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은 조금 전에 깨어났다.양지원이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양민아가 양지원을 위해 뜨거운 죽을 식히고 있었다.어린 딸이 엄마를 알뜰살뜰 살피는 모습에 다들 효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가식적인 가면 아래 양민아는 사실...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양혁수가 빼꼼 들어오더니 양지원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역시 엄마는 달라요. 병문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다 섰다고요.”양지원은 양혁수를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자리에는 양지원도 함께였기에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누구 왔어?”“안시연 씨요.”그 말에 양민아가 실수로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양지원은 감정에 북받쳤지만 양민아의 소란에 다시 경계 태세를 했다.그리고 침착하게 물었다.“안시연 씨는 어떻게 왔어?”“누가 바래다줬어요.”“연정훈?”이에 양혁수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오라고 해.”“네.”병실 문이 더 크게 열리고 안시연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연정훈도 따라 들어왔다.안시연은 편안한 옷차림에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데 목에는 귀여운 머플러가 둘려 있었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두 볼에는 빨간 홍조가 나타났으며 이에 또래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안시연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양지원은 천천히 안시연의 얼굴을 살폈다.눈, 코, 입, 얼굴형까지.그리고 안시연이 쿠키를 먹고 식물 중독에 걸렸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양지원은 의사에게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 물었고, 의사는 체질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다. 모든 사람이 양석진과 안시연처럼 격한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안시연...어쩌면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생각에 양지원은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으며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양 대표님.”안시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 다정하게 양지원을 불렀다.양지원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양지원에게 볼일이 있어 보이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양 대표님 바빠 보이시는데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양지원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안시연을 올려다보았다.속은 문드러지고 해졌지만 행여나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벨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안시연과 연정훈이 돌아갈 준비를 했고 양지원은 덤덤하게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연정훈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께서 걱정이 많았을 텐데 괜찮다고 말 좀 전해주렴.”“네. 몸조리 잘하시고 설 연휴에 다시 보러 올게요.”“그래.”양지원은 양민아를 시켜 손님 배웅을 하라고 했다.양민아는 아직 친자 확인 결과를 받지 못했다. 벌써 이틀 동안 안절부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안시연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양지원의 얼굴만 살피고 있었다.하지만 양지원의 얼굴을 아무리 살펴도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양민아는 미소를 지은 채로 안시연과 연정훈을 배웅했고 조금 있다가 센터에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한 무리 사람들이 모두 병실을 나서고 양지원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건지 양지원이 전화를 걸려는 순간 양석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양지원이 심호흡을 하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지원아.”양석진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다.“병원에 입원한 거야?”양석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지원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양석진은 나이가 지긋하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양지원은 눈물을 들킬 까 빠르게 벽을 향해 돌아누웠으며 한참 호흡을 고르게 하고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조금 피곤했나 봐요.”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무슨 일 있었어?”“아무 일도 없어요...”“그런데 왜 울어?”그 순간 양지원은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렸다.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양지원은 몸을 일으켜 빠르게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양지원은 쉽
복도에서 안시연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양혁수의 기분이 조금 울적해 보이자 안시연이 먼저 양혁수에게 말을 걸었다.“양 대표님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양혁수는 양지원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안시연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이제 어딜 가는 거예요?”“집으로 가야죠.”“오늘은 시간이 없고 이틀 뒤에 다시 약속 잡아요.”양혁수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리도록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안시연과 연정훈이 앞줄에 섰고 양혁수는 두 사람 뒤에 섰다. 그래서 양혁수와 대화하려면 안시연은 계속 고개를 돌려야 했는데 그래도 귀찮은 내색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그렇다 보니 안시연은 내내 연정훈을 등지고 고개를 돌린 자세였다.몇 초 사이 연정훈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렸다.양민아는 세 사람의 오른쪽 쪽에 섰고 불편해하는 연정훈을 눈치챘다. 그런데 여전히 양혁수와 ‘알콩달콩’ 대화하고 있는 모습에 양민아도 화가 났다.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양민아는 왠지 벌써 걱정이 태산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커졌다.그리고 양민아는 또 다른 의문이 하나 있었다.만약 양혁수가 정말 소현정의 자식이라면 안시연과 양혁수는 배다른 형제였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는 걸까?설마...양지원이 다른 사람과 아이를...이 생각만 하면 양민아는 소름이 돋았다.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한 무리 사람이 그 안에서 내렸다.안시연은 양혁수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 했고 양민아는 연정훈과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모든 게 무산이 되었다.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떠나버린 것이었다.남겨진 양민아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졌고 양혁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안세연은 두어 번 뒤를 돌아다보다가 연정훈의 빠른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긴 다리로 이렇게 빨리 걸다니, 짧은 다리 안시연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
안시연은 연정훈이 정말 연락을 한 건지 잠시 고민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지금 전화 걸어봐도 좋아.”“...”안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다시 차에 올랐다.‘바래다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 뭐. 어차피 연정훈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 연정훈 시간이 좀 비싼 것도 아니고.’안시연이 또다시 번복이라도 할 까봐 연정훈은 노심초사해했다.“안전벨트.”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이 묵묵히 벨트를 착용했다.딸깍.안전벨트가 잠금장치인 듯 안심하며 연정훈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동네 부근에 도착하고 연정훈은 뒷좌석의 선물 세트와 안시연의 짐을 위층으로 올렸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을 발견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뒤를 따른 연정훈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연정훈더러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며 제안했다.“이 사람 바빠요.”안시연이 대신 거절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우선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안시연의 말대로 했다.“조금 있다가 약속이 하나 있어서 오늘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틀 뒤 설 연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래, 그래.”외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주방에서 소현정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귀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운도 참 좋지. 정말 연정훈을 꼬시기라도 한 거야?’그러나 이 생각에 소현정은 또 짜증이 났고 괜스레 긴장되었으며 오성호에게 빨리 이 사실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이제 모든 걸 서둘러야 했다. 사실이 들통이 나기 전에 오성호가 하루빨리 양지원의 사업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여우 같은 모녀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건지 운도 참 좋았다.다른 한편, 안시연은 연정훈을 배웅하러 집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나선 안시연은 바로 표정을 굳혔다.바람보다도 더 빠른 태도 전환에 연정훈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안시연이 슬쩍 손을 뒤로 빼버렸다.그렇게 층계 앞까지 걸어간 안시연이 말했다.“이만 가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안시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연정훈을 등진 채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며칠 만나지 못한 사이 연정훈은 입만 더 번드르르해진 것 같았다. 강남에서 질문했을 때만 해도 연정훈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안시연이 조금 흔들렸다는 걸 눈치챈 연정훈이 뒤로 안시연을 꼭 껴안았다.안시연은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이 손 놔요.”“지금 나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이틀 뒤 연휴에 널 데리러 올게. 우리 같이 밥 먹자.”연정훈은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으며 삐진 여자 친구를 달래는 말투였다.안시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날 외할머니랑 있을 거예요.”“외할머니한테 2시간만 허락 맡을게.”“허락 못 맡아요.”안시연은 왠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조금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품 안에서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연정훈이 두 팔로 안시연을 꽉 껴안고 말없이 체온을 나누었다.안시연은 여전히 뾰로통해 했지만 방금처럼 가시를 세우지는 않았다.얼마 뒤 연정훈은 안시연의 턱을 잡고 빠르게 입술에 뽀뽀했다.!그리고 연정훈은 바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새해 선물은 이미 강남에 준비해 뒀어.”“...”“그러니까 나랑 밥 좀 먹자. 선물 받아 가고 올해 행복하게 지내는 거야. 우리 이렇게 서먹하게 지내지 말자, 응?”연정훈이 안시연을 얼리고 달래며 자신의 울타리에 서서히 가두었다.안시연은 더 이상 연정훈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으나 사람 마음은 칼같이 잘리는 게 아니었기에 자꾸 흔들렸다.성공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금씩 다가갔다.입술이 맞닿고 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다.그러나 그때!안시연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연정훈을 밀어내며 품 안에서 뛰쳐나왔다.“...”거의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연정훈이 입맛을 다셨다.“시연아.”“빨리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시연이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했다.
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부승희와 반우희가 보였다.반우희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해피 뉴 이어.”“해피 뉴 이어.”막 스타일링을 마친 부승희는 머리가 찰랑거렸다. 부승희는 연 푸른 색 털 외투와 하얀 바지를 맞춰 입었다.그리고 외출용 부츠는 비율을 더 길게 보이게 했다.반우희는 부승희의 옆에서 왠지 더 자그마하게 보였다.“이 집 너무 찾기 힘들었어요. 정훈 오빠는 왜 이런 집을 찾아준 거예요?”부승희가 입을 삐죽였다.그러자 반우희가 되물었다.“여기가 찾기 어려웠어요?”“네? 아... 아니에요.”“...”안시연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이 집은 제 어머니가 외할머니랑 같이 살려고 찾은 집이에요.”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데리러 왔는데 마침 반우희와 마주쳤다. 그리고 반우희까지 함께 데리고 가려고 했다. 왠지 반우희라면 자신의 얼음 같은 오빠를 녹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가요. 제가 작은 파티를 하나 주최했어요.”그리고 부승희는 방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외할머니에게 말했다.“외할머니, 저희 안시연 씨랑 놀러 갈게요.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외할머니는 부승희를 처음 만났지만 스스럼없는 부승희에 조금 당황해했다.“어? 그래, 그래.”외할머니는 얼떨결에 대답했고 안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아직 시간도 이르니 외출해 바깥 공기를 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안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두 사람과 밖으로 나갔다. 반우희는 어린 동생들도 함께 데리고 떠났다.그렇다 보니 차 안은 북적북적 소란스러웠다.부승희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 간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부승희가 말한 파티는 인조 호수를 낀 파티장에 위치했으며 온갖 오락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바닥에는 인조 눈도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 위에도 예쁘게 장식을 하니 바깥세상과는 동떨어진 동화 세계 같았다.그리고 누군가 준비한 과일 와인의 향이 아주 좋았다.차에서 내린
양씨 저택.새해 전날 어르신이 집을 찾았고 저택 안의 사람들은 애써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그러나 위층 양지원의 방은 전등 하나 켜지 않고 캄캄했다.어젯밤 양지원은 친자 확인 결과를 받았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정말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그리고 안시연이 친딸이 맞았으며 안시연과 양혁수는 혈연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만약 양혁수가 오성호의 자식이라면 안시연은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딸일 것이다.행여나 검사 결과에 문제가 존재할까 양지원은 사람을 시켜 다시 검사를 진행해 보라고 했다.하지만 결과는 일치했다.사실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양지원은 오늘 하루 양혁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똑똑똑.노크 소리와 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삼촌 왔어요.”양지원은 심장이 철렁했다.양지원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조금 더 열렸다.양혁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여사님, 아들 들어가도 될까요?”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고 이틀 동안 양지원의 이상을 눈치챘다.양지원도 이를 알아차렸고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서 침대 무드 등을 더 어둡게 조절하며 말했다.“들어오렴. 그리고 엄마 외투 좀 찾아줘.”“네, 좋아요.”양혁수는 미소를 띤 채로 방 안에 들어갔다.정원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양지원은 심장이 쿵쾅거렸으며 양혁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양혁수는 외투를 양지원에게 건넸다.“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그래.”어둠 속에서 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천천히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양석진의 등장에 거실은 더 북적거렸다.양지원은 층계에서 양석진과 시선을 마주했다.“몸은 좀 어때?”양석진의 질문에 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많이 좋아졌어요.”저녁 식사 전 양석진은 간단하게 세수하려 했다.그래서 양지원을 지나쳐 방으로 걸어가는 데 무의식적으로 움찔거리는 양지원이 보였다. 양지원은 짙은 다크써클이 내려오고 많이 수척해
양지원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의 뒤에서 손을 뻗어 양지원의 이마를 만졌다.양지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따뜻한 양석진의 손바닥은 양지원의 이마에 잠시 머물다가 떨어졌다.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자 양지원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열도 나지 않고 감기도 아닌데 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거야?”양석진이 덤덤하게 물었고 양지원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막 잠에서 깨서 그래요...”양석진은 말없이 옆자리 의자로 나란히 앉았고 오래전 양지원의 공부를 가르쳤던 그 시절이 겹쳐 보였다.양석진은 샤워하고 편한 셔츠로 갈아입었는데 옅은 우드 향을 풍겼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일은 다 끝냈어요?”연휴 첫날에 온다던 양석진이 오늘이 되어서야 나타났고 아마도 볼일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끝냈어.”“이번엔 얼마나 있을 거예요?”“이틀.”“그래요...”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양지원이 펜을 잡고 종이 위로 글을 끄적였으나 대체로 낙서에 가까웠다.양석진에게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면 양석진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다.그러나 인상을 찌푸린 양지원이 낙서를 끄적이는 모습에 양석진은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오성호 같은 소인배를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새해인데 그 사람한테 연락은 했어?”아마도 부부 싸움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아직도 법적상 부부라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양지원은 며칠 동안 꿈을 꿔도 오성호를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심혜설과의 약속 때문에 오성호와 바로 관계를 끊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어르신이 자주 재혼을 제기하자 이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이젠 오성호와의 이혼이 점점 어렵게 되었다.양석진이 입에서 오성호라는 이름이 나오자 양지원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무슨 연락을 해요.”양석진이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