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퇴근할 시간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송재이는 문예슬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져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문예슬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는 걸 보니 설영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송재이도 남자 하나 때문에 친한 친구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단번에 승낙했다.문예슬의 차는 빌딩 문 앞에 멈추었다.송재이가 밖으로 나가니 문예슬이 차창을 내리고 웃으며 송재이를 향해 손짓하는 모습을 보았다.송재이가 차에 오른 후 문예슬은 고개를 돌려 송재이에게 말했다.“가자, 내가 너를 데리고 갈 곳이 있어.”문예슬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목이 막힌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문예슬은 가볍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고 도중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송재이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고개를 돌려 문예슬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문예슬은 송재이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차는 한 호텔 입구에 세워졌고 문예슬은 시동을 껐다.송재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나 여기 왜 데려왔어?”문예슬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송재이는 그녀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녀의 걸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호텔 1층 로비에서 문예슬은 모퉁이를 찾아 송재이를 끌고 가 앉았다.송재이는 오리무중에 빠졌다.그러다 그때 문예슬이 두 눈을 반짝이며 턱을 앞으로 치켜들었다.송재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주현아가 설영준의 손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그 순간 송재이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재빨리 손에 든 잡지로 얼굴을 가렸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문예슬이 그 앞으로 달려갔다.28층에서 멈춘 숫자를 보고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송재이를 끌었다.“가자! 우리도 올라가!”“싫어.”송재이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놓으며 거절하려고 했다.문예슬은 물었다.“무엇이 두려운 거야?”“두렵다고? 나는...”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미 문예슬에 의해 엘리베이터로 끌려갔다.설영준은
송재이는 오늘 문예슬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설영준과 주현아가 이곳에 와서 방을 잡을지 어떻게 알았는지 몰랐다.한 가지, 설영준이 주현아와 방을 잡은 건 확실하다는 거다.선남선녀가 혼약까지 있었으니, 그리고 주정명이 사고가 났을 때 그는 밤에 그의 딸을 만났다.문예슬은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방금 그들이 본 그 장면이 송재이에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목적을 달성했으니 문예슬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밥을 다 먹은 후 문예슬은 차를 몰고 송재이를 데려다주었다.…호텔 방안.설영준은 방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주현아는 거의 멍하니 옆에 서 있었다.바로 한 시간 전, 그녀는 설영준의 사무실에 찾아갔고 이것은 그녀가 출국하기 전의 마지막 기회였다.원래 그녀는 죽어도 출국하고 싶지 않았는데 설영준을 여러 해 동안 사랑했기 때문이다.주가의 처지가 위태로운 지금이지만 끝장을 보지 않는 한 설영준과 함께 할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효연은 동의하지 않았고 두 모녀가 다투는 사이 민효연은 손찌검까지 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민효연이 딸을 때린 건 처음이었다.주현아는 민효연에게 다소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잡은 꼬투리 때문에 민효연의 한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출국에 동의했지만 출국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싸워볼 작정이었다.그녀는 설영준과 자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말이다.사무실에 있을 때 그녀는 설영준에게 물을 부어주며 그 속에 약을 넣어 설영준의 성욕을 확대하려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설영준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녀를 꿰뚫었다.“사무실은 좀 그러니 나랑 자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자.”그는 그 물컵을 힐끗 보고는 부어버리고는 다시 탁자 위에 놓았다.주현아는 설영준이 그녀를 꿰뚫어 볼 줄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난감하고 의아하여 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그런데 그가 그녀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영준아, 나 너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주현아는 울면서 엎드려 애원하다시피 했다.그러나 설영준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시종일관 평온한 눈빛으로 이 모든 것을 일관했다.그는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땅에 엎드려 몰골이 말이 아닌 주현아를 내려다보았다.“그렇게 원한다면…”그의 말에 주현아는 희망이 되살아나는 듯 불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너 혼자 해!”설영준의 한마디는 그녀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았다.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마침내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이 밤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난감한 날이 되었다.주현아는 약물의 자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리고 생리적 본능에 따라 스스로 손으로 해결하였다.주현아의 모든 추잡한 모습과 난감한 행동, 눈에 거슬리는 표정과 자세 그 모든 것들이 설영준 눈앞에 펼쳐졌다.설영준은 시종일관 담담하게 담배를 피웠고 눈앞의 광경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약효는 매우 강렬했는데 그녀는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혔고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탈진했는데 마지막엔 알몸으로 바닥에 엎드려 숨을 할딱거렸다.설영준은 그녀를 땅바닥에서 안아 올려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줬다.피곤함에 눈을 들뜬 주현아는 설영준의 얼굴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직도 나랑 자고 싶어?”그가 조용히 물었다.“아니.”주현아는 이제 설영준 앞에서는 자존심 하나 남지 않았다.그녀의 몸을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먹는 것 같았을 때 그는 단지 냉담한 눈으로 방관할 뿐이었다.주현아가 자기가 벌린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그녀는 마침내 두려움을 알았다.설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민 사장님과 약속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난 약속을 지켰어. 아까는 모두 너 혼자 필사적으로...”그녀는 수치스러움에 눈을 감고 눈물을 뚝뚝 흘렸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설영준은 소파 위에 놓인 양복을 집어 들고 돌아
송재이는 연우에게 마지막 3교시의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앞으로는 오지 않겠다고 미리 민효연에게 말했다.원래는 민효연이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는데 최근 집안일 때문에 민효연도 이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했다.그녀는 더 묻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민효연은 연우에게 피아노 선생님을 바꿔줘야 한다는 일을 도정원에게 말했다.도정원은 전화로 누가 먼저 제안했느냐고 물었고 송재이가 먼저 얘기했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에 잠겼다.그는 지금 송재이와 설영준이 여전히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시 떨어져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설을 전후해 다시 함께한 것 같았다.그래서 일부러 sns에 송재이가 연우의 손을 잡고 쇼핑하는 사진을 올린 거였다.지금 보니 이 일로 설영준이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가 어떤 식으로 송재이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설득했는지는 잘 몰랐다.송재이가 연우의 피아노 선생님 일을 그만둬야만 도정원과 그녀와 앞으로 만날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만약 그렇게 신경을 쓴다면 그녀와 결혼할 것이지 제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이런 사소한 복수를 한다는 자체가 너무 유치하고 하찮았다.그는 전화로 설영준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그는 설영준이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눈에 거슬렸지만 상업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의지하는 편이었다.만난 후 두 사람은 먼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설영준은 도정원이 계속 그를 관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설영준은 진중한 느낌을 주는 기질을 타고났지만 속은 분명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다.그는 진지할 때는 낯선 사람은 쉽게 다가가지 못할 분위기를 풍겼고 일거수일투족에서 박력과 매너가 넘쳤는데 이런 풍격은 여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그리고 설영준은 평소에도 헬스 습관이 있는데 이는 수년 전부터 시작된 거여서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보기만 해도 침대에서의 솜씨가 굉장히 좋을 것 같았다.이것들 모두가 여자들을 사로잡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도정원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는 당연히 굳이 도정원한테 말할 필요는 없었다.설영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도정원을 쳐다보며 동문서답을 했다.“재이가 제 여자친구라는 것도 아셨으니 앞으론 좀 조심해주세요. 세상에 여자가 많고도 많은데 꼭 재이한테 목을 맬 필요는 없으시잖아요.”그 말뜻인 즉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는 거였다.도정원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속으로 세상에 여자가 그리도 많은데 설영준은 왜 하필이면 송재이만을 고집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설영준 같은 남자는 어쩌면 여자들이 그에게 반해 정신을 잃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더러 한 여자에게만 몰두하라고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도정원이 송재이의 배다른 오빠라는 사실은 그와 도경욱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송재이 본인마저도 말이다. 그도 도경욱에게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설영준이 이렇게 눈에 뵈는 것도 없이 날뛰는 모습이 너무 아니꼬웠다.도정원은 도저히 송재이가 이런 남자와 함께한다는 것이 안심되지 않았다.하지만 송재이 본인은 또 이 남자를 너무 좋아하니...“설 대표님, 제가 저희 아버지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죠?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셨어요...”설영준이 막 국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도정원이 자기 집안일을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도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설영준이 도정원에 대해 아는 거라곤 단지 그가 가문의 최하위층에서 천천히 지금의 자리까지 기어올랐다는 것밖에 없었다.그의 아버지에 대한 일은 당연히 큰 관심이 없었다.이 전에 도정원도 분명 누구한테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오늘 도정원은 도경욱과 서지원의 옛이야기에 대해 곧이곧대로 설영준에게 말해주었다.설영준은 조금은 의문스러웠지만 그 얘기를 끊지는 않았다.도정원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거다. 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그래도 그는 조용히 그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제 아버지와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식당 앞에서 작별했다.떠나기 전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알다시피 연우가 조금 특별한 아이잖아요. 그래서 쉽게 선생님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연준 씨가 여자친구분한테 얘기해서 전처럼 수업하러 오시라고 해주세요.”말을 하고는 설영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살면서 처음 설영준이 밀린 대화였다.하지만 그는 거절할 수도 없었다....최근 송재이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설영준과 주현아가 같이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이후로 그녀는 저녁에 계속 같은 꿈을 꾸었다.방문으로 열고 들어서니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야릇한 자세를 하고 있는 그런 꿈 말이다.주현아는 설영준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송재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봤지? 영준이는 아직도 날 놓지 못했다고!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영준이는 날 사랑하지 널 사랑하지 않아.”“재이야,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현아였어... 얘가 내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 못 보겠더라...”핸드폰이 울렸고 송재이는 잠결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뒤척이다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러다 침대 머리를 잡고 겨우 떨어지는 걸 막았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잡아 들었고 도정원이 온 전화라는 걸 발견했다.송재이는 통화버튼을 눌렀고 도정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 선생님, 오늘 저녁 레슨 말인데요. 계속 그 시간 맞죠?”“네?”송재이는 이미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민 사장이 아직 선생님을 바꾼다는 말을 도정원이랑 말하지 않았다는 거에 놀랐다.“얼마 전에 저랑 선생님 남자친구분이 같이 저녁을 했는데요, 제가 그분보고 저를 도와 얘기 좀 해 달라고 했어요. 만약 계속하신다면 제가 두 배의 레슨비를 내도록 할게요.”도정원은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듯 담담했는데 송재이는 오리무중에 빠졌다.그녀는 힘껏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꿈인지 생신지 구분을 하려 했다.“남자친구라뇨? 누구 남자친구요?”도정원은 피식
저녁에 송재이가 집에 도착하니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은은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고 막 조명을 켜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에 의해 품에 안겨졌다.송재이는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을 쳤고 하지만 이내 그의 익숙한 체온과 향기를 눈치챘다.그의 입술은 송재이의 볼에 닿을락 말락 했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나 안 보고 싶었어?”송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설영준과 주현아가 호텔 룸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그런데 어찌 그녀한테 보고 싶었는지 물어본단 말인가?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을 손으로 잡더니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힘있게 덮었다.“대답이 없네? 그럼 묵인한 거로 칠게...”그는 키스하며 한편으론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그리고는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렸다.“할래?”그녀의 손은 가볍게 그의 목에 걸쳐졌다.“더러워.”설영준은 침실로 걸어가다가 그녀의 한마디에 주춤했다.하지만 냉소를 지을 뿐 뒤이어 침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리고 그녀는 가볍게 침대에 던져졌다.“더러워? 매번 할 때마다 좋아했잖아?”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의 모호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송재이는 오금이 저려왔다. 그가 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가 덮쳐올 태세를 취하자 그녀의 마음속에 참아왔던 억울함과 짜증이 몰려왔다.그녀는 뒤로 물러섰지만 그는 단번에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너 주현아랄 잤어? 잤냐고!”그녀의 이 물음을 들으니 그는 과연 동작을 멈췄다.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다 봤으면서 왜 안 들어왔어?”그의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서 울렸다.회억해보니 송재이는 그제야 1층 로비에서 여진을 마주쳤던 일이 생각났다.그 뜻인즉 그는 이미 그녀가 그날 호텔에 갔었고 두 사람이 방을 잡은 걸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이 아니겠는가?“안 잤어.”주변의 희미한 불빛 사이로 그녀는 그의 눈길을 보았다.말을 마치고 그의 입술은 그렇게 그녀
어두운 밤, 송재이의 졸음이 서서히 사라졌다.그녀는 눈을 뜨고 헛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체온의 전달로 그녀의 마음도 따끈따끈해졌다.다음날 송재이는 늦게 일어났다.세수한 후 거실로 걸어가자 익숙한 밥 냄새가 났다.부엌에서 수도꼭지가 콸콸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물소리가 사라졌고 누군가 도마에서 채소를 썰고 도자기가 부딪치는 소리 찌개 끓이는 소리가 났다.이런 짙은 사람 사는 듯한 소리는 송재이에게 있어서 매우 감동적이었다.엄마가 살아계실 때만 이렇게 고즈넉한 삶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이 사치가 돼버렸다.“밥 먹자.”설영준은 부엌에서 나와 고개를 들어 한마디 했다.“그래.”앉아서 보니 오늘 아침 메뉴는 시금칫국이었다.그녀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모금 마셨고 잠시 후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설영준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송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방이 너무 더워서 그래?”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고 그의 말투에 섞인 조롱을 알아챘다.“어, 아침에 햇빛이 너무 쨍쨍하네!”설영준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송재이는 줄곧 머리를 숙이고 설영준을 감히 보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의 얇은 벽이 끝내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마음은 한결 가까워진 듯했다.…그녀는 장하 별장에서 살고 싶지 않아 이사를 나왔다.마지막 남은 옷도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수모를 그녀는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그가 여러 번 암시하였다 하더라도 그녀도 앞으로 자신의 집에서만 살기로 했다.한 번은 그녀가 감기에 걸려 목욕을 하고 일찍 이불에 들어가 잠을 자려 하는데 설영준이 왔었다.술을 마시고 그녀의 침실에 들어와 두말없이 뽀뽀를 하려 했다.그녀는 몸이 아픈 데다 그에게 이런 괴롭힘까지 당하니 당연히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그 뺨에 설영준도 술에서 깬듯했다.송재이는 조금 멈칫했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방문 앞을 가리키며 그를 향해 나지막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