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의 뒤에서 손을 뻗어 양지원의 이마를 만졌다.양지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따뜻한 양석진의 손바닥은 양지원의 이마에 잠시 머물다가 떨어졌다.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자 양지원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열도 나지 않고 감기도 아닌데 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거야?”양석진이 덤덤하게 물었고 양지원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막 잠에서 깨서 그래요...”양석진은 말없이 옆자리 의자로 나란히 앉았고 오래전 양지원의 공부를 가르쳤던 그 시절이 겹쳐 보였다.양석진은 샤워하고 편한 셔츠로 갈아입었는데 옅은 우드 향을 풍겼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일은 다 끝냈어요?”연휴 첫날에 온다던 양석진이 오늘이 되어서야 나타났고 아마도 볼일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끝냈어.”“이번엔 얼마나 있을 거예요?”“이틀.”“그래요...”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양지원이 펜을 잡고 종이 위로 글을 끄적였으나 대체로 낙서에 가까웠다.양석진에게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면 양석진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다.그러나 인상을 찌푸린 양지원이 낙서를 끄적이는 모습에 양석진은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오성호 같은 소인배를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새해인데 그 사람한테 연락은 했어?”아마도 부부 싸움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아직도 법적상 부부라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양지원은 며칠 동안 꿈을 꿔도 오성호를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심혜설과의 약속 때문에 오성호와 바로 관계를 끊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어르신이 자주 재혼을 제기하자 이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이젠 오성호와의 이혼이 점점 어렵게 되었다.양석진이 입에서 오성호라는 이름이 나오자 양지원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무슨 연락을 해요.”양석진이
양창수는 양석진의 오랜 오른팔이었고 양씨 가문에서는 양혁수의 삼촌 대접을 받았다.같은 시간 양창수는 양씨 가문 사람들과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위층을 올려다보니 양석진의 방은 컴컴했지만 양지원의 방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쯧쯧.양창수가 혀를 차며 양석진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양지원의 전등마저 꺼지자 양창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양석진이 양지원의 방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과연 그 예상이 맞았다.몇 분 후,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에휴, 양석진 의원도 참.’‘국가 대사에는 참 이성적인 분이 여자관계는 참 서툴러.’양석진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양창수는 예의를 갖춰 차를 따랐다.“더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양창수가 입을 열자 양석진이 바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고 양창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웃지 마. 눈가 주름 생겨.”“...”‘젠장.’‘여자관계가 순탄하지 않은 건 모두 저 입 때문일 거야.’그러나 양창수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양석진은 평소에 담배를 자주 피우는 편이 아니었으나 양지원을 만나는 날이면 꼭 담배를 찾았다.양창수는 눈치껏 양석진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왜 애꿎은 담배만 찾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아가씨에게 직접 하면 되잖아.’“내일 오후 시간을 내서 그 사람 주변 조사 좀 해줘.”그 사람은 당연히 양지원을 의미했다.양창수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아가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그래.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것 같아.”양석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양석진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양지원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양지원은 여전히 양석진에게 선을 그었다.하필이면 그 종이에 오성호라는 세 글자만 계속 적을 건 뭔가?양창수가 입을 열었다.“아가씨 쪽 일은 손문병 씨가 맡고 있습니다.”“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절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반우희는 조금 멈칫했다.다른 여자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테지만 반우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변호사님께 사심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변호사가 되지 못하는 벌을 받겠습니다!”이승우가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변호사 하고 싶은 이유가 승원이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반우희는 여전히 바른 자세였다.안시연은 반우희가 정자세로 선 모습이 왠지 어색하게 보였다.“아니에요. 전 정말 법이 좋고 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반우희의 말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그러나 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에이, 난 또 우리 오빠 좋아하는 줄 알았네.”“아니에요.”반우희가 다시 자리에 앉자 곁에 앉은 부승원은 덤덤한 얼굴로 와인을 삼켰다.그때, 이승우 옆자리 여자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맹세는 주먹 쥐고 하는 게 맞아요?”...그러자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이승우는 여자의 이마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우린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돼.”여자는 부끄러운 듯 이승우의 품을 파고들었고 부승희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반우희를 향했으나 반우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그러나 안시연은 반우희의 귓불이 살짝 빨개진 걸 눈치챘고 빨개진 귓불은 반짝이는 불꽃 아래에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사람들은 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부승원을 살폈다.부승원은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에 있는 다른 여변호사와 대화를 나눴다.부승원은 차가운 성격이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그러니 부승원이 왈가닥 소녀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반우희가 조용해진 걸 발견한 안시연이 먼저 다가가 말했다.“우희 씨, 우리도 이만 돌아갈까요? 외할머니가 기다릴 거예요.”“아... 네!”반우희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부승희는 그제야 방금 자신의 질문이 선을 넘은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술을 마셨더니
김세연이 연달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연정훈은 모두 거절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댄 채로 물었다.“가족 모임 없어요?”“없는데? 그럼 너희 집에서 같이 밥 먹어도 돼?”“...”이에 안시연이 작게 중얼거렸다.“정말 뻔뻔하긴.”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나이가 서른 가까이 되도록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뻔뻔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안시연은 여러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연정훈이 강제로 자신의 품 안으로 앉게 했다. 안시연이 입을 열려고 하면 바로 키스로 말을 삼키게 했다.“음...”안시연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연정훈은 술을 마셨고 좀 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안시연을 꽉 끌어안고 뜨거운 온기를 품은 손으로 안시연의 스웨터 위를 더듬었다.동거했을 때는 밤낮으로 붙어 지냈으니 이렇게 오래 떨어지긴 처음이었다. 그렇다 보니 더 예민해지고 작은 자극에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안시연이 작게 신음을 뱉자, 차 안의 공기는 더 뜨거워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들어 자기 다리 위로 앉혔다. 그리고 정면으로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안시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아래로 꾹꾹 눌러 자극을 주었다.안시연은 달뜬 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혔으며 온몸의 힘이 풀렸다.“기사, 기사가 있어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목에 키스하며 말했다.“담배 피우러 나갔어.”“그래도 안 돼요...”연정훈은 한 손으로 안시연의 두 팔목을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스웨터를 올려 허리를 더 깊게 매만졌다. 이어 손은 서서히 안시연의 바지 벨트로 향했다.“연정훈 씨...”안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작은 목소리로 연정훈의 이름을 속삭였다.“소리 내지 말고 천천히 느껴.”안시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이 불덩이가 된 것 같았다.외할머니는 집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차 안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았다.머릿속으로 아우성을 쳐도 이미
부승원은 한참이 지나도록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안시연은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었다. 차 안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고 자칫하면 불장난이 또 시작될 수 있었다.“내가 내려서 확인해 볼게요, 변호사님이 우희 씨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안시연은 옷을 정리하고 차에서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안시연은 또 얼굴을 붉혔다.연정훈도 안시연을 따라 차에서 내려 건물로 향했다.“여기까지 온 이상 외할머니께 인사는 드려야지.”연정훈의 당당한 모습에 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 명절에 연정훈 가문이 가족 모임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 본인의 집을 찾는다니. 이러다가 연정훈의 어머니가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두 사람이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층계 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어. 너랑 난 절대 가능성이 없다고.”차가운 목소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안시연은 그 자리에 굳었다.너무 심한 말에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어버렸고 부승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아이들의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말해줄게. 네가 변호사가 될 가능성은 없어.”“그런데 난...”“네가 읽고 있는 책은 너에게 오히려 독이 될 거야.”“...”“그리고 안시연 씨와 연정훈을 그만 지켜봐. 네가 안시연 씨를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도 미지수인데 너라고 다를 것 같아?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현실 직시 제대로 하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바라고 살아.”안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안시연 뒤에 선 연정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이 미지수라니.부승원은 거절하려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만 말하지 왜 애꿎은 다른 커플을 저주한다는 말인가?부승원은 할 얘기를 마치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리고 안
[선물이요?]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이 답했다.[외투 주머니 확인해 봐.]주머니?안시연은 의아해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거실에 내려놓은 외투를 찾아 양쪽 주머니를 뒤졌다.왼쪽 주머니에는 어느 주얼리 브랜드의 영수증이 있었다.그리고 안시연은 이 브랜드가 보석 브랜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이 메시지를 또 보내왔고 안시연은 깜짝 놀라 굳어버린 몸을 서서히 돌렸다.[그건 예약금 영수증이고 이미 여러 디자인을 골라뒀어. 출장 다녀오면 같이 가서 결정하자.]안시연은 그 자리에 멈췄다.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긴 안시연은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망설였다.며칠 전만 해도 결혼 생각이 없다더니 갑자기 무슨 감정 변화가 찾아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도 또 자신을 홀리는 수작이 아닌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정말 나와 결혼하려는 걸까?’[이 브랜드가 별로라면 다른 브랜드도 좋아.]연정훈의 메시지를 보며 안시연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한참 고민 끝에 메시지를 전송했다.[여긴 대부분 결혼반지일 텐데요.][나도 알아.]...[결혼하는데 반지 아니면 뭘 사겠어?]연정훈은 아주 직진이었다.안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맞은 편의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서프라이즈가 아니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된 기분은 뜬구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칫하면 구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찾아왔다.그래서 자꾸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 있는데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왔다.갑작스러운 벨 소리는 조용한 집에서 유난히 우렁차게 들려 황급히 거절 버튼을 눌렀다.[가족이 자고 있어요.][난 너도 잠이 든 줄 알고.]...안시연은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한 손으로 타자했다.[내가 원하는 결혼은 혼인 서류를 작성하고 법적 효력이 있는 부부 사이를 원하는 거예요. 반지 하나만 있는 그런 결혼이 아니에요.][응. 일반적인 결혼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그날 밤 안시연은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다행히 그다음 날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연정훈도 아마 고객사를 만나러 가야 할 테니 시간이 없을 것이다.도심과 조금 떨어진 이곳은 친구와 가족이 없다면 명절 느낌이 덜했다.안시연은 반우희와 버섯 머리 아이들과 근처를 함께 걸었고 명절 기운을 조금 느꼈다.그리고 이른 시간, 양혁수가 문자를 보내왔다.[해피 뉴이어.]안시연은 이모티콘으로 답변했다.양혁수는 읽었지만 다른 말이 없었다. 왠지 양혁수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점심시간이 되고 주임이KTX 시간을 놓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설 연휴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회사는 왜 너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외할머니는 푸념하시며 안시연을 위한 간식을 챙겨주었다.소현정은 한편에 앉아 간식이나 먹으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오성호는 화서시로 떠났다. 이틀 전 양지원이 새해부터 양혁수가 일을 이어받게 할 것이라 말했고 아예 화서시의 전체 산업을 양혁수에게 물려줄 것이라 했다.‘흥.’‘내 아들은 양씨 가문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데 저 계집애는 마음대로 하라지 뭐.’안시연은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불안한 마음이 더 증폭되었다.“내가 곁에 없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꼭 연락하세요. 급한 일이면 위층의 우희 씨를 찾으셔도 되고요.”안시연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늘어놓았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무슨 걱정을 해? 네 엄마가 여기 있는데.”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소현정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 지긋한 외할머니가 아직도 삼시 세끼를 차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외할머니만 아니었다면 엄마와의 관계는 진작 끊었을 것이다.시간이 되고 외할머니가 아래층까지 안시연을 바래다주었다.택시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안시연은 짐을 싣고 난 뒤에 외할머니한테 폭 안기며 말했다.“혼자 있어도 잘 지내야 해요.”“그래. 걱정하지 말거라.”자꾸 불안
양창수가 그곳으로 가보니 의자에 묶인 손문병은 다친 곳이 별로 없었다.‘허? 그런데 벌써 입을 연 거야?’양창수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아가씨를 위해 어떤 일을 했나요?”손문병은 몸집이 큰 편이고 아주 진중한 얼굴이었다.주변 사람들을 힐끔 둘러보던 손문병이 입을 열었다.“주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 주세요.”“빨리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말 크게 다칠 테니까.”손문병이 말했다.“아가씨는 오성호를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양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뭐라고요?”“양혁수 도련님은 아가씨의 아이가 아닙니다.”양창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나 손문병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무자비하게 사실을 폭로했다.“안시연이라는 여자아이가 아가씨의 딸입니다.”이 말을 마치고 손문병은 양창수를 바라보았다.양창수는 큰 충격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이런 일로 농담한다면 정말 목숨이 위험해질 겁니다.”“제가 직접 친자 결과를 받아왔습니다.”양창수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엄청난 진실에 양창수는 차라리 헛소리라고 믿고 싶었다.양창수는 뒤로 뒷걸음 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2초 뒤, 양창수가 분노 가득한 얼굴로 손문병을 바라보았다.“감히 이렇게 큰 일을 의원님에게 숨기다니!”‘정말 죽으려고 작정했나?’“아가씨가 그렇게 지시했습니다.”“아가씨가 죽으라고 하면 그쪽은 정말 죽을 수 있어요?”“그건 아닙니다.”“...”양창수는 두 눈을 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 이상 손문병과 쓸데없는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사건 전말을 알아내야 했다.손문병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제가 보고를 하지 않았던 건 사실 찝찝한 구석이 하나 있어서 그랬습니다.”“말해요!”“안시연 씨는 아가씨의 친딸이 맞지만 그렇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양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거야 당연히...”“안시연 씨는 양혁수 도련님과 혈연관계가 없습니다.”너무 큰 정보량에 양창수는 다시 한번 벙어리가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