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굳이 유강그룹 계열사를 인수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죠.”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 그건 저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예요.”육경서가 어깨를 으쓱했다.어차피 그의 머릿속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유를 알아낼 길은 없으니 강유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육경서 씨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작품들 쭉 훑어봤는데 로코 장르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육경서 씨 데뷔 년차도 꽤 쌓였고 이미지 변신이 필요할 것 같은데.”이에 육경서의 눈이 반짝였다.“! 저 그 작품 주인공 할 수 있는 거예요?”원작 속 남자주인공은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고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마음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완벽한 이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역을 따내고 싶었다.‘형수님만 오케이하며 형이야 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고... 그러니까 제발...’“아, 남자주인공을 연기하기엔 육경서 씨가 조금 부족할 것 같고... 서브 남주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육경서 씨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고...”하지만 육경서의 머릿속에는 온통 “육경서 씨가 조금 부족할 것 같고”라는 말 뿐, 다른 말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내가... 내가 부족해? 하, 내가 찍은 작품마다 다 대박이었어! 게다가 조연이라니. 난 조연은 해본 적도 없다고!’한편, 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강유리는 캐릭터 분석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서브 남주는 재벌 2세인데 육경서 씨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잘 맞을 것 같고요. 지금까진 항상 차도남 스타일만 연기했잖아요. 서브 남주는 따뜻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스타일이라 육경서 씨 이미지 전환에도 도움이 될 것...”“이 얼굴로 조연이요?”참다 못한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주연은 누군데요? 도대체 누구길래 이 육경서를 밀어내고 주연을 하는 거냐고요! 대표님, 나 육경서예요.”‘내가 얼마나 핫한지 몰라’라고 얼굴에 적혀있는 모습을 보던 강유리가 헛웃음을 지었다.‘생각보다 자기 커리어에 프라이드가 대단하네.’“주연은 소지
“...”그의 말에 수화기 저편의 침묵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자기? 육경서 따위한테?’그대로 전화가 끊겨버렸지만 육경서는 별 개의치 않았다.‘하여간 성질머리 하곤.’그리고 바로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준아, 나 파리행 티켓 좀 끊어줘. 지석 선배님과 함께 귀국해야겠어.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알겠지?”뜬금없는 부탁에 매니저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공항으로 마중나가는 것도 충분한데 파리까지 간다고? 굳이?“형, 우리도 나름 톱연예인인데 굳이 파리까지 가야겠어?”“아 됐고, 얼른 끊어줘. 얼른!”한편, 강유리는 다시 회사 재무제표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회사를 이어받은 뒤로 투자 예정이던 예능이며 영화, 드라마가 일정을 앞당기게 되면서 수익은 확실히 좋아진 상태였으나...그전에 성홍주가 남겨둔 구멍이 너무 큰 탓에 올린 수익이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연말까지 수익 2배...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뿐.전에 그녀에게 얘기했던 수익이 지나치게 높다는 걸 인정하게 만들거나 성홍주가 매도한 자산들을 전부 매입하는 것.“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이 말만을 남기고 쌩하고 회사를 나선 강유리는 바로 로열 엔터 본사로 향했다.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건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짜증 나는 얼굴과 마주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비서에 고문 변호사까지 대동한 성홍주 역시 강유리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강유리, 네가 어떻게 여길...”그리고 뭔가 눈치챈 성홍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LK그룹이 유강그룹 계열사를 인수한다면 본사 주가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이에 강유리가 헛웃음을 지었다.“하, 집안 기둥뿌리 다 팔아서 사생아 딸한테 갖다바치는 분이 이제 와서 회사 생각하시는 척하지 마세요.”“사생아라니! 신영이 네 동생이야.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그리고 나라고 피붙이 같은 계열사들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싶겠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강유리가
한편, 비록 강유리 앞에서는 당당한 척했지만 강유리와 육시준이 친근한 모습으로 귓속말을 나누는 걸 보니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육시준이 직접 강유리 마중까지 나오다니. 그리고 둘이서 뭘 속삭이고 있는 거야...’어쨌든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려던 그때, 비서처럼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성홍주 대표님 되시죠? 모시겠습니다.”비서의 뒤를 따르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성홍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육시준 대표님은 저기 계시는 것 같은데...”이에 비서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께서는 급히 나가보셔야 하셔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아, 알겠습니다. 기다리시죠.”한편, 조용한 카페숍.파일을 탁 하고 내려놓은 강유리가 씩씩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파일을 펼치던 육시준은 겉으로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혹시나 진짜 정체를 들키는 건 아닐까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유강그룹 건 때문에... 우리 대표님 만나려고 했던 거야?”“하. 진짜 당신 회사 대표 진짜 미친 거 아니야?”강유리가 짜증스레 소리쳤다.겨우 연이 닿아 좋아했었는데 성홍주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녀는 만나주지도 않다니.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하, 다 무너져가는 계열사들은 도대체 왜 욕심을 내는 거래? 돈이 썩어난대? 차라리 그러면 기부를 하지 그래?”반면 육시준은 평소 진지한 척 무게를 잡던 모습과 달리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내는 강유리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그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발랄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지만...“웃어?”돌아온 건 강유리의 핀잔뿐이었다.“뭐가 웃겨! 당신도 진짜 바보 아니야? 유강그룹까지 빼앗기면 나 당신 못 먹여살려!”그러자 육시준의 표정이 확 진지해졌다.“큰일이긴 하네.”“흥.”그 뒤로도 강유리는 도저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느니, 더러운 자본에 욕심을 낸다느니, 분명
이때 강유리가 눈을 반짝이더니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내가! 내가 인수할 거야.”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육시준이 물었다.“감히 LK그룹과 싸우겠다?”하지만 강유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오늘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약속을 먼저 깬 건 그쪽이잖아? 그리고 유강그룹은 애초에 우리 집안 계열사기도 하고. 아마 그분도 날 이해해 주실 거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거랑 싸우시겠어.”“하지만 LK그룹 대표는 생각을 예측할 수 없는데다 돈에 욕심만 많은 대머리 노총각이잖아?”“큼큼...”‘아까 너무 흥분해서 남의 회사 오너를 너무 심하게 흉을 봤네.’이에 강유리가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헛소리한 거야. 설마 그 사람한테 막 이르고 그럴 건 아니지? 부부는 일심동체잖아. 내가 잘 돼야 당신한테도 좋은 거야.”‘부부는 일심동체?’“부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 육시준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육시준한테 자기라고 했다면서?”“엥?”진짜 남편인 그에게는 여보니 자기니 애칭 한번 불러준 적 없으면서 다른 남자에게는 서스럼없이 자기라니.단단히 삐친 육시준과 달리 그를 바라보는 강유리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그래도 계열사 인수건에 관해선 육시준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사실이니까... 어쩌겠어. 내가 달래줘야지.’“그건 그냥... 습관? 닉네임 같은 거야. 육시준 씨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연예인들한테도 그렇게 부르곤 해. 뭔가... 친근해 보이잖아?”“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다고?”“...”항상 우아한 백조 같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처음 보는 강유리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누가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어.’“아니, 사이가 좋으면 친근하게 그렇게 부르기도 하잖아.”“난 용납 못해.”진지한 그의 표정에 강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휴,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안 된다고 못을 박는데 어쩌겠어
“우리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곤란하신 거겠죠. LK그룹이 아버지를 가지고 놀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계열사를 처분하려고 하실 때 제 의견 한 번이라도 물어보신 적 있으세요?”강유리는 여유롭게 하품까지 해가며 대꾸했다.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녀의 답변에 성홍주는 이 모든 게 강유리의 농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곤 말을 이어갔다.“왜? LK그룹을 설득하면 내가 고분고분하게 포기할 줄 알았어?”그제야 강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긴 속눈썹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그 속에 숨겨졌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이 세상에 기업이 LK뿐이야? 가격만 좀 더 낮추면 다른 그룹에 충분히 넘길 수 있어. 정 안 되면 다른 계열사도 처분하지 뭐.”이에 휴대폰을 잡은 강유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아버지...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계열사를 처분하네 마네 하세요? 그거 다 우리 엄마 거라고요.”“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생각은 안 해봤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니. 그런데 넌 네 동생한테 어떻게 했는데...”어차피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서로 싸워봤자 답도 없는 싸움이 될 게 분명하니 강유리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곤 휴대폰을 던져버렸다.‘항상 이런 식이야. 아버지는 성신영 생각뿐이지.’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란다는 이유로 더 챙겼고 커서는 성신영이 철이 들고 착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더 이뻐한 성홍주다.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사치를 부리느라 쓰는 돈들 전부 그녀의 어머니의 소유였다는 것을.‘이게 도둑질과 다를 게 뭐야.’이때 뒤편에서 큰 손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어쩜, 잠긴 목소리도 이렇게 매력적이래?’성홍주와의 통화로 불쾌했던 기분을 싹 가시게 만드는 목소리에 강유리가 고개를 돌렸다.밤새 솟은 수염마저도 섹시하게 보이게 만드는 완벽한 얼굴.‘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볼 때마다
은 로열 엔터가 투자하고 천재 감독 강덕준이 기획을 맡은 대작으로 작은 배역도 오디션 경쟁률이 엄청났다.오늘 오후는 바로 여자 조연 배역을 뽑는 자리.잔뜩 꾸민 여배우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오늘 로열 엔터 대표님도 오신다면서?”“정말?”“에이, 공식적인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 분이시잖아.”“그만큼 로열이 이 작품을 신경 쓴다는 말이지. 제작비만 300억이잖아.”미다스의 손 신아람이 을 추천한 뒤로 로열 엔터가 80억이라는 거금을 투척해 저작권을 인수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돈 냄새를 맡은 투자자들이 어떻게든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설령 작품 흥행에 실패한다 해도 로열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영광이었으니까.하지만 로열은 어중이떠중이 투자자들을 전부 거절했고 주연급은 전부 연기력이 탄탄한 대배우들을 섭외한 데다 가장 핫한 배우 육경서까지 조연으로 참여하며 대중들의 관심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그 오디션장에는 성신영도 자리했다.“신영 언니, 육 대표님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려나?”한때 유강엔터 소속이었던 여배우 오예라가 물었다.“정신차려. 안 봐도 대머리에 배 나온 아저씨겠지 뭐.”성신영이 찬물을 끼얹었다.‘그 흔한 인터뷰까지 거절하면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걸 보면 외모에 큰 하자가 있는 게 분명해.’하지만 오예라는 개의치 않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뭐 어때요? 모든 단점을 다 커버할 수 있는 재력이 있잖아요.”오예라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 성신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오디션장이 아니라 시상식이나 영화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 잔뜩 모인 자리였지만 성신영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재벌 그룹 딸인데다 청순한 외모로 데뷔와 동시에 인기스타 반열에 오른 그녀였으니까.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대시를 하는 제작자나 연예인들도 수두룩했고 그들의 은밀한 제안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딱
두 여자가 강유리 험담으로 똘똘 뭉치고 있던 그때, 감독을 비롯한 오늘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강덕준 감독이 등장하자 술렁이던 오디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무릇 창작이란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한 것이라 어느 정도 유명한 감독들은 다들 재능이 뛰어나다 할 수 있었지만 강덕준은 달랐다.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오직 감독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사람이 바로 강덕준이었다.데뷔 첫 작품부터 바로 관객수 1500만 돌파, 대한민국 첫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들이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이번 작품에 가지는 사람들의 관심 중 팔할은 강덕준에게서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믿고 보는 강덕준이라는 말이 업계에서는 진리처럼 퍼질 정도였으니까.그런데 그런 강덕준이 앉은 자리는 놀랍게도 센터가 아니었다.그렇다면...“정말 육 대표님이 오시려는 건가 봐.”텅 빈 자리를 보며 여배우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하지만 기대감도 잠시.오디션이 시작되고 강덕준 감독의 독설 심사평에 여배우 두 명이 눈물바람으로 현장을 뛰쳐나가면서 현장의 분위기는 더더욱 무거워졌다.하지만 오디션이 진행되면 될 수록 강덕준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가고...“다음 분 나오세요.”결국 이제 평가를 하는 것조차 귀찮아진 듯 그가 입을 열었다.다음 순서인 오예라가 침착한 얼굴로 무대에 오르더니 심사위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란희 역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 오예라라고 합니다.”이에 강덕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이 오디션장은 조연 “하나”역을 뽑는 자리, 하지만 “하나” 역 탈락자 중에서 “란희” 배역을 뽑는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한 오예라는 먼저 선수를 쳤다.그리고 다수의 오디션을 경험한 덕분에 침착한 태도와 란희 역에 꼭 맞는 코디.강덕준의 얼굴에 드디어 조금의 흥미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좋습니다. 그럼 이 대사 한번 해보실까요?”“알겠습
‘엥? 날 위해 준비한 자리라고?’얼떨떨한 표정의 강유리와 우희나가 앞으로 나가고...가까이 다가오는 강유리를 바라보던 강덕준의 얼굴에 묘한 장난기가 실렸다.“이 분은...?”“아, 저희 영화 투자사 중 하나인 유강엔터 강유리 대표님이십니다.”다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직장인들인지라 로열 엔터 관계자가 이렇게나 공손하게 나오는 데는 필시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역시 벌떡 일어서며 다급하게 인사를 건넸다.강유리는 그들과 한명, 한명 악수를 나누며 센터자리로 향했다.“대표님, 이쪽은 강덕준 감독님이십니다.”“처음 뵙겠습니다, 감독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처음 뵙겠다는 강유리의 말에 강덕준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던 무렵, 충격에 빠진 건 아직 무대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오예라도 마찬가지였다.‘뭐? 강유리 대표도 투자자라고?’그녀의 의아한 시선이 성신영에게로 향했지만 성신영 역시 오예라 못지 않게 놀란 모습이었다.‘또... 또 이런 식이야...’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을 즐기는 강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강유리, 도대체 육 대표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약간의 해프닝 끝에 오디션이 계속되었다.한편, 강덕준이 잔뜩 굳은 얼굴로 강유리의 귓가에 속삭였다.“죽을래? 공항에 마중 안 나온 것도 짜증 나는데. 뭐 처음 뵙겠습니다?”“내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 그래서 비서 보냈잖아.”“하, 조금 있다가 봐.”강유리를 흘겨본 강덕준이 말을 이어갔다.“시작하세요.”강덕준의 목소리에 우희나는 극도의 긴장감에 사로잡혔다.쥐 죽은 듯 조용해진 오디션장 때문에 자신의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들리는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그녀는 그나마 편한 사이인 강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인사를 시작했다.“안, 안녕하세요. 유강엔터 신인 배우, 우희나라고 합니다.”“강 대표님은 투자자신데. 투자사 소속 연예인이 오디션에 참가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아니꼬운 눈으로 그녀를 바
“뭐가 문제야? 유리 신분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니까 내가 지시만 하면 서류는 아무 문제가 없어.”바론 공작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하자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저는요?”“육 서방 서류가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자네가 협조하기만 한다면...”“협조 못 해요.”육시준이 바로 대답하자 바론 공작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면서 나한테 왜 물었어? 이럴 거면 귀국할 거라고 얘기하면 되 것을 남을 것처럼 쓸데없는 말을 한바탕 물었어?’“하지만 전 유리 의견을 존중해요. 유리가 남고 싶다면 저도 함께 남을 것이고 비행기는 이미 준비됐으니 싫다고 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바론 공작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그래서 자네가 지금 내가 유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야?”육시준은 그걸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그렇지 않았다.“그런 뜻은 없어요.”바론 공작은 육시준을 힘껏 노려보더니 귀찮은지 가버렸다.‘이 자식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유리 앞에서 갖은 자상한 척을 다 하더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 기다려 봐. 내가 유리를 설득해서 이곳에 남게 하면 널 데릴사위로 맞아들일 거야.’시간이 훌쩍 지나 제2부가 시작되었다.이 동안에 육경서는 그날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잊어버린 듯이 여전히 신주리의 주위를 맴돌며 갖은 비위를 맞춰갔다.육경서는 녹화 날 댓바람부터 캐리어를 준비해 신주리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카메라 감독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한 무리 사람이 돌처럼 굳어버리더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육경서는 그런 사람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문을 노크하자 그걸 본 카메라 감독은 신속하게 카메라 초점을 그에게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경서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늘 녹화하는 날인 걸 잊지 않았죠?”“알아요.”육경서가 대충 대답하자 카메라 감독이 물었다.“그럼 경서 씨 카메
문이 쾅 하고 닫히면서 하마터면 바론 공작의 코에 부딪힐뻔하자 그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역시 딸내미는 시집가면 남이야. 자기 남편밖에 몰라. 열받아.’강유리 심부름을 다녀왔던 도우미는 무슨 일인지 살짝 예상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다시 험상궂은 바론 공작을 보더니 비밀을 배속으로 삼켜버리면서 말했다.“부부 사이 일이겠죠. 공작 어르신은 잠깐 기다렸다가...”“대디 걸이라고 누가 그랬어? 저 아이가 부부 사이의 일을 나한테 말해줄 것 같아? 이럴 때면 아비를 문밖에 버려두고 말이야. 사기꾼 같은 계집애.”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론 공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유리는 너무 흥분돼 정신이 나갔는지 육시준을 방안으로 끌어들인 뒤 화장실에 숨어 뒤에 감춘 물건을 보여줬다. 빨간 두 줄이 눈앞에 나타나자 육시준은 멍하니 서 있었고 표정은 변함없지만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육시준은 가까스로 흥분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게 뭐야? 그래서 결과가 뭐야?”“이게 뭔지 몰라? 두 줄이잖아. 나 임신했어. 이번에는 진짜야.”강유리가 활짝 웃으며 감격해 말했다. 육시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테스트 시제를 받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봐서 담담한 척했을 뿐이다. 그는 선명하게 찍힌 빨간 두 줄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더니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져도 끄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표정이 무너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다.“그렇다면...”“당신 아빠가 되었어.”강유리는 이런 육시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참지 못하고 재차 설명해 줬다. 다음 순간 강유리의 발이 허공에 뜨더니 육시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고 천정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귓가에는 흥분으로 가득한 남자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아빠가 됐어. 드디어 아빠가 됐어. 내가 이럴 줄 알았어.”강유리는 머릿속이 죽통이 되는 것 같아 작은 손으로 그의 팔뚝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진정. 진정. 정숙.”이 순간에 무슨
강유리가 잠깐 멍하더니 살짝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왜?”그러자 육시준은 강유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남은 일정은 별로 끌리지 않아.”강유리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솔직히 요 며칠은 주로 집에서 바론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남은 일정에 대해 강유리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리고 예측하는 것이 있기에 그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유리는 육시준이 눈치챘는지를 모르기에 머리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비비더니 온화하게 물었다.“여보, 내가 요 며칠 라이브에 정신이 팔려서 당신한테 신경 못 썼어.”“맞아. 그래서 어떻게 보상할 거야?”육시준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강유리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때라면 착한 육시준이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해한다고 했을 텐데 보상을 요구했다.“부부 사이에 보상을 얘기하면 서운하지.”강유리는 작은 손을 내저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육시준은 그런 강유리한테 속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 “저번에 내가 긴급회의를 했다고 나한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어? 그때는 왜 내가 서운해할 거란 생각을 안 했어?”‘이득 앞에서 못 본 체하는 건 바보가 아닌가?’하지만 강유리는 절대 육시준이 쉽게 이득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보상해 줄게. 내가 그렇게 억지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방금 전의 제의 들어줄게.”그 말에 육시준은 미묘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바라봤다.‘방금 제기한 요구라면 혹시 앞당겨서 귀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육시준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고 항상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던 그지만 강유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앞당겨 귀국하자고 한 건 사실 진짜로 귀국하자는 것이 아니고 강유리가 요즘 회사 일과 다른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자기한테 소홀한 것 같아 귀띔해 주려 했던 것인데 그녀가 바보인 척하며 그의 제의에 찬성했다. 강유리는 육시준의 놀란 표정을 보고 신
육경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욕이라도 할까 봐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수를 욕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강유리의 뒤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더욱 두려운 건 육시준이었다. 화를 못 이겨 육경서는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바닥에 있는 쿠션과 인형을 발로 차버리고는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발길에 채워 저 먼 곳에 불쌍하게 누워있는 인형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주워서는 원래 자리에 예쁘게 놓아줬다. 이건 주리가 선물한 것이기에 절대 이 아이한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육경서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형수가 한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기에 강유리가 주리를 설득해 화해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두 사람이 절친이기에 그녀를 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이렇게 좋은 절친이 있으니 주리는 절대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경서가 남도 아니고, 아아아아악!강유리가 빨리 도망치라고 했기에 주리가 육경서를 냉랭하게 대한 것이고 전혀 기회를 줄 뜻이 없었으며 오해를 풀고 나서도 화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단 말인가?육경서는 털썩 주저앉아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철없고 진지하지 못한 게 생리적 결함도 아닌데 고치면 되잖아.’육경서는 반드시 주리에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가 다시 자기를 신임할 수 있게끔 하리라고 결심했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육경서가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심리 변화와 최종 결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강유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의식 간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라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육시준이 팔짱을 끼고 베란다 옆 수납장에 기대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언제 왔어? 부르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강유리는 육경서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 여론 뒤에 또 모순이 생긴 모양이다. 솔직히 강유리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긴 하지만 육경서가 아직 철들지 못했고 반평생을 도련님으로 살아왔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만 모순이 생기거나 좌절을 겪으면 의심하고 심지어 포기해 버리기에 이대로 지속된다면 두 사람 모두 힘들어질 것이고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강유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한테 비밀을 알려드릴게요.”육경서는 전혀 감흥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비밀이요?”육경서는 주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지만 형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주리가 처음 육씨 가문에 왔을 때 어머님이 사실 두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강유리가 진지하게 말하자 육경서는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터져버렸다.“이게 다 형수님 탓이잖아요. 엄마. 아빠 앞에서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남의 집 귀한 딸을 제가 해칠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그러자 강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이게 왜 이상한 소리예요? 도련님이 저한테 직접 말했잖아요.”“형수님, 미안해요.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해줘요.”“도련님이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강유리가 느릿느릿 말하더니 이내 덧붙여 말했다.“제가 이 말을 하려는 건 어머님 태도 때문에 주리가 그날 기분이 상당히 잡쳐있었어요.”육경서는 이해가 안 가는지 되물었다.“왜요?”강유리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도련님 생각에는요?”“주리가 승벽심이 강하고 어디를 가든 항상 주목받던 사람인데 어르신들의 사랑을 못 받으니 서운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육경서 말에 강유리는 조용히 눈을 흘겼다.‘여태까지 솔로인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오랜 침묵 끝에 육경서가 눈치를 챈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붙은 건지 담대하게 예측했다.“혹시 저를 위해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바론 공작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의료진은 불같이 달려왔고 한바탕 검사를 마친 뒤 아무 문제도 없다는 아주 난처한 결론을 내렸다.“당신들 뭐 하는 사람이야?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아빠가 너무 흥분하셨어요. 단순하게 위장이 불편했을 뿐이에요.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강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론 공작을 위안했고 지금은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유리의 말에 찬성했다.“맞아요. 그럴 수도...”바론 공작은 그때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뒷말을 제지했다.‘네 자식이 감히 음식 습관이 안 맞다고 말을 하기만 해 봐. 내 딸이 어떻게 자기 집에서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 있어?’얼토당토않은 이유이고 이건 강제로 귀국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의사는 그제야 바론 공작의 말뜻을 이해하고 이내 덧붙여 말했다.“아가씨가 이곳에 오신 지 한참 되셨는데 음식 습관 때문에 위장이 불편할 건 같지 않고요. 제가 보기에는 내일 병원에 가셔서 전면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자택에서 검사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환경 제한이 있었다. 의사가 다행히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바론 공작이 비록 불만이 잔뜩 했지만 이내 손을 저으며 가보라고 했다. 강유리는 헛구역질 한번 한 것으로 아빠가 난리법석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래도 마음속은 따뜻했다. 사실 강유리는 생리가 일주일이나 미뤄졌기에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전에 한번 해프닝을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확정된 다음에 말하려고 아무 내색을 내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강유리는 도우미를 불러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하자 그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강유리는 식지로 입을 막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비밀이야. 바론 공작과 육시준이 알게 하면 안 돼.”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어둠이 내리자 강유리는 베란다 소파에 앉아 절반 넘게 진행
어떤 커플이 툭하면 사귀고 툭하면 헤어지고 그런단 말인가? 만일 이번에 톡톡히 혼내주지 않으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반드시 이번 기회에 나쁜 버릇을 고치고 진심을 보여주게 해야 한다.그리고 아직 예능 프로그램이 남았으니 함께 출연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육경서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솔직히 절친이 있으면 이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며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자제하게 해준다.전에 신주리도 마찬가지로 릴리와 신하균이 사귄다고 했을 때 가족애를 버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여기까지 생각한 신주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물었다.“그날 밤 네가 그랬잖아. 신하균과 사귀는 것이 단지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 도덕에 반했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고.”이건 릴리가 신하균과 연애한 뒤 신주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다.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신주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릴리는 말문이 턱 하니 막히더니 부자연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그런 말을 했어?”그러자 신주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분명히 했어.”릴리는 생각하는 척하더니 반박하지 않고 말했다.“맞는 말이잖아. 내가 그때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지금 운수가 안 좋아.”신주리는 릴리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융통성이 전혀 없고 일밖에 모르는 신하균은 예쁜 말로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르고 낭만도 모르며 외모 빼면 자랑할 것이라곤 전혀 없으니 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단체방에서 수다를 떨다 결과를 마저 듣지도 못하고 릴리가 오프해버리는 바람에 심심한 나머지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 검색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는 동시에 머리 한쪽 구석으로 이젠 귀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도우미들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하는 냄새가 어렴풋이 전해오자 강유리는
그 기분이 신씨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잘 유지되었고 비록 두근거리고 긴장됐지만 그래도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신주리의 이 한마디 말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얼어들었다.‘연기라고 했어...’육경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한참 동안 노려보자 불편함을 느낀 신주리는 두 사람의 운명을 책임진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빨간불 앞에 차가 멈추자 신주리는 두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투덜거렸다.“왜 쏘아보고 그래? 그러다 물기라도 할 것 같아.”육경서는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주리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오해가 생긴 게 유미나 때문인 줄 알았어.”이 말은 진심이었고 그는 유미나만 해결하면 두 사람이 화해할 줄 알았지만 신주리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장난 같지 않았다. 그를 혼내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주리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 생각이 틀렸어.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솔직히 신주리도 유미나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절대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한 번도 육경서와 그녀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상대를 대하는지의 문제였다. ...여론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오늘 밤 어떤 사람은 상심에 빠졌고 어떤 사람은 수심이 가득했다. 유미나와 매니저는 서로 원망하기에 바빴고 게다가 거액의 배상금까지 떠안게 되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육경서와 신주리도 아직 화해하지 못했기에 똑같이 수심에 빠져있었다. 신주리는 절대 나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귀신 작전을 펼치러 월계만으로 달려가 눈에 띄는 커플만 있으면 헤집어놓을 심산이었다. 릴리 집에 도착해보니 뻔뻔한 친오빠는 그곳에 없었고 릴리 혼자만 절친 단체방에서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신주리였다.“핸드폰이 그렇게도 좋아?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서
현재 신주리 실력과 지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지하 주차장에 신씨 가문 차량이 오래전부터 대기하고 있었고 경호원이 기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서슬이 퍼레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신주리는 매니저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차를 향해 걸어가자 경호원이 깍듯이 차 문을 열어줬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오르니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신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육경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기자한테 포위돼 못 빠져나가는 것을 어머님, 아버님이 구해주셨어.”신명진은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신주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다 가족인데 모순이 있으면 집에 가서 문 닫아걸고 얘기해.”그러자 한영숙도 한마디 곁들었다.“그래. 이 자식이 평소에는 믿음이 별로 안 갔는데 오늘 결정적인 순간에 너를 위해 서슴없이 나서는 것을 보니 그나마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신씨 부모님은 신주리의 열혈 팬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수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단지 팬에 그쳤고 딸이 실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신주리가 입을 열고 뭐라고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차는 서서히 신씨 가문 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에도 육경서가 신씨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사위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하필이면 또 이런 특별한 사건이 생긴 시점이라 덜컥 겁이 났다.바로 이때 신주리가 입을 열고 말했다.“두 분은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아직 할 일이 있어 나갔다 와야겠어요.”그러자 한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녁 먹을 시간인데 뭐가 그렇게 바빠?”“회사 여부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요.”신주리는 대충 아무 핑계를 대면서 두 사람을 차 밖으로 밀어냈다. 합리적인 이유라 부모님이 두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영숙은 차에서 내리면서 낮은 소리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