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지만 윤이의 성장 과정을 보지 못하는 건 앞으로도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경빈의 차량이 이미 단지 앞에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이경빈은 상념에 잠긴 듯 차 옆에 기대 서 있었다.“아빠!”윤이가 이경빈을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이에 이경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하지만 시선을 들어 올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윤이가 아닌 탁유미였다.탁유미는 베이지색 스웨터에 흰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네이비색 에코백을 들고 신발은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게다가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옅은 화장까지 했다.그래서일까, 어쩐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활발하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경빈이 넋을 놓고 있을 때 탁유미와 윤이는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아빠, 좋은 아침이에요!”윤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그래, 윤이도 좋은 아침이야.”이경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이제 같이 놀이공원으로 갈까?”“네!”이경빈은 방금 넋을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리기 위해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윤이가 먼저 올라타고 탁유미가 올라타려고 할 때, 이경빈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오늘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나와 결혼할 사람은 수진이 뿐이니까.”이에 탁유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일말의 동요도 없는 그녀의 얼굴에 이경빈은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경계 태세를 잔뜩 갖추고 힘껏 주먹을 휘둘렀는데 아무런 공격성 없는 솜사탕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이제 그만 팔 좀 놔줄래? 윤이가 기다리잖아.”아니나 다를까 차 안에서 윤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엄마 왜 안 와요?”이경빈은 그 말에 바로 손을 풀어 주었고 탁유미도 천천히 뒷좌석에 올랐다.그리고 이경빈은 운전석에 올라타
티켓을 받으러 줄을 설 때 윤이가 물었다.“오늘 우리, 아빠랑 사진 많이 찍을 수 있는 거예요?”탁유미가 잠시 멈칫했다.“그래. 엄마가 윤이랑 아빠가 함께 있는 사진 많이 찍어줄게.”“나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찍고 싶어요.”같이?탁유미가 잠시 침묵했다.그녀는 상관이 없었으나 이경빈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같이 사진 찍으면 안 돼요? 혹시... 엄마랑 아빠랑 이혼해서 그래요? 그래서 함께 못 찍는 거예요...?”윤이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하지만 희성이는 엄마랑 아빠도 이혼했는데도 같이 찍은 사진이 엄청 많았단 말이에요.”아이의 얼굴은 이제 부루퉁을 넘어서 속상해 보이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런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이따 엄마가 먼저 아빠랑 윤이 사진 찍어줄게. 그리고서 셋이서 같이 찍자. 어때?”“좋아요!”아이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탁유미는 옅게 웃었다.이경빈에게 놀이공원 얘기를 꺼낸 건 어차피 윤이 소원 때문이었다.그러니 셋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는 것도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그때 주차를 마친 이경빈이 이쪽으로 다가왔다.아이는 이경빈을 보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기 손을 내밀었다.이경빈은 손잡아달라는 아이의 작은 손을 보더니 잠깐 멈칫했다.“너랑 손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야.”탁유미가 아이 행동의 의미를 대신 얘기해주었다.윤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손잡아도 돼요?”거절당할까 두려워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서서히 손을 뻗어 아들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윤이는 한 손에는 이경빈의 손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윤이에게는 놀이공원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롭게 느껴졌다.일전 임유진과 곽동현과 함께 온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다른 설렘과
회전목마 순서가 다가왔을 때, 탁유미는 그제야 회전목마가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병 때문에 식욕이 떨어져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걸 보니 금세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아까부터 간 쪽이 또다시 욱신거리는 것으로 보아 통증이 시작되려 하는 게 틀림없었다.윤이는 차례가 다가오자 환호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아들이 이렇게도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탁유미는 한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안전바를 꽉 잡으며 최대한 통증을 참아내려 했다.이경빈의 시선이 아까부터 자신에게 있었음을 모른 채 말이다.이 정도의 회전속도는 이경빈에게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또 조금 유치할 수 있는 행동도 윤이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체험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윤이가 기뻐서 방방 뛸 때면 그 역시 마음이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따뜻해졌다.이런 감정은 처음이다.피가 당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까?윤이가 친아들이라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이경빈의 시선이 매섭게 탁유미를 쫓았다.그는 창백한 얼굴로 이제는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있는 그녀를 보며 미간이 절로 찌푸렸다.그녀가 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윤이에게는 가슴 설레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경빈은 어이가 없게도 자신이 아까 내뱉은 말이 후회되기 시작했다.회전목마가 멈추고 탁유미는 애써 웃어 보이며 윤이에게 말했다.“엄마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아빠랑 여기 있어.”그녀는 말을 마친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세면대에 얼굴을 박고 게워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오늘 아침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라 게워내려고 해도 뭘 게워낼 것이 없었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다행히 윤이는 그녀의 몸 상태가 좋
앞으로도 이렇게 이경빈이 윤이에게만은 다정한 아빠가 되기를 탁유미는 진심으로 바랐다.사진을 찍은 후 윤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엄마도 아빠랑 같이 사진 찍어요. 윤이가 찍어줄게요!”윤이의 시선에 이경빈이 막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탁유미가 한발 빨리 입을 열었다.“괜찮아. 아까 보니까 동물 친구들이 이곳저곳에서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찍고 있었어. 아마 엄마랑 아빠가 함께 있는 모습도 찍혔을 거야.”아이는 그 말에 활짝 웃더니 알겠다고 하며 더 이상 사진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동물 탈을 쓴 직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내문을 보니 사진은 원하면 메일로 보내준다고 했다.이로써 무리하게 이경빈과 함께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어졌다.아무리 아들의 소원이라고 해도 질색할 게 뻔한 얼굴을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한편 이경빈은 탁유미의 말에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어이가 없었다.사진을 찍는 걸 거절한다고 해도 그건 그녀가 아닌 그여야 했다.그런데 탁유미는 애초에 그런 생각 따위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거절해버렸다.그러고는 지금,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윤이와 함께 바깥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이경빈은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점심이 되고 세 사람은 놀이공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밥을 먹었다.“왜 더 안 먹고?”탁유미가 조금만 먹고 수저를 내려놓자 이경빈이 물었다.“배불러.”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 말에 이경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음식이 아직 한가득한데 벌써 배가 부르다고?윤이는 점심을 다 먹은 후 레스토랑 안에 있는 키즈 존으로 가서 놀겠다고 했다.“그렇게 해.”탁유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는 신이 나서 방방 뛰며 키즈 존으로 달려갔다.테이블에서 멀지 않는 곳이었기에 탁유미는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의자에 앉은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아이는 점점
탁유미가 담담한 얼굴로 받아쳤다.“걱정하지 마. 나도 네 앞에서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너인 건 나도 싫거든.”“너...!”이경빈이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생각해보면 탁유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인 건데 그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조금 아파 나기까지 했다.“너 혹시 일부러 이래? 약 한가득 보여주면서 내 동정심이라도 사 보려고?”탁유미는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약을 먹었다.그러고는 다 먹은 다음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만약 그렇다면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좀 들어? 만약 내가 정말 죽게 됐고 너한테 나를 구할 기회가 있다고 하면 너는 어떡할래? 날 구해줄 거야?”이경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죽는다고? 탁유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스치자 이경빈은 그럴 리 없다며 부인했다.탁유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저 그의 동정심이나 얻으려는 수법이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게 분명했다.“머리가 나빠지기라도 한 거야? 내가 널 구할 리가 없잖아. 탁유미, 나는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곧 죽을 것처럼 아파해도 널 구해줄 생각 따위 없어!”이경빈이 차갑게 말했다.이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도 그래. 고마워.”고맙다고?“고맙다고? 지금 나 놀려?”“아니. 진심이야.”탁유미는 담담한 얼굴로 얘기한 후 시선을 돌려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는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진심이었다.그가 머릿속에 잠깐 든 헛된 망상을 깨워줘서, 그를 마음에서 놓은 게 정확했다는 걸 다시금 알려줘서 그리고 잘못된 감정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해줘서 그녀는 정말 고마웠다.“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만나지 말자. 다시는.”이제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그녀의 말에 이경빈이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변해갔다.‘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누가 할 소릴!’그는 그녀의 말에 어이
집에 도착한 후 탁유미는 윤이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띠링.그때 메시지 알림 소리가 울리고 탁유미의 휴대폰에 뉴스 기사가 하나 도착했다.뉴스 기사 알림은 보는 즉시 삭제해버렸던 그녀였지만 익숙한 남자의 이름에 탁유미는 얼른 휴대폰을 두 손으로 들고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그녀가 봤던 남자의 이름은 바로 ‘백연신’이었다.그리고 기사 내용은 백연신이 재원시의 고씨 가문과 손을 잡고 오늘 열린 주주총회에 갑자기 나타나 백씨 가문에서의 자신의 권리를 되찾았다는 것이었다.그들이 나타나고 몇 분 뒤 바로 경찰까지 나타났고 경찰들은 그 자리에서 백연신 아버지의 첫째 부인과 그의 두 아들을 특수상해죄로 잡아갔다.즉 치열했던 권력 다툼에서 첫째 부인은 완전히 져버린 것이고 백연신은 최종 승리자가 됐다는 소리였다.기사 내용 중에는 이러한 말도 적혀있었다.백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앞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며 정략결혼은 물론이고 두 기업이 합병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말이다.탁유미는 기사를 다 훑은 후 입을 다물 수 없었다.두 가문 사이의 정략결혼이라니.그렇다는 건 백연신이 고씨 가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는 뜻이었다.백씨 가문의 나머지 두 아들은 경찰들에 의해 서로 끌려갔으니까.하지만 그렇게 되면....‘지영 씨는 어떡하고...?’한지영의 얼굴이 떠오르자 탁유미는 갑자기 조급해 나고 또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래서 그녀는 서둘러 침실에서 나온 후 휴대폰을 들고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 씨, 백연신 씨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런데... 백씨 가문이랑 고씨 가문 사이에 정략결혼 얘기가 돈다던데 그거 정말이에요?”탁유미의 질문에 임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네. 적어도 기사 내용에 거짓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백연신 씨한테 직접 들어봐야 해요. 언니, 일단 이 얘기는 지영이한테 비밀로 해줘요. 지영이 부모님한테도 방금 전화해서 일단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진실이 뭔지 알아내고 나
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맞는 말이었다.만약 그때 한지영이 만신창이가 된 채 나타나지 않았으면 임유진은 그에게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또한 그리도 쉽게 결혼을 수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알았어. 대신 그쪽으로 가는 건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백연신을 이쪽으로 데리고 올게.”강지혁이 말했다.“만약 백연신 씨가 거절하면?”“올 거야. 만약 거절하면 그때는 납치해서라도 데리고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이 원하는 일이라면 강지혁은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틀 후.정말 협박이라도 한 건지 임유진은 무사히 백연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다만 백연신은 혼자가 아니었다.그의 옆에는 고씨 가문의 잃어버린 친딸인 고은채도 함께 있었다.임유진은 일전 인터넷으로 고은채의 얼굴을 확인한 적이 있다.사진에서도 무척이나 예쁜 사람이었지만 실물을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은 물론이고 몸매도 좋았으며 은근하게 사람을 홀리는 듯한 매력도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연신이 그녀에게 쉽게 넘어갔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백연신이 한지영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누구보다 임유진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백연신의 진심이 듣고 싶었다.“고은채 씨,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백연신 씨와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서요.”임유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어떡하죠?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네요. 저랑 연신 씨 사이에는 비밀이라는 게 없거든요. 그러니 할 말 있으시면 제 앞에서 하세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은 채 백연신의 옆에 딱 달라붙어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을 가지고 놀았다.그리고 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임유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치솟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그러죠.”임유진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시선을 백연신에게로 돌렸다.“지영이는 대체 어쩌다 다치게 된 거죠?”“지영이를 다치게 한 건 아마 제 배
“그랬습니까? 운이 좋네요.”백연신이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네, 운이 좋기는 좋죠. 사람들에게 바로 발견이 되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거기에 운을 다 써버린 건지 병원으로 이송된 후 한지영 씨 부모님은 몇 번이나 의사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기적적으로 깨어나기는 했는데 바로 어제 또다시 상황이 악화했고요. 이대로라면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강지혁의 목소리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그저 일상을 얘기하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하지만 그 말에 백연신은 얼굴을 굳히더니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럴 리가?!”“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강지혁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백씨 가문과 고씨 가문이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는 소식은 이미 인터넷에 다 퍼진 상태인데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다고 한들 한지영 씨라고 모를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흥분하시는 거죠? 한지영 씨가 걱정됩니까?”백연신은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강지혁을 빤히 노려보며 입을 꾹 닫았다.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의 행동에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연신 씨, 왜 그래요?”백연신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의 말은 계속되었다.“혹 걱정되시는 거면 병문안이라도 가보세요. 어쩌면 운이 좋게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고 얘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백연신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백연신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그리고 그 결과 백연신이 아예 한지영을 내려놓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적어도 한지영의 생사는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더욱더 의문이 들었다.어차피 이럴 거면 왜 아까 그렇게도 무심한 척 행동했는지 말이다.“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그때 고은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한지영 씨가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였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