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미리 손님이 올 예정이라 회사에 알렸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미처 몰랐다.게다가 연정훈은 진수빈과 기사 한 명만 대동했다.어찌 보면 사적인 일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양시연을 발견한 진수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시연 씨, 오랜만이에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굳이 이름을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연정훈을 사무실로 안내했다.진수빈은 눈치껏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양시연의 비서가 차를 따라주러 들어가려 하자 빠르게 막아섰다.“연 대표님이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 죄송하지만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진수빈의 말에 비서는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정훈의 취향을 물었다.“다 괜찮습니다.”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고, 차라리 아침 식사를 하고 탈이 난다면 연정훈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직접 차를 따랐다.주변은 온통 조용하고 연정훈은 바삐 움직이는 양시연을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겨우 몇십 평방 남짓한 사무실은 연정훈의 휴게실보다도 작았다.하지만 사무실 배치에 많은 신경을 쓴 건지 탁자 위에 편백 화분이 눈에 띄었다.편백 나무 향이 솔솔 나는 사무실 안에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양시연이 있었다.아늑한 분위기에 잠긴 연정훈을 양시연이 불렀다.“대표님.”“맛이 좋네요.”연정훈은 뜨끔해 갑자기 칭찬을 날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차를 내리는 사람이 손맛이 없는 편이네요. 너무 오래 숙성해 좋은 차를 낭비했어요.”“...”‘내가 차를 내린 걸 봤어? 봤냐고?’그러나 양시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제 밑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아직 신인이라 이쪽으로는 아직 많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학원을 끊어줘야겠군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지금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본인 같은 사장 아래에서 직원들이 배울 수 없을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양시연은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순간 얼어붙었다.연정훈은 너무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면 아예 품속에 파묻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정신을 차린 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슨 일이에요?”‘설마 밖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건가?'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고 있었다.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은 바로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손을 그의 등에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잠시 후 연정훈은 그녀를 조금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그의 턱에 입술을 가볍게 닿게 한 뒤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려 깊은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가까워서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건물 안은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급히 달려왔다 해도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것일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아무 말 없이 연정훈의 손을 잡아 책상 쪽으로 데려갔다.그리고 티슈를 꺼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이렇게까지 급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큰일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깊게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양시연은 살짝 놀랐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런 거야?’양시연이 묻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자기 가슴과 책상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이마를 양시연의 이마에 맞대며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졌어. 다행히도 하늘은 내 편이었던 거야.’양시연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연정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뭔데 그래요? 나한테 말해 줘요. 이렇게 말 안 하면 나도 초조해진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
“사무실로 올라갈게.”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분위기가 마치 따지러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서류를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양시연은 당연히 연정훈일 거로 생각하며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그러나 돌아보니 문을 연 사람은 몇몇 임원들이었다.회의가 끝난 직후라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일이 있을 법도 했지만 양시연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앞장선 사람은 익숙한 인물 권준호였다.예전에 주지혁 남매에게 몰려 궁지에 빠졌던 그녀는 원칙을 저버리고 연정훈을 찾아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 키스를 했는데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주지혁 부부 외에 그중 한 명이 바로 권준호였다.몇 년이 흐르고 권준호는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사이 양시연은 그의 대표 부인이 되어 있었다.권준호는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 그때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양시연에게는 늘 공손했다. 덕분에 양시연도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양시연은 연정훈이 곧 도착할 거로 생각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임원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일어나 문을 열려 하자 양시연이 손짓으로 제지했다.“앉아계세요. 제가 열게요.”그녀는 이미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고 문을 열자 급하게 걸어오던 연정훈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양시연이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자 환한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짧은 순간 연정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휘둘렸고 인연이 정말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얽혀 있었고 누군가가 방해하려 해도 결국 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만나 그녀의 손을 잡을 운명이었다.양시연과 함께할 운명이라 믿어지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찼고 온몸이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마침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이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양시연이 말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
양시연은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부승원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하아. 연 교수님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네.’양시연은 침을 삼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덜 쓰일 거로 생각하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한편 연정훈은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연결되지 않았다.잠시 화면을 응시하던 연정훈은 다시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양시연에게 당장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연달아 네 번이나 전화했으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쯤 받을 법한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렇게 고민하던 순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마침내 연결되었다!“시연아!”“대체 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나 지금 회의 중이에요. 부승원 씨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고요.”“할 말이 있어.”“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봐요.”연정훈은 입을 뗐지만 정작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양시연이 답답한 듯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나...”“됐어요. 그렇게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나 먼저 끊을게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시연.”양시연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자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숨을 골랐다.밖에서는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양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었고 마음은 공처럼 이리저리 튕겨 다니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임성원의 목소리인 것을 확인한 연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 하러 들어왔어?”“도련님 혹시 배탈 나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황당했다.“...”“나 괜찮아.”“정말 괜찮으세요? 약이라도 챙겨드릴까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며 단
연씨 가문과 마씨 가문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두 가문의 노인들은 오랜 파트너였다. 그러나 연호민이 서울로 자리를 옮기고 마씨 가문의 노인이 지방에 남게 되면서 두 가문은 점차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얼마 후 마봉식은 경기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했고 이 시점에서 두 가문이 만나는 이유를 연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원래 많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 그 이메일들이 그의 머리에 쌓여서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속은 뒤집혔다. 그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싶었지만 연재혁을 화나게 할까 봐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거실에 들어서자 마봉식이 차를 끓이고 있었고 그가 그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자리를 안내했다.연정훈이 마봉식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마봉식은 무척 기뻐하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결혼식 날 바빠서 현장에 가지 못했었는데 언제 한번 네 아내를 데리고 와서 꼭 만나게 해줘.”“기회가 되면 꼭 같이 인사드리겠습니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양측은 미묘하게 탐색을 끝내고 그제야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라면 마봉식이 물러나고 연재혁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은 확실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이 시점에서 너의 아버지의 발목을 잡힐 실수를 하면 안된다.”마봉식이 그렇게 말하자 연정훈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조이현의 고소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봉식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가 말한 것은 연정훈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실제로 이런 일들을 다루는 것은 연재혁과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연정훈은 아직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옆에서 듣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뿐이었다.연정훈의 마음속은 여전히 이메일을 모두 읽어보고 진짜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중도에 마봉식이 그에게 물었다.“네 장인어른 몸 상태는 어떠냐?”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은 그들 사이에서 비밀이
연재혁이 연정훈에게 시간을 비우라 한 건 마봉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던 연정훈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시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씨 가문에 간 거 아니었어요?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요?”“아직 아버지를 만나기 전이라 그냥 너랑 얘기나 좀 하려고.”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났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살며시 내려놓았다.“오늘 밤엔 술 마실 일 없죠?”“안 마셔도 돼.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차만 마시거든.”“그 말 들으니 안심되네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난 이런 자리 자주 가는 거 별로 걱정 안 해요.”연정훈이 답했다.“나도 자주 가고 싶진 않아. 약속만 없었으면 지금쯤 집에서 널 안고 있었을 텐데.”“정말 한심해요.”양시연은 핀잔을 주며 말했다.“집 생각 그만하고 일에 집중해요.”“집중이 안 돼. 지금 당장 유턴해서 집에 가고 싶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다 당신 아버지께 혼나면 어쩌려고요?”연정훈은 눈을 감고 양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창문에 톡톡 빗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빗소리가 퍼졌다.양시연은 우산 꼭 챙기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연정훈에게 그 잔소리는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그녀가 부승원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며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했을 때 연정훈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부승원이 요즘 연애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야근까지 열심히 해?”양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얘기 제발 하지 마세요. 지금은 의지로 버티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진짜 손 털고 나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제가 죽어나겠죠.”"정 안 되면 내가 양원의 일을 그만두고 네 회사로 가서 일해줄게."“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일을 시키겠어요.”양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며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휴대폰 화면에 입맞춤을 가볍게 흉내 냈다.“알겠어. 밤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나 이제 일해야 해.”연
양시연은 몰래 엿보다가 순간 멍해졌고 부승원에게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보였다.반면 반우희는 아이스크림을 절반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부승원 옆에 꼬리처럼 붙어 있었다.양시연이 보기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반우희는 아마 부승원에게 달라붙어 키링처럼 매달렸을 것이다.양시연이 일부러 헛기침하자 반우희는 곧바로 양시연 쪽을 힐끗 보더니 티가 나지 않게 어색하게 부승원에게서 약간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의 과자 부분을 먹기 시작했다.부승원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일을 계속했다.잠시 후 그는 양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최근 계획을 이야기하며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이 정도 사소한 일로 연씨 가문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 집안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성장 환경이 다르면 사고방식도 달랐다. 양시연은 소현주가 죽었다는 사실에 사람이 죽은 이상 그 일을 잘 이용하면 큰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나 부승원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그러던 부승원이 갑자기 말했다.“그래도 불안하면 외출할 때 조심해요.”“안전 문제인가요?”부승원은 짧게 대답했다.“네.”“연씨 가문 같은 대가문은 큰일이 벌어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요.”양시연은 곧바로 평화로운 시기를 떠올리며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연서명을 떠올렸다. 물론 그 후에 조씨 가문은 사실상 몰락해 미래가 없어졌지만 연정훈의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양시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이 말을 마음에 새겼다.오후엔 바빴지만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처리 결과를 물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이미 다 처리했다고 말하며 저녁엔 경인의 현직 고위 임원을 만나야 해서 그녀를 데리러 가지 못한다고 했다.“괜찮아요.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애아기 오늘 착했어? 발길질 안 했어?”양시연은 부드럽고 차분
소현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양시연은 이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누군가 지방에 한 통의 고소장을 보냈고 고소장에는 두 부부가 권력을 이용해서 한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적혀 있었다.사실 소현주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이미 영상 자료를 통해 소현주가 죽기 전에 양시연을 만났고 양시연이 험악한 경호원들을 데리고 갔으며 대화 중 몇 차례 소현주를 제압하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다른 사람 같았으면 최소한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불려 갔을 일이었지만 양시연의 신분 덕분에 아무도 이 문제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고소장이 접수되자 연재혁은 분노한 나머지 연정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사팀에 응답하라고 했다.아침 일찍 양시연은 연정훈이 밖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양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문제없겠죠? 누가 고소했는지 알아요?”연정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익숙한 사람이긴 한데 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야.”“누군데요?”“조이현.”양시연은 정말로 뜻밖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조이현 씨가 아직도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정말 정신 나갔구나.’“만약 조이현 씨 혼자 한 짓이라면 오히려 별일 아닐 거야.”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문제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누구라고 생각해요?”“굳이 의심할 필요 없어. 곧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그는 언제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예전엔 그의 이런 태도가 오만해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든든했다.그날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양시연은 회사로 돌아온 뒤 사무실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양시연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데리러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표세연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차 안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일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걱정을 털어놨다.“누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요.”“괜한 걱정이야.”연정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당했으면 벌써 몇백 번은 죽었을 거야. 경인에서는 물론 경인 밖에서도 나한테 시비 걸 사람 몇이나 되겠어.”“말은 그렇지만...”“말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양시연은 그의 단호한 말에 살짝 안심하며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집에 도착하자 연재혁은 없었고 표세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세연은 임신한 양시연을 보자 아들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했다.“음식들 맛 좀 봐봐. 입맛에 안 맞으면 내가 말해서 새로 차리게 할게.”양시연은 식탁 위에 놓인 각 지역의 신선한 음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충분합니다. 그만하시고 어머님도 앉으세요.”표세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자는 양시연에게 음식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며 한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양시연이 거의 다 먹고 나서야 표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너의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니?”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바라봤고 연정훈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한 듯 표세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네 아빠가 알려줬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양지원의 태도로 보아 이번 양석진의 건강 문제는 비밀리에 처리되고 있을 터였다. 연재혁이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양석진의 측근도 아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