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방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느긋하게 스킨 케어까지 마치고 테이블 앞에 앉아 내일 사용할 제안서를 작성했다.내용은 연정훈과의 협력.밝게 켜진 전등 아래 양시연은 자꾸 넋이 빠지고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연정훈을 떠나던 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것 같았고 두 사람의 추억은 마치 ‘유물’처럼 느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지원이 진실을 고백하고 적게는 반년 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를 먹었다.그때는 미처 연락을 끊지 못해 핸드폰에는 자주 연정훈의 연락이 찍혀 있었다.하지만 그 뒤로 양시연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그 일들만으로도 벅찬 나날을 보냈다. 매일 놀람과 경악 속에서 잠이 들고 깼으며 연정훈이라는 사람을 차차 잊어갔다.그래서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모든 연락을 끊었다.끊임없이 배우고 변하고 달라지는 동안 양시연은 매일매일을 바삐 보냈다.그리고 최근 들어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경인으로 돌아오게 된 건 양지원이 건넨 연습 프로젝트에서 인터참 프로젝트를 뽑았기 때문이었다.오늘 연정훈을 만나도 큰 감정 변화가 없을 줄만 알았는데 양시연은 자기 자신을 참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경인에 남겨둔 선명한 발자국이었다.양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새벽 2시를 넘겨버렸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 있던 양시연은 살짝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긴 소매와 긴 바지의 잠옷을 입은 양지원이 간식거리를 들고 서 있었다.양시연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엄마, 금방 돌아오신 거예요?”정원에 차가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었다.그 말에 양지원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방에 불이 켜지 있길래 간식 좀 챙겨 왔어.”양시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테이블 위로 간식을 내려 두며 양지원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네 아버지가 그러던데 술을
양지원이 인상을 팍 썼다.“너한테 넘기지 않는다는 거야?”“네. 태클을 걸고 싶은 모양이에요.”양시연의 솔직한 말에 양지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뭐, 정훈이는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런가 보죠.”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차였다고 생각해 체면을 구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양지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더니 좋은 수가 떠오른 것처럼 몸을 바짝 일으켰다.이에 양시연도 흥미를 보이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며칠 뒤 너에게 국내 인사들을 소개해 줄게. 그런데 가장 먼저 연씨 가문으로 가자. 정훈이 엄마와 내가 어떤 사이인데 바로 널 수양딸로 삼고 큰 잔치를 벌이게 하는 거지. 그럼 너와 정훈이는 오빠 동생 사이가 되는 거야.”“...”양시연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자신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는지는 잘 몰라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의 표정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양지원은 흥이 난 듯 계속 말을 이었다.“그리고 정훈이 엄마가 널 괴롭혔다고 했지? 마침 잘됐네. 우리 한번 제대로 갚아주자.”모자를 한꺼번에 꼽 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사모님이랑 친한 친구 사이 아니었어요?”양지원이 역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전해 들었어. 보아하니 빈부로 신분에 급을 메긴 것 같은데 그동안 연락을 아예 끊고 지냈어.”“절교예요?”“비슷하지.”양지원이 턱을 감싸며 말했다.“날 먼저 찾아와도 거들떠보지 않았지.”“정말요?”“그래. 그래도 네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먼저 연락해 식사 자리를 잡을게. 방심한 틈을 타 널 소개해 주는 거야.”벌써 구체적인 틀이 잡혔다.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양지원이 이런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니까 열심히 들어줘!’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임했다.그리고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건지 양시
“방금 말한 계획이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이렇게 해봐. 먼저 연정훈을 꼬셔보는 거야. 과거에 정훈이도 네 감정을 이용했다며? 너도 한번 갚아주는 거야!”“...”양지원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가장 아슬아슬해지는 순간에 연씨 가문을 찾아 오빠로 삼는 거지!”결국은 그 오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양시연은 이마를 짚었다.자신이 왜 양지원의 연애 충고를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지원은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오늘 밤엔 흥분에 겨워 말을 멈추지 않았다.그러자 양시연이 제때 말을 끊었다.“엄마, 그만해요. 난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양지원이 입을 삐죽였다.모녀는 야밤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테이블에 앉았다가 소파로 옮겨 2차전을 이었다.이런 이벤트는 과거 몇 년 사이 종종 있었다.양지원은 양시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새벽 시간에 자주 방을 찾아왔었다.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일도 이렇게 천천히 양시연에게 알렸다.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양지원은 긴 소매와 긴 바지 차림이 불편했다. 그래도 갑자기 슬립으로 갈아입는 건 이상했으니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방을 나서려는데 양지원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요즘 혁수랑 연락하고 있어?”“네. 저번 주에 연락했었어요.”양지원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나한테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됐어.”진실을 알아차린 양혁수는 꼭 한번 오성호와 소현정을 만나고 싶다고 뜻을 밝혔고 모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양지원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양지원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그리고 모든 상황이 조금 진정되고는 영국으로 훌쩍 떠나가 버렸다. 양씨 사업을 조금 물려받은 뒤 창업한다더니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들었다.양시연이 양지원을 위로했다.“자꾸 슬쩍 엄마 상황을 물어봤어요.”그 말에 양지원이 눈을 반짝였다.“정말?”“네!”양시연은 통화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
9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회의실은 난리가 났다.손지은은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감히 날 잘라요?”양시연이 말했다.“네. 아주 잘 들으셨네요.”“왜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유를 몰라서 물어요?”손지은이 말문이 막혔다.양시연은 손지은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훑었다.인터참은 과거 거의 무너져가는 의료 보험 회사였다. 지금 남겨진 직원들 절반 이상은 그 회사 직원들이었다.회사 업무에 익숙해 보여 양시연은 경력자를 골라 남겼다.인수하고 처음에는 다들 열심히 일을 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양시연이 ‘말 잘 듣는’ 대표라는 인식이 강해지자 점점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특히 손지은이 제일 대표적이었는데 자꾸 양시연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새로 사람을 뽑아 책임자를 따로 만들었고 어린 친구들이 더 착실하게 일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그런데 손지은은 성과를 내는 신인들이 꼴사나웠는지 문제가 있는 땅을 구매하도록 함정을 팠다.“토지 인수 건은 려욱 씨가 마음이 급해 큰 실수를 한 건 맞지만 다들 참여를 했으니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가 사직을 당해 마땅한지는 잘 알겠지요. 보상금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고 회사 측에서 손해 배상도 신청할 겁니다!”“참여했던 사람들은 제 발로 이 회사를 나가던지 앞으로 숨죽이고 회사 생활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내가 손해 배상 신청하면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빚이 생길 겁니다. 회사에 이렇게 큰 손해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큰 범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요?”“내가 행여나 모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미 경찰에 신고했고 충분한 조사를 거쳐 모두 알아냈어요!”회의실은 정적이 흘렀다.다들 양시연에게 이렇게 강한 모습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손지은은 아예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러자 양시연은 비서를 시켜 경호원을 대동해 직접 치워버렸다.손지은의 난동이 겨우 잠잠해질 무렵,
양시연은 미리 손님이 올 예정이라 회사에 알렸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미처 몰랐다.게다가 연정훈은 진수빈과 기사 한 명만 대동했다.어찌 보면 사적인 일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양시연을 발견한 진수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시연 씨, 오랜만이에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굳이 이름을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연정훈을 사무실로 안내했다.진수빈은 눈치껏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양시연의 비서가 차를 따라주러 들어가려 하자 빠르게 막아섰다.“연 대표님이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 죄송하지만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진수빈의 말에 비서는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정훈의 취향을 물었다.“다 괜찮습니다.”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고, 차라리 아침 식사를 하고 탈이 난다면 연정훈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직접 차를 따랐다.주변은 온통 조용하고 연정훈은 바삐 움직이는 양시연을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겨우 몇십 평방 남짓한 사무실은 연정훈의 휴게실보다도 작았다.하지만 사무실 배치에 많은 신경을 쓴 건지 탁자 위에 편백 화분이 눈에 띄었다.편백 나무 향이 솔솔 나는 사무실 안에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양시연이 있었다.아늑한 분위기에 잠긴 연정훈을 양시연이 불렀다.“대표님.”“맛이 좋네요.”연정훈은 뜨끔해 갑자기 칭찬을 날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차를 내리는 사람이 손맛이 없는 편이네요. 너무 오래 숙성해 좋은 차를 낭비했어요.”“...”‘내가 차를 내린 걸 봤어? 봤냐고?’그러나 양시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제 밑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아직 신인이라 이쪽으로는 아직 많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학원을 끊어줘야겠군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지금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본인 같은 사장 아래에서 직원들이 배울 수 없을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새벽이 되어서야 양시연은 사건의 전말을 들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표세연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일곱 명 모두 구조되었고 여섯 명은 이미 의식을 되찾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팀장을 맡은 이가 가장 위독한 상태였으며 아직도 응급 치료 중이라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임성원이 보고했다.“깨어난 사람들 모두 책임자가 오후에 연 대표를 만나 서명을 받은 승인 문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증언했습니다.”“그럼 그 승인 문서는 어디 있나요?”“없습니다. 모두 봤다고는 하지만 문서는 책임자가 보관하고 있었고 현재 그가 응급실에 있어 찾을 수 없습니다.”양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승인 문서도 없이 그냥 입 맞추고 연정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죠?”“그 사람들의 말이 일관되게 똑같아서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죠. 그 책임자는 그냥 가짜 승인 문서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요. 그러면 직원들은 실제로 봤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증언할 테고. 하지만 승인 문서가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죠?”‘한심하다. 이렇게 조잡한 수작을 부리다니.’이 사람들은 연재혁이 패배할 거로 생각하고 양시연의 아버지가 위중하다고 생각하니 막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 책임자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임성원은 사실대로 말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상태가 위독했습니다.”양시연은 욕이 나올 뻔했다.세상이 참 잔혹하다. 해당 라인의 최고 책임자는 연정훈이었고 규칙에 따라 사고가 발생하면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그 책임의 경중이 다를 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승인 문서도 없이 증거도 없이 오직 입을 맞추고 연정훈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표세연은 냉정하게 말했다.“그 책임자가 살아 있기만 하면 조사를 통해 연정훈과의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걸 밝힐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죽으면 비록 연정훈이 주범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억울한 오명을 쓸 가능성이
옛집에 도착하자 표세연은 서둘러 양시연을 맞이하여 앉히고 다양한 간식들을 차려주며 소파를 정리해 편안하게 앉게 했다.“이쁜 얘기야, 한 달 넘으면 할머니랑 만날 수 있겠네.”표세연은 양시연의 배를 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옆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간식을 놓으면서 말했다.“도련님, 요즘은 사모님과 함께 집에서 지내시면 좋겠어요. 도련님께서 오시면 사모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요.”양시연은 표세연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챘고 표세연이 불면증에 걸린 것 같다고 느꼈다.표세연은 아줌마를 보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아주머니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는데 어머니께서는 아직 심리적으로 훈련이 덜 된 거 같네요.”표세연이 연정훈을 가볍게 째려보았다.“그 전과는 달라. 예전엔 할아버지가 도와주셨지만 지금은 여기서 할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어.”양시연은 위로하며 말했다.“사실 더 승진하지 않더라도 다른 기회는 있을 거예요.”표세연은 고개를 저었다.“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지. 무승부는 없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아기의 이름으로 전환했다.표세연은 확실히 기뻐하며 말했다.“성씨는 네가 선택할 권리를 줬으니 이름을 지을 때는 아이의 할아버지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좋아요. 이름은 아버님께서 정하게 하세요.”양시연은 여유 있게 말했다.표세연은 다시 양시연의 배를 만졌고 거실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연정훈은 전화를 받고 회사에 가야 했다.“주말인데 전혀 시간이 없네.”표세연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으며 연정훈에게 차 조심히 운전하고 저녁에는 최대한 일찍 돌아오라고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이자 표세연도 기뻐했다.연정훈이 떠난 후 양시연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분위기도 완벽했다.부승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우희에게 입을 맞췄다.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반우희가 발끝을 들자 부승원은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깊게 키스했다.반우희의 몸에서 오래 스며든 듯한 강한 딸기 향이 났고 부승원은 그 향이 가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반우희는 식사 후 화장실에서 거의 반병을 썼고 혹시 음료처럼 한 통을 다 마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고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핥으며 부승원의 입술도 스치듯 지나갔다.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자 반우희는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부승원의 가슴에 묻었다.“이제 가야 해. 승주가 널 찾을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반우희는 가볍게 대답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불빛은 어두웠지만 부승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정말 좋다.’반우희는 부승원을 마주 보며 뒷걸음치자 부승원이 말했다.“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네.”반우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두 걸음 더 뒤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다.부승원은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고 입안의 딸기 향이 한층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갑자기 멈추자 부승원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부승원 씨.”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몸을 숨겼다.부승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뭐 하는 거야?”반우희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만들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오늘 밤에 문제집 다 풀 거예요.”부승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적당히 해. 문제집이 너한테 질려서 도망가겠어.”반우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부승원은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로 향했다.차에 다가가자 그는 잠
두 사람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운전사는 이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반우희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반우희는 부승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없이 매달렸다.부승원은 마음이 약해져 반우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집에 가기 싫으면 한 바퀴 더 돌면서 간식이라도 사줄까?"“싫어요.”반우희는 부승원을 더욱 꼭 안았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재빠르게 그의 턱에 가벼운 키스로 응답했다.주변은 어두컴컴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부승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평소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너그러움만이 남아 있었다.“마라 새우를 많이 먹으면 원래 이렇게 집착하게 되나?”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새우 탓이 아니라 달이 문제에요.”“달이 뭘 잘못했는데?”“나는 인정해 이건 전부 달 때문인 것을.”반우희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승원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조용한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 구절을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음성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달빛이 너무 아름다웠고 너는 너무 다정했어. 그 순간 오직 너와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부승원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정도면 달이 욕을 좀 먹어도 억울하지 않겠네.’“부승원 씨.”반우희가 그의 품 안에서 부르자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흔들리지 마세요. 부모님께 휘둘리지 말고 날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마요. 난 당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반응 없이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아닌데? 너 승주한테 돈만 많이 주면 나랑 헤어지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에 부승원은 반우희의 문제지를 채점하고 있었다.동그라미가 이어지고 반우희는 제 자신에게 박수를 쳤다.“와! 다 맞았어요?”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끔 보며 말했다.“오바하지 마. 너 몇 문제 운으로 맞춘 거 다 알아.”“누가 그래요?”부승원은 바로 세 번째 문제를 짚으며 말했다.“이거 설명해 봐.”“...”반우희는 혀를 쯧쯧 찼다.“운도 실력이에요.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다 맞은 게 중요한 거죠!”부승원은 못 들은 척하고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에 찰싹 붙어 설명을 들었다.“이젠 곧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래. 문제 잘 풀어서 따로 과외를 할 필요는 없겠어. 오늘은 일찍 돌아갈 것 같네.”“그게 뭐예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였다.“내가 열심히 문제 풀어서 다 맞춘 건 시간 짜내서 변호사님이랑 연애하려고 그런 거란 말이에요!”‘이럴 줄 알았으면 두 문제는 틀리는 거였는데.’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교과서를 내려놨다.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부승원을 보며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정말 목각처럼 딱딱한 사람이야. 다음부턴 내가 좀 더 머리를 써야겠어.’부승원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신발 갈아 신고 같이 내려가자.”반우희는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밖으로 걸었다.그러자 부승원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승주한테 말해둬. 조금 늦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왜요?”반우희가 고개를 휙 돌렸다.“기사님이 아래층에 있는 거 아니에요? 금방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은데?”부승원은 반우희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연애하자며?”‘음?’반우희는 바로 눈을 반짝였다.“헤헤.”‘딱딱한 목각이라는 말 취소!’반우희는 활짝 웃으며 승주를 찾았고 빠르게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부승원은 반우희더러 문밖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세 아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반우희는 문밖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주와 아이들은 숙제하러 방으로 돌아갔다.반우희는 부승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고 부승원에게 자리를 찾아준 뒤 열심히 문제지를 풀었다.부승원은 그제야 반우희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자신이 반우희에게 잘해주는 날이면 반우희는 보답을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정말 바보 같긴.’“2년 안으로 사법고시 넘을 자신 있어?”반우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자신 있습니다!”“사법고시 넘으면 뭘 할 건데?”“음... 사건 받아야죠?”“...”“꿈도 야무져. 그렇게 쉽게 사건 의뢰가 들어올 것 같아?”반우희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그때, 부승원은 부모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 있어?”“지금 하고 있잖아요?”“그거 말고. 좋은 대학 다니고 싶은 그런 거 말이야.”“에이. 학력도 안 좋은데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그게 뭐가 중요해. 너만 좋다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어느 대학인데요?”“세계 어디든.”반우희는 멈칫하더니 펜을 내려두고 부승원을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날... 해외로 보내려는 거예요?”반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연애를 실컷 하고 해외로 보내, 반 헤어짐 상태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설명하려고 했으나 말 대신 볼을 쭉 잡아당겼다.“해외 연수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금 성적으로는 돈 가득 쏟아부어도 안 돼.”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그쵸? 아무리 나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렇게 뭐든지 해주면 안 되는 거죠.”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 연수 가고 싶어?”부승원은 다시 떠보듯 물었고 반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요.”“왜?”반우희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부승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반우희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요?”반우희가 다가오자 희주는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비밀이에요.”반우희는 몰래 혀를 찼다.다른 한편, 배가 부른 승주는 애어른처럼 요즘 가정 상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우리가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신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 사람 덕분이죠.”그러자 반우희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바로 누나... 의 남자 친구 덕분이에요!”“...”“야!”반우희는 승주는 슬쩍 노려봤으나 승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몰래 맥주 맛을 보더니 쓴맛에 혀를 두르며 말했다.“매형, 솔직히 우리 셋이 발목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꼬맹이들은 모두 부승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털털한 반우희와는 달리 세 아이는 아닌 척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그래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게 불편하고 누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가재를 입에 넣더니 승주와 짠을 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실력으론 너희 셋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승주는 몰래 숨을 돌리며 부승원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식사 막바지에 다다르니 가재는 줄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 오갔다.반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찾았다.희주도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다.부승원은 승주가 아직도 저에게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누나한테 들어보니 매형 어머니가 오늘 누나 만났다면서요?”부승원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말했다.“그래. 조금 긴장한 건지 딸꾹질했는데 그것도 너한테 말한 거야?”“별건 아니고, 너무 창피했다면서 누나가 용기를 달라고 했어요.”“어머니가 우희 괴롭힌 거 아니야. 우희가 지레 겁을 먹은 거지.”“누나는 언젠간 삼촌 어머니가 드라마처럼 수표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누나는 어떻게 할 대책이었는데?”“대책이라
부승원은 승주의 초대를 받고 반우희의 집으로 향했다.집 안은 벌써 떠들썩했는데 승주와 반우희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었다.“마늘 향이 제일 맛있어!”“에이 마라가 찐이죠!”승주가 반우희를 타이르듯 말했다.“마늘 향 먹으면 양치해도 마늘 향이 남는데 남자 친구랑 뽀뽀할 수 있겠어요?”“...”반우희는 순식간에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틈을 타 승주가 마지막 승부사를 날렸다.“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요. 우리 마라 맛으로 해요!”“마늘 맛 조금만.”반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마늘 맛도 조금 해줘. 너희 누나 정말 먹는 거에 진심이라니까.”부승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 목소리에 승주와 반우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우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왔어요?”승주는 그사이에 삶은 가재를 한입 먹으며 부승원을 불렀다.“삼촌, 여기로 와서 앉아요. 동준아, 우리 매형한테 술 따라드려!”“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주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삼촌이었다가 매형이었다가 호칭 좀 통일하면 안 돼?”“나한테는 삼촌이지만 누나의 남자 친구일 때는 매형이니까 틀린 거 없잖아요!”승주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어휴. 좀 조용히 해!”그러나 승주는 이런 일로 풀이 죽을 아이가 아니었고 바로 가재를 입안 가득 넣었다.부승원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남은 거 뭐 있어? 내가 할게.”그러자 반우희가 말했다.“오이무침할 줄 알아요?”“응.”“그럼 부탁할게요.”주방에는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온도가 아주 뜨거웠다.부승원은 언젠간 이 집의 가전제품을 다 새것으로 갈아주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손놀림이 빠른 부승원은 빠르게 오이무침을 완성했다.반우희는 가재를 입맛별로 나눠 상에 올렸고 작은 상이 부러질 듯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되었다.부승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집을 오갔던 터라 이젠 익숙하게 밥상 앞에 앉았다.희주는 부승
날이 어두워지고 부승원은 본가로 향했다.부승희는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원을 발견한 채애정은 활짝 웃으며 손 씻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약속인 것이냐?”아버지 부형석의 질문에 부승원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대답했다.“네.”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니 부모님은 부승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대신 꿀물로 속을 채우게 했다.“네 어머니가 오늘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어. 복스럽게 생겼다던데.”“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예쁘던데 나이가 좀 어려요.”채애정의 말에도 부승원은 묵묵히 꿀물을 마시며 대꾸하지 않았다.한참 뒤 부혁석이 물었다.“그 아이랑은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무슨 말씀인지?”부형석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봤고 채애정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마요. 우리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래요?’부형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질문을 이어가기로 했다.“나와 네 어머니의 생각은 그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네 옆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해외 연수를 다녀와 몇 년 뒤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그러자 채애정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본인 생각이면서 왜 나까지 함께 묶고 그래요?’부형석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게를 잡았다.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이런 부승원의 모습에 채애정과 부형석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내려놓은 잔만 챙겨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도련님 부승원에게 쉽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부승원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시선에 두 사람은 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졌다.“몇 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가 결혼하면 그래도 짝으로 걸맞으니 창피하지 않으실 거고, 내가 그동안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실 거잖아요. 그 아이는 돈과 명예를 가졌으니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