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보름이 지났다. 오케스트라는 섣달 그믐날이 되어서야 마침내 쉬기 시작했다.송재이는 일찍 일어나 물건을 사서 어머니의 묘소로 차를 몰고 갔다.철이 들었는지 이제는 울지 않고 웃으며 엄마한테 좋은 말을 했다.돌아오니 거리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모두 기쁨에 겨워 새해맞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멀지 않은 곳에서 새 해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고 이웃들도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덕담을 나누었다.이렇게 떠들썩한 날에 송재이는 오히려 홀로 있었다. 작년에는 병실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에 쓸쓸했지만 외롭지 않았다.하지만 올해는...갑자기 도정원과 연우가 생각났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둘은 나의 가족일까?’송재이는 알고 싶었으나 감히 증거를 찾지 못했다.송재이는 집으로 돌아온 후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텔레비전을 켰다.텔레비전에서는 설날 특집이 한창이었다.그녀는 집안의 쓸쓸한 분위기를 깨려고 볼륨을 좀 높였으나 줄곧 딴생각하고 있었다.이때 유은정이 전화를 걸어왔다. 유은정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했다.유은정은 송재이가 혼자 설 쇠는 것을 알고는 외로워할까 봐 집으로 초대했다.송재이는 동정과 연민을 받고 싶지 않아 유은정의 성의를 거절했다.“괜찮아, 설날 특집 보다가 일찍 씻고 잘 거야.”유은정은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심심하면 언제든지 놀러와. 우리 엄마 아빠 모두 너를 환영해.”“그래!”전화를 끊자 송재이의 웃음도 사라졌다.그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고 했다.무심코 텔레비전을 힐끗 보니 광고가 방송되고 있었다.다섯 식구가 나란히 모여 떡국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었다. 떡국! 송재이는 예전에 엄마에게서 떡국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었기에 솜씨가 좋았다.도씨 부자를 찾아갈 핑계가 없었는데 마침 떡국을 만들어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저번에 도경욱이 입원했을 때도 가봤으니 억지는 아니겠지?’
설영준을 보자마자 그날 화가 나서 울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또 가슴이 아팠다.송재이는 입술을 깨물고 화가 나서 말했다.“너! 난... 싫어!”송재이가 자기도 모르게 거절하자 박윤찬과 설도영은 동시에 멍해졌다.평소에 송재이는 부드럽고 얌전해 보였으나 방금 얼굴에 억지가 스쳐 지나갔다.설도영은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다짜고짜 송재이의 쇼핑백을 들어 차 안에 실었다.“악!”설도영에게 끌려가는 송재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이 씨,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라 택시 잡기가 어려워요. 우리가 데려다줄게요. 항상 귀찮게 하였는데 이번엔 우리 형이 나를 대신해서 보답하게 해요. 그렇죠? 형, 운전해요!”설도영은 건방을 떨며 감히 설영준에게 운전하라고 지시했다.설영준이 백미러에서 설도영을 보자 설도영은 입을 다물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형, 운전해요, 집에 가요.”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설영준의 차에 탔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영준과 함께 이 차에서 섹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차에는 또 갑자기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송재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마치 자신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다른 사람이 엿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그녀는 또 몰래 설영준을 힐끔 보았다. 그녀의 자리에서는 그의 옆모습만 보였다.설영준은 운전대를 잡고는 운전에 몰두했다.‘이 사람은 어색하지도 않아? 나만 부끄러워하고 있어?’송재이는 설영준의 속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그날 설영준은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그녀 앞에서 그녀의 옷을 집어 던졌는데, 마치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한 것 같았다. 지금 그녀가 이렇게 많은 물건을 들고 있는 것을 보더니 또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려 한다.하지만 이것은 설영준의 생각이 아니라 박윤찬과 설도영이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호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재이 씨, 이 봉지 안에 떡국 재료가 가득하네요. 식구가 몇 분이세요? 이렇게 많이 샀어요?”“아!”정신을 차리고 보니 설도영이 호기심에 쇼핑백을 열어보고
‘분위기까지 조절해?’‘내가 마스코트야?’송재이는 설도영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이상한 말을 하는 이 아이는 사춘기였다.송재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나 떡국 재료도 샀는데...”“같이 먹어!”설영준이 말했다.그는 송재이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설동훈과 오서희가 없으니 송재이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하지만... 원래는 집에 돌아가서 떡국을 많이 만들어서 도씨 부자에게 주려고 했었는데 이러면 떡국을 줄 수 없게 된다.송재이는 걱정이 되어 창밖을 바라보았다.바깥 거리에 사람이 갈수록 적어졌고 차는 교외를 향해 천천히 산길을 달렸다. 설씨네 집과 가까워졌다.어떤 일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하다. 예전에 설도영과 함께 있었던 그 3년, 사실 그녀는 매년 섣달 그믐날 그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그는 항상 곁에 없었다.그때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소녀 같은 생각과 환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그녀를 위해 원칙을 깨거나 갑자기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기를 바라는 등이런 비현실적인 망상을 가지고 그녀는 세월을 보냈다.하지만 송재이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망상을 접었을 때, 그는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 설을 쇠겠다고 말했다. 비록 설도영과 박윤찬도 함께 있었지만 송재이에게는 남다른 설이었다.다시 설씨 저택에 돌아오니 이곳의 모든 것이 익숙하고도 낯설었다.지난번에 떠날 때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이렇게 다시 올 줄 생각지도 못했다.대문에서 별장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설도영과 설영준이 앞에서 걸었고 송재이가 그 뒤를 따랐다.마지막으로 박윤찬은 손에 쇼핑백을 들고 걸었다.“지민건 사건은 이미 판결이 났으니 적어도 1년 이상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갑자기 뒤에서 박윤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네!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상업적으로 그를 억압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항상 저를 괴롭혔는지 모르겠어요.”송재이는 참지 못하고 하소연했다. 박윤찬은 가볍게 웃으며
설도영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설영준과 박윤찬, 송재이, 세 사람을 보았다.그는 눈썹을 찡그리고 설영준과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주춤했다. 설날에도 매를 맞고 싶지 않았다.‘됐어! 입 다물고 벙어리가 되는 것이 나아.’설 씨 저택에는 뜻밖에도 아줌마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모두 휴가여서 그들 몇 명만 있었다.박윤찬은 집에 들어온 후 잠시도 쉬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손을 씻고 서랍에서 앞치마를 꺼내서 전을 부치고 떡국을 만들려 했다.설도영이 거실로 가서 텔레비전을 켜자, 안에서 떠들썩한 설날 특집 소리가 들려왔다.원래 화려하고 냉랭한 인상을 주던 설씨 저택에서 뜻밖에도 설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설도영은 텔레비전에 빠져들었고 송재이와 설영준은 안방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송재이는 입술을 깨물었다.“난 혼자 설 쇠는 것이 편해. 왜 하필 나를 영준 씨 집에 데려왔어?”“분위기 메이커.”설영준은 냉담하게 말했다.송재이는 언짢았다. 이 말은 마치 늙은 술꾼이 술자리에서 아가씨들을 찾아 자기의 나쁜 취미를 만족시키는 것과 같았다.그러나 이 세 남자는 누구도 ‘늙은이’가 아니었다.나이가 제일 많은 설영준도 28세밖에 안 되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윤찬 씨를 도와 채소 씻으러 부엌으로 갈게.”송재이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빠른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갔다.설영준만 피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해도 괜찮았다.거실에는 설영준과 설도영만 남았다.“형, 왜 재이 씨를 이렇게 무섭게 대해요?”설도영을 텔레비전을 보며 설영준에게 물었다.설영준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내가 무서워?”“여자들은 담이 작고 수줍음이 많아서 달래야 해요.”설도영은 진지하게 말했다.“너 여자친구 생겼어?”“...네?”설도영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돌렸다.“난 이제 겨우 16살이에요. 친구들은 너무 어려서 눈에 띄지 않아요!”“여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경험담이야?”설영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설도영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
설영준은 송재이가 도정원과 연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말을 하다 보니 그녀가 활짝 웃는 것을 보았다.박윤찬은 대학교 때부터 혼자 자취생활을 시작했다.그래서 떡국이나 김치, 전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송재이는 도정원과 통화한 후 박윤찬을 도와 계속 음식을 만들었다.음식 속에 머리카락이 들어갈까 봐 질끈 동여매고는 진지하게 만들었다.전을 부치는 그녀의 얼굴은 얌전하고 부드러웠다.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 몇 올이 귓가에서 흘러내렸다. 설영준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가늘고 늘씬한 몸매, 청순하면서도 매혹적인 외모, 아무리 보아도 미인이 따로 없었다.설영준은 많은 사람을 봐왔기에 진정한 미인을 한눈에 알아봤다.그렇지 않았다면, 한눈에 반하지 않았을 것이다.송재이의 어머니가 아프고, 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와 교환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녀가 좀 못생겼으면 이런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다.‘틀림없이 나 외에도 송재이에게 반한 남자가 적지 않을 거야.’설영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송재이를 보면 이유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닿아 간지러운지 송재이는 손으로 얼굴을 긁었다.손에 있는 밀가루가 얼굴에 묻었지만 송재이는 얼굴에 밀가루가 묻은 줄도 모르고 열심히 전을 부쳤다.열심히 전을 부치는 모습은 마치 열심히 숙제하는 초등학생 같았다.맞은편 박윤찬은 그녀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귀엽고 예뻐 사랑을 듬뿍 받을 외모지만 하필이면 전을 부치고 있는데 게다가 아주 열심히 한다. 동그랗게 구워진 전은 앙증맞고 깜찍해서 마치 예술품과 같았다.박윤찬은 원래 잘 웃지 않으나 송재이를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옆에서 티슈를 꺼내어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네? 여기요?”송재이는 부끄러워하며 티슈를 받아 두 번이나 닦았지만 제대로 닦지 못했다. 박윤찬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거울삼아 비춰줬고, 그제야 송재이는 겨우 밀가루를 닦아냈다.박윤찬과 송재이는 모두 손놀
음식을 다 먹은 후 박윤찬은 일어나서 설거지했다. 송재이는 설씨 저택에 놀러 온 손님이기에 밥을 다 먹은 후 손을 떼고 바로 갈 수 없었다.그래서 덩달아 바쁘게 움직였다.바깥 날씨가 이미 어두워졌다. 그믐날 밤, 멀리서 불꽃놀이 소리가 들려왔다.갑자기 밤하늘로 치솟는 불꽃도 있다. 송재이는 창가에 서서 잠시 바라보았다.설도영은 흥분된 얼굴로 갑자기 2층에서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재이 선생님, 우리도 불꽃놀이 해요!”말을 마친 후 설영준을 바라보며 물었다.“형, 해도 돼?”“마음대로!”설영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그런 후 네 사람은 불꽃을 나누었다.송재이는 이미 몇 년이나 불꽃놀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기대가 되었다.설영준은 흰 셔츠만 입었고 마당으로 나갈 때는 잿빛 스웨터를 하나 더 껴입었다.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가 손가락 사이에 끼고는 송재이의 불꽃에 불을 붙였다.불꽃에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밝아졌다.또렷하고 환한 불꽃은 그녀의 얼굴을 화사하게 비추었다.수많은 별빛이 그녀의 눈에 비쳐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여기서 설도영이 가장 어렸지만, 오히려 송재이가 제일 즐거워했다.“마음에 들어?”설영준은 그녀의 뒤에 서서 폴짝폴짝 뒤는 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마디 물었다.“응!”송재이는 불꽃놀이를 하며 대답했다.설영준은 하늘 높이 치솟는 불꽃에 불을 붙이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불꽃은 하늘로 뛰어올라 밤하늘에서 꽃을 피웠다.송재이는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별장 구역은 인가가 드물다. 주변은 거의 그들의 불꽃놀이 장소로 변했다.다른 사람들도 함께였지만 이것은 송재이와 설영준이 함께한 첫 설이었다.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밤하늘에 흩어진 불꽃을 보며 송재이는 마음속으로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심정을 몰랐다. 아마 그에게는 오늘 밤도 여느 날처럼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송재이는 영원히 오늘 밤과 이 불꽃놀이를 기억할 것이다.앞으로 힘들고 외로운 길을 혼자
송재이는 서유리에게서 뱀에 관한 해몽을 들었다. 뱀은 성에 관한 것으로 남자의 몸을 원한다는 뜻이라고 했다.처음에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난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마음에 찔려서 그런 것 같았다.그 후로도 그녀는 가끔 꿈을 꾸었다. 그녀의 몸을 감고 있는 뱀이 점점 거칠어지고 사납게 되는 꿈이었다.깨어나면 통제 불능의 모순된 생각이 그녀를 거의 미치게 했다. 한편으로는 전통 사상에 구속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억누를 수 없이 갈망하였다. 설영준의 남성 호르몬이 그녀의 독이었다.송재이는 샤워를 마치고 준비해준 새 잠옷을 입었다. 머리를 말릴 겨를도 없이 욕실 문을 밀어 열었다.순간 두 다리를 꼬고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설영준을 보았다.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설영준은 남의 방에 무단 침입한 것을 전혀 어색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하긴, 여기는 원래 설씨 저택이니 말이다. 한 치의 땅도 모두 설 씨네 것이었다.뜻밖에도 송재이는 놀라지 않았고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버리고 담담하게 설영준을 향해 걸어갔다. 설영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어 송재이를 침대 위로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눌러 눕히고는 키스하기 시작했다.방금 샤워할 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가 정원에서 절반이나 피웠던 담배로 불꽃을 피우는 모습뿐이었다.어찌 된 영문인지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빠져버렸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움과 남성 호르몬은 여자가 정복하고 싶은 열정을 일으키게 했다. 벗어날 수 없으니 송재이는 직면하려 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들어 마주 보았다.예전에 그녀는 영원히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남자와 엮이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여자가 반드시 결혼 상대와만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규정도 없었다.욕망 자체는 수치스럽지 않다. 계속 마음을 외면하기보다는 내버려 두는 게 더 좋았다.설영
설영준은 예전에 침대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그녀를 지배할 수 있었다.그래서 권위가 도발당한 느낌은 처음이었다.하지만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절대 정복보다는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끝나고 나니 송재이는 온몸이 나른하고 힘이 빠졌다.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침대 옆에 누워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말했다.“돌아가, 박 변호사님과 도영이가 아직 집에 있어. 내일 일찍 일어나서 그들에게 들키면 할 말이 없어.”“한 명은 친구고, 한 명은 동생인데 보면 어때?”“신체적인 관계는 해소가 끝나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아. 난 앞으로 남자친구도 사귀어야 하는데 섹파가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섹파’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설영준은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그런 관계인 것 확실했다.게다가, 그가 줄곧 원한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오니 그는 어쩐지 귀에 거슬렸다....이튿날 아침, 설영준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겨우 8시였다.거실 안은 매우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다.도영은 분명 늦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윤찬과 송재이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그는 또 위층으로 올라가서 한바탕 찾았다.이 두 사람은 각자 방에 이불을 개어 놓은 채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설영준은 송재이에게 카톡을 보냈다.[돌아갔어?]그녀는 아주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어, 설날이라서 인사하러 가느라 박 변호사님 차를 얻어타고 가고 있어.]‘얻어 타? 헉.’설영준은 웃는 듯 웃는 듯 휴대전화를 노려보다가 잠시 후 그녀에게 다시 문자 한 통을 보냈다.[나와 함께 있을 때,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지 마. 너 그런 건 알아서 해야지!]그 순간 송재이는 차에 타고 있었다.방금 박윤찬의 집을 지나갔는데, 그는 이미 내려갔고 뒷좌석에는 그녀 혼자만 있었다.예전에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남자가 자기 여자에 대한 소유욕이라고 착각하고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도 성장하고 있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