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너 옷차림이…….”강지혁은 그제야 반응했다. 지금 지혁이 입고 있는 이 옷차림은 어젯밤 할아버지를 모시고 밥을 먹을 때의 옷차림이다.만약 혁이라면 당연히 이런 옷을 입을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어젯밤의 일을 겪은 후, 지혁은 오히려 이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임유진에게 지혁의 진정한 신분을 밝혀야 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 그 순간이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다.그리고 유진이 지혁의 신분을 알게 되면 당당하게 유진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옷차림이 달라도 나는 여전히 혁이야, 그렇지?”지혁이 미소를 지은 채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이 아무리 바보라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이 유진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너 노숙자가 아니었어?”“아니야.”지혁이 인정했다.“그럼 넌…… 왜 노숙자 행세를 하고 있었어?”속았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피어났다.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지혁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몸을 덮은 이불을 꼭 잡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떨려왔다.유진이 알고 있던, 순수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동생이, 사실 유진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진의 일방적인 느낌일 뿐이다.한지영의 말대로 유진은 지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 경솔하게 지혁을 집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지혁은, 분명 노숙자가 아니라면서, 왜 유진과 함께 그 좁은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걸까? 함께 동거했던 그날들은 또 지혁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내가 사칭한 것이 아니라 누나가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바로잡지 않았을 뿐이야.”지혁이 말했다.유진은 숨이 막혀 한동안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그…… 그럼 왜 나랑 같이 살아? 너 분명히 집이 있는데!”유진이 지혁을 노려보았다.“누나랑 함께 사는 게 좋았어, 그리고…….”지혁은 말하면서 손을 들어 유진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누나가 날 ‘원해서’ 내가 남은 거야, 안 그래?”입술을 깨물고 있는 유진은
모든 걸 다 해서라도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사람들은 그가 모질다며 무정하다며 욕했지만, 이런 그가 그녀를 보호하고 싶다고 생각 할 줄이야.“괜찮아, 네가 두려워하던 일은 어젯밤에 일어나지 않았어. 내가 제때 달려갔거든.”강지혁이 말했다.정말 그가…… 그녀를 구했다!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가까이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런데 네가 어떻게 거기에서 나를 구할 수 있었어?”그는 분명 어제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가지 않았는데 말이다!“누나 기억 안 나? 누나가 나한테 전화해서 구해달라고 했어.”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괜찮아, 제때 도착했어.”전화 한 통에 백 킬로미터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달려와 나를 구했다고?!임유진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이 피어났다.그는 말하면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덮었다.“누나 손이 거울 조각에 긁혔을 뿐이야. 아마 손은 며칠 동안 치료해야 할 것 같아. 만약 나중에 흉터가 남으면 내가 좋은 의사 찾아서 손에 생긴 흉터 없애 줄게.”임유진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손에 거즈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충격적인 일들 때문인지 오른손이 다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누나는 어제 일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어?”강지혁이 정색한 채로 물었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어젯밤 설날 음식을 먹다가 발생한 일들을 하나하나 솔직하게 강지혁에게 말해주었다.듣고 있던 강지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친척들은 정말…… 그녀를 이런 식으로 바보에게 보내다니! 이건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일이었다!그는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그때, 강지혁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강지혁은 발신 번호가 뜨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후 유진에게 말했다.“내가 신분을 숨긴 건 내가 누나를 속인 거니 누나가 사과를 원하다면 원하는 대로 사과할게. 하지만 지금은 병원이니까 누나 몸부터 추스르고 나중에 다시
강 씨 어르신은 손에 든 전화를 노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옆에 있는 간병인에게 넘겨주었다.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렇다면 정말 좋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다짐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지난날 그의 아들도 그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아빠, 나는 한 여자를 위해 강씨 가문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그러나 결국 아들은 한 여자를 위해 강씨 가문을 버리고 목숨도 버리게 되었다!“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봐. 그 여자에 관한 모든 상세한 자료를 알아야겠어.”강 씨 어르신은 담담하게 명령했다.“알겠습니다.”병실 모퉁이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채 노트북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임유진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녀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시간이 없었던 것만 같았다.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와 그녀를 살폈다. 그들은 기본적인 검사들과 그녀의 피를 채혈해 갔고 검사 절차가 몇 개 더 남았다며 오후에 피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 다시 보자고 했다.그리고 누군가 병실 밖에서 문을 몇 번 가볍게 두드린 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상대방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깔끔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였다. 나이도 그녀랑 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상대방은 임유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안녕하세요, 저는 고이준입니다…… ‘혁이'의 개인비서예요. 이건 유진 씨 휴대전화와 가방이에요. 가방 안에 사라진 게 없는지 확인 해 보셔도 됩니다.”상대방은 핸드폰과 가방을 임유진의 침대 머리맡에 놓고 말했다. 그가 막 물러나려 할 때 임유진이 그를 불렀다.“그…… ‘혁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고이준은 공손하게 말했다.“임유진 씨, 때를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저는 그저 그의 비서일 뿐이에요.”“그럼 내 친척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까요?”임유진은 질문을 바꾸어 물었다.고이준은 그녀의 물음
그녀가 가방을 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았지만 사라진 물건은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휴대전화를 박 씨 집에서 발견하고 가져왔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임유진이 다시 전원을 켜자 부재중 전화와 문자 알림이 쏟아졌다.그중에는 외할머니 번호, 한지영의 번호 또 다른 낯선 번호들도 있었다.외할머니가 전화한 이유는 임유진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한지영이라면…… 임유진은 20통 가까이 걸려 온 전화를 보고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곧 한지영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유진이야?”“응, 내 핸드폰이 어제 맛이 가서 방금 켰는데 너 전화했었네?”임유진이 말했다.한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세상에, 내가 어제 저녁에 너한테 전화하니까 통화가 안 되더라고. 설날에 외갓집에 간다고 하길래, 나는 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돼서 전화해 봤어. 솔직히 너의 외갓집의 친척들중에 외할머니만 너한테 잘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잖아.”한지영은 끊임없이 말을 뱉었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연락이 안 되자 점점 불안했었다. 만약 오늘 점심에도 연락이 안된다면, 그녀는 오후에 직접 그녀의 외갓집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도 주소를 알고 있으니까.“참, 어젯밤에 친척들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한지영이 걱정하며 물었다.“그들은 날 바보에게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고 그 돈으로 집을 사려고 했어.”임유진은 숨기지 않고 어젯밤 외갓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한지영에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한지영은 치를 떨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뻔뻔한 사람들이 다 있을 수 있지? 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다행히도 혁이가 나를 구해줬어. 난 괜찮아.”임유진이 말했다.“그럼 너 지금 오피스텔이야? 내가 갈게.”한지영이 말했다.“아니, 난…… 아직 외갓집에 있어. 지금 혁이와 함께 있으니까 돌아가면 다시 만나자.”임유진이 황급히 대답했다.한지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를 내며 임유진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때, 핸드폰에서 외할아버지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유진이에게 빨리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하라고 해. 첫째와 사람들이 다 나올 수 있도록 해야지.”“풀어주라고요? 뭘 풀어줘요? 그들이 죄를 지었으니, 가둘 수 있을 만큼 가둬야 해요!”“당신 아들딸인데, 다른 성을 딴 애 때문에 꼭 그래야겠어?”“뭐가 다른 성을 딴 애예요?, 유진이도 내 외손녀예요! 애가 엄마도 없는데, 나라도 힘이 돼줘야 해요!”“당신 이러다가 나중에 다 당신을 외면할 거야. 아님 혹시 감옥살이를 한 외손녀가 나중에 당신의 시중을 들고 임종까지 지키게 하고 싶은 거야?”두 노인은 휴대전화가 아직 통화 상태라는 것을 잊은 듯 다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외할머니가 통화 중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유진아, 들려?”“네, 들려.”임유진이 말했다.“외할머니는 네가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 됐어. 너의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 그리고 너의 사촌오빠, 사촌 언니 그들은 돈에 눈이 멀어 미친 짓을 했어. 너는 그 사건을 철회할 필요가 없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외할머니는 강경한 어투로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임유진은 핸드폰을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전화한 이유가 이 일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해서 자신한테 경찰서 쪽에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를 풀어달라고 말해주길 바랄 줄 알았다.그런데 뜻밖에도 외할머니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어릴 때 아버지로 인해 외할머니에게 버려졌고, 그녀는 작은 마을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울먹이는 유진이의 손을 잡고 괴롭힌 아이들을 찾아갔다.그리고 매번 외할머니가 말했다.“유진이 울지 마. 할머니가 있잖아. 할머니는 유진이 편이야. 유진이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당해서도 안 돼!”외할머니는 그녀를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아 따지고, 그래도 말이 안 통한다면 그녀는 물불 안 가리
그녀의 눈물은 항상 그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녀의 눈물을 멈출 수만 있다면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갑자기 임유진이 강지혁의 품에 안겨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안고, 자신의 얼굴을 그의 가슴에 기대었을 때, 그녀는 억누르고 있던 마음속의 그 고통을 그에게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품속에서 목 놓아 우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가볍게 껴안고 마음껏 울게 내버려 뒀다.임유진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하도 울어서 나중에는 눈물이 안 나오는 거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휴지를 들고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부드럽게 닦았다.“누나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한테 말해 줄래?”“외할머니야.”그녀는 코를 훌쩍거렸다.“외할머니가 뭐라하셨어?”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아니, 외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냐고, 큰삼촌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어. 갇혀야 할 만큼 갇혀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야.”임유진은 콧소리를 냈다.강지혁은 조금 의외라 생각했다.“이 외할머니, 그래도 괜찮은 분이시네.”“외할머니는 나에게 잘해 주셨어.”임유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외할머니가 이 정도까지 잘해 주실 줄은 몰랐다. 외할머니는 본인의 행동으로 온 가족이 자신에게 등 돌리고 적이 되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럼 누나는? 친척들을 봐줄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임유진은 눈을 들어 눈앞의 사람을 쳐다보았다.강지혁이 말을 이었다.“누나가 풀어주라고 하면 경찰국에 전화해 사람을 풀어주라고 할 수 있지만, 만약 누나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변호사를 찾아 그들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어.”그는 이 일이 자신한테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임유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녀 역시 법학을 전공했다. 같은 일이라도 사건의 흐름에
임유진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손바닥에 있는 그 흉측한 상처를 보았더라도 그녀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간호사가 임유진의 오른손에 다시 거즈를 감아 주었다. 임유진은 따끔함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려졌지만,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내가 할게요, 나가요.”강지혁이 간호사에게 말했다.간호사는 공손하게 방에서 물러났고, 강지혁은 거즈를 능숙하게 임유진의 오른손에 감았다. 그녀가 오른손에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동작은 가볍고 부드러웠다.상처를 다 싸맨 후, 그는 거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가능한 한 오른손을 사용하지 말고, 아까처럼 주먹을 꽉 쥐지 마. 피를 얼마나 더 흘려야 그만둘 거야?”그녀는 그가 거즈를 감고 나서 마무리로 예쁘게 매듭 묶는 걸 보았다.“너 능숙하게 잘 묶는구나.”순간 그의 두 눈에 우울함이 스쳤다.“어렸을 때 좀 배웠어.”“그때 아버지는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다녔어. 가끔 길에서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보면 달려가서 무작정 잡아당기곤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맞은 적이 많아.”그리고 그는 항상 아버지를 위해 상처를 싸맸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그의 솜씨도 능숙해졌다.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는 한번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상처를 싸맨 적이 없었는데 오직 그녀만은 예외였다.“앞으로 거울 조각 같은 걸 손으로 막 잡지 마. 이번에는 네가 운이 좋아서 손 근육을 다치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앞으로 손을 못 쓸뻔했어.”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어젯밤에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의식을 잃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상대방은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했겠지.”“아파?”그가 물었다. 어젯밤 그가 뛰어들었을 때 그녀가 손에 거울 조각을 쥔 채 피를 흘리고 있던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그는 본인의 의지만으로 이런 상황을 버티고 있는 여자를 한평생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은 혼미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의지로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괜찮아.”
강지혁은 목이 메었다. 임유진은 그가 지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분명 지혁은 이미 유진에게 자신의 신분을 말했는데도 말이다.방안의 불빛 아래, 유진의 긴 머리카락은 어깨에 흩어져 있고, 얼굴은 창백하게 물들어 있으며 살구 같은 눈동자는 아주 긴장한 채로 지혁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듯했고 운명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마치 이미 고된 생활로 인해 너무 힘들어 이미 불공평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했다.“누나, 병원에서 잘 치료하고 있어.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퇴원하면 그때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려줄게.”지혁이 말하자 유진은 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했던 일을 다 말한 것인지 유진은 하품을 하더니 눈꺼풀이 축 처졌다.“누나 피곤하면 먼저 좀 자. 의사가 방금 최근 며칠 동안 졸릴 거라고 했어.”지혁은 말을 하며 유진을 부축하여 눕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은 잠이 들었다.지혁은 유진의 잠든 얼굴을 보고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더니 마지막으로 유진의 입술을 만졌다.“누나, 내가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지혁에게 대답하는 것은 단지 고요함일 뿐이다.유진이 깨어났을 때 지혁은 유진의 병실 침대 옆에 앉아있었고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배고프지? 음식을 가져오라고 할까?”지혁이 말했다.지혁이 말하자 유진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 배가 고픈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일단 내가 누나를 안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는 걸 도울게. 조금 있다 밥 먹자.”지혁은 말하면서 유진을 번쩍 안았다.“나 혼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혁이 유진을 번쩍 안아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지혁의 목을 안았다.지혁은 유진을 안고 화장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유진을 한쪽 세면대에 앉힌 다음 부드러운 털 슬리퍼를 신겨준 뒤에야 다시 유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똑바로 설 수 있어?”지혁이 물었다.“응.”유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혁은 유진의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