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비록 강유리 앞에서는 당당한 척했지만 강유리와 육시준이 친근한 모습으로 귓속말을 나누는 걸 보니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육시준이 직접 강유리 마중까지 나오다니. 그리고 둘이서 뭘 속삭이고 있는 거야...’어쨌든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려던 그때, 비서처럼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성홍주 대표님 되시죠? 모시겠습니다.”비서의 뒤를 따르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성홍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육시준 대표님은 저기 계시는 것 같은데...”이에 비서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께서는 급히 나가보셔야 하셔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아, 알겠습니다. 기다리시죠.”한편, 조용한 카페숍.파일을 탁 하고 내려놓은 강유리가 씩씩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파일을 펼치던 육시준은 겉으로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혹시나 진짜 정체를 들키는 건 아닐까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유강그룹 건 때문에... 우리 대표님 만나려고 했던 거야?”“하. 진짜 당신 회사 대표 진짜 미친 거 아니야?”강유리가 짜증스레 소리쳤다.겨우 연이 닿아 좋아했었는데 성홍주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녀는 만나주지도 않다니.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하, 다 무너져가는 계열사들은 도대체 왜 욕심을 내는 거래? 돈이 썩어난대? 차라리 그러면 기부를 하지 그래?”반면 육시준은 평소 진지한 척 무게를 잡던 모습과 달리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내는 강유리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그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발랄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지만...“웃어?”돌아온 건 강유리의 핀잔뿐이었다.“뭐가 웃겨! 당신도 진짜 바보 아니야? 유강그룹까지 빼앗기면 나 당신 못 먹여살려!”그러자 육시준의 표정이 확 진지해졌다.“큰일이긴 하네.”“흥.”그 뒤로도 강유리는 도저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느니, 더러운 자본에 욕심을 낸다느니, 분명
이때 강유리가 눈을 반짝이더니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내가! 내가 인수할 거야.”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육시준이 물었다.“감히 LK그룹과 싸우겠다?”하지만 강유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오늘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약속을 먼저 깬 건 그쪽이잖아? 그리고 유강그룹은 애초에 우리 집안 계열사기도 하고. 아마 그분도 날 이해해 주실 거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거랑 싸우시겠어.”“하지만 LK그룹 대표는 생각을 예측할 수 없는데다 돈에 욕심만 많은 대머리 노총각이잖아?”“큼큼...”‘아까 너무 흥분해서 남의 회사 오너를 너무 심하게 흉을 봤네.’이에 강유리가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헛소리한 거야. 설마 그 사람한테 막 이르고 그럴 건 아니지? 부부는 일심동체잖아. 내가 잘 돼야 당신한테도 좋은 거야.”‘부부는 일심동체?’“부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 육시준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육시준한테 자기라고 했다면서?”“엥?”진짜 남편인 그에게는 여보니 자기니 애칭 한번 불러준 적 없으면서 다른 남자에게는 서스럼없이 자기라니.단단히 삐친 육시준과 달리 그를 바라보는 강유리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그래도 계열사 인수건에 관해선 육시준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사실이니까... 어쩌겠어. 내가 달래줘야지.’“그건 그냥... 습관? 닉네임 같은 거야. 육시준 씨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연예인들한테도 그렇게 부르곤 해. 뭔가... 친근해 보이잖아?”“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다고?”“...”항상 우아한 백조 같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처음 보는 강유리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누가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어.’“아니, 사이가 좋으면 친근하게 그렇게 부르기도 하잖아.”“난 용납 못해.”진지한 그의 표정에 강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휴,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안 된다고 못을 박는데 어쩌겠어
“우리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곤란하신 거겠죠. LK그룹이 아버지를 가지고 놀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계열사를 처분하려고 하실 때 제 의견 한 번이라도 물어보신 적 있으세요?”강유리는 여유롭게 하품까지 해가며 대꾸했다.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녀의 답변에 성홍주는 이 모든 게 강유리의 농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곤 말을 이어갔다.“왜? LK그룹을 설득하면 내가 고분고분하게 포기할 줄 알았어?”그제야 강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긴 속눈썹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그 속에 숨겨졌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이 세상에 기업이 LK뿐이야? 가격만 좀 더 낮추면 다른 그룹에 충분히 넘길 수 있어. 정 안 되면 다른 계열사도 처분하지 뭐.”이에 휴대폰을 잡은 강유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아버지...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계열사를 처분하네 마네 하세요? 그거 다 우리 엄마 거라고요.”“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생각은 안 해봤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니. 그런데 넌 네 동생한테 어떻게 했는데...”어차피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서로 싸워봤자 답도 없는 싸움이 될 게 분명하니 강유리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곤 휴대폰을 던져버렸다.‘항상 이런 식이야. 아버지는 성신영 생각뿐이지.’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란다는 이유로 더 챙겼고 커서는 성신영이 철이 들고 착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더 이뻐한 성홍주다.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사치를 부리느라 쓰는 돈들 전부 그녀의 어머니의 소유였다는 것을.‘이게 도둑질과 다를 게 뭐야.’이때 뒤편에서 큰 손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어쩜, 잠긴 목소리도 이렇게 매력적이래?’성홍주와의 통화로 불쾌했던 기분을 싹 가시게 만드는 목소리에 강유리가 고개를 돌렸다.밤새 솟은 수염마저도 섹시하게 보이게 만드는 완벽한 얼굴.‘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볼 때마다
은 로열 엔터가 투자하고 천재 감독 강덕준이 기획을 맡은 대작으로 작은 배역도 오디션 경쟁률이 엄청났다.오늘 오후는 바로 여자 조연 배역을 뽑는 자리.잔뜩 꾸민 여배우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오늘 로열 엔터 대표님도 오신다면서?”“정말?”“에이, 공식적인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 분이시잖아.”“그만큼 로열이 이 작품을 신경 쓴다는 말이지. 제작비만 300억이잖아.”미다스의 손 신아람이 을 추천한 뒤로 로열 엔터가 80억이라는 거금을 투척해 저작권을 인수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돈 냄새를 맡은 투자자들이 어떻게든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설령 작품 흥행에 실패한다 해도 로열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영광이었으니까.하지만 로열은 어중이떠중이 투자자들을 전부 거절했고 주연급은 전부 연기력이 탄탄한 대배우들을 섭외한 데다 가장 핫한 배우 육경서까지 조연으로 참여하며 대중들의 관심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그 오디션장에는 성신영도 자리했다.“신영 언니, 육 대표님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려나?”한때 유강엔터 소속이었던 여배우 오예라가 물었다.“정신차려. 안 봐도 대머리에 배 나온 아저씨겠지 뭐.”성신영이 찬물을 끼얹었다.‘그 흔한 인터뷰까지 거절하면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걸 보면 외모에 큰 하자가 있는 게 분명해.’하지만 오예라는 개의치 않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뭐 어때요? 모든 단점을 다 커버할 수 있는 재력이 있잖아요.”오예라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 성신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오디션장이 아니라 시상식이나 영화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 잔뜩 모인 자리였지만 성신영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재벌 그룹 딸인데다 청순한 외모로 데뷔와 동시에 인기스타 반열에 오른 그녀였으니까.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대시를 하는 제작자나 연예인들도 수두룩했고 그들의 은밀한 제안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딱
두 여자가 강유리 험담으로 똘똘 뭉치고 있던 그때, 감독을 비롯한 오늘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강덕준 감독이 등장하자 술렁이던 오디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무릇 창작이란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한 것이라 어느 정도 유명한 감독들은 다들 재능이 뛰어나다 할 수 있었지만 강덕준은 달랐다.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오직 감독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사람이 바로 강덕준이었다.데뷔 첫 작품부터 바로 관객수 1500만 돌파, 대한민국 첫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들이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이번 작품에 가지는 사람들의 관심 중 팔할은 강덕준에게서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믿고 보는 강덕준이라는 말이 업계에서는 진리처럼 퍼질 정도였으니까.그런데 그런 강덕준이 앉은 자리는 놀랍게도 센터가 아니었다.그렇다면...“정말 육 대표님이 오시려는 건가 봐.”텅 빈 자리를 보며 여배우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하지만 기대감도 잠시.오디션이 시작되고 강덕준 감독의 독설 심사평에 여배우 두 명이 눈물바람으로 현장을 뛰쳐나가면서 현장의 분위기는 더더욱 무거워졌다.하지만 오디션이 진행되면 될 수록 강덕준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가고...“다음 분 나오세요.”결국 이제 평가를 하는 것조차 귀찮아진 듯 그가 입을 열었다.다음 순서인 오예라가 침착한 얼굴로 무대에 오르더니 심사위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란희 역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 오예라라고 합니다.”이에 강덕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이 오디션장은 조연 “하나”역을 뽑는 자리, 하지만 “하나” 역 탈락자 중에서 “란희” 배역을 뽑는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한 오예라는 먼저 선수를 쳤다.그리고 다수의 오디션을 경험한 덕분에 침착한 태도와 란희 역에 꼭 맞는 코디.강덕준의 얼굴에 드디어 조금의 흥미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좋습니다. 그럼 이 대사 한번 해보실까요?”“알겠습
‘엥? 날 위해 준비한 자리라고?’얼떨떨한 표정의 강유리와 우희나가 앞으로 나가고...가까이 다가오는 강유리를 바라보던 강덕준의 얼굴에 묘한 장난기가 실렸다.“이 분은...?”“아, 저희 영화 투자사 중 하나인 유강엔터 강유리 대표님이십니다.”다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직장인들인지라 로열 엔터 관계자가 이렇게나 공손하게 나오는 데는 필시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역시 벌떡 일어서며 다급하게 인사를 건넸다.강유리는 그들과 한명, 한명 악수를 나누며 센터자리로 향했다.“대표님, 이쪽은 강덕준 감독님이십니다.”“처음 뵙겠습니다, 감독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처음 뵙겠다는 강유리의 말에 강덕준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던 무렵, 충격에 빠진 건 아직 무대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오예라도 마찬가지였다.‘뭐? 강유리 대표도 투자자라고?’그녀의 의아한 시선이 성신영에게로 향했지만 성신영 역시 오예라 못지 않게 놀란 모습이었다.‘또... 또 이런 식이야...’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을 즐기는 강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강유리, 도대체 육 대표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약간의 해프닝 끝에 오디션이 계속되었다.한편, 강덕준이 잔뜩 굳은 얼굴로 강유리의 귓가에 속삭였다.“죽을래? 공항에 마중 안 나온 것도 짜증 나는데. 뭐 처음 뵙겠습니다?”“내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 그래서 비서 보냈잖아.”“하, 조금 있다가 봐.”강유리를 흘겨본 강덕준이 말을 이어갔다.“시작하세요.”강덕준의 목소리에 우희나는 극도의 긴장감에 사로잡혔다.쥐 죽은 듯 조용해진 오디션장 때문에 자신의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들리는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그녀는 그나마 편한 사이인 강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인사를 시작했다.“안, 안녕하세요. 유강엔터 신인 배우, 우희나라고 합니다.”“강 대표님은 투자자신데. 투자사 소속 연예인이 오디션에 참가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아니꼬운 눈으로 그녀를 바
“아니요. 뭐 어차피 그냥 상대역 연기 해주는 건데 괜찮지 않을까요?”오예라의 질문에 성신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 바보야.”“엥?”“지금 심사위원들 표정을 봐. 어차피 란희 역은 저 배우로 이미 결정난 거나 마찬가지야. 상대역은 어디까지나 저 연기 밑받침 노릇이나 해주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기회를 잡고 싶다면 스스로 움직여야 할 거 아니야.”가만히 있으면 눈앞에 닥친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걸 오예라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두 사람의 연기력이 비등비등해도 투자사인 유강엔터 소속 연예인인 우희나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마당에 연기력까지 밀리고 있으니 이번 오디션은 완벽한 패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한편,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오예라의 모습에 성신영은 속이 타들어갔다.“신인 연기자들은 상대편에서 강하게 밀고 나가면 기가 죽어서 대사를 까먹거나 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 큰 실수가 있으면 아무리 투자사 소속 연예인이라도 떨어트릴 수밖에 없을걸?”성신영의 조언에 오예라의 눈이 다시 반짝이더니 그녀를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언니, 걱정하지 마요. 그건 자신있으니까.”다시 자신감을 얻은 오예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신영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강유리, 네가 뭔데 사람들 관심을 다 받고 난리야. 돈 몇 푼 투자하고 신인 연기자 한 명 끼워팔 생각이었나 본데... 꿈 깨. 네가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봐.”한편, 심사위원석에서 무언가 쑥덕대는 오예라, 성신영 두 사람과 여전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사를 확인하고 있는 우희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강유리의 표정 역시 살짝 어두워졌다.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우희나 배우에 대한 심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지만... 소속사 대표로서 배우한테 조언 몇 마디 해주는 건 괜찮겠죠?”이에 강덕준을 비롯한 다른 심사위원들이 흔쾌히 승낙했다.“그럼요.”강유리의 손짓에 우희나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
그렇게 우희나는 강덕준의 짖꿎은 두 번째 테스트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란희 역은 우희나가 연기하는 걸로 거의 분위기가 기울게 되었다.모든 오디션이 끝나고 강덕준이 자리를 뜨려는 강유리의 앞을 막아섰다.“아까... 그 배우한테 뭐라고 한 거야?”“아, 연지한 배우 알지? 희나 씨가 데뷔 전부터 팬이었거든? 오예라가 연지한과 사귀는 사이었고, 먼저 바람까지 피웠다고. 그 충격에 우울증 치료를 받느라 요즘 활동도 못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줬어.”“뭐?”한편, 오디션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할 때에도 우희나는 방금 전의 분노에 여전히 푹 빠져있는 모습이었다.한참을 혼 나간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던 우희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건지 다급하게 사과를 시작했다.“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대본에도 없는 따귀를...”하지만 강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우희나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아까 대표님 말씀 사실인가요? 오예라가 정말 우리 지한 님을...”“거짓말이에요.”순간, 우희나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희나 씨는 성격이 소심하고 너무 심하게 긴장하는 게 탈이에요. 이 단점을 커버할만큼 놀라운 연기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내가 왜 희나 씨를 선택했는지 알아요?”우희나가 막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희나 씨의 백지 같은 모습이 마음이 들어서였어요.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뭐, 첫 붓터치는 제대로 된 것 같네요.”우희나에게 계약서를 건넨 강유리가 말을 이어갔다.“란희 배역은 우희나 씨가 연기하기로 했어요. 지금은 조연이지만 다음엔 서브 여주, 그 다음엔 메인 여주, 그리고 언젠가 우희나 씨가 원톱 배역으로 작품을 맡는 그날까지 난 서포트를 아끼지 않을 생각이에요.”강유리의 기대감이 담겨서인지 우희나는 단 몇 장의 종이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결연한 강유리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