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퇴근할 시간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송재이는 문예슬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져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문예슬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는 걸 보니 설영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송재이도 남자 하나 때문에 친한 친구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단번에 승낙했다.문예슬의 차는 빌딩 문 앞에 멈추었다.송재이가 밖으로 나가니 문예슬이 차창을 내리고 웃으며 송재이를 향해 손짓하는 모습을 보았다.송재이가 차에 오른 후 문예슬은 고개를 돌려 송재이에게 말했다.“가자, 내가 너를 데리고 갈 곳이 있어.”문예슬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목이 막힌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문예슬은 가볍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고 도중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송재이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고개를 돌려 문예슬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문예슬은 송재이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차는 한 호텔 입구에 세워졌고 문예슬은 시동을 껐다.송재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나 여기 왜 데려왔어?”문예슬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송재이는 그녀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녀의 걸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호텔 1층 로비에서 문예슬은 모퉁이를 찾아 송재이를 끌고 가 앉았다.송재이는 오리무중에 빠졌다.그러다 그때 문예슬이 두 눈을 반짝이며 턱을 앞으로 치켜들었다.송재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주현아가 설영준의 손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그 순간 송재이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재빨리 손에 든 잡지로 얼굴을 가렸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문예슬이 그 앞으로 달려갔다.28층에서 멈춘 숫자를 보고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송재이를 끌었다.“가자! 우리도 올라가!”“싫어.”송재이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놓으며 거절하려고 했다.문예슬은 물었다.“무엇이 두려운 거야?”“두렵다고? 나는...”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미 문예슬에 의해 엘리베이터로 끌려갔다.설영준은
송재이는 오늘 문예슬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설영준과 주현아가 이곳에 와서 방을 잡을지 어떻게 알았는지 몰랐다.한 가지, 설영준이 주현아와 방을 잡은 건 확실하다는 거다.선남선녀가 혼약까지 있었으니, 그리고 주정명이 사고가 났을 때 그는 밤에 그의 딸을 만났다.문예슬은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방금 그들이 본 그 장면이 송재이에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목적을 달성했으니 문예슬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밥을 다 먹은 후 문예슬은 차를 몰고 송재이를 데려다주었다.…호텔 방안.설영준은 방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주현아는 거의 멍하니 옆에 서 있었다.바로 한 시간 전, 그녀는 설영준의 사무실에 찾아갔고 이것은 그녀가 출국하기 전의 마지막 기회였다.원래 그녀는 죽어도 출국하고 싶지 않았는데 설영준을 여러 해 동안 사랑했기 때문이다.주가의 처지가 위태로운 지금이지만 끝장을 보지 않는 한 설영준과 함께 할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효연은 동의하지 않았고 두 모녀가 다투는 사이 민효연은 손찌검까지 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민효연이 딸을 때린 건 처음이었다.주현아는 민효연에게 다소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잡은 꼬투리 때문에 민효연의 한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출국에 동의했지만 출국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싸워볼 작정이었다.그녀는 설영준과 자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말이다.사무실에 있을 때 그녀는 설영준에게 물을 부어주며 그 속에 약을 넣어 설영준의 성욕을 확대하려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설영준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녀를 꿰뚫었다.“사무실은 좀 그러니 나랑 자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자.”그는 그 물컵을 힐끗 보고는 부어버리고는 다시 탁자 위에 놓았다.주현아는 설영준이 그녀를 꿰뚫어 볼 줄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난감하고 의아하여 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그런데 그가 그녀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영준아, 나 너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주현아는 울면서 엎드려 애원하다시피 했다.그러나 설영준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시종일관 평온한 눈빛으로 이 모든 것을 일관했다.그는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땅에 엎드려 몰골이 말이 아닌 주현아를 내려다보았다.“그렇게 원한다면…”그의 말에 주현아는 희망이 되살아나는 듯 불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너 혼자 해!”설영준의 한마디는 그녀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았다.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마침내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이 밤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난감한 날이 되었다.주현아는 약물의 자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리고 생리적 본능에 따라 스스로 손으로 해결하였다.주현아의 모든 추잡한 모습과 난감한 행동, 눈에 거슬리는 표정과 자세 그 모든 것들이 설영준 눈앞에 펼쳐졌다.설영준은 시종일관 담담하게 담배를 피웠고 눈앞의 광경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약효는 매우 강렬했는데 그녀는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혔고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탈진했는데 마지막엔 알몸으로 바닥에 엎드려 숨을 할딱거렸다.설영준은 그녀를 땅바닥에서 안아 올려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줬다.피곤함에 눈을 들뜬 주현아는 설영준의 얼굴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직도 나랑 자고 싶어?”그가 조용히 물었다.“아니.”주현아는 이제 설영준 앞에서는 자존심 하나 남지 않았다.그녀의 몸을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먹는 것 같았을 때 그는 단지 냉담한 눈으로 방관할 뿐이었다.주현아가 자기가 벌린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그녀는 마침내 두려움을 알았다.설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민 사장님과 약속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난 약속을 지켰어. 아까는 모두 너 혼자 필사적으로...”그녀는 수치스러움에 눈을 감고 눈물을 뚝뚝 흘렸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설영준은 소파 위에 놓인 양복을 집어 들고 돌아
송재이는 연우에게 마지막 3교시의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앞으로는 오지 않겠다고 미리 민효연에게 말했다.원래는 민효연이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는데 최근 집안일 때문에 민효연도 이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했다.그녀는 더 묻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민효연은 연우에게 피아노 선생님을 바꿔줘야 한다는 일을 도정원에게 말했다.도정원은 전화로 누가 먼저 제안했느냐고 물었고 송재이가 먼저 얘기했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에 잠겼다.그는 지금 송재이와 설영준이 여전히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시 떨어져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설을 전후해 다시 함께한 것 같았다.그래서 일부러 sns에 송재이가 연우의 손을 잡고 쇼핑하는 사진을 올린 거였다.지금 보니 이 일로 설영준이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가 어떤 식으로 송재이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설득했는지는 잘 몰랐다.송재이가 연우의 피아노 선생님 일을 그만둬야만 도정원과 그녀와 앞으로 만날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만약 그렇게 신경을 쓴다면 그녀와 결혼할 것이지 제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이런 사소한 복수를 한다는 자체가 너무 유치하고 하찮았다.그는 전화로 설영준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그는 설영준이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눈에 거슬렸지만 상업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의지하는 편이었다.만난 후 두 사람은 먼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설영준은 도정원이 계속 그를 관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설영준은 진중한 느낌을 주는 기질을 타고났지만 속은 분명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다.그는 진지할 때는 낯선 사람은 쉽게 다가가지 못할 분위기를 풍겼고 일거수일투족에서 박력과 매너가 넘쳤는데 이런 풍격은 여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그리고 설영준은 평소에도 헬스 습관이 있는데 이는 수년 전부터 시작된 거여서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보기만 해도 침대에서의 솜씨가 굉장히 좋을 것 같았다.이것들 모두가 여자들을 사로잡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도정원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는 당연히 굳이 도정원한테 말할 필요는 없었다.설영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도정원을 쳐다보며 동문서답을 했다.“재이가 제 여자친구라는 것도 아셨으니 앞으론 좀 조심해주세요. 세상에 여자가 많고도 많은데 꼭 재이한테 목을 맬 필요는 없으시잖아요.”그 말뜻인 즉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는 거였다.도정원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속으로 세상에 여자가 그리도 많은데 설영준은 왜 하필이면 송재이만을 고집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설영준 같은 남자는 어쩌면 여자들이 그에게 반해 정신을 잃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더러 한 여자에게만 몰두하라고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도정원이 송재이의 배다른 오빠라는 사실은 그와 도경욱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송재이 본인마저도 말이다. 그도 도경욱에게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설영준이 이렇게 눈에 뵈는 것도 없이 날뛰는 모습이 너무 아니꼬웠다.도정원은 도저히 송재이가 이런 남자와 함께한다는 것이 안심되지 않았다.하지만 송재이 본인은 또 이 남자를 너무 좋아하니...“설 대표님, 제가 저희 아버지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죠?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셨어요...”설영준이 막 국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도정원이 자기 집안일을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도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설영준이 도정원에 대해 아는 거라곤 단지 그가 가문의 최하위층에서 천천히 지금의 자리까지 기어올랐다는 것밖에 없었다.그의 아버지에 대한 일은 당연히 큰 관심이 없었다.이 전에 도정원도 분명 누구한테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오늘 도정원은 도경욱과 서지원의 옛이야기에 대해 곧이곧대로 설영준에게 말해주었다.설영준은 조금은 의문스러웠지만 그 얘기를 끊지는 않았다.도정원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거다. 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그래도 그는 조용히 그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제 아버지와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식당 앞에서 작별했다.떠나기 전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알다시피 연우가 조금 특별한 아이잖아요. 그래서 쉽게 선생님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연준 씨가 여자친구분한테 얘기해서 전처럼 수업하러 오시라고 해주세요.”말을 하고는 설영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살면서 처음 설영준이 밀린 대화였다.하지만 그는 거절할 수도 없었다....최근 송재이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설영준과 주현아가 같이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이후로 그녀는 저녁에 계속 같은 꿈을 꾸었다.방문으로 열고 들어서니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야릇한 자세를 하고 있는 그런 꿈 말이다.주현아는 설영준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송재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봤지? 영준이는 아직도 날 놓지 못했다고!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영준이는 날 사랑하지 널 사랑하지 않아.”“재이야,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현아였어... 얘가 내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 못 보겠더라...”핸드폰이 울렸고 송재이는 잠결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뒤척이다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러다 침대 머리를 잡고 겨우 떨어지는 걸 막았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잡아 들었고 도정원이 온 전화라는 걸 발견했다.송재이는 통화버튼을 눌렀고 도정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 선생님, 오늘 저녁 레슨 말인데요. 계속 그 시간 맞죠?”“네?”송재이는 이미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민 사장이 아직 선생님을 바꾼다는 말을 도정원이랑 말하지 않았다는 거에 놀랐다.“얼마 전에 저랑 선생님 남자친구분이 같이 저녁을 했는데요, 제가 그분보고 저를 도와 얘기 좀 해 달라고 했어요. 만약 계속하신다면 제가 두 배의 레슨비를 내도록 할게요.”도정원은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듯 담담했는데 송재이는 오리무중에 빠졌다.그녀는 힘껏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꿈인지 생신지 구분을 하려 했다.“남자친구라뇨? 누구 남자친구요?”도정원은 피식
저녁에 송재이가 집에 도착하니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은은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고 막 조명을 켜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에 의해 품에 안겨졌다.송재이는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을 쳤고 하지만 이내 그의 익숙한 체온과 향기를 눈치챘다.그의 입술은 송재이의 볼에 닿을락 말락 했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나 안 보고 싶었어?”송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설영준과 주현아가 호텔 룸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그런데 어찌 그녀한테 보고 싶었는지 물어본단 말인가?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을 손으로 잡더니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힘있게 덮었다.“대답이 없네? 그럼 묵인한 거로 칠게...”그는 키스하며 한편으론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그리고는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렸다.“할래?”그녀의 손은 가볍게 그의 목에 걸쳐졌다.“더러워.”설영준은 침실로 걸어가다가 그녀의 한마디에 주춤했다.하지만 냉소를 지을 뿐 뒤이어 침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리고 그녀는 가볍게 침대에 던져졌다.“더러워? 매번 할 때마다 좋아했잖아?”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의 모호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송재이는 오금이 저려왔다. 그가 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가 덮쳐올 태세를 취하자 그녀의 마음속에 참아왔던 억울함과 짜증이 몰려왔다.그녀는 뒤로 물러섰지만 그는 단번에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너 주현아랄 잤어? 잤냐고!”그녀의 이 물음을 들으니 그는 과연 동작을 멈췄다.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다 봤으면서 왜 안 들어왔어?”그의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서 울렸다.회억해보니 송재이는 그제야 1층 로비에서 여진을 마주쳤던 일이 생각났다.그 뜻인즉 그는 이미 그녀가 그날 호텔에 갔었고 두 사람이 방을 잡은 걸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이 아니겠는가?“안 잤어.”주변의 희미한 불빛 사이로 그녀는 그의 눈길을 보았다.말을 마치고 그의 입술은 그렇게 그녀
어두운 밤, 송재이의 졸음이 서서히 사라졌다.그녀는 눈을 뜨고 헛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체온의 전달로 그녀의 마음도 따끈따끈해졌다.다음날 송재이는 늦게 일어났다.세수한 후 거실로 걸어가자 익숙한 밥 냄새가 났다.부엌에서 수도꼭지가 콸콸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물소리가 사라졌고 누군가 도마에서 채소를 썰고 도자기가 부딪치는 소리 찌개 끓이는 소리가 났다.이런 짙은 사람 사는 듯한 소리는 송재이에게 있어서 매우 감동적이었다.엄마가 살아계실 때만 이렇게 고즈넉한 삶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이 사치가 돼버렸다.“밥 먹자.”설영준은 부엌에서 나와 고개를 들어 한마디 했다.“그래.”앉아서 보니 오늘 아침 메뉴는 시금칫국이었다.그녀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모금 마셨고 잠시 후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설영준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송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방이 너무 더워서 그래?”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고 그의 말투에 섞인 조롱을 알아챘다.“어, 아침에 햇빛이 너무 쨍쨍하네!”설영준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송재이는 줄곧 머리를 숙이고 설영준을 감히 보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의 얇은 벽이 끝내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마음은 한결 가까워진 듯했다.…그녀는 장하 별장에서 살고 싶지 않아 이사를 나왔다.마지막 남은 옷도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수모를 그녀는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그가 여러 번 암시하였다 하더라도 그녀도 앞으로 자신의 집에서만 살기로 했다.한 번은 그녀가 감기에 걸려 목욕을 하고 일찍 이불에 들어가 잠을 자려 하는데 설영준이 왔었다.술을 마시고 그녀의 침실에 들어와 두말없이 뽀뽀를 하려 했다.그녀는 몸이 아픈 데다 그에게 이런 괴롭힘까지 당하니 당연히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그 뺨에 설영준도 술에서 깬듯했다.송재이는 조금 멈칫했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방문 앞을 가리키며 그를 향해 나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