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면서 강유리를 깎아내리기 바쁜 성신영의 모습이 아니꼬왔지만 자기 입으로 강유리의 남편이 재계 1위 그룹 대표 육시준이라고 밝히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으므로 임천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강유리가 어떻게 살든 그건 걔가 알아서 할 일이야. 신경 쓰지 말자.”차갑게 굳은 임천강의 얼굴을 확인한 성신영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실렸다.‘그래. 오빠도 이젠 강유리한테 완전히 실망한 거야. 이제 오빠한테는 나뿐이라고.’그리고 그녀 역시 고개를 들어 아득하게 높은 철대문을 바라보았다.‘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저곳으로 들어갈 거야. 강유리보다 뒤처질 수는 없어.’한편, 빌라를 나선 강유리는 거세게 엑셀을 밟았다.비록 두 사람을 골탕 먹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둘에게서 받은 배신감에 비하면 이 정도 복수는 턱도 없었으니까.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누나. 로열 쪽에서 저작권 사겠대. 대표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는데? 게다가 다른 세 작품 저작권까지 사겠다는데. 가격은 전부 80억으로.”끼익!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에 강유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핸들을 꽉 쥔 강유리의 눈이 커다래졌다.“대표가 직접 밀어붙였다고?”“응. 대표 비서라는 사람이 직접 나한테 연락 왔었어.”“게다가 다른 작품 저작권까지?”“응. 그 망작들까지 전부 다 사겠대.”“허...”헛웃음을 끝으로 한참을 침묵하던 강유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아니, 그 사람 바보 아니야? 아니, 애초에 그런 안목으로 사업을 어떻게 하는 거래? 그 쓰레기 같은 작품을 왜...”다 무너져가는 유강그룹 계열사에 말이 좋아 작품이지 낙서나 다름없는 작품까지...설마 돈이 썩어나는 건가?“누나는 참... 스스로에게도 참 가차없구나. 자기 작품을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큼, 그나저나 아쉽네. 그쪽에서 그렇게 쉽게 오케이 할 줄 알았으면 80억이 아니라 좀 더 높게 부르는 건데.”‘게다가 내가 눈독 들인 회사까지 빼앗으려고 들고 말
“아니, 왜 굳이 유강그룹 계열사를 인수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죠.”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 그건 저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예요.”육경서가 어깨를 으쓱했다.어차피 그의 머릿속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유를 알아낼 길은 없으니 강유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육경서 씨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작품들 쭉 훑어봤는데 로코 장르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육경서 씨 데뷔 년차도 꽤 쌓였고 이미지 변신이 필요할 것 같은데.”이에 육경서의 눈이 반짝였다.“! 저 그 작품 주인공 할 수 있는 거예요?”원작 속 남자주인공은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고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마음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완벽한 이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역을 따내고 싶었다.‘형수님만 오케이하며 형이야 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고... 그러니까 제발...’“아, 남자주인공을 연기하기엔 육경서 씨가 조금 부족할 것 같고... 서브 남주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육경서 씨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고...”하지만 육경서의 머릿속에는 온통 “육경서 씨가 조금 부족할 것 같고”라는 말 뿐, 다른 말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내가... 내가 부족해? 하, 내가 찍은 작품마다 다 대박이었어! 게다가 조연이라니. 난 조연은 해본 적도 없다고!’한편, 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강유리는 캐릭터 분석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서브 남주는 재벌 2세인데 육경서 씨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잘 맞을 것 같고요. 지금까진 항상 차도남 스타일만 연기했잖아요. 서브 남주는 따뜻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스타일이라 육경서 씨 이미지 전환에도 도움이 될 것...”“이 얼굴로 조연이요?”참다 못한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주연은 누군데요? 도대체 누구길래 이 육경서를 밀어내고 주연을 하는 거냐고요! 대표님, 나 육경서예요.”‘내가 얼마나 핫한지 몰라’라고 얼굴에 적혀있는 모습을 보던 강유리가 헛웃음을 지었다.‘생각보다 자기 커리어에 프라이드가 대단하네.’“주연은 소지
“...”그의 말에 수화기 저편의 침묵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자기? 육경서 따위한테?’그대로 전화가 끊겨버렸지만 육경서는 별 개의치 않았다.‘하여간 성질머리 하곤.’그리고 바로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준아, 나 파리행 티켓 좀 끊어줘. 지석 선배님과 함께 귀국해야겠어.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알겠지?”뜬금없는 부탁에 매니저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공항으로 마중나가는 것도 충분한데 파리까지 간다고? 굳이?“형, 우리도 나름 톱연예인인데 굳이 파리까지 가야겠어?”“아 됐고, 얼른 끊어줘. 얼른!”한편, 강유리는 다시 회사 재무제표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회사를 이어받은 뒤로 투자 예정이던 예능이며 영화, 드라마가 일정을 앞당기게 되면서 수익은 확실히 좋아진 상태였으나...그전에 성홍주가 남겨둔 구멍이 너무 큰 탓에 올린 수익이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연말까지 수익 2배...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뿐.전에 그녀에게 얘기했던 수익이 지나치게 높다는 걸 인정하게 만들거나 성홍주가 매도한 자산들을 전부 매입하는 것.“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이 말만을 남기고 쌩하고 회사를 나선 강유리는 바로 로열 엔터 본사로 향했다.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건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짜증 나는 얼굴과 마주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비서에 고문 변호사까지 대동한 성홍주 역시 강유리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강유리, 네가 어떻게 여길...”그리고 뭔가 눈치챈 성홍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LK그룹이 유강그룹 계열사를 인수한다면 본사 주가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이에 강유리가 헛웃음을 지었다.“하, 집안 기둥뿌리 다 팔아서 사생아 딸한테 갖다바치는 분이 이제 와서 회사 생각하시는 척하지 마세요.”“사생아라니! 신영이 네 동생이야.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그리고 나라고 피붙이 같은 계열사들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싶겠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강유리가
한편, 비록 강유리 앞에서는 당당한 척했지만 강유리와 육시준이 친근한 모습으로 귓속말을 나누는 걸 보니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육시준이 직접 강유리 마중까지 나오다니. 그리고 둘이서 뭘 속삭이고 있는 거야...’어쨌든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려던 그때, 비서처럼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성홍주 대표님 되시죠? 모시겠습니다.”비서의 뒤를 따르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성홍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육시준 대표님은 저기 계시는 것 같은데...”이에 비서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께서는 급히 나가보셔야 하셔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아, 알겠습니다. 기다리시죠.”한편, 조용한 카페숍.파일을 탁 하고 내려놓은 강유리가 씩씩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파일을 펼치던 육시준은 겉으로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혹시나 진짜 정체를 들키는 건 아닐까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유강그룹 건 때문에... 우리 대표님 만나려고 했던 거야?”“하. 진짜 당신 회사 대표 진짜 미친 거 아니야?”강유리가 짜증스레 소리쳤다.겨우 연이 닿아 좋아했었는데 성홍주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녀는 만나주지도 않다니.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하, 다 무너져가는 계열사들은 도대체 왜 욕심을 내는 거래? 돈이 썩어난대? 차라리 그러면 기부를 하지 그래?”반면 육시준은 평소 진지한 척 무게를 잡던 모습과 달리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내는 강유리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그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발랄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지만...“웃어?”돌아온 건 강유리의 핀잔뿐이었다.“뭐가 웃겨! 당신도 진짜 바보 아니야? 유강그룹까지 빼앗기면 나 당신 못 먹여살려!”그러자 육시준의 표정이 확 진지해졌다.“큰일이긴 하네.”“흥.”그 뒤로도 강유리는 도저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느니, 더러운 자본에 욕심을 낸다느니, 분명
이때 강유리가 눈을 반짝이더니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내가! 내가 인수할 거야.”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육시준이 물었다.“감히 LK그룹과 싸우겠다?”하지만 강유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오늘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약속을 먼저 깬 건 그쪽이잖아? 그리고 유강그룹은 애초에 우리 집안 계열사기도 하고. 아마 그분도 날 이해해 주실 거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거랑 싸우시겠어.”“하지만 LK그룹 대표는 생각을 예측할 수 없는데다 돈에 욕심만 많은 대머리 노총각이잖아?”“큼큼...”‘아까 너무 흥분해서 남의 회사 오너를 너무 심하게 흉을 봤네.’이에 강유리가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헛소리한 거야. 설마 그 사람한테 막 이르고 그럴 건 아니지? 부부는 일심동체잖아. 내가 잘 돼야 당신한테도 좋은 거야.”‘부부는 일심동체?’“부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 육시준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육시준한테 자기라고 했다면서?”“엥?”진짜 남편인 그에게는 여보니 자기니 애칭 한번 불러준 적 없으면서 다른 남자에게는 서스럼없이 자기라니.단단히 삐친 육시준과 달리 그를 바라보는 강유리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그래도 계열사 인수건에 관해선 육시준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사실이니까... 어쩌겠어. 내가 달래줘야지.’“그건 그냥... 습관? 닉네임 같은 거야. 육시준 씨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연예인들한테도 그렇게 부르곤 해. 뭔가... 친근해 보이잖아?”“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다고?”“...”항상 우아한 백조 같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처음 보는 강유리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누가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어.’“아니, 사이가 좋으면 친근하게 그렇게 부르기도 하잖아.”“난 용납 못해.”진지한 그의 표정에 강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휴,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안 된다고 못을 박는데 어쩌겠어
“우리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곤란하신 거겠죠. LK그룹이 아버지를 가지고 놀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계열사를 처분하려고 하실 때 제 의견 한 번이라도 물어보신 적 있으세요?”강유리는 여유롭게 하품까지 해가며 대꾸했다.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녀의 답변에 성홍주는 이 모든 게 강유리의 농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곤 말을 이어갔다.“왜? LK그룹을 설득하면 내가 고분고분하게 포기할 줄 알았어?”그제야 강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긴 속눈썹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그 속에 숨겨졌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이 세상에 기업이 LK뿐이야? 가격만 좀 더 낮추면 다른 그룹에 충분히 넘길 수 있어. 정 안 되면 다른 계열사도 처분하지 뭐.”이에 휴대폰을 잡은 강유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아버지...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계열사를 처분하네 마네 하세요? 그거 다 우리 엄마 거라고요.”“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생각은 안 해봤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니. 그런데 넌 네 동생한테 어떻게 했는데...”어차피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서로 싸워봤자 답도 없는 싸움이 될 게 분명하니 강유리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곤 휴대폰을 던져버렸다.‘항상 이런 식이야. 아버지는 성신영 생각뿐이지.’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란다는 이유로 더 챙겼고 커서는 성신영이 철이 들고 착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더 이뻐한 성홍주다.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사치를 부리느라 쓰는 돈들 전부 그녀의 어머니의 소유였다는 것을.‘이게 도둑질과 다를 게 뭐야.’이때 뒤편에서 큰 손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어쩜, 잠긴 목소리도 이렇게 매력적이래?’성홍주와의 통화로 불쾌했던 기분을 싹 가시게 만드는 목소리에 강유리가 고개를 돌렸다.밤새 솟은 수염마저도 섹시하게 보이게 만드는 완벽한 얼굴.‘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볼 때마다
은 로열 엔터가 투자하고 천재 감독 강덕준이 기획을 맡은 대작으로 작은 배역도 오디션 경쟁률이 엄청났다.오늘 오후는 바로 여자 조연 배역을 뽑는 자리.잔뜩 꾸민 여배우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오늘 로열 엔터 대표님도 오신다면서?”“정말?”“에이, 공식적인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 분이시잖아.”“그만큼 로열이 이 작품을 신경 쓴다는 말이지. 제작비만 300억이잖아.”미다스의 손 신아람이 을 추천한 뒤로 로열 엔터가 80억이라는 거금을 투척해 저작권을 인수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돈 냄새를 맡은 투자자들이 어떻게든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설령 작품 흥행에 실패한다 해도 로열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영광이었으니까.하지만 로열은 어중이떠중이 투자자들을 전부 거절했고 주연급은 전부 연기력이 탄탄한 대배우들을 섭외한 데다 가장 핫한 배우 육경서까지 조연으로 참여하며 대중들의 관심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그 오디션장에는 성신영도 자리했다.“신영 언니, 육 대표님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려나?”한때 유강엔터 소속이었던 여배우 오예라가 물었다.“정신차려. 안 봐도 대머리에 배 나온 아저씨겠지 뭐.”성신영이 찬물을 끼얹었다.‘그 흔한 인터뷰까지 거절하면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걸 보면 외모에 큰 하자가 있는 게 분명해.’하지만 오예라는 개의치 않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뭐 어때요? 모든 단점을 다 커버할 수 있는 재력이 있잖아요.”오예라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 성신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오디션장이 아니라 시상식이나 영화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 잔뜩 모인 자리였지만 성신영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재벌 그룹 딸인데다 청순한 외모로 데뷔와 동시에 인기스타 반열에 오른 그녀였으니까.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대시를 하는 제작자나 연예인들도 수두룩했고 그들의 은밀한 제안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딱
두 여자가 강유리 험담으로 똘똘 뭉치고 있던 그때, 감독을 비롯한 오늘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강덕준 감독이 등장하자 술렁이던 오디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무릇 창작이란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한 것이라 어느 정도 유명한 감독들은 다들 재능이 뛰어나다 할 수 있었지만 강덕준은 달랐다.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오직 감독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사람이 바로 강덕준이었다.데뷔 첫 작품부터 바로 관객수 1500만 돌파, 대한민국 첫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들이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이번 작품에 가지는 사람들의 관심 중 팔할은 강덕준에게서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믿고 보는 강덕준이라는 말이 업계에서는 진리처럼 퍼질 정도였으니까.그런데 그런 강덕준이 앉은 자리는 놀랍게도 센터가 아니었다.그렇다면...“정말 육 대표님이 오시려는 건가 봐.”텅 빈 자리를 보며 여배우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하지만 기대감도 잠시.오디션이 시작되고 강덕준 감독의 독설 심사평에 여배우 두 명이 눈물바람으로 현장을 뛰쳐나가면서 현장의 분위기는 더더욱 무거워졌다.하지만 오디션이 진행되면 될 수록 강덕준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가고...“다음 분 나오세요.”결국 이제 평가를 하는 것조차 귀찮아진 듯 그가 입을 열었다.다음 순서인 오예라가 침착한 얼굴로 무대에 오르더니 심사위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란희 역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 오예라라고 합니다.”이에 강덕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이 오디션장은 조연 “하나”역을 뽑는 자리, 하지만 “하나” 역 탈락자 중에서 “란희” 배역을 뽑는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한 오예라는 먼저 선수를 쳤다.그리고 다수의 오디션을 경험한 덕분에 침착한 태도와 란희 역에 꼭 맞는 코디.강덕준의 얼굴에 드디어 조금의 흥미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좋습니다. 그럼 이 대사 한번 해보실까요?”“알겠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