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
“그야…….”임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한 입 남은 찐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예전 같았으면 맛없다고 투정 부렸을 테지만, 지금 그녀에게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우리는 많이 닮았으니까?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이잖아. 어쩌면 그 누구도 우리를 원하지 않을 거고, 관심을 주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말을 마친 그녀는 강지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희망과 기대 속에 김장감도 섞여 있었다.“그런가? 하긴, 우리가 비슷한 부류긴 하지…….”진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그의 눈은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진혁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가질 수 있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유진의 말은 꽤 흥미로운 게임으로 다가왔다.“누나.”그는 유진이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순간, 유진의 미소는 봄에 핀 꽃들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저녁을 먹고 난 뒤, 유진은 지혁을 데리고 야시장으로 가, 그가 입을 옷을 샀다. 분명 세일하는 싼 옷을 골랐지만 금액은 10만원을 훌쩍 넘었다.하지만 유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지혁에게 새 패딩을 입혀줬다.“따뜻하지?”“응.”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신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아담한 유진을 바라봤다.“사실 안 사줘도 돼. 원래 있던 옷으로도 충분해.”“충분해도 새 옷을 입을 순 있잖아. 물론 돈이 없어서 많이는 못 사주지만, 적어도 너한테 옷 한 벌 정도는 사줄 수 있거든?”“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진혁은 나지막이 물었다.“그야 내가 네 누나니까.”유진은 싱긋 웃으며 지혁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우연히 닿은 차가운 그의 손에 유진은 양손으로 감싸 입김을 불어주며 이리저리 비벼댔다.“손이 너무 차가운데? 이렇게 문지르다 보면 좀 따뜻해질 거야.”스스럼없는 여자의 행동에 지혁은 약간 굳어버렸고
“그딴 영광 필요 없어.”임유진의 말에 하 감독은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달려들어 뺨을 갈겼다.“내가 마시라면 마실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비싼 척은!”이윽고 욕설을 퍼붓더니 옆에 놓인 와인병을 들어 유진의 입에 마구 부어 넣었다.유진은 상대방을 밀쳐내려고 애썼지만, 여자 혼자서 건장한 남자를 힘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임유라까지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으니.하 감독은 유라의 눈치 있는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유라 씨, 가만 보면 참 기특하다니까. 내가 유라 씨 분량 꼭 늘려준다. 총감독님한테는 내가 말 잘해볼게.”그 말에 임유라는 더 신이 나서 열심히 옆에서 도왔다.“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저희 언니가 이런 데 좀 서툴러서 그러니 감독님이 이해해주세요.”한편, 유진은 자기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도 몰랐다. 주량이 약하다 못해 거의 알코올 쓰레기라고도 불리었기에 벌써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의식이 꺼지지 않도록 본인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나…… 나 집에 갈래…….”“그래, 이따가 데려다줄게.”하 감독은 술에 취해 나른해진 그녀를 얼른 끌어안았다.유진은 화려한 미녀는 아니지만 일전에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다는 것만 생각하면 하 감독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 감독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솔직히 전화를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액정에 뜬 총감독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수신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총감독은 그의 큰 형인 데다 그가 감독의 자리를 꿰찬 것도 총감독인 형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었다.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급기야 호흡마저 가빠졌다.“그…… 그럴 리가 없어. 이, 이 여자…… 이 여자는 환경미화원인 데다 백도 없다고. 전 남자친구인 소민준과도 헤어진 지가 언젠데, 게다가 지금 소민준은 약혼녀까지 있잖아.”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여자친구가 환경미화원으로 길바닥 청소나 하는
“아니.”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강지혁의 뇌리에는 어제의 일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임유진을 침대에 눕힐 때, 유진이 갑자기 자기를 깔아 눕히던 기억.그 순간만 떠올리면 놀랍기만 하다. 자기가 방심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만약 상대가 지혁의 목숨을 노렸다면 아마 반항도 못 하고 바로 죽었을 거다.언제나 경계심이 많던 지혁이었기에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유진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덮고 있던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두 눈을 소중하다는 듯 어루만졌다.“혁아, 너 눈 진짜 예뻐…… 마음에 들어…… 좋아…….”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잇따라 귓가에 들려왔다.“좋다고?”이 단어는 그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단어라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다 지혁에게 좋아한다 눈이 마음에 든다 등과 같은 말을 해왔었으니까.지혁의 두 눈은 아마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은 부분일 거다.그리고 지혁이 어렸을 때, 지혁의 아버지는 매번 지혁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리곤 했다.“이런 눈은 다정해 보이지만 제일 매정해. 혁이 넌 앞으로 다정할지 매정할지 모르겠네.” 하고 말이다.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유진의 대답이 들려왔다.“응…… 왜냐하면…… 딸꾹…… 아주 맑고 깨끗해.”‘깨끗하다고?’지혁은 피식 웃었다. 지혁의 눈이 깨끗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유진이 처음이다.“마치…… 죄악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엄청 깨끗해.”유진은 술에 취한 모습으로 자기의 얼굴을 지혁의 얼굴에 바싹 붙인 채로 읊조렸다.“혁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 보호해 줄게…….”그리고 말을 채 끝마치지도 않고 지혁의 가슴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날 보호한다고? 자기도 보호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보호한다고 그래? 진짜 바본가?’“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고꾸라져 자던데?”지혁은 어제의 기억을 접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저녁 9시가 넘도록 강지혁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그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고 마음 졸였지만, 하필이면 지혁한테 핸드폰도 없는지라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었다.이윽고 아예 집을 나와 동네를 둘러보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지혁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도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먼발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유진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혁아!”지혁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그리고 유진이 앞에 도착했을 때에야 지혁은 유진이 숨을 헐떡이는 건 물론 얼굴도 얼어 벌겋게 물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오히려 예쁘게 반짝거렸다.“돌아와서 다행이다.”“혹시…… 나 기다렸어?”지혁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로 보아 유진이 밖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지 짐작이 갔다.“응.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유진은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그런 유진의 눈에서 지혁은 유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혁이지 GH 그룹 대표 강지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의 신분이 밝혀져도 유진이 자기를 이렇게 걱정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전단지를 돌리는 게 생각보다 늦게 끝났어. 손 차갑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이윽고 싱긋 웃더니 유진의 두 손을 잡은 채로 지난번 유진이 했던 대로 유진의 손을 살살 비벼주기 시작했다.점점 따뜻해지는 손에 유진의 마음에도 점차 온기가 차올랐다. 분명 추운 날씨임에도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있어서 참 좋아.”지혁은 유진의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 말 꼭 기억해. 앞으로 절대 후회하면 안 돼.”“당연하지. 절대 후회하지 않아. 이제 됐어, 나 이제 따뜻하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자. 저녁 다시 데워줄게.”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강지혁은 촛불을 끄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빈 소원은...”소원이 뭐였는지 얘기하려던 찰나 임유진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잠깐! 소원을 말하면 어떡해. 그러면 안 이뤄진단 말이야.”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나한테 소원권 준다며. 내가 속으로만 빌면 내 소원이 뭔지 네가 모르잖아.”“그건 이거랑 별개 소원이지. 그 세 개 소원은 내가 들어주기로 약속한 거고 지금 이 소원은 음... 그러니까 하느님만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이야. 예를 들어 회사가 더 잘되게 해달라거나 백 세까지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거나 하는 거.”“하지만 내 소원은 모두 다 너랑 연관이 있는 건데?”강지혁은 손을 뻗어 임유진의 손을 잡고 이내 그녀의 검지를 하나 폈다.“내 첫 번째 소원은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그 날까지 네가 평생 이렇게 나랑 같이 생일날 함께 있어 주는 거야.”그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강지혁의 소원은 계속됐다. 그는 또다시 그녀의 손가락을 펴더니 ‘2’를 만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두 번째 소원은 네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거야.”말을 마친 그는 잠시 침묵하며 시선을 내려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세 번째 소원을 좀처럼 입에 내지 못했다.“세 번째 소원은 뭐야?”결국 궁금해진 임유진이 못 참고 물었다.“세 번째 소원은 아직 안 쓸래. 정말 필요할 때, 그때 다시 얘기할게.”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대신 내가 세 번째 소원을 말했을 때 그게 뭐든 꼭 들어줘야 해. 그럴 수 있어?”“당연하지.”임유진이 호쾌하게 대답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약속한 거야. 꼭 들어줘야 해?”“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래? 갑자기 궁금해지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짙은 어둠이 보였다.강지혁은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제발 이 세 번째 소원을 쓸 날이
둘만 있는 생일 파티이기는 하지만 임유진은 그래도 일부러 강지혁과 같은 색의 옷을 입었다.그러고는 아래로 내려가 같이 밥을 먹었다.사실 점심에 강지혁을 위해 직접 요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임신 중이라 안 된다며 강지혁에게 바로 거절당해버렸다.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던 그녀였지만 완강한 반대에 결국 그에게 손수 음식을 차려주는 건 아이를 다 낳은 뒤에 하기로 했다.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직접 요리하는 건 아니지만 대신 점심 메뉴 주문은 평소 강지혁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직접 했으며 생일 케이크도 직접 그림을 그려 케이크 가게 사장에게 보내주며 자신이 그린 대로 만들게 했다.케이크를 강지혁의 앞에 대령했을 때 강지혁의 얼굴에는 정말 기쁜듯한 표정이 어렸다.그 표정에 임유진은 벌써 배가 부른 듯한 느낌이었다.“너 이거...”강지혁이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들어?”임유진이 묻자 강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며 웃었다.“응. 마음에 들어.”임유진이 준비한 케이크는 조금 많이 특별했다.케이크 위에는 마당이 딸린 작은 집이 있었고 마당에는 흰머리 노인 부부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 노인 부부 주위에는 성인처럼 보이는 세 명의 사람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그보다 더 작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마지막으로 마당에는 초콜릿으로 된 문구도 적혀 있었다.[혁아, 생일 축하해. 우리 평생 함께하자!]이건 강지혁의 소원이기도 했고 임유진의 소원이기도 했다.먼 미래, 그와 그는 흰머리가 뒤덮인 노인이 될 것이고 두 사람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큰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며 그 세 명의 아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예쁜 아이들이 또 생기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초를 꽂고 강지혁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혁아, 28살 생일 축하해!”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1년 전,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1년 뒤인 지금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임유진은 볼 때마다 그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연예인 중에도 내로라하는 잘생긴 얼굴들이 많은데 왜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팬들이 세상을 구한 얼굴이라고 자기 아이돌을 치켜세워도 잠깐 동조만 할 뿐이지 그 뒤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하지만 강지혁의 얼굴은 아무리 많이 봐도 질리지 않는다.“좋은 아침. 생일 축하해, 혁아.”임유진의 아침 인사에 강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좋은 아침.”“오늘은 출근 안 하는 거지?”“응, 안 해.”강지혁이 옷장에서 옷을 꺼내며 입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항상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야 만다.부부가 된 지도 이제 한 달이 다 되고 이제는 볼 것도 다 본 사이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녀가 그럴 때면 일부러 더 보라는 듯 옷을 느긋하게 갈아입고는 한다.“혁아, 우리 아이들 말이야. 누구를 더 닮게 될까? 아무래도 너를 더 닮게 되겠지?”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은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미소를 지었다.“왜? 나를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어?”“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너 닮았으면 좋겠어. 만약 아들이 나오면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는 아이가 될 테고 딸이 나오면 남자들이 우리 딸 차지하겠다고 엄청 많이 싸워댈 거야. 분명해.”“나는 반대로 아이들이 너 닮았으면 좋겠어. 아들이고 딸이고 다 너를 닮는 게 좋아.”“나?”임유진은 그 말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닮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네 예쁜 얼굴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게 되는데?”“내가 예뻐?”강지혁이 침대 곁으로 다가와 두 손을 임유진의 곁에 두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나한테는 네가 제일 예뻐.”펑.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자기보다 예쁜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다음 주 주말이요...?”탁유미가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왜요? 그날 무슨 일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다음 주 주말에 이경빈이랑 같이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어요.”토요일이 될지 일요일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이경빈과 약속한 건 다음 주 주말이었다.탁유미의 말에 윤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엄마, 정말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가요?”“응, 정말이야.”탁유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윤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무릎을 꿇은 것도, 자존심이 박살 난 것도 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한편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듣더니 집에서 나가기 전 작은 목소리로 탁유미에게 물었다.“셋이 함께 가는 거예요?”“네.”탁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윤이가 유치원에서 소원 적는 놀이할 때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가고 싶다고 적었어요. 그래서 그 소원 들어주려고요.”“하지만 언니는 지금 몸이...”“어차피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할 생각이에요. 노는 건 윤이가 할 거니까 괜찮아요.”임유진도 곧 엄마가 될 몸이기에 탁유미가 무슨 마음인지 이해가 됐다.“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요.”“네, 그럴게요.”탁유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탁유미가 어떤 방법으로 이경빈을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집으로 돌아온 후, 임유진은 강지혁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아이들이 태어나면 놀이공원에 자주 가는 게 어때?”이에 강지혁이 그녀를 안아주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오늘 유미 언니 보러 갔는데 윤이가 엄마랑 아빠랑 놀이공원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간 적이 없으니까... 언니가 사랑을 많이 주고 있어도 윤이한테는 이경빈이 필요해. 이경빈은 정말 구제 불능 인간이지만 그래도... 윤이한테는 필요한
3년 반이라는 형을 받았을 때도 탁유미는 여전히 자신을 무죄라고 주장했었다.그게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하지만 오늘, 이경빈 때문에 그 자존심이 짓이겨져 버렸다.‘차라리 잘 됐어.’이로써 이경빈과 그녀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으니까.룸 안.공수진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이경빈 쪽으로 다가갔다.“경빈 씨, 화내지 말아요. 애초에 탁유미 씨 사과 같은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는 경빈 씨만 있으면 돼요.”이경빈은 피곤한지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진작 받아야 할 사과였어.”“하지만 진심이 아닌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공수진은 말을 하며 이경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탁유미 씨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마 내가 경빈 씨랑 결혼하는 게 배가 아파서일 거예요.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을 보내주는 게 쉽지 않은 거겠죠. 경빈 씨가 여지를 주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난 정말 더 이상은 탁유미 씨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여지를 주지 않는 건 당연한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 결혼식은 예정일에 정상적으로 진행될 테니까. 나랑 결혼할 여자는 수진이 너야.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어.”그 말에 공수진은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경빈에게 뽀뽀하려는 듯 발꿈치를 들었다.하지만 입술이 부딪히려는 순간 이경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을 피해버렸다.이에 공수진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난 피곤해서 이만 들어갈게. 항공권은 예매해 뒀으니까 시간이 되면 김 비서가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제 품에서 공수진을 떼어냈다.공수진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그의 품에서 나오더니 이경빈이 뒤돌았을 때 한마디 물었다.“경빈 씨, 아까 탁유미 씨가 마지막에 약속을 지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약속을 한 거예요?”“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이경빈은 그녀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이에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
탁유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어졌다.공수진에게 가서 사과하라고?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피해자가 보상을 받지는 못할망정 가해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4년이나 빚을 진 건 그녀가 아니라 이경빈과 공수진이었다.“너한테는 네 아들 곁에 좀 있어 달라는 부탁이 그딴 조건 없이는 못 하겠는 일이야?”탁유미의 얼굴이 무섭게 일렁였다.이에 이경빈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내가 무슨 조건을 걸던 그건 내 자유야!”이경빈의 말에 탁유미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더니 평정심을 되찾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았어.”...공수진은 이경빈의 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경빈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하지만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은 탁유미의 얼굴이었다.그리고 그 뒤로 이경빈도 들어왔다.“경빈 씨, 이게 지금 무슨...”공수진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이경빈은 아무 말이 없었고 그 대신 탁유미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공수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4년 전 일은 미안해요.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그래서 공수진 씨가 아이를 잃게 된 것도 전부 제 잘못이에요. 그간 제대로 된 사과를 못 했어요.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공수진은 그 말에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경빈 씨,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너한테 사과하고 싶대. 용서해줄 거야?”이경빈의 말에 공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경빈이 탁유미에게 뭐라고 얘기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이경빈은 아무 말 없는 공수진을 한번 보더니 시선을 돌려 싸늘한 눈으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사과에 성의가 없잖아. 고작 그런 말로 4년 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갈 거라고 생각해?”그러자 탁유미가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공수진에게 무릎을 꿇었다.“용서해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슬픔도 분노도 들어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경빈 씨!”공수진은 이경빈의 이름을 외치며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이경빈은 시선을 내려 탁유미의 떨리는 손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공수진을 향해 말했다.“먼저 올라가. 금방 갈게.”“네?”공수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열림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하고 그렇게 문이 닫힐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왔다.그도 그럴 것이 문이 닫히기 전 이경빈이 그녀가 탁유미를 바라보았으니까.게다가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망설이는 눈빛이었다.뭘 망설이는 거지?왜 탁유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거지?4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이경빈은 탁유미만 보면 흔들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탁유미 그 여자가 뭐라고?공수진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어차피 죽을 거 그냥 지금 빨리 죽어버리지! 왜 또 경빈 씨 앞에서 알짱대는 건데!?’엘리베이터 앞.이경빈은 지금 자기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다.탁유미가 ‘잠깐만’이라고 외치며 팔을 잡았을 때 정말 발걸음이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할 말이 뭐야. 빨리 말해.”이경빈이 그녀에게 잡힌 팔을 우악스럽게 빼내며 말했다.더 이상 그녀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싫었다.“나랑 윤이한테 시간 좀 내줘. 같이 놀이공원 가자. 윤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을 가본 적이 없어. 그래서 윤이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주고 싶어.”“좋은 추억?”이경빈이 차갑게 웃었다.“탁유미, 너랑 내가 윤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가는 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들을 포기하는 척 이렇게 다시 나한테 접근하는 게 목적이야? 새삼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그립기라도 해?”탁유미는 떨리기도 하고 또 불안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상처를 받았다던가 분노했다던가 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이경빈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으니까.탁유미는 그저 이경빈이 자
탁유미는 이경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와 프런트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다.“이경빈 씨를 만나고 싶은데 지금 호텔에 있나요?”“이경빈 고객님은 현재 외출 중이세요. 용건이 있으신 거면 직접 연락을 해보시거나 로비에서 기다려주세요.”직원이 예의 있게 답해주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연락하고 싶어도 이경빈의 연락처 같은 건 진작 삭제했으니까. 그녀가 이경빈과 연락할 수 있는 루트는 양육권 분쟁 준비 당시 연락을 취했었던 그의 변호사와 연락하는 방법뿐이었다.탁유미는 넓은 로비 한쪽에 가만히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시간이 정처 없이 흐르고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때 문이 열리고 드디어 이경빈이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옆에는 공수진도 함께 있었다.이경빈은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탁유미의 모습을 발견했다.로비에 사람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눈은 마치 자석처럼 단번에 탁유미 쪽으로 이끌렸다.“네가 왜 여기 있어?”이경빈이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할 말이 있어.”탁유미가 조금 쭈뼛거리며 말했다.“할 말?”이경빈이 코웃음 쳤다.“나한테는 3개월 동안 만큼은 찾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네가 찾아오는 건 또 괜찮나 보지?”비아냥 섞인 그의 말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옆에 있던 공수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경빈 씨는 왜 찾아왔어요? 설마 이제 와서 양육권은 못 주겠다고 하려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말을 마친 후 공수진은 이경빈의 팔을 더 꽉 잡았다.“경빈 씨, 이만 가요.”“그래.”이경빈이 지나쳐 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자 탁유미가 손을 뻗어 이경빈의 앞을 막아섰다.“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몇 분이면 돼!”그러자 이경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우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더 남았나? 3개월 얘기를 꺼낸 건 너야. 나도 더는 너 안 찾아갈 테니까 너도 나 찾아오지 마. 그리고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면 꿈 깨!”
한지영은 깨어났다고 해도 한두 시간가량 뒤면 또다시 잠이 들고는 했다.오늘도 새벽녘에 잠시 눈을 떴다가 몇 시간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탁유미는 임유진보다 일찍 와 있었기에 투명 유리 너머로 한지영이 눈을 뜬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줄곧 한지영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기에 누워있는 한지영을 보는 게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탁유미는 자신은 얼마 안 가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한지영은 이번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잘 살기를 바랐다.물론 지금껏 한지영에게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병문안을 다 마친 후 탁유미와 임유진은 함께 병원을 나섰다.“언니, 몸은 좀 어때요? 실력 좋은 선생님들한테 한번 봐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괜찮아요. 약만 꾸준히 먹으면 통증도 가벼워지거든요. 그리고 지금 봐주는 선생님도 실력 있는 분이에요.”탁유미의 말은 사실이었다.임유진이 걱정되어 탁유미의 주치의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쪽으로는 유명한 의사였다.“그럼 금전적으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알겠어요. 고마워요.”탁유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생이 평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임유진 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 그녀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행운아처럼 느껴졌다.“참, 윤이는요? 윤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지난번에 사준 옷이랑 장난감은 마음에 든대요?”임유진이 물었다.“엄청 좋아했어요. 요 며칠은 유진 씨가 사준 장난감만 가지고 놀아요. 그리고 옷은 한번 입어 보더니 자기 마음에 쏙 들었는지 특별한 날 입을 거라며 옷장에 고이 모셔둔 거 있죠?”그 말에 임유진은 윤이와는 정반대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새 옷을 사게 되면 근처 편의점을 가는데도 그 옷을 입으려 했고 다른 옷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다음에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이라도 가야겠어요. 윤이가 새 옷 입은 모습이 궁금해요.”“그래요.”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뭔가 떠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