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주말이요...?”탁유미가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왜요? 그날 무슨 일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다음 주 주말에 이경빈이랑 같이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어요.”토요일이 될지 일요일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이경빈과 약속한 건 다음 주 주말이었다.탁유미의 말에 윤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엄마, 정말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가요?”“응, 정말이야.”탁유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윤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무릎을 꿇은 것도, 자존심이 박살 난 것도 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한편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듣더니 집에서 나가기 전 작은 목소리로 탁유미에게 물었다.“셋이 함께 가는 거예요?”“네.”탁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윤이가 유치원에서 소원 적는 놀이할 때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가고 싶다고 적었어요. 그래서 그 소원 들어주려고요.”“하지만 언니는 지금 몸이...”“어차피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할 생각이에요. 노는 건 윤이가 할 거니까 괜찮아요.”임유진도 곧 엄마가 될 몸이기에 탁유미가 무슨 마음인지 이해가 됐다.“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요.”“네, 그럴게요.”탁유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탁유미가 어떤 방법으로 이경빈을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집으로 돌아온 후, 임유진은 강지혁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아이들이 태어나면 놀이공원에 자주 가는 게 어때?”이에 강지혁이 그녀를 안아주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오늘 유미 언니 보러 갔는데 윤이가 엄마랑 아빠랑 놀이공원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간 적이 없으니까... 언니가 사랑을 많이 주고 있어도 윤이한테는 이경빈이 필요해. 이경빈은 정말 구제 불능 인간이지만 그래도... 윤이한테는 필요한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임유진은 볼 때마다 그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연예인 중에도 내로라하는 잘생긴 얼굴들이 많은데 왜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팬들이 세상을 구한 얼굴이라고 자기 아이돌을 치켜세워도 잠깐 동조만 할 뿐이지 그 뒤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하지만 강지혁의 얼굴은 아무리 많이 봐도 질리지 않는다.“좋은 아침. 생일 축하해, 혁아.”임유진의 아침 인사에 강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좋은 아침.”“오늘은 출근 안 하는 거지?”“응, 안 해.”강지혁이 옷장에서 옷을 꺼내며 입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항상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야 만다.부부가 된 지도 이제 한 달이 다 되고 이제는 볼 것도 다 본 사이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녀가 그럴 때면 일부러 더 보라는 듯 옷을 느긋하게 갈아입고는 한다.“혁아, 우리 아이들 말이야. 누구를 더 닮게 될까? 아무래도 너를 더 닮게 되겠지?”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은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미소를 지었다.“왜? 나를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어?”“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너 닮았으면 좋겠어. 만약 아들이 나오면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는 아이가 될 테고 딸이 나오면 남자들이 우리 딸 차지하겠다고 엄청 많이 싸워댈 거야. 분명해.”“나는 반대로 아이들이 너 닮았으면 좋겠어. 아들이고 딸이고 다 너를 닮는 게 좋아.”“나?”임유진은 그 말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닮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네 예쁜 얼굴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게 되는데?”“내가 예뻐?”강지혁이 침대 곁으로 다가와 두 손을 임유진의 곁에 두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나한테는 네가 제일 예뻐.”펑.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자기보다 예쁜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둘만 있는 생일 파티이기는 하지만 임유진은 그래도 일부러 강지혁과 같은 색의 옷을 입었다.그러고는 아래로 내려가 같이 밥을 먹었다.사실 점심에 강지혁을 위해 직접 요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임신 중이라 안 된다며 강지혁에게 바로 거절당해버렸다.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던 그녀였지만 완강한 반대에 결국 그에게 손수 음식을 차려주는 건 아이를 다 낳은 뒤에 하기로 했다.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직접 요리하는 건 아니지만 대신 점심 메뉴 주문은 평소 강지혁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직접 했으며 생일 케이크도 직접 그림을 그려 케이크 가게 사장에게 보내주며 자신이 그린 대로 만들게 했다.케이크를 강지혁의 앞에 대령했을 때 강지혁의 얼굴에는 정말 기쁜듯한 표정이 어렸다.그 표정에 임유진은 벌써 배가 부른 듯한 느낌이었다.“너 이거...”강지혁이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들어?”임유진이 묻자 강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며 웃었다.“응. 마음에 들어.”임유진이 준비한 케이크는 조금 많이 특별했다.케이크 위에는 마당이 딸린 작은 집이 있었고 마당에는 흰머리 노인 부부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 노인 부부 주위에는 성인처럼 보이는 세 명의 사람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그보다 더 작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마지막으로 마당에는 초콜릿으로 된 문구도 적혀 있었다.[혁아, 생일 축하해. 우리 평생 함께하자!]이건 강지혁의 소원이기도 했고 임유진의 소원이기도 했다.먼 미래, 그와 그는 흰머리가 뒤덮인 노인이 될 것이고 두 사람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큰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며 그 세 명의 아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예쁜 아이들이 또 생기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초를 꽂고 강지혁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혁아, 28살 생일 축하해!”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1년 전,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1년 뒤인 지금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
강지혁은 촛불을 끄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빈 소원은...”소원이 뭐였는지 얘기하려던 찰나 임유진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잠깐! 소원을 말하면 어떡해. 그러면 안 이뤄진단 말이야.”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나한테 소원권 준다며. 내가 속으로만 빌면 내 소원이 뭔지 네가 모르잖아.”“그건 이거랑 별개 소원이지. 그 세 개 소원은 내가 들어주기로 약속한 거고 지금 이 소원은 음... 그러니까 하느님만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이야. 예를 들어 회사가 더 잘되게 해달라거나 백 세까지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거나 하는 거.”“하지만 내 소원은 모두 다 너랑 연관이 있는 건데?”강지혁은 손을 뻗어 임유진의 손을 잡고 이내 그녀의 검지를 하나 폈다.“내 첫 번째 소원은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그 날까지 네가 평생 이렇게 나랑 같이 생일날 함께 있어 주는 거야.”그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강지혁의 소원은 계속됐다. 그는 또다시 그녀의 손가락을 펴더니 ‘2’를 만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두 번째 소원은 네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거야.”말을 마친 그는 잠시 침묵하며 시선을 내려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세 번째 소원을 좀처럼 입에 내지 못했다.“세 번째 소원은 뭐야?”결국 궁금해진 임유진이 못 참고 물었다.“세 번째 소원은 아직 안 쓸래. 정말 필요할 때, 그때 다시 얘기할게.”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대신 내가 세 번째 소원을 말했을 때 그게 뭐든 꼭 들어줘야 해. 그럴 수 있어?”“당연하지.”임유진이 호쾌하게 대답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약속한 거야. 꼭 들어줘야 해?”“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래? 갑자기 궁금해지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짙은 어둠이 보였다.강지혁은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제발 이 세 번째 소원을 쓸 날이
임유진은 그저 혼자 몰래 연습했다고만 했지만 그 연습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돈 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내 정성이 들어간 거야.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때는 이런 것도 다 재밌는 추억이 될 테니까.”“지금도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야.”강지혁이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고마워, 유진아.”임유진은 그에게 행복을 주는 여자고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여자다.이 세상에서 그에게 이것들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유진, 그녀뿐이다....작은 모텔 방안.공수진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야비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당시 이따위 남자와 연애를 한 자신이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이경빈과 비교하면 주원호의 의사라는 직업은 큰 메리트가 없었다.‘내가 그때 정신을 차리고 빨리 차버렸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지금도... 윽, 소름 돋아!’그녀의 경멸 가득한 눈빛을 읽었는지 주원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지금이야 사모님 소리 들게 될 여자가 됐다지만 그때는 너도 별 볼 것 없는 여자였어. 너나 나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고. 탁유미의 골수 기증 기록을 네가 한 것처럼 조작해달라고 나한테 빌었던 것도 너야. 내가 없었으면 넌 이경빈 그 남자하고 말도 못 섞었을 거라고. 지금도 그래. 만약 네가 막판에 골수 기증을 포기했다는 걸 이경빈이 알게 되면 아마 널 가만두지 않을걸?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그런 불손한 눈빛을 보내면 안 돼. 오히려 감사의 눈빛을 보내야지. 안 그래, 수진아?”주원호의 말에 공수진은 바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주원호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상 그를 자극해봤자 득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기, 네가 말한 100억이야. 비밀번호는...”공수진은 가방 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그에게 비밀번호를 얘기해주었다.주원호는 카드를 받아들더니 피식 웃었다.“그래, 난 수진이 네가 100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줄 수 있을 줄 알고
다 좋지만 윤이의 성장 과정을 보지 못하는 건 앞으로도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경빈의 차량이 이미 단지 앞에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이경빈은 상념에 잠긴 듯 차 옆에 기대 서 있었다.“아빠!”윤이가 이경빈을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이에 이경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하지만 시선을 들어 올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윤이가 아닌 탁유미였다.탁유미는 베이지색 스웨터에 흰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네이비색 에코백을 들고 신발은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게다가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옅은 화장까지 했다.그래서일까, 어쩐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활발하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경빈이 넋을 놓고 있을 때 탁유미와 윤이는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아빠, 좋은 아침이에요!”윤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그래, 윤이도 좋은 아침이야.”이경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이제 같이 놀이공원으로 갈까?”“네!”이경빈은 방금 넋을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리기 위해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윤이가 먼저 올라타고 탁유미가 올라타려고 할 때, 이경빈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오늘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나와 결혼할 사람은 수진이 뿐이니까.”이에 탁유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일말의 동요도 없는 그녀의 얼굴에 이경빈은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경계 태세를 잔뜩 갖추고 힘껏 주먹을 휘둘렀는데 아무런 공격성 없는 솜사탕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이제 그만 팔 좀 놔줄래? 윤이가 기다리잖아.”아니나 다를까 차 안에서 윤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엄마 왜 안 와요?”이경빈은 그 말에 바로 손을 풀어 주었고 탁유미도 천천히 뒷좌석에 올랐다.그리고 이경빈은 운전석에 올라타
티켓을 받으러 줄을 설 때 윤이가 물었다.“오늘 우리, 아빠랑 사진 많이 찍을 수 있는 거예요?”탁유미가 잠시 멈칫했다.“그래. 엄마가 윤이랑 아빠가 함께 있는 사진 많이 찍어줄게.”“나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찍고 싶어요.”같이?탁유미가 잠시 침묵했다.그녀는 상관이 없었으나 이경빈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같이 사진 찍으면 안 돼요? 혹시... 엄마랑 아빠랑 이혼해서 그래요? 그래서 함께 못 찍는 거예요...?”윤이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하지만 희성이는 엄마랑 아빠도 이혼했는데도 같이 찍은 사진이 엄청 많았단 말이에요.”아이의 얼굴은 이제 부루퉁을 넘어서 속상해 보이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런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이따 엄마가 먼저 아빠랑 윤이 사진 찍어줄게. 그리고서 셋이서 같이 찍자. 어때?”“좋아요!”아이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탁유미는 옅게 웃었다.이경빈에게 놀이공원 얘기를 꺼낸 건 어차피 윤이 소원 때문이었다.그러니 셋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는 것도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그때 주차를 마친 이경빈이 이쪽으로 다가왔다.아이는 이경빈을 보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기 손을 내밀었다.이경빈은 손잡아달라는 아이의 작은 손을 보더니 잠깐 멈칫했다.“너랑 손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야.”탁유미가 아이 행동의 의미를 대신 얘기해주었다.윤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손잡아도 돼요?”거절당할까 두려워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서서히 손을 뻗어 아들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윤이는 한 손에는 이경빈의 손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윤이에게는 놀이공원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롭게 느껴졌다.일전 임유진과 곽동현과 함께 온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다른 설렘과
회전목마 순서가 다가왔을 때, 탁유미는 그제야 회전목마가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병 때문에 식욕이 떨어져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걸 보니 금세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아까부터 간 쪽이 또다시 욱신거리는 것으로 보아 통증이 시작되려 하는 게 틀림없었다.윤이는 차례가 다가오자 환호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아들이 이렇게도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탁유미는 한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안전바를 꽉 잡으며 최대한 통증을 참아내려 했다.이경빈의 시선이 아까부터 자신에게 있었음을 모른 채 말이다.이 정도의 회전속도는 이경빈에게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또 조금 유치할 수 있는 행동도 윤이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체험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윤이가 기뻐서 방방 뛸 때면 그 역시 마음이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따뜻해졌다.이런 감정은 처음이다.피가 당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까?윤이가 친아들이라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이경빈의 시선이 매섭게 탁유미를 쫓았다.그는 창백한 얼굴로 이제는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있는 그녀를 보며 미간이 절로 찌푸렸다.그녀가 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윤이에게는 가슴 설레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경빈은 어이가 없게도 자신이 아까 내뱉은 말이 후회되기 시작했다.회전목마가 멈추고 탁유미는 애써 웃어 보이며 윤이에게 말했다.“엄마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아빠랑 여기 있어.”그녀는 말을 마친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세면대에 얼굴을 박고 게워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오늘 아침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라 게워내려고 해도 뭘 게워낼 것이 없었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다행히 윤이는 그녀의 몸 상태가 좋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정다연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집안이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강지혁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은 정다연이 나서서 임유진의 기를 꺾으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다연은 임유진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짜 죽음으로 강 회장님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도 얘기해주시겠어요? 듣기로 다른 남자 때문이라던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명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이런 일로 가문에 먹칠하시면 안 되잖아요.”정다연의 의도는 뻔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난 게 사실은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는 근거 불분명한 얘기로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연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너도나도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지난 5년간 임유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정다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정다연 씨, 혹시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정다연은 임유진의 입에서 정확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대꾸했다.“그건 말할 수 없죠.”“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이 사실은 정다연 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될까요?”임유진의 말에 정다연이 발끈했다.“그게 무슨!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임유진은 평온하고 또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정다연 씨,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들 그걸 직접 내 앞에서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이에요. 좋은 의도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정다연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움찔했다. 남편 덕에 신분 상승한 여자라 몇 번
백연신이었다.백연신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일전 드레스 샵에서 임유진이 제일 먼저 골랐던 그 실버 드레스였다.백연신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임유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강 회장님 아내분과 아는 사이이지 않았어요? 5년만일 텐데 가서 인사해요, 우리.”그녀는 백연신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이끈 채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죠? 고은채예요.”고은채는 예쁘게 웃으며 먼저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임유진은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고은채만 아니었으면 백연신과 한지영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고은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백연신의 옆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백연신은 사랑보다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을 원했던 남자였으니까.“사모님과는 연이 좀 깊은 것 같아요.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가 바로 사모님 친구분이셨죠?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좋은 남자 소개 해주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고은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리낌 없이 한지영의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불빛 바로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아니요. 지영이 친구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영이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힘이 돼줄 거고 도움을 청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울 예정이에요. 물론 지영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럴 거고요.”임유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만약 그녀로 인해 한지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은채는 이에 가볍게 웃었다.“한지영 씨는 든든한 친구를 둬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참,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연신 씨랑 결혼식에 관해 논의
임유진은 청초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긴 머리를 단아하게 위로 올렸다. 물론 머리를 푼 모습도 예뻤지만 올린 것이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그녀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강지혁의 옆에 서도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또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강지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한 쌍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젊은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연예인도 만나보고 몸매가 예쁜 모델들도 만나봤을 텐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임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오늘의 임유진은 유독 더 예쁘고 단아했다. 단지 옷이 바뀌고 예쁘게 치장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게다가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는 했다.강지혁은 마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임유진을 더 바싹 자기 곁에 붙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아마 5년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게 목적이라는 걸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라며 그들에게 임유진을 소개해주었다.임유진과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5년 전에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소개해준 대로 인사를 나누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나 저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왜, 힘들어?”“그건 아니고 힐
하지만 잠깐 눈을 판 사이 한지영을 다치게 했고 그렇게 평생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을 잃어버렸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나와 결혼하고 싶은거라면 그렇게 해줄게. 이곳에서의 일이 다 끝이 나면 혼사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지.”“정말이에요?”고은채는 예상 밖의 답변에 활짝 웃었다.“너한테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백연신은 담담하게 답하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지영이 건드리지 마. 지영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각오해도 좋을 거야.”고은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토록 시린 눈빛은 처음이었다.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남자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백연신, 네가 지금은 나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만 머지않아 곧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그때는 아마 한지영은 생각도 안 날걸? 두고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고은채는 만약 백연신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한지영 같은 건 애초에 기회도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지영은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아니면 집안으로 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못난 여자였으니까.“알겠어요. 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연신 씨도 꼭 약속을 지켜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한정판 블랙 드레스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신었다. 예쁜 드레스에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까지 하고 나니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건 5년 만이라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남들에게 흠을 잡히는 일은 조금도 없어야 했으니까.사실 그녀가 원래 준비했던 목걸이는 루비 목걸이가 아닌 진주 목걸이였다. 그런데 드레스를 다 입은 후 목걸이를 하려는데 갑자기 강지혁이 다가와 그녀에게 루비 목걸이를 해주었다.“오늘 드레스에는 이게 더 어울려.”강지혁이 말했다.“뭐야?
강지혁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녀의 부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이러한 기분은 처음이라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과거의 자신은 대체 이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었는지 문득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별장으로 돌아온 백연신은 마치 집주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은채를 보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차가운 남자의 말에도 고은채는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왔어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집에 오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나 당신 여자친구잖아. 안 그래요? 그보다 어디 갔다 왔어요? 설마 전 여자친구 보러 간 건 아니죠?”백연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고은채의 말대로 그는 한지영을 보러 갔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는 것까지 보았다.그 광경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찼고 한지영 옆에 있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한지영은 그의 여자였으니까.“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이 그 여자와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아주 조금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이제 34살이나 됐죠? 그러면 머지않아 곧 선도 보고 결혼도 하겠네요. 여자들은 아닌 척해도 나이를 꽤 많이 신경 쓰고 있거든요.”고은채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유혹적인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입 다물어.”백연신은 고은채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다시 거칠게 뿌리쳤다. 경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그리고 내 몸에 손대지 마.”“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였어요?”고은채는 그에게 뿌리쳐진 손을 아무렇지 않게 거두어들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만약 그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한지영은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전에 벌써 싸늘하게 죽어버렸을 거예요. 그때 연신 씨가 한지영 살리겠다고 나한
임유진은 마치 점심 메뉴 정하듯 태연한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너는 내 거라는 것만 확실하게 그 여자한테 각인시켜주면 돼. 만약 네가 그렇게 했는데도 헛된 희망을 품고 헛된 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상대할게. 너는 나설 필요 없어.”남편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내가 네 거야?”가까스로 가라앉은 임유진의 볼이 한순간에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응, 넌 내 거야. 내 남편이고 나만 가질 수 있어.”강지혁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걸 쉽게 허락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일까, 이 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괜히 마음이 들뜨고 이상한 만족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내가 네 거라고 확신하나 봐?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려고?”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다른 여자한테 아주 잠시 끌린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마음을 다시 나한테로 돌려놓으려고 할 거야.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 없이는 안 될 지경에 이른 거라면... 그때는 조용히 네 곁을 떠날 거야. 그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같으니까.”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그녀가 알고 있는 혁이가 아닐 테니 서로를 위해서라도 놓아주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임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히더니 곧바로 그녀를 제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로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들었다.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누군가의 한마디로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