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궁!김찬욱의 말에 수저를 들려던 강유리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 멈추었다.그리고 우습게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음흉하게 웃던 신주리의 표정이었다.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김찬욱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흘렸다.“아, 아... 전 또 형수님께서 일부러 준비하신 줄 알았죠. 뭐, 잘됐네요. 저도 요즘 몸이 허하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참에 제대로 몸보신 좀 하죠.”“그래. 필요한 사람이 많이 먹어야지.”육경서가 낚지 호롱 두 개를 던져주다시피 김찬욱에게 건넸다.“...”이런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다간 누구 하나 체기에 병원으로 실려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거란 생각에 육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역시, 남편 생각해주는 건 와이프뿐이라니까.”“아, DH 제품들도 전부 리콜되고 당신한테 고마운 게 많아. 이렇게라도 고백해야지.”“쿨럭, 쿨럭.”순간 낙지에 목구멍에 콕 걸린 듯한 기분에 김찬욱은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참, 아까 김 대표님 말씀으론 다들 서로 친하다면서?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어도 돼? 우정에 금이라도 가면 어쩌지? 찬욱 씨가 많이 슬퍼할 거 같은데...”강유리가 육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평소의 맑은 눈동자가 아닌 의심이 가득한 눈동자.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육시준의 시선이 김찬욱에게 향하고 육경서는 테이블 밑으로 김찬욱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대답 잘해라, 이 자식아...’자연스레 잔에 든 음료를 마신 김찬욱이 한 마디 툭 뱉었다.“슬프긴요 뭐.”하지만 잔에 든 액체를 삼킨 김찬욱이 미간을 찌푸렸다.‘육경서 이 자식... 잔에 보드카를 담으면 어떡해... 맹물인 줄 알고 잔뜩 마셨잖아! 아니지, 지금은 알코올의 힘이라도 빌리는 게 맞아...’아예 잔에 든 음료를 전부 원샷한 김찬욱이 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오늘은 진심으로 사과드리려고 온 겁니다.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저희 측 잘못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직원 관리를 잘못한 제 잘못이겠죠.”“사과라... 어떻게든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보글보글...연포탕이 끓는 소리만이 적막이 잠긴 식탁을 메우고...어느새 술기운이 잔뜩 오른 김찬욱은 육경서의 손을 더 꽉 부여잡았다.“아까 우리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한편, 바위처럼 굳어버린 육경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김찬욱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하, 이 손...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잘라버리고 싶다...’깜짝 놀란 건 강유리도 마찬가지였다.‘세상에...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어쩐지... 뭔가 이상하긴 했어. 김찬욱 대표가 뭔가 말하려고 하면 도련님이 바로 막아내는 거 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했었는데 커밍아웃 때문이었어?’“형, 형수님.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경서가 자꾸만 비밀로 하자고 해서요. 저도 나름 기업 대표고 경서도 연예인으로서 얼굴 다 팔렸잖아요. 요즘 이미지도 좋은데 게이설이라도 돌면... 이해하시죠?”진심어린 눈동자에 감동한 강유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 그럼요. 그런데...”육경서가 단순히 엔터회사 소속 연예인이었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찬성했을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을 순 없는 관계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인연인지 알고 있어서였다.하지만, 육경서는 그녀의 남편, 육시준의 친동생이기도 하다.자기 동생의 커밍아웃에 피를 나눈 가족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호기심이 앞섰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육시준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피식 웃었다.“이해는 하지만... 허락은 글쎄...”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찬욱은 아예 한 술 더떠서 두 사람의 기구한 러브스토리까지 꾸며내 들려주는 기염을 토해냈고 세기의 사랑이라고 타이틀을 붙여도 될 만큼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강유리는 물론이고 육경서조차 본인이 정말 이런 경험을 했던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그렇게 한참을 혼자 떠들던 김찬욱이 머쓱한 표정으로 또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런데 형이 무슨 짓을 하셨길
강유리, 육시준이 자리를 뜨고 식탁에는 어색함만이 남고 말았다.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김찬욱이 방금 전 말했던 그 광경들이 오버랩되며 육경서도, 김찬욱도 동시에 헛구역질을 시작했다.“욱!”세상에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른 거짓말이 또 있을까?한편, 2층 복도.잠옷을 갈아입고 씻으려던 강유리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채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베이지색 잠옷에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목소리, 귀여운 고양이귀 모양 머리띠, 그리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과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처럼 조심스러운 움직임...착장도 행동거지도 10대 소녀라고 해도 될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육시준은 목덜미를 잡다시피하여 강유리를 안방으로 끌어당겼다.“아, 왜 그래! 궁금하지 않아? 당신 동생 인생이 달린 일이잖아.”강유리가 발버둥을 치며 나지막히 경고했다.안방문을 닫은 뒤에야 손에 힘을 푼 육시준이 말했다.“글세, 내가 너라면 네 걱정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그... 그게 무슨 소리야?”강유리가 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워낙 조용한 분위기인데다 어딘가 야릇한 눈빛.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강유리가 옷을 여미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큼, 나 아직 일 안 끝났어. 그리고 이제 겨우 7시야. 정신 좀 차려.”“그래? 남편 몸 걱정을 지나치게 하길래 오늘 일은 다 마친 줄 알았지...”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 육시준이 자연스레 셔츠 단추를 하나둘씩 풀기 시작했다.“윽...”대충 핑계 몇 마디 대서는 벗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강유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진짜... 진짜 당신 몸 보신 해주고 싶었던 거였어. 그런데 하필 메뉴들이...”한참을 뒷걸음질 치던 강유리의 발목이 소파에 닿고 순간 중심을 잃은 강유리가 털썩 소파에 쓰러졌다.어느새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헤친 육시준이 소파에 눕다시피 한 강유리 위로 다가왔다.“메뉴가 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특별히 준비한 건 아니고?”
한편 1층 식탁.한참 헛구역질만 하던 두 사람 역시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진심으로 현타가 밀려온 김찬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난 진짜 할만큼 했다. 이 정도면 너희 형 화도 풀리겠지?”“양심이 있다면 풀어야지.”육경서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또 다시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두 사람은 동시에 술잔을 들어 안에 든 액체를 원샷했다.그리고 잠시 2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김찬욱과 육경서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올랐다.역시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육시준은 부스스한 머리 때문인지 단순히 옷 때문인지 평소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다.애꿎은 술만 마셔대던 육경서, 김찬욱이 쪼르르 달려왔다.육시준이 육경서에게 묘한 눈빛을 보내고 형에 관해선 눈치 백단인 육경서가 바로 입을 열었다.“두 사람 천천히 얘기 나눠. 난 내일 아침 일찍 촬영이라.”이때다 싶어 도망치는 육경서를 김찬욱은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저 자식이 정말... 아주 의리는 제대로 말아드셨구만.’“대표님.”그리고 김찬욱도 드디어 진지한 얼굴로 육시준을 마주했다.여유로운 얼굴로 소파에 앉은 육시준이 그에게 물었다.“네가 이 사람 저 사람 잘 만나고 다니는 줄은 알았지만... 우리 집안 사람한테까지 눈독 들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감정을 알아챌 수 없는 담담한 목소리에 김찬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큼, 경고인가?’“사모님과 어떤 상황이라는 건 대충 들어서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더다 보니... 그리고 저희 측 직원과 있었던 일은 정말 몰랐어요. 영상도...”“워낙 바쁘니까 이해해. 그리고 내가 직접 오더 내린 게 아니라 임 비서가 움직인 거니까 소홀히 여길만도 했지.”‘윽, 이 사람 이렇게 잘 비아냥대는 성격이었던가?’차라리 화를 내면 좋을 텐데. 아무 감정없이 덤덤하게 말하니 진심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휴.”잠시 후, 김찬욱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정말 죄송합니다. 제 소홀로 형님
강유리는 침을 꼴깍 삼켰고, 부자연스럽게 잠옷의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느릿느릿하게 침대 가장자리로 걸어가서, 그를 지나쳐 안으로 기어갔다. 이불에 들어가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천천히 이불을 끌어 내리더니 큰 눈을 드러내고 옆에 있는 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육시준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뗐고,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졸려?”그녀가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그는 등불을 끄고 자기 쪽에 있는 탁상 등 불만 켜놓았다. 그의 시선은 다시 화면을 향했다. 강유리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눈빛이 점점 흐려져만 갔다.‘이게 끝이야? 계속하지 않는 거냐고! 방금 샤워도 했고 바디로션도 향 신경 써서 발랐는데…… 양치도 두 번이나 했고, 스프레이까지 뿌렸는데…… 팩도 했고 열심히 피부 관리도 했는데…… 겨우 이런 반응이라고?’그녀는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면서 손가락을 뻗어 그의 팔을 콕콕 찔렀다. 말랑말랑한 촉감에 육시준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왜 그래?”“아직도 화났어?”강유리는 떠보듯이 물었고, 육시준은 자신을 떠보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설득하듯 조곤조곤 말했다.“우리가 부부긴 하지만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내가 떠보는 건 내가 모르는 면을알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침대에 팔꿈치를 기댔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헐렁한 잠옷은 어깨에 걸려 있었다. 육시준의 시선에서 보면 마침 옷깃 밑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는 바로 시선을 뗐다. 그런 그를 보다가 강유리는 직접 달려들어 그의 가슴에 반쯤 안긴 채 그의 머리를 자신의 방향으로 돌려세웠다.“뭐 대단한 일이라고, 뭘 흥분하고 그래?”“……”둘의 시선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나는 어두웠고, 하나는 콧대가 높았다. “기분 나쁘면 솔직하게 말해! 다음에 안 떠보면 될 거 아니냐고! 그런데 알아둬야 할 건,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창밖은 고요하고 밤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 반짝이고, 저녁의 쌀쌀한 바람 한 가닥이 커튼이 살짝 스쳤다.얼마 후, 강유리가 곧 이성을 잃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육시준은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유리야.”“응?”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다 못해 빠져들어 갈 것만 같았다.육시준은 잠시 숨을 고르며 한참 침묵하다가 살짝 일어나더니 그녀와 거리를 두고 말했다.“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좀 비울 수 있어? 나란 사람을 완전히 알게 해줄게. 날 떠볼 필요도, 시험할 필요도 없어.”강유리가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말했다.“사실 난 상관없어. 누구나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잖아.”하지만 시험이나 호기심은 본능이었기에 그녀는 그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였을 뿐이었다.“내가 상관있어.”육시준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말을 덧붙였다.“난 네가 나를 다시 봤으면 좋겠어.”오늘 저녁에는 일이 잘 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유리가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과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육시준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고, 오히려 죄책감이 더 커져만 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한다. 오해와 여러가지 이유로 그의 정체성은 점점 더 민감해졌다. 분명히 아주 작은 일인데 속였다는 생각 때문에 갈수록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졌다. 계속하다가는 일만 엉망이 되니 곧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육시준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일단 결정을 내리면 즉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시기를 밸런타인데이로 잡았다. 그의 생애 첫 밸런타인데이였다.강유리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았다. 그동안의 관찰을 통해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육시준이어느 정도 파악됐기 때문이었다. 성격도 좋고 인품도 좋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게 장점이고, 유일한 단점은 태생이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조건으로도 그는 많은 일들을 척척 해냈다. DH 브랜드 퇴출은 좋은 예인데,
성홍주도 울분을 발산할 길이 없었고, 다만 찻잔을 단단히 쥐며 말했다.“몹쓸 년 같으니라고. 자기 성씨를 잊은 게 아닌가 싶어!”왕소영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정말 유리 때문이라면 신영이를 좀 도와줘.”성한일도 이를 악물며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러니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성홍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지금의 유리는 3년 전 손아귀에 있던 그 소녀가 아니야……’그녀는 너무나 모질고 무정하게 변했으며, 그녀의 뒤에는 또 대단한 후원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성홍주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천강이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오랜 세월 동안 지내온 부부 사이였기에 왕소영은 성홍주의 눈빛만 봐도 그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슬퍼졌다.“감성이 깊은 애니까 속상해하고 있지 않을까?”“펑!”성홍주는 컵을 탁자 위로 세게 내리치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신영이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속상해할 자격이나 있어? 그 집 가서 전해. 이 혼사 없던 일로 한다고!”지난번 사건이 알려지자, 성홍주는 진작에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신영의 뛰어난 외모와 명성이 강유리보다 얼마나 더 값진지 모르니, 틀림없이 더 훌륭한 남자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성신영은 2층 복도에 서서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모든 말다툼을 들으면서도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타인 엔터는 지금 빈털터리이고 인심이 흐트러지면 조만간 끝장이 날 것이다. 임천강의 이런 수법은 육씨 가문의 발가락 하나에도 비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절대로 강유리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를 차버릴 좋은 기회다. 그녀는 계단을 따라 내려와 온화한 목소리로 가족들한테 인사했다.“아빠, 엄마, 왜 아직도 안 주무셔?”성신영은 금방 울어서인지 눈시울이 붉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몹시 초췌해 보였다.“불쌍한 내 딸아
이렇게 성신영은 온갖 서러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고, 강제로 임천강과 선을 그어야 했다. 임천강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저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회사에서 지내야 할 만큼 머리 아픈 일이 수두룩했다. 무수히 많은 사업이 계약 해지를 하게 되고, 위약금 배상으로 인해 회사의 자금줄이 돌지 못하자 그는 마침내 예비 장인어른을 떠올렸다. 동시에 며칠 동안 성신영과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는 뭔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날 그녀가 짜증 섞인 말투로 대화하다 전화를 끊은 뒤로 다시는 연락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는 재빨리 JL빌라로 돌아왔는데, 이미 차가 못 들어가게 조치되어 있었다. 이 집은 성신영의 것으로, 그가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열통 넘는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마침 혼사를 깨려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게 됐다. 합의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그것은 말 그대로 통보였다.그는 혼사가 깨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겨우 며칠 사이에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됐지?’이 모든 것은 강유리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가 곤경에 빠진 틈을 타 유강 엔터는 스타인 엔터의 많은 연예인들한테 손을 내밀었고,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꽤 유명한 연예인들과 이름난 프로듀서들이 줄줄이 유강 엔터로 모여들었다며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이 모든 것은 강유리의 복수극이라고, 그녀의 목적은 스타인 엔터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다들쉬쉬했다. 하지만 스타인 엔터의 성과는 원래 강유리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소수였다. 그저 그녀의 것을 되찾았을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 유명 샵.조보희가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는데, 팔로워가 수만 명이나 늘어났다고 했다. 인터넷에는 지금 온통 사과의 목소리뿐이며, 또 많은 의류 브랜드가 찾아와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