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 순서가 다가왔을 때, 탁유미는 그제야 회전목마가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병 때문에 식욕이 떨어져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걸 보니 금세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아까부터 간 쪽이 또다시 욱신거리는 것으로 보아 통증이 시작되려 하는 게 틀림없었다.윤이는 차례가 다가오자 환호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아들이 이렇게도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탁유미는 한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안전바를 꽉 잡으며 최대한 통증을 참아내려 했다.이경빈의 시선이 아까부터 자신에게 있었음을 모른 채 말이다.이 정도의 회전속도는 이경빈에게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또 조금 유치할 수 있는 행동도 윤이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체험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윤이가 기뻐서 방방 뛸 때면 그 역시 마음이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따뜻해졌다.이런 감정은 처음이다.피가 당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까?윤이가 친아들이라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이경빈의 시선이 매섭게 탁유미를 쫓았다.그는 창백한 얼굴로 이제는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있는 그녀를 보며 미간이 절로 찌푸렸다.그녀가 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윤이에게는 가슴 설레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경빈은 어이가 없게도 자신이 아까 내뱉은 말이 후회되기 시작했다.회전목마가 멈추고 탁유미는 애써 웃어 보이며 윤이에게 말했다.“엄마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아빠랑 여기 있어.”그녀는 말을 마친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세면대에 얼굴을 박고 게워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오늘 아침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라 게워내려고 해도 뭘 게워낼 것이 없었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다행히 윤이는 그녀의 몸 상태가 좋
앞으로도 이렇게 이경빈이 윤이에게만은 다정한 아빠가 되기를 탁유미는 진심으로 바랐다.사진을 찍은 후 윤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엄마도 아빠랑 같이 사진 찍어요. 윤이가 찍어줄게요!”윤이의 시선에 이경빈이 막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탁유미가 한발 빨리 입을 열었다.“괜찮아. 아까 보니까 동물 친구들이 이곳저곳에서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찍고 있었어. 아마 엄마랑 아빠가 함께 있는 모습도 찍혔을 거야.”아이는 그 말에 활짝 웃더니 알겠다고 하며 더 이상 사진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동물 탈을 쓴 직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내문을 보니 사진은 원하면 메일로 보내준다고 했다.이로써 무리하게 이경빈과 함께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어졌다.아무리 아들의 소원이라고 해도 질색할 게 뻔한 얼굴을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한편 이경빈은 탁유미의 말에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어이가 없었다.사진을 찍는 걸 거절한다고 해도 그건 그녀가 아닌 그여야 했다.그런데 탁유미는 애초에 그런 생각 따위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거절해버렸다.그러고는 지금,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윤이와 함께 바깥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이경빈은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점심이 되고 세 사람은 놀이공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밥을 먹었다.“왜 더 안 먹고?”탁유미가 조금만 먹고 수저를 내려놓자 이경빈이 물었다.“배불러.”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 말에 이경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음식이 아직 한가득한데 벌써 배가 부르다고?윤이는 점심을 다 먹은 후 레스토랑 안에 있는 키즈 존으로 가서 놀겠다고 했다.“그렇게 해.”탁유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는 신이 나서 방방 뛰며 키즈 존으로 달려갔다.테이블에서 멀지 않는 곳이었기에 탁유미는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의자에 앉은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아이는 점점
탁유미가 담담한 얼굴로 받아쳤다.“걱정하지 마. 나도 네 앞에서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너인 건 나도 싫거든.”“너...!”이경빈이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생각해보면 탁유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인 건데 그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조금 아파 나기까지 했다.“너 혹시 일부러 이래? 약 한가득 보여주면서 내 동정심이라도 사 보려고?”탁유미는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약을 먹었다.그러고는 다 먹은 다음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만약 그렇다면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좀 들어? 만약 내가 정말 죽게 됐고 너한테 나를 구할 기회가 있다고 하면 너는 어떡할래? 날 구해줄 거야?”이경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죽는다고? 탁유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스치자 이경빈은 그럴 리 없다며 부인했다.탁유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저 그의 동정심이나 얻으려는 수법이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게 분명했다.“머리가 나빠지기라도 한 거야? 내가 널 구할 리가 없잖아. 탁유미, 나는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곧 죽을 것처럼 아파해도 널 구해줄 생각 따위 없어!”이경빈이 차갑게 말했다.이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도 그래. 고마워.”고맙다고?“고맙다고? 지금 나 놀려?”“아니. 진심이야.”탁유미는 담담한 얼굴로 얘기한 후 시선을 돌려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는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진심이었다.그가 머릿속에 잠깐 든 헛된 망상을 깨워줘서, 그를 마음에서 놓은 게 정확했다는 걸 다시금 알려줘서 그리고 잘못된 감정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해줘서 그녀는 정말 고마웠다.“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만나지 말자. 다시는.”이제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그녀의 말에 이경빈이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변해갔다.‘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누가 할 소릴!’그는 그녀의 말에 어이
집에 도착한 후 탁유미는 윤이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띠링.그때 메시지 알림 소리가 울리고 탁유미의 휴대폰에 뉴스 기사가 하나 도착했다.뉴스 기사 알림은 보는 즉시 삭제해버렸던 그녀였지만 익숙한 남자의 이름에 탁유미는 얼른 휴대폰을 두 손으로 들고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그녀가 봤던 남자의 이름은 바로 ‘백연신’이었다.그리고 기사 내용은 백연신이 재원시의 고씨 가문과 손을 잡고 오늘 열린 주주총회에 갑자기 나타나 백씨 가문에서의 자신의 권리를 되찾았다는 것이었다.그들이 나타나고 몇 분 뒤 바로 경찰까지 나타났고 경찰들은 그 자리에서 백연신 아버지의 첫째 부인과 그의 두 아들을 특수상해죄로 잡아갔다.즉 치열했던 권력 다툼에서 첫째 부인은 완전히 져버린 것이고 백연신은 최종 승리자가 됐다는 소리였다.기사 내용 중에는 이러한 말도 적혀있었다.백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앞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며 정략결혼은 물론이고 두 기업이 합병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말이다.탁유미는 기사를 다 훑은 후 입을 다물 수 없었다.두 가문 사이의 정략결혼이라니.그렇다는 건 백연신이 고씨 가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는 뜻이었다.백씨 가문의 나머지 두 아들은 경찰들에 의해 서로 끌려갔으니까.하지만 그렇게 되면....‘지영 씨는 어떡하고...?’한지영의 얼굴이 떠오르자 탁유미는 갑자기 조급해 나고 또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래서 그녀는 서둘러 침실에서 나온 후 휴대폰을 들고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 씨, 백연신 씨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런데... 백씨 가문이랑 고씨 가문 사이에 정략결혼 얘기가 돈다던데 그거 정말이에요?”탁유미의 질문에 임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네. 적어도 기사 내용에 거짓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백연신 씨한테 직접 들어봐야 해요. 언니, 일단 이 얘기는 지영이한테 비밀로 해줘요. 지영이 부모님한테도 방금 전화해서 일단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진실이 뭔지 알아내고 나
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맞는 말이었다.만약 그때 한지영이 만신창이가 된 채 나타나지 않았으면 임유진은 그에게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또한 그리도 쉽게 결혼을 수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알았어. 대신 그쪽으로 가는 건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백연신을 이쪽으로 데리고 올게.”강지혁이 말했다.“만약 백연신 씨가 거절하면?”“올 거야. 만약 거절하면 그때는 납치해서라도 데리고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이 원하는 일이라면 강지혁은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틀 후.정말 협박이라도 한 건지 임유진은 무사히 백연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다만 백연신은 혼자가 아니었다.그의 옆에는 고씨 가문의 잃어버린 친딸인 고은채도 함께 있었다.임유진은 일전 인터넷으로 고은채의 얼굴을 확인한 적이 있다.사진에서도 무척이나 예쁜 사람이었지만 실물을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은 물론이고 몸매도 좋았으며 은근하게 사람을 홀리는 듯한 매력도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연신이 그녀에게 쉽게 넘어갔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백연신이 한지영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누구보다 임유진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백연신의 진심이 듣고 싶었다.“고은채 씨,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백연신 씨와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서요.”임유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어떡하죠?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네요. 저랑 연신 씨 사이에는 비밀이라는 게 없거든요. 그러니 할 말 있으시면 제 앞에서 하세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은 채 백연신의 옆에 딱 달라붙어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을 가지고 놀았다.그리고 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임유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치솟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그러죠.”임유진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시선을 백연신에게로 돌렸다.“지영이는 대체 어쩌다 다치게 된 거죠?”“지영이를 다치게 한 건 아마 제 배
“그랬습니까? 운이 좋네요.”백연신이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네, 운이 좋기는 좋죠. 사람들에게 바로 발견이 되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거기에 운을 다 써버린 건지 병원으로 이송된 후 한지영 씨 부모님은 몇 번이나 의사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기적적으로 깨어나기는 했는데 바로 어제 또다시 상황이 악화했고요. 이대로라면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강지혁의 목소리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그저 일상을 얘기하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하지만 그 말에 백연신은 얼굴을 굳히더니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럴 리가?!”“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강지혁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백씨 가문과 고씨 가문이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는 소식은 이미 인터넷에 다 퍼진 상태인데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다고 한들 한지영 씨라고 모를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흥분하시는 거죠? 한지영 씨가 걱정됩니까?”백연신은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강지혁을 빤히 노려보며 입을 꾹 닫았다.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의 행동에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연신 씨, 왜 그래요?”백연신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의 말은 계속되었다.“혹 걱정되시는 거면 병문안이라도 가보세요. 어쩌면 운이 좋게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고 얘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백연신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백연신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그리고 그 결과 백연신이 아예 한지영을 내려놓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적어도 한지영의 생사는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더욱더 의문이 들었다.어차피 이럴 거면 왜 아까 그렇게도 무심한 척 행동했는지 말이다.“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그때 고은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한지영 씨가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였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
한지영은 휴대폰이 가까이 다가오자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유진아... 나... 나 연신 씨 보고 싶어. 연신 씨한테... 전해줘. 내가...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연신 씨를... 믿는다고...”그 말에 임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새어 나왔다.임유진은 한지영에게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그도 그럴 것이 한지영이 믿고 있는 백연신은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버젓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으니까.또한 상황으로 볼 때 한지영이 원하는 결말은 이제 없을 것만 같았다.한편 임유진의 눈물에 백연신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지영이가 왜요? 지영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임유진은 그 말에 훌쩍이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러자 백연신은 그대로 손을 뻗어 임유진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소리를 치며 물었다.“지영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연신 씨...”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백연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이건 한지영의 목소리였다.백연신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입을 달싹였다.뭐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막혀 한 글자도 새어 나오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나 보러... 와요... 연신 씨... 나는... 연신 씨가 직접... 입으로 내뱉은 말만... 믿을 거예요. 만약 안 오면... 아무것도 안 먹고... 자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꼭 와...”한지영의 힘없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걱정이 왈칵 치밀었다.그는 한지영이라는 여자를 잘 알고 있다.그녀는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애교도 부리고 때로는 자기 멋대로 하며 또 때로는 철부지 소녀처럼 아이돌이나 쫓아다니고 그에게 거짓말도 한다.하지만 그런 푼수 같은 그녀지만 한번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꼭 하고야 만다.즉 이건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백연신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정말 바보 같은 여자가 따로 없다.어떻게 이런 상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방금 임유진이 뒤로 넘어가려고 했던 순간 그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그리고 임유진도 상당히 놀랐는지 얼굴이 다 하얘졌다.방금은 너무 감정만 앞세웠다.만약 정말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간신히 지켜낸 세 아이를 잃을 뻔했을 수도 있었다.“없어... 난 괜찮아.”임유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부축해 세운 후 싸늘한 눈길로 백연신을 바라보았다.“백연신 씨, 내 와이프가 넘어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다쳤으면 간신히 지켜낸 백연신 씨의 가문이 다시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까요.”그 말에 백연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그래요? 이제는 S 시를 넘어 재원시까지 먹어버리시게요?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요 그럼.”임유진 두 남자의 신경전에 서둘러 강지혁의 팔을 끌어당겼다.“혁아, 나 괜찮아. 지금은 지영이 일이 더 중요해.”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백연신을 바라보았다.“정말 지영이 보러 갈 거예요?”백연신은 침묵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알겠어요. 병원까지는 우리가 안내하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멈추고 백연신 옆에 서 있는 고은채를 바라보았다.“고은채 씨는 안돼요. 백연신 씨 혼자 오세요.”“하하, 그쪽이 뭔데요?”고은채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묻자 강지혁이 나섰다.“내 와이프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위협적인 그의 말에 고은채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지금은 재원시가 아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백연신은 고개를 돌려 고은채를 바라보았다.“나 혼자 갈게. 기다리고 있어.”고은채는 그 말에 싱긋 웃더니 갑자기 백연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췄다.“알겠어요.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요. 그리고 전 여자친구분한테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정다연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집안이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강지혁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은 정다연이 나서서 임유진의 기를 꺾으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다연은 임유진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짜 죽음으로 강 회장님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도 얘기해주시겠어요? 듣기로 다른 남자 때문이라던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명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이런 일로 가문에 먹칠하시면 안 되잖아요.”정다연의 의도는 뻔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난 게 사실은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는 근거 불분명한 얘기로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연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너도나도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지난 5년간 임유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정다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정다연 씨, 혹시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정다연은 임유진의 입에서 정확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대꾸했다.“그건 말할 수 없죠.”“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이 사실은 정다연 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될까요?”임유진의 말에 정다연이 발끈했다.“그게 무슨!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임유진은 평온하고 또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정다연 씨,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들 그걸 직접 내 앞에서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이에요. 좋은 의도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정다연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움찔했다. 남편 덕에 신분 상승한 여자라 몇 번
백연신이었다.백연신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일전 드레스 샵에서 임유진이 제일 먼저 골랐던 그 실버 드레스였다.백연신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임유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강 회장님 아내분과 아는 사이이지 않았어요? 5년만일 텐데 가서 인사해요, 우리.”그녀는 백연신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이끈 채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죠? 고은채예요.”고은채는 예쁘게 웃으며 먼저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임유진은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고은채만 아니었으면 백연신과 한지영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고은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백연신의 옆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백연신은 사랑보다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을 원했던 남자였으니까.“사모님과는 연이 좀 깊은 것 같아요.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가 바로 사모님 친구분이셨죠?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좋은 남자 소개 해주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고은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리낌 없이 한지영의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불빛 바로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아니요. 지영이 친구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영이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힘이 돼줄 거고 도움을 청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울 예정이에요. 물론 지영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럴 거고요.”임유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만약 그녀로 인해 한지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은채는 이에 가볍게 웃었다.“한지영 씨는 든든한 친구를 둬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참,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연신 씨랑 결혼식에 관해 논의
임유진은 청초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긴 머리를 단아하게 위로 올렸다. 물론 머리를 푼 모습도 예뻤지만 올린 것이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그녀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강지혁의 옆에 서도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또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강지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한 쌍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젊은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연예인도 만나보고 몸매가 예쁜 모델들도 만나봤을 텐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임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오늘의 임유진은 유독 더 예쁘고 단아했다. 단지 옷이 바뀌고 예쁘게 치장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게다가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는 했다.강지혁은 마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임유진을 더 바싹 자기 곁에 붙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아마 5년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게 목적이라는 걸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라며 그들에게 임유진을 소개해주었다.임유진과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5년 전에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소개해준 대로 인사를 나누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나 저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왜, 힘들어?”“그건 아니고 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