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 있는 생일 파티이기는 하지만 임유진은 그래도 일부러 강지혁과 같은 색의 옷을 입었다.그러고는 아래로 내려가 같이 밥을 먹었다.사실 점심에 강지혁을 위해 직접 요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임신 중이라 안 된다며 강지혁에게 바로 거절당해버렸다.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던 그녀였지만 완강한 반대에 결국 그에게 손수 음식을 차려주는 건 아이를 다 낳은 뒤에 하기로 했다.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직접 요리하는 건 아니지만 대신 점심 메뉴 주문은 평소 강지혁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직접 했으며 생일 케이크도 직접 그림을 그려 케이크 가게 사장에게 보내주며 자신이 그린 대로 만들게 했다.케이크를 강지혁의 앞에 대령했을 때 강지혁의 얼굴에는 정말 기쁜듯한 표정이 어렸다.그 표정에 임유진은 벌써 배가 부른 듯한 느낌이었다.“너 이거...”강지혁이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들어?”임유진이 묻자 강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며 웃었다.“응. 마음에 들어.”임유진이 준비한 케이크는 조금 많이 특별했다.케이크 위에는 마당이 딸린 작은 집이 있었고 마당에는 흰머리 노인 부부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 노인 부부 주위에는 성인처럼 보이는 세 명의 사람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그보다 더 작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마지막으로 마당에는 초콜릿으로 된 문구도 적혀 있었다.[혁아, 생일 축하해. 우리 평생 함께하자!]이건 강지혁의 소원이기도 했고 임유진의 소원이기도 했다.먼 미래, 그와 그는 흰머리가 뒤덮인 노인이 될 것이고 두 사람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큰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며 그 세 명의 아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예쁜 아이들이 또 생기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초를 꽂고 강지혁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혁아, 28살 생일 축하해!”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1년 전,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1년 뒤인 지금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
강지혁은 촛불을 끄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빈 소원은...”소원이 뭐였는지 얘기하려던 찰나 임유진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잠깐! 소원을 말하면 어떡해. 그러면 안 이뤄진단 말이야.”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나한테 소원권 준다며. 내가 속으로만 빌면 내 소원이 뭔지 네가 모르잖아.”“그건 이거랑 별개 소원이지. 그 세 개 소원은 내가 들어주기로 약속한 거고 지금 이 소원은 음... 그러니까 하느님만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이야. 예를 들어 회사가 더 잘되게 해달라거나 백 세까지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거나 하는 거.”“하지만 내 소원은 모두 다 너랑 연관이 있는 건데?”강지혁은 손을 뻗어 임유진의 손을 잡고 이내 그녀의 검지를 하나 폈다.“내 첫 번째 소원은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그 날까지 네가 평생 이렇게 나랑 같이 생일날 함께 있어 주는 거야.”그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강지혁의 소원은 계속됐다. 그는 또다시 그녀의 손가락을 펴더니 ‘2’를 만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두 번째 소원은 네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거야.”말을 마친 그는 잠시 침묵하며 시선을 내려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세 번째 소원을 좀처럼 입에 내지 못했다.“세 번째 소원은 뭐야?”결국 궁금해진 임유진이 못 참고 물었다.“세 번째 소원은 아직 안 쓸래. 정말 필요할 때, 그때 다시 얘기할게.”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대신 내가 세 번째 소원을 말했을 때 그게 뭐든 꼭 들어줘야 해. 그럴 수 있어?”“당연하지.”임유진이 호쾌하게 대답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약속한 거야. 꼭 들어줘야 해?”“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래? 갑자기 궁금해지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짙은 어둠이 보였다.강지혁은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제발 이 세 번째 소원을 쓸 날이
임유진은 그저 혼자 몰래 연습했다고만 했지만 그 연습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돈 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내 정성이 들어간 거야.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때는 이런 것도 다 재밌는 추억이 될 테니까.”“지금도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야.”강지혁이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고마워, 유진아.”임유진은 그에게 행복을 주는 여자고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여자다.이 세상에서 그에게 이것들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유진, 그녀뿐이다....작은 모텔 방안.공수진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야비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당시 이따위 남자와 연애를 한 자신이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이경빈과 비교하면 주원호의 의사라는 직업은 큰 메리트가 없었다.‘내가 그때 정신을 차리고 빨리 차버렸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지금도... 윽, 소름 돋아!’그녀의 경멸 가득한 눈빛을 읽었는지 주원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지금이야 사모님 소리 들게 될 여자가 됐다지만 그때는 너도 별 볼 것 없는 여자였어. 너나 나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고. 탁유미의 골수 기증 기록을 네가 한 것처럼 조작해달라고 나한테 빌었던 것도 너야. 내가 없었으면 넌 이경빈 그 남자하고 말도 못 섞었을 거라고. 지금도 그래. 만약 네가 막판에 골수 기증을 포기했다는 걸 이경빈이 알게 되면 아마 널 가만두지 않을걸?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그런 불손한 눈빛을 보내면 안 돼. 오히려 감사의 눈빛을 보내야지. 안 그래, 수진아?”주원호의 말에 공수진은 바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주원호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상 그를 자극해봤자 득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기, 네가 말한 100억이야. 비밀번호는...”공수진은 가방 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그에게 비밀번호를 얘기해주었다.주원호는 카드를 받아들더니 피식 웃었다.“그래, 난 수진이 네가 100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줄 수 있을 줄 알고
다 좋지만 윤이의 성장 과정을 보지 못하는 건 앞으로도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경빈의 차량이 이미 단지 앞에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이경빈은 상념에 잠긴 듯 차 옆에 기대 서 있었다.“아빠!”윤이가 이경빈을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이에 이경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하지만 시선을 들어 올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윤이가 아닌 탁유미였다.탁유미는 베이지색 스웨터에 흰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네이비색 에코백을 들고 신발은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게다가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옅은 화장까지 했다.그래서일까, 어쩐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활발하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경빈이 넋을 놓고 있을 때 탁유미와 윤이는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아빠, 좋은 아침이에요!”윤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그래, 윤이도 좋은 아침이야.”이경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이제 같이 놀이공원으로 갈까?”“네!”이경빈은 방금 넋을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리기 위해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윤이가 먼저 올라타고 탁유미가 올라타려고 할 때, 이경빈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오늘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나와 결혼할 사람은 수진이 뿐이니까.”이에 탁유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일말의 동요도 없는 그녀의 얼굴에 이경빈은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경계 태세를 잔뜩 갖추고 힘껏 주먹을 휘둘렀는데 아무런 공격성 없는 솜사탕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이제 그만 팔 좀 놔줄래? 윤이가 기다리잖아.”아니나 다를까 차 안에서 윤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엄마 왜 안 와요?”이경빈은 그 말에 바로 손을 풀어 주었고 탁유미도 천천히 뒷좌석에 올랐다.그리고 이경빈은 운전석에 올라타
티켓을 받으러 줄을 설 때 윤이가 물었다.“오늘 우리, 아빠랑 사진 많이 찍을 수 있는 거예요?”탁유미가 잠시 멈칫했다.“그래. 엄마가 윤이랑 아빠가 함께 있는 사진 많이 찍어줄게.”“나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찍고 싶어요.”같이?탁유미가 잠시 침묵했다.그녀는 상관이 없었으나 이경빈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같이 사진 찍으면 안 돼요? 혹시... 엄마랑 아빠랑 이혼해서 그래요? 그래서 함께 못 찍는 거예요...?”윤이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하지만 희성이는 엄마랑 아빠도 이혼했는데도 같이 찍은 사진이 엄청 많았단 말이에요.”아이의 얼굴은 이제 부루퉁을 넘어서 속상해 보이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런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이따 엄마가 먼저 아빠랑 윤이 사진 찍어줄게. 그리고서 셋이서 같이 찍자. 어때?”“좋아요!”아이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탁유미는 옅게 웃었다.이경빈에게 놀이공원 얘기를 꺼낸 건 어차피 윤이 소원 때문이었다.그러니 셋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는 것도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그때 주차를 마친 이경빈이 이쪽으로 다가왔다.아이는 이경빈을 보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기 손을 내밀었다.이경빈은 손잡아달라는 아이의 작은 손을 보더니 잠깐 멈칫했다.“너랑 손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야.”탁유미가 아이 행동의 의미를 대신 얘기해주었다.윤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손잡아도 돼요?”거절당할까 두려워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서서히 손을 뻗어 아들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윤이는 한 손에는 이경빈의 손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윤이에게는 놀이공원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롭게 느껴졌다.일전 임유진과 곽동현과 함께 온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다른 설렘과
회전목마 순서가 다가왔을 때, 탁유미는 그제야 회전목마가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병 때문에 식욕이 떨어져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걸 보니 금세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아까부터 간 쪽이 또다시 욱신거리는 것으로 보아 통증이 시작되려 하는 게 틀림없었다.윤이는 차례가 다가오자 환호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아들이 이렇게도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탁유미는 한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안전바를 꽉 잡으며 최대한 통증을 참아내려 했다.이경빈의 시선이 아까부터 자신에게 있었음을 모른 채 말이다.이 정도의 회전속도는 이경빈에게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또 조금 유치할 수 있는 행동도 윤이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체험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윤이가 기뻐서 방방 뛸 때면 그 역시 마음이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따뜻해졌다.이런 감정은 처음이다.피가 당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까?윤이가 친아들이라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이경빈의 시선이 매섭게 탁유미를 쫓았다.그는 창백한 얼굴로 이제는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있는 그녀를 보며 미간이 절로 찌푸렸다.그녀가 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윤이에게는 가슴 설레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경빈은 어이가 없게도 자신이 아까 내뱉은 말이 후회되기 시작했다.회전목마가 멈추고 탁유미는 애써 웃어 보이며 윤이에게 말했다.“엄마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아빠랑 여기 있어.”그녀는 말을 마친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세면대에 얼굴을 박고 게워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오늘 아침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라 게워내려고 해도 뭘 게워낼 것이 없었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다행히 윤이는 그녀의 몸 상태가 좋
앞으로도 이렇게 이경빈이 윤이에게만은 다정한 아빠가 되기를 탁유미는 진심으로 바랐다.사진을 찍은 후 윤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엄마도 아빠랑 같이 사진 찍어요. 윤이가 찍어줄게요!”윤이의 시선에 이경빈이 막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탁유미가 한발 빨리 입을 열었다.“괜찮아. 아까 보니까 동물 친구들이 이곳저곳에서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찍고 있었어. 아마 엄마랑 아빠가 함께 있는 모습도 찍혔을 거야.”아이는 그 말에 활짝 웃더니 알겠다고 하며 더 이상 사진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동물 탈을 쓴 직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내문을 보니 사진은 원하면 메일로 보내준다고 했다.이로써 무리하게 이경빈과 함께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어졌다.아무리 아들의 소원이라고 해도 질색할 게 뻔한 얼굴을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한편 이경빈은 탁유미의 말에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어이가 없었다.사진을 찍는 걸 거절한다고 해도 그건 그녀가 아닌 그여야 했다.그런데 탁유미는 애초에 그런 생각 따위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거절해버렸다.그러고는 지금,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윤이와 함께 바깥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이경빈은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점심이 되고 세 사람은 놀이공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밥을 먹었다.“왜 더 안 먹고?”탁유미가 조금만 먹고 수저를 내려놓자 이경빈이 물었다.“배불러.”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 말에 이경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음식이 아직 한가득한데 벌써 배가 부르다고?윤이는 점심을 다 먹은 후 레스토랑 안에 있는 키즈 존으로 가서 놀겠다고 했다.“그렇게 해.”탁유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는 신이 나서 방방 뛰며 키즈 존으로 달려갔다.테이블에서 멀지 않는 곳이었기에 탁유미는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의자에 앉은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아이는 점점
탁유미가 담담한 얼굴로 받아쳤다.“걱정하지 마. 나도 네 앞에서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너인 건 나도 싫거든.”“너...!”이경빈이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생각해보면 탁유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인 건데 그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조금 아파 나기까지 했다.“너 혹시 일부러 이래? 약 한가득 보여주면서 내 동정심이라도 사 보려고?”탁유미는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약을 먹었다.그러고는 다 먹은 다음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만약 그렇다면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좀 들어? 만약 내가 정말 죽게 됐고 너한테 나를 구할 기회가 있다고 하면 너는 어떡할래? 날 구해줄 거야?”이경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죽는다고? 탁유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스치자 이경빈은 그럴 리 없다며 부인했다.탁유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저 그의 동정심이나 얻으려는 수법이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게 분명했다.“머리가 나빠지기라도 한 거야? 내가 널 구할 리가 없잖아. 탁유미, 나는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곧 죽을 것처럼 아파해도 널 구해줄 생각 따위 없어!”이경빈이 차갑게 말했다.이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도 그래. 고마워.”고맙다고?“고맙다고? 지금 나 놀려?”“아니. 진심이야.”탁유미는 담담한 얼굴로 얘기한 후 시선을 돌려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는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진심이었다.그가 머릿속에 잠깐 든 헛된 망상을 깨워줘서, 그를 마음에서 놓은 게 정확했다는 걸 다시금 알려줘서 그리고 잘못된 감정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해줘서 그녀는 정말 고마웠다.“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만나지 말자. 다시는.”이제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그녀의 말에 이경빈이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변해갔다.‘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누가 할 소릴!’그는 그녀의 말에 어이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
“그건 그쪽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윤이의 손을 꽉 잡았다.여기서 더 언쟁을 높이게 되면 일이 더 커질 뿐만이 아니라 윤이도 겁을 먹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여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나는 내 아들을 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의 자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부모 아래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어? 범죄도 유전이야!”그녀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주변 학부모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탁유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탁유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분노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말 가려서 해.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아이들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리고 우리 윤이는 당신이 멋대로 판단해도 될 애가 아니야. 당장 내 아들한테 사과해!”여자는 탁유미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사과하라고? 당신 아들한테? 내가 왜? 뭐, 사과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밀어버리게? 또 콩밥 먹게 해줘?!”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그녀의 아픈 구석을 칼로 난도질하듯 후벼팠다.탁유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윤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사과하지 않으면 당신 고소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없어. 당신이 우리 애한테 사과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갈 테니까!”갈 땐 가더라도 윤이가 앞으로 괴롭힘당하지 않게는 해줘야만 한다.엄마로서 좋은 건 못 해줘도 이것만큼은 해줘야 한다.“고소? 하하하! 감방살이하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고소를 들먹여?”하지만 여자는 가소롭게 웃으며 탁유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바로 소장 받게 될 거야. 그리고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