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려난 문예슬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송재이가 입양하려던 아이를 잃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송재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가 전혀 이해가 안 됐다.문예술의 세상에서 아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아이를 거래 목적으로 사용하는 그녀는 당연히 아이가 어머니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이날 문예슬은 송재이를 찾았다.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비웃었다.“난 이해가 안 돼. 입양하려던 애를 잃었을 뿐이잖아. 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오바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문예슬을 바라보는 송재이의 눈빛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직 깊은 슬픔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문예슬의 무지함과 냉정함에 슬펐다. 문예슬은 영원히 그녀의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넌 모를 거야.”송재이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너한테 아이는 도구일 뿐이잖아. 하지만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혈육이야. 내가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똑같아. 똑같이 살점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파.”이 말을 들은 문예슬은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서린 웃음이었다.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너 진짜 놀랍다. 그걸 느끼는 네가 대단하게 느껴지지? 모성애, 뭐 그런 건 줄 알지? 웃겨.”송재이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문예슬의 도발을 받고도 평온하기만 했다.문예슬의 광기는 전적으로 그녀의 문제다. 송재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므로 광기에 영향받고 싶지 않았다.“웃음으로 악행이 지워질 것 같아? 넌 모성애를 몰라. 아이를 잃은 고통도 모를 거야. 이건 네 문제야. 내가 아니라.”“악행?”문예슬의 미소는 천천히 굳었다. 그녀의 눈빛도 점차 예리해졌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랑 악행을 운운해? 넌 깨끗한 줄 알아? 네가 한 일은 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줄 아냐고!”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문예슬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이성 잃은 사람과 다퉈봤자 입만 아팠다.
송재이는 잘 알았다. 문예슬과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계략과 인내가 필요했다.다음 신경전에서 그녀는 더욱 치밀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SNS를 이용하여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 것이다. 문예슬이 고립감을 느끼도록 말이다.그녀는 신경 써서 만든 글들을 올렸다. 모든 글에 행복한 느낌이 가득 담겼다. 회식 자리에서 환히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도 아주 아름다웠다.그 뒤에는 일부러 남자와 다정하게 있는 사진도 올렸다. 남자의 모습이 희미해서 상상의 공간이 아주 많았다.이 글들을 보면 그녀가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활 속에는 사랑과 우정과 성공으로 가득했다.그녀가 작성한 문구에도 현재에 대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올린 글은 문예슬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나 너보다 잘 살아.”송재이는 문예슬이 이 글들을 볼 것을 잘 알았다. 심지어 그녀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이 악문 모습도 상상되었다.송재이의 목적이 바로 문예슬의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예슬이 통제권을 잃고 불안해하기를 바라봤다.며칠 후, 송재이는 공개적인 활동에서 ‘우연히’ 문예슬과 마주쳤다. 그녀는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예슬을 향해 걸어갔다.“오랜만이야, 예슬아.”송재이는 쉽게 알아챌 수 없이 비꼬며 말을 이었다.“너 요즘 심심해 보이더라? 내가 올린 글 봤어? 난 되게 보람차게 지냈어.”문예슬의 안색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당연히 송재이가 올린 글을 봤다. 모든 글과 사진이 그녀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이런 거로 나한테 영향 줄 수 있을 줄 알았어?”문예슬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벌써 떨리기 시작했다.송재이는 피식 웃었다. 계획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던 것이다.“영향? 아, 네가 오해한 모양이구나.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상은 계속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물론 넌 내 인생에서 아웃됐지만.”송재이의 계획에는 작은 허점이 있었다. 불필요한 오해
이튿날 아침.문예슬은 일찍이 설영준의 회사 아래로 왔다. 설영준이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는 걸 알았기에, 이 기회에 어제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하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설영준의 지시로 출입금지 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대는 한순간 사라지고 말았다.그런데도 문예슬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사무실 밖에서 기다렸다. 언젠가 설영준이 생각을 바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렀다. 그녀는 동상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오가는 사무실 직원들은 궁금하고도 동정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다렸다.여진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문예슬의 존재와 그녀의 뚝심이 느껴졌다.그는 설영준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가 결정한 일은 쉽게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기다리는 문예슬을 바라보며 마음이 약해졌다.결국 여진은 참지 못하고 설영준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말했다.“대표님, 문예슬 씨가 밖에서 한참 기다렸습니다. 아무래도 용건이 있는 모양입니다.”설영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기분이 복잡했다. 문예슬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건 알았지만, 지금은 전혀 만나고 싶지 않았다.그는 너무나도 피곤했다. 지금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설영준이 대답 없는 것을 보고 여진이 말을 보탰다.“대표님의 마음은 알지만 정말 급해 보여서 그럽니다. 무슨 일로 왔는지라도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설영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그래요, 들어오라고 해요.”설영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여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가서 문예슬에게 말을 전했다.이 말을 들은 문예슬은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녀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심호흡하더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설영준은 책상 앞에 앉아서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차가운 얼굴에는 피곤함이 서렸다.“무슨 일로 왔어요?”문예슬은 설영준의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그녀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었
문예슬은 설영준의 사무실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음속에는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그녀는 용기를 내서 설영준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과거는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이다. 하지만 설영준은 차갑게 거절해 버렸다.“싫어요.”이 세 글자는 비수처럼 문예슬의 심장에 꽂혔다.안색이 창백해지는 것도 잠시 금방 부끄러운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영준의 거절은 그녀의 고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거칠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동시에 분노가 서렸다.말없이 입술을 깨문 그녀는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다....요즘 송재이는 오로지 일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꿈은 음악 스튜디오를 차리는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인재로 배양하는 곳으로 말이다.그녀는 이 계획에 열정이 가득했다. 그래서 매일 여러 사람을 만나며 투자금을 모았다.오늘도 그녀는 회의실에 앉아서 핸드폰을 꽉 잡았다. 눈빛에는 긴장과 기대로 가득했다. 이때 핸드폰이 드디어 울리고 그녀는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장 대표님. 저 송재이예요.”“아, 재이 씨. 안녕하세요.”“장 대표님, 전에 말씀드렸던 투자 건 다시 얘기하려고 하는데요. 저희 쪽에서 서류와 계획서를 전부 준비했어요.”“저도 그 일 때문에 연락했어요. 참 미안하게 됐네요. 우리 회사에 요즘 전략적 조정이 있었어요. 전에 투자하기로 약속한 것도 철회해야겠어요.”“네? 대표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자료도 다 준비했는데요? 그리고... 그리고 스튜디오 준비도 이미 시작했어요.”“충격적인 소식이란 거 알아요. 저희도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재이 씨가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은 아주 높이 평가해요. 하지만 도무지 투자를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요.”송재이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장 대표님. 저희도 빨리 계획을 조정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신재명의 시선은 설영준의 얼굴에 맴돌았다.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은 쉽게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송재이와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신재명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송재이 씨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에요. 혹시... 친한 사이인가요?”설영준은 고개를 돌려서 신재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그건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조금... 복잡한 일이라서요.”신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촉하지 않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한참 침묵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호기심은 점점 더 커졌다.설영준은 이런 식으로 사심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 하지 않는 일도 하는 걸 봐서 송재이와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안 그래도 복잡해 보이더라고요. 두 분 사이가.”설영준은 고개를 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이제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신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인간관계가 다 그렇죠. 그리고 송재이 씨의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투자자로서만 그런 거 아니죠?”설영준은 미소를 지으며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재이는 재능이 뛰어나요. 투자할 가치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설영준이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길래 신재명도 계속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스튜디오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계획서는 전부 다 봤습니다. 생각이 아주 새로워요. 음악에 대해서도 남다른 견해가 있는 것 같아요. 투자금만 있으면 분명히 성공할 프로젝트예요.”“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투자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네, 설 대표님 덕분에 저도 든든하네요. 앞으로 계속 송재이 씨랑 연락할게요. 준비되는 대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알았어요. 그럼 수고해요.”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설영준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카페에서 나간 그는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하지만 마음속은 아직도 답답했다. 송재이가 떠오른 것이다.송재이는 그의 심장을
신재명은 갑작스러운 요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본능적으로 거절하려고 했던 그는 송재이의 눈빛을 보고 무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는 예의껏 송재이에게 말했다.“너무 갑작스럽네요. 동료한테 전화해서 확인 좀 해야 할 것 같아요.”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재명이 말한 동료가 설영준이라는 것도 알았다.한쪽으로 걸어간 신재명은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송재이의 요구를 전해줬다. 전화 건너편에서 설영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재이 요구대로 계약서 수정해요.”신재명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설영준이 이토록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는 다시 송재이의 앞으로 돌아가서 설영준의 결정을 알렸다. 그녀는 별다른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그렇게 하죠.”신재명은 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한참 진정하지 못했다. 설영준의 결정이 놀라웠던 것이다. 설영준이 협력 대상에게 무조건적 순응하는 건 또 처음 봤다.이는 송재이의 재능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믿음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신재명은 알았다.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 대표님이 허락하셨으니 계약서는 금방 수정될 겁니다. 그리고 바로 사인하죠.”송재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듯이 말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번 일 꼭 성공시키도록 노력할게요.”사인하는 과정에도 신재명은 아주 다정했다. 그는 모든 조항을 자세히 설명하며 훌륭한 제안을 해줬다.사인을 끝낸 다음, 신재명은 반쯤 장난식으로 말했다.“송재이 씨는 행복하겠어요. 설 대표님과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말이에요.”송재이는 피식 웃었다. 신재명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저희 프로젝트 꼭 성공할 거라고 믿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한 달 후, 송재이는 금방 인테리어를 끝낸 스튜디오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마음속에는 기대와 불안으로 가득했다.
젊은 참가자는 송재이의 응원을 받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째 연주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한 곡이 끝나고 박수 소리는 조금밖에 들리지 않았다. 젊은 참가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묵묵히 무대에서 내려갔다.연주회가 끝나고, 송재이는 텅 빈 무대에 서 있었다. 마음속에는 말 못 할 실망이 맴돌았다. 이런 식으로 훌륭한 인재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다른 인재를 찾는 건 그렇다 쳐도, 지금 있는 직원도 붙잡지 못하게 생겼다. 하나둘 빠져나가는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세상은 색채를 잃은 것 같았다. 그녀는 매일 매일 회색 안개 속을 거닐고 있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혀 벗어날 수 없었다.그녀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출구 없는 고통이었다.송재이는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도 유난히 조심스러워졌다. 또다시 실패할까 봐서 말이다.이런 기분은 일에도 영향을 줬다. 아이디어는 더 이상 전처럼 샘솟지 않았다. 완전히 고갈된 것 같은 기분이다.어느 하루, 송재이는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완성하지 못한 악보와 기획안을 바라봤다. 눈앞이 흐릿해진 것도 잠시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던 과거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그리움과 슬픔뿐이다. 컴퓨터를 닫은 그녀는 창가로 가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의 별은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것만 같았다.스튜디오의 운영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날이 쌓여 가는 적자에 스트레스도 똑같이 쌓였다.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손해는 점점 더 커졌다. 이제는 송재이도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오늘까지 벌써 10억 원의 손해를 봤다는 것을 말이다.설영준은 자신이 송재이에게 준 상처가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준 상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었다.그는 송재이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 평생 갚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송재이의 스튜디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왜 대신 돈을 갚아줬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일상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사막이 되어버렸다. 빗물을 갈망하면서도 폭풍우의 침식이 두려웠다.그녀는 바쁜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마음속의 공허함을 메우려고 했다. 오늘도 늘 그랬듯 늦은 시간까지 일했다. 드디어 퇴근한 그녀는 피곤한 몸으로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저녁의 주차장은 유난히 어두웠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는 텅 빈 공간에서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차 앞으로 다가가니 펑크 난 타이어가 보였다. 차는 불행을 호소하는 듯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송재이는 자세를 숙여서 타이어를 살펴봤다. 차가운 타이어가 만져지자 약간 황당한 기분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그녀의 웃음소리는 고요한 밤에 이질적인 느낌을 줬다. 웃다 보니 어느샌가 눈가가 촉촉해졌고 눈물도 또르르 떨어졌다.송재이는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손은 여전히 펑크 난 타이어에 닿아 있었다. 마치 다친 친구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미소는 서서히 사라져갔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흐느낌이었다. 그녀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렸다. 눈물은 뚝뚝 타이어에 떨어졌다.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차만 잊히기라도 한 것처럼 외로이 세워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독감에 그녀는 이 삭막한 도시에 잊힌 것 같았다.마음속으로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전부 미지수였다.그녀는 처음으로 무대에 섰던 때가 떠올랐다. 긴장되고 흥분되던 그때의 기분을 말이다. 처음으로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았을 때는 엄청난 성취감이 느껴졌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머나먼 과거가 된 것 같았다. 현재에 있는 것은 실패와 좌절뿐이었다.그녀는 설영준도 생각했다. 그녀에게 무한한 믿음을 주던 애인을 말이다. 설영준이 좋은 마음으로 도와줬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이런 식의 베풂을 마냥 받을 수 없었다. 이는 자존심의 문제였다.스스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