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에 소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옆에 있는 진세령을 바라보았다.지금 소 씨네 집과 진 씨네 집은 한배를 탔다.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관심이 있다면…….그래도 겨우 여자 하나를 위해 소 씨네 가문과 진 씨네 가문에 손을 댈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어쨌거나, 유진이 그해에 그런 결과를 맞게 된 건 완전히 유진의 자업자득이었으니 말이다!————유진은 아주 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유진은 마치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유진이 아무리 도망치고 애원해도 그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뼈를 찌르는 듯한 차가운 물, 더럽기 그지없는 쓰레기들, 그리고 주먹질과 발길질, 다 너무 생생했다. 상대방이 발로 유진의 머리를 밟고, 비웃으며 말했다“이것 봐, 이 사람은 변호사야, 지식인이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와 똑같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잖아? 아니지, 우리보다 못해, 우리는 사람을 때릴 수 있는데 이 여자는 맞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이런 고생을 도대체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 왜…… 유진은 분명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임유진, 네가 가장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바로 네가 s 시의 주인에게 미움을 샀다는 거야.”“임유진, 강지혁에게 미움을 산 사람은 다 안 좋게 끝났어.”“임유진, 강 대표님이 자비로워 네 목숨을 원하지 않은 거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자비로운가? 3년 동안 감옥에서 온몸 가득 상처를 입었고, 심지어 평생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자비로운 것인가?너무 괴로워, 몸이 터질 것 같았다.괴로워 죽을 지경인데, 누가 와서 유진을 구할 수 있을까?“하지 마…… 하지 마…….”유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는지 몰랐다. 몸의 이 괴로움을 벗어나려 했던 걸까, 아니면 이런 비참한 운명을 벗어나려 했던 걸까?누가 유진을 도울 수 있고, 또 누가 유진을 보호할 수 있을까?“누나,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아무도 누나를 다치
“하지만…… 너 옷차림이…….”강지혁은 그제야 반응했다. 지금 지혁이 입고 있는 이 옷차림은 어젯밤 할아버지를 모시고 밥을 먹을 때의 옷차림이다.만약 혁이라면 당연히 이런 옷을 입을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어젯밤의 일을 겪은 후, 지혁은 오히려 이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임유진에게 지혁의 진정한 신분을 밝혀야 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 그 순간이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다.그리고 유진이 지혁의 신분을 알게 되면 당당하게 유진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옷차림이 달라도 나는 여전히 혁이야, 그렇지?”지혁이 미소를 지은 채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이 아무리 바보라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이 유진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너 노숙자가 아니었어?”“아니야.”지혁이 인정했다.“그럼 넌…… 왜 노숙자 행세를 하고 있었어?”속았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피어났다.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지혁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몸을 덮은 이불을 꼭 잡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떨려왔다.유진이 알고 있던, 순수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동생이, 사실 유진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진의 일방적인 느낌일 뿐이다.한지영의 말대로 유진은 지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 경솔하게 지혁을 집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지혁은, 분명 노숙자가 아니라면서, 왜 유진과 함께 그 좁은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걸까? 함께 동거했던 그날들은 또 지혁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내가 사칭한 것이 아니라 누나가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바로잡지 않았을 뿐이야.”지혁이 말했다.유진은 숨이 막혀 한동안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그…… 그럼 왜 나랑 같이 살아? 너 분명히 집이 있는데!”유진이 지혁을 노려보았다.“누나랑 함께 사는 게 좋았어, 그리고…….”지혁은 말하면서 손을 들어 유진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누나가 날 ‘원해서’ 내가 남은 거야, 안 그래?”입술을 깨물고 있는 유진은
모든 걸 다 해서라도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사람들은 그가 모질다며 무정하다며 욕했지만, 이런 그가 그녀를 보호하고 싶다고 생각 할 줄이야.“괜찮아, 네가 두려워하던 일은 어젯밤에 일어나지 않았어. 내가 제때 달려갔거든.”강지혁이 말했다.정말 그가…… 그녀를 구했다!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가까이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런데 네가 어떻게 거기에서 나를 구할 수 있었어?”그는 분명 어제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가지 않았는데 말이다!“누나 기억 안 나? 누나가 나한테 전화해서 구해달라고 했어.”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괜찮아, 제때 도착했어.”전화 한 통에 백 킬로미터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달려와 나를 구했다고?!임유진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이 피어났다.그는 말하면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덮었다.“누나 손이 거울 조각에 긁혔을 뿐이야. 아마 손은 며칠 동안 치료해야 할 것 같아. 만약 나중에 흉터가 남으면 내가 좋은 의사 찾아서 손에 생긴 흉터 없애 줄게.”임유진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손에 거즈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충격적인 일들 때문인지 오른손이 다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누나는 어제 일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어?”강지혁이 정색한 채로 물었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어젯밤 설날 음식을 먹다가 발생한 일들을 하나하나 솔직하게 강지혁에게 말해주었다.듣고 있던 강지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친척들은 정말…… 그녀를 이런 식으로 바보에게 보내다니! 이건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일이었다!그는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그때, 강지혁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강지혁은 발신 번호가 뜨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후 유진에게 말했다.“내가 신분을 숨긴 건 내가 누나를 속인 거니 누나가 사과를 원하다면 원하는 대로 사과할게. 하지만 지금은 병원이니까 누나 몸부터 추스르고 나중에 다시
강 씨 어르신은 손에 든 전화를 노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옆에 있는 간병인에게 넘겨주었다.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렇다면 정말 좋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다짐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지난날 그의 아들도 그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아빠, 나는 한 여자를 위해 강씨 가문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그러나 결국 아들은 한 여자를 위해 강씨 가문을 버리고 목숨도 버리게 되었다!“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봐. 그 여자에 관한 모든 상세한 자료를 알아야겠어.”강 씨 어르신은 담담하게 명령했다.“알겠습니다.”병실 모퉁이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채 노트북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임유진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녀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시간이 없었던 것만 같았다.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와 그녀를 살폈다. 그들은 기본적인 검사들과 그녀의 피를 채혈해 갔고 검사 절차가 몇 개 더 남았다며 오후에 피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 다시 보자고 했다.그리고 누군가 병실 밖에서 문을 몇 번 가볍게 두드린 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상대방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깔끔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였다. 나이도 그녀랑 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상대방은 임유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안녕하세요, 저는 고이준입니다…… ‘혁이'의 개인비서예요. 이건 유진 씨 휴대전화와 가방이에요. 가방 안에 사라진 게 없는지 확인 해 보셔도 됩니다.”상대방은 핸드폰과 가방을 임유진의 침대 머리맡에 놓고 말했다. 그가 막 물러나려 할 때 임유진이 그를 불렀다.“그…… ‘혁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고이준은 공손하게 말했다.“임유진 씨, 때를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저는 그저 그의 비서일 뿐이에요.”“그럼 내 친척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까요?”임유진은 질문을 바꾸어 물었다.고이준은 그녀의 물음
그녀가 가방을 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았지만 사라진 물건은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휴대전화를 박 씨 집에서 발견하고 가져왔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임유진이 다시 전원을 켜자 부재중 전화와 문자 알림이 쏟아졌다.그중에는 외할머니 번호, 한지영의 번호 또 다른 낯선 번호들도 있었다.외할머니가 전화한 이유는 임유진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한지영이라면…… 임유진은 20통 가까이 걸려 온 전화를 보고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곧 한지영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유진이야?”“응, 내 핸드폰이 어제 맛이 가서 방금 켰는데 너 전화했었네?”임유진이 말했다.한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세상에, 내가 어제 저녁에 너한테 전화하니까 통화가 안 되더라고. 설날에 외갓집에 간다고 하길래, 나는 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돼서 전화해 봤어. 솔직히 너의 외갓집의 친척들중에 외할머니만 너한테 잘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잖아.”한지영은 끊임없이 말을 뱉었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연락이 안 되자 점점 불안했었다. 만약 오늘 점심에도 연락이 안된다면, 그녀는 오후에 직접 그녀의 외갓집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도 주소를 알고 있으니까.“참, 어젯밤에 친척들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한지영이 걱정하며 물었다.“그들은 날 바보에게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고 그 돈으로 집을 사려고 했어.”임유진은 숨기지 않고 어젯밤 외갓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한지영에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한지영은 치를 떨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뻔뻔한 사람들이 다 있을 수 있지? 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다행히도 혁이가 나를 구해줬어. 난 괜찮아.”임유진이 말했다.“그럼 너 지금 오피스텔이야? 내가 갈게.”한지영이 말했다.“아니, 난…… 아직 외갓집에 있어. 지금 혁이와 함께 있으니까 돌아가면 다시 만나자.”임유진이 황급히 대답했다.한지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를 내며 임유진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때, 핸드폰에서 외할아버지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유진이에게 빨리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하라고 해. 첫째와 사람들이 다 나올 수 있도록 해야지.”“풀어주라고요? 뭘 풀어줘요? 그들이 죄를 지었으니, 가둘 수 있을 만큼 가둬야 해요!”“당신 아들딸인데, 다른 성을 딴 애 때문에 꼭 그래야겠어?”“뭐가 다른 성을 딴 애예요?, 유진이도 내 외손녀예요! 애가 엄마도 없는데, 나라도 힘이 돼줘야 해요!”“당신 이러다가 나중에 다 당신을 외면할 거야. 아님 혹시 감옥살이를 한 외손녀가 나중에 당신의 시중을 들고 임종까지 지키게 하고 싶은 거야?”두 노인은 휴대전화가 아직 통화 상태라는 것을 잊은 듯 다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외할머니가 통화 중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유진아, 들려?”“네, 들려.”임유진이 말했다.“외할머니는 네가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 됐어. 너의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 그리고 너의 사촌오빠, 사촌 언니 그들은 돈에 눈이 멀어 미친 짓을 했어. 너는 그 사건을 철회할 필요가 없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외할머니는 강경한 어투로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임유진은 핸드폰을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전화한 이유가 이 일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해서 자신한테 경찰서 쪽에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를 풀어달라고 말해주길 바랄 줄 알았다.그런데 뜻밖에도 외할머니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어릴 때 아버지로 인해 외할머니에게 버려졌고, 그녀는 작은 마을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울먹이는 유진이의 손을 잡고 괴롭힌 아이들을 찾아갔다.그리고 매번 외할머니가 말했다.“유진이 울지 마. 할머니가 있잖아. 할머니는 유진이 편이야. 유진이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당해서도 안 돼!”외할머니는 그녀를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아 따지고, 그래도 말이 안 통한다면 그녀는 물불 안 가리
그녀의 눈물은 항상 그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녀의 눈물을 멈출 수만 있다면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갑자기 임유진이 강지혁의 품에 안겨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안고, 자신의 얼굴을 그의 가슴에 기대었을 때, 그녀는 억누르고 있던 마음속의 그 고통을 그에게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품속에서 목 놓아 우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가볍게 껴안고 마음껏 울게 내버려 뒀다.임유진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하도 울어서 나중에는 눈물이 안 나오는 거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휴지를 들고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부드럽게 닦았다.“누나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한테 말해 줄래?”“외할머니야.”그녀는 코를 훌쩍거렸다.“외할머니가 뭐라하셨어?”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아니, 외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냐고, 큰삼촌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어. 갇혀야 할 만큼 갇혀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야.”임유진은 콧소리를 냈다.강지혁은 조금 의외라 생각했다.“이 외할머니, 그래도 괜찮은 분이시네.”“외할머니는 나에게 잘해 주셨어.”임유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외할머니가 이 정도까지 잘해 주실 줄은 몰랐다. 외할머니는 본인의 행동으로 온 가족이 자신에게 등 돌리고 적이 되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럼 누나는? 친척들을 봐줄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임유진은 눈을 들어 눈앞의 사람을 쳐다보았다.강지혁이 말을 이었다.“누나가 풀어주라고 하면 경찰국에 전화해 사람을 풀어주라고 할 수 있지만, 만약 누나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변호사를 찾아 그들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어.”그는 이 일이 자신한테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임유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녀 역시 법학을 전공했다. 같은 일이라도 사건의 흐름에
임유진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손바닥에 있는 그 흉측한 상처를 보았더라도 그녀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간호사가 임유진의 오른손에 다시 거즈를 감아 주었다. 임유진은 따끔함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려졌지만,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내가 할게요, 나가요.”강지혁이 간호사에게 말했다.간호사는 공손하게 방에서 물러났고, 강지혁은 거즈를 능숙하게 임유진의 오른손에 감았다. 그녀가 오른손에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동작은 가볍고 부드러웠다.상처를 다 싸맨 후, 그는 거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가능한 한 오른손을 사용하지 말고, 아까처럼 주먹을 꽉 쥐지 마. 피를 얼마나 더 흘려야 그만둘 거야?”그녀는 그가 거즈를 감고 나서 마무리로 예쁘게 매듭 묶는 걸 보았다.“너 능숙하게 잘 묶는구나.”순간 그의 두 눈에 우울함이 스쳤다.“어렸을 때 좀 배웠어.”“그때 아버지는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다녔어. 가끔 길에서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보면 달려가서 무작정 잡아당기곤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맞은 적이 많아.”그리고 그는 항상 아버지를 위해 상처를 싸맸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그의 솜씨도 능숙해졌다.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는 한번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상처를 싸맨 적이 없었는데 오직 그녀만은 예외였다.“앞으로 거울 조각 같은 걸 손으로 막 잡지 마. 이번에는 네가 운이 좋아서 손 근육을 다치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앞으로 손을 못 쓸뻔했어.”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어젯밤에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의식을 잃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상대방은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했겠지.”“아파?”그가 물었다. 어젯밤 그가 뛰어들었을 때 그녀가 손에 거울 조각을 쥔 채 피를 흘리고 있던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그는 본인의 의지만으로 이런 상황을 버티고 있는 여자를 한평생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은 혼미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의지로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괜찮아.”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