 말만 남기고 다시 양말을 신고는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그런 유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면 나중에 절대 실망하면 안 돼.”--클럽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임유라는 매일매일을 불안에 시달렸다. 그날의 하 감독의 태도는 이상하다 못해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그다음 날 하 감독은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총감독마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심지어 교체된 이유를 제작진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함정이었다. 하지만 유라는 왠지 모르게 총감독까지 교체된 이유가 하 감독의 일과 관련 있으며 나아가서 유진과도 관련이 있다고 느껴졌다.그렇게 의심만 하기를 며칠째, 유라는 하 감독이 오른손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오른손은 하 감독이 임유진을 때린 손이었던 것 같은데.’그런 생각이 들자, 유라는 몹시 불안해졌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얻을 수 없었다.‘그날 하 감독이 전화를 받고 난 뒤부터 임유진에 대한 태도가 변했어. 게다가 하 감독이 이렇게 된 건…… 너무 우연의 일치 아닌가? 아니면…… 임유진 뒤에 정말 대단한 백이 있는 건가?’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대단한 백이 있다면 유진이 고생을 하며 길거리에서 청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혼자서 끝내 결론을 얻어내지 못한 유라는 그날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부모님께 털어놓았다. 하지만 임정호는 작은딸이 큰딸더러 술 접대를 하게 했다는 걸 듣기 바쁘게 유라를 째려보았다.“넌 어떻게 네 언니한테 술 접대를 시킬 수가 있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안은…….”“술 접대가 뭐 어때서요? 게다가 유라도 우리 집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유라가 유명해져야 우리 가족도 잘 먹고 잘살 거 아니에요. 설마 당신, 그 감옥 다녀온 큰딸한테 희망 거는 거예요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1화

    임정호, 방미령과 임유라 세 사람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를 살폈다.그리고 그때 미령은 그제야 반응했는지 몇 마디 욕설을 퍼부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호가 한발 빠르게 방미령을 제지했다.“됐어, 저 남자도 감옥에서 알게 된 사람이면 어쩌려고! 감옥이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저 남자가 어떤 죄로 옥살이했을지 누가 알아.”그 말에 미령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애써 삼키며 분을 삭이다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면 당신 이 일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에요?”“상황을 지켜보자는 거야. 만약 하 감독이 유라한테 책임을 물으면 그때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이건 한참을 고민해서 얻은 정호의 결론이었다. 솔직히 지금 안에 들어가 남자와 다툴 배짱도 없었다.하지만 옆에 있던 유라는 미간을 구기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방금 유라는 안에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그 사람이 정말로 옥살이하고 나온 남자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분명 두꺼운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지혁의 잘생긴 얼굴은 유라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특히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얼굴과 분위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본 것처럼 낯익은 느낌이었다.이윽고 저 사람도 연예계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그 시각, 방 안.“고마워.”유진은 지혁을 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만약 그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유진은 아마 아버지에게 손찌검당했을 것이다.“에이 동생이 누나를 돕는데 고마워할 필요가 뭐가 있어? 당연한 거 아닌가?”지혁은 유진의 진지한 태도에 장난기 섞인 말투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겼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이 유진의 발목에 닿았다.“발목은 괜찮아? 내가 또 약 발라줄까?”지혁은 말하면서 벌써 약을 꺼내 들고 손에 덜어내더니 유진의 발목을 살살 문지르며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다시 조용해진 분위기에 유진은 쭈뼛거리다가 자기 입술을 꽉 깨물었다.“저 세 사람이 나 왜 찾아왔는지 안 물어봐?”“누나가 말 안 하면

최신 챕터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505화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504화

    “누가 대문 바로 앞에 아이를 두고 갔다고 경호 실장님이 얘기해줬어요. CCTV를 돌려보니 김재호 비서더라고요.”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도련님, 이 아이... 도련님 어릴 때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집사는 갓난아기 시절의 강지혁을 본 적이 있다.당시 강선우는 울고 있는 강지혁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봐서 강문철이 자신의 아내를 받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강문철은 강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선우까지 필요 없다며 아주 단호하게 두 사람을 내쳤다.“이 집 문턱을 넘고 싶으면 그 여자를 버리고 와!”그렇게 강선우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강지혁을 데리고 다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집사는 그때 강선우의 품속에서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경호 실장에게서 아이를 전해 받은 후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강지혁은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서서히 크게 뜨며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말했다.“나와... 닮았다고?”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있었다.“네, 가까이에 와서 한번 봐보세요.”집사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휘청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고이준은 집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 덕에 간신히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집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핑크색이다 못해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설마... 유진이가 낳은 아이인 건가? 하지만... 그러면 아이가 세 명이어야 하는데? 왜 한 명이지? 그리고... 유진이는 어디 있지? 왜 아이만 있는 거지?’강지혁의 머릿속은 지금 질문으로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은 후 다급하게 강지혁을 불렀다.“대표님, 김재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답니다!”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503화

    강씨 저택.고이준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강지혁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S 시의 꼭대기에 군림해있는 남자가 임유진의 옷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는 임유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한가득 널려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대표님...”고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미팅에 이제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해주셔야 할 서류들도 있고요.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유진이 소식은 아직이야?”잔뜩 잠긴 목소리가 고이준의 말을 끊었다. 다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는 상태였다.마치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느끼려는 사람처럼, 마치 지금 눈을 떠버리면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완전히 빼앗겨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네,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임유진을 찾아 헤맨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긴 시간에 지친 수색대원들은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다며 이 이상 수색해봤자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고이준은 그 말을 강지혁에게 전할 수 없었다. 전하면 강지혁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유진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얘기 좀 해줘, 응? 제발...”강지혁이 품에 있는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완전히 옷에 파묻었다.“나한테 잘살라고 했지? 그런데 유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대표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사모님께서 하늘에서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 과연 좋아할까요? 오히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보다 못한 고이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그는 말을 내뱉자마자 1초도 안 돼 바로 후회했다. 굳게 닫혀있던 강지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를 아주 무섭게 노려봤기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502화

    “아니, 안 죽었어.”윤이의 질문에 대답한 건 탁유미가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은 윤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유진이 이모는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윤이는 아직 이경빈을 용서하지 못한 것인지 그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탁유미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지켰다.아이는 탁유미가 이경빈으로 인해 험하게 다뤄지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이경빈은 고작 4살짜리 아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걸 보며 괜히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다정했던 윤이를, 언제나 선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윤이를 가차 없이 버린 건 바로 이경빈 본인이었으니까.그가 멍청하게 행동한 탓에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던 아이와의 정도 이제는 완전히 잡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엄마한테 상처 줄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이경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그도 알고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속죄뿐이라는 것을.탁유미는 별다른 말 없이 윤이의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경빈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그러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탁유미의 이름을 불렀다.“유미야, 나한테 뭐 할 말 없어...?”그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돌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유진 씨 찾아주고 있다며? 들었어.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묻는 게 나와 너 사이에 관한 일이라면 따로 할 말 같은 거 없어.”탁유미는 이제 완전히 그와 선을 그으려는 모양이었다.그때 버스가 도착하고 탁유미와 윤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그리고 이경빈은 고통을 삼킨 얼굴로 두 사람을 태운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녀는 이제 그와 그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한다.하지만 현재 두 사람의 상황이 어떻든 그녀가 살아 있으니 그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501화

    사실 고이준은 지금껏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임유진은 강지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임유진이 강지혁 대신 죽음을 택했을 때 그 누구보다 놀랐고 그녀의 행동에 탄복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지 모르나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대표님을 사랑하시니까요. 그래서 자신보다는 대표님께서 살기를 바랐던 거죠.”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움찔 떨렸다.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날 사랑한다고... 그래, 날 사랑해서 그런 거야. 유진이는 날...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그렇게도 확실하게 얘기해줬는데 나는 믿어주지 않았어...”강지혁은 임유진이 아이들 때문에 그를 용서한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용서하는 거라고 했을 때 그럴 일 없다며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는 줄곧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이 그녀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임유진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목숨으로 그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줬다.“대표님, 사모님은 아마 바다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대표님 걱정을 하셨을 겁니다. 절대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절벽에서 떨어진 게 아닐 겁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모님을 위하신다면 다시 정신을 차려주세요!”고이준은 강지혁이 홧김에 나쁜 선택을 할까 봐 너무나도 걱정이 됐다.“이준아...”그때 강지혁의 곧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정말 이대로 유진이를 찾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애초에 살아갈 수는 있을까...?”모든 걸 다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가 지금은 마치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저녁 바다를 담은 그의 검은색 두 눈동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탁해져 있었다.고이준은 그런 그의 모습에 순간 만약 정말 이대로 임유진을 찾지 못하면 강지혁은 어쩌면 정말 나쁜 선택을 할지도 모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500화

    “이 여자 살려내.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세 명의 아이도.”김재호의 말에 의사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확언하기 어렵습니다.”“당신이 이 근방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의사라는 거 알아. 그리고 이력서 보니 산부인과에서 몇 년이나 근무한 경력이 있던데 그러면 수술 같은 건 당신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거 아니야.”김재호는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사의 이력은 이미 진작에 조사를 마쳤다.“물론 그렇습니다만... 네 명 다 살릴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만약 넷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살려내지 못하면 그때는 이 보건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 반드시 살려내.”김재호가 음산한 얼굴로 협박했다....임유진이 탄 차량은 육지로 건져졌다. 하지만 차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경찰과 강지혁의 경호원들이 바다 근처를 전부 다 수색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72시간의 골든 타임도 이제는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는 정말 죽은 거라고 포기해야 할 때가 왔다.하지만 이곳에는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고이준은 멘탈이 붕괴하기 직전까지 온 강지혁이 너무나도 불안하고 또 걱정됐다. 또한 멘탈이 무너지는 순간 강지혁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몰라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다.고이준은 배 갑판에 가만히 서 있는 강지혁을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요 며칠 강지혁은 거의 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임유진의 행방을 쫓았다. 그는 가끔 시체라도 좋으니 제발 눈앞에 나타나 달라며 외쳤다.하지만 고이준은 오히려 임유진의 시체가 나타나지 않은 이 상황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임유진의 시체를 마주하게 되면 강지혁은 볼 것도 없이 미쳐버릴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의 목숨은 구해주었지만 그 대신 강지혁의 멘탈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세요. 벌써 3일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499화

    그리고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강문철의 예상을 벗어남으로써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쟁취했다. 물론 그것도 하늘의 뜻이 어떤지 봐야겠지만 말이다.김재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강문철이 살아생전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임유진이 정말 지혁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때는... 살려둬. 하지만 지혁이 곁에 두지는 마. 임유진은 지혁이한테 약점밖에 안 돼.”“그러면 차라리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김재호의 질문에 강문철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김재호는 그저 강문철에게 임유진이 만약 바다에 빠졌는데도 살아나면 그때는 그녀를 살려주라는 지시만 받았다.한편 절벽에서 2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작은 오두막 안에 있던 진세령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휴대폰을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예쁜 얼굴이 단숨에 질투와 분노로 무섭게 일그러졌다.“왜! 왜 임유진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왜 살려주려고 하는데! 왜! 왜!”강지혁은 그녀의 언니인 진애령의 죽음 때는 자기와는 아주 조금도 상관없는 사람의 죽음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임유진을 위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버튼을 누르며 죽음을 택했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임유진의 행복만을 빌었다.“임유진이 뭐라고 그렇게 해!”진세령은 결과적으로 임유진이 죽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는데도 전혀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분명히 속이 시원하고 상쾌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지독한 패배감만 들었다.강지혁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어주려고까지 하는 남자를 그녀는 영원히 얻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강지혁이 미쳐버린 지금 고이준은 자신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싶어 일단 경찰을 불러 바다에 떨어진 임유진을 수색하게 한 다음 강제로 강지혁을 구급차에 태워 병원에 보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보니 그제야 김재호가 그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498화

    강지혁은 생각보다 감정에 섬세한 남자라 임유진은 차라리 그가 그녀를 조금 덜 사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무리 지금은 마음이 아파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을 수 있을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이라는 남자와 흰머리로 뒤덮일 때까지 정말 잘살아 보고 싶었다. 예쁜 아이 셋을 낳고 평생 웃으며 행복하게 잘살아 보고 싶었다.그래서 그때 그에게 영원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평생 그의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말을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약속을 이제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겨버렸네...?’임유진은 중력으로 몸이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문득 강문철이 그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강문철은 그녀가 정말 강지혁을 사랑하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내가 혁이를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으셨나? 그래서 내 손을 기어봉에 묶어놨나? 내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려고?’임유진의 귓가에 강지혁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극심한 고통과 해수가 그녀를 집어삼켰다.“유진아! 유진아!”강지혁은 이대로 임유진의 차량을 따라가려는 듯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고이준은 그런 그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며 이내 경호원들에게 같이 힘을 보태라고 지시했다.그러자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강지혁의 팔과 몸을 잡았다.“놔! 이거 놔! 유진이 구하러 가야 하니까 이거 놔!”강지혁이 눈이 빨개진 채로 목이 부서지라 외쳤다.“사모님께서는 차량과 함께 떨어지셨습니다! 이대로 대표님께서 뛰어봤자 함께 목숨을 잃는 것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모님이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 대표님도 들으셨잖습니까! 그런데도 이대로 사모님을 따라가실 겁니까?!”고이준이 외쳤다.그러자 그 말에 강지혁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그도 알고 있다. 임유진이 그를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쯤은. 하지만... 그녀가 세상에 없는데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그때 기계 장치 쪽에서 치지직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금 강문철

  • 길에서 주운 노숙자가 알고보니 유명그룹 대표님?!   제1497화

    임유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새어 나왔다.지금 이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남의 행복이나 비는 바보 같은 남자 때문에 그녀는 가슴이 아프고 또 숨이 막혔다.강지혁의 엄지손가락이 결국에는 버튼을 눌렀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있는 차 안 모니터에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그게 폭탄 해제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그녀와 강지혁 사이에는 이제 고작 2분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2분이라는 시간 동안 강지혁은 언제든지 손을 떼고 그곳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다.“고 비서님, 당장 혁이를 저기서 끌어내 주세요!”임유진이 고이준을 향해 외쳤다.그 말에 고이준의 몸이 움찔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지혁을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임유진이 탄 차량 주위에 깔린 폭탄들이 터지게 된다.“내 몸에 손대면 그게 누구든 가만 안 둬!”강지혁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아주 크게 울려 퍼졌다.이에 경호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준은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고이준, 유진이가 절벽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면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 그리고 지금 당장 내 곁에서 멀리 떨어져.”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원해서 하는 거라고?하지만 그게 원해서든 아니든 임유진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사실 그녀에게는 강지혁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임유진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기어봉에 묶인 손을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어느새 많이도 불룩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미안해. 엄마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정말 미안해... 엄마가 한 선택에 너희를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너희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혁이가 죽는 걸 이대로 지켜볼 수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엄마 한 번만 봐줘.”임유진은 숨을 한번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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