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의 뒤에서 손을 뻗어 양지원의 이마를 만졌다.양지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따뜻한 양석진의 손바닥은 양지원의 이마에 잠시 머물다가 떨어졌다.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자 양지원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열도 나지 않고 감기도 아닌데 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거야?”양석진이 덤덤하게 물었고 양지원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막 잠에서 깨서 그래요...”양석진은 말없이 옆자리 의자로 나란히 앉았고 오래전 양지원의 공부를 가르쳤던 그 시절이 겹쳐 보였다.양석진은 샤워하고 편한 셔츠로 갈아입었는데 옅은 우드 향을 풍겼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일은 다 끝냈어요?”연휴 첫날에 온다던 양석진이 오늘이 되어서야 나타났고 아마도 볼일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끝냈어.”“이번엔 얼마나 있을 거예요?”“이틀.”“그래요...”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양지원이 펜을 잡고 종이 위로 글을 끄적였으나 대체로 낙서에 가까웠다.양석진에게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면 양석진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다.그러나 인상을 찌푸린 양지원이 낙서를 끄적이는 모습에 양석진은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오성호 같은 소인배를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새해인데 그 사람한테 연락은 했어?”아마도 부부 싸움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아직도 법적상 부부라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양지원은 며칠 동안 꿈을 꿔도 오성호를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심혜설과의 약속 때문에 오성호와 바로 관계를 끊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어르신이 자주 재혼을 제기하자 이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이젠 오성호와의 이혼이 점점 어렵게 되었다.양석진이 입에서 오성호라는 이름이 나오자 양지원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무슨 연락을 해요.”양석진이
양창수는 양석진의 오랜 오른팔이었고 양씨 가문에서는 양혁수의 삼촌 대접을 받았다.같은 시간 양창수는 양씨 가문 사람들과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위층을 올려다보니 양석진의 방은 컴컴했지만 양지원의 방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쯧쯧.양창수가 혀를 차며 양석진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양지원의 전등마저 꺼지자 양창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양석진이 양지원의 방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과연 그 예상이 맞았다.몇 분 후,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에휴, 양석진 의원도 참.’‘국가 대사에는 참 이성적인 분이 여자관계는 참 서툴러.’양석진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양창수는 예의를 갖춰 차를 따랐다.“더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양창수가 입을 열자 양석진이 바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고 양창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웃지 마. 눈가 주름 생겨.”“...”‘젠장.’‘여자관계가 순탄하지 않은 건 모두 저 입 때문일 거야.’그러나 양창수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양석진은 평소에 담배를 자주 피우는 편이 아니었으나 양지원을 만나는 날이면 꼭 담배를 찾았다.양창수는 눈치껏 양석진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왜 애꿎은 담배만 찾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아가씨에게 직접 하면 되잖아.’“내일 오후 시간을 내서 그 사람 주변 조사 좀 해줘.”그 사람은 당연히 양지원을 의미했다.양창수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아가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그래.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것 같아.”양석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양석진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양지원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양지원은 여전히 양석진에게 선을 그었다.하필이면 그 종이에 오성호라는 세 글자만 계속 적을 건 뭔가?양창수가 입을 열었다.“아가씨 쪽 일은 손문병 씨가 맡고 있습니다.”“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절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반우희는 조금 멈칫했다.다른 여자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테지만 반우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변호사님께 사심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변호사가 되지 못하는 벌을 받겠습니다!”이승우가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변호사 하고 싶은 이유가 승원이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반우희는 여전히 바른 자세였다.안시연은 반우희가 정자세로 선 모습이 왠지 어색하게 보였다.“아니에요. 전 정말 법이 좋고 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반우희의 말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그러나 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에이, 난 또 우리 오빠 좋아하는 줄 알았네.”“아니에요.”반우희가 다시 자리에 앉자 곁에 앉은 부승원은 덤덤한 얼굴로 와인을 삼켰다.그때, 이승우 옆자리 여자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맹세는 주먹 쥐고 하는 게 맞아요?”...그러자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이승우는 여자의 이마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우린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돼.”여자는 부끄러운 듯 이승우의 품을 파고들었고 부승희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반우희를 향했으나 반우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그러나 안시연은 반우희의 귓불이 살짝 빨개진 걸 눈치챘고 빨개진 귓불은 반짝이는 불꽃 아래에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사람들은 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부승원을 살폈다.부승원은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에 있는 다른 여변호사와 대화를 나눴다.부승원은 차가운 성격이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그러니 부승원이 왈가닥 소녀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반우희가 조용해진 걸 발견한 안시연이 먼저 다가가 말했다.“우희 씨, 우리도 이만 돌아갈까요? 외할머니가 기다릴 거예요.”“아... 네!”반우희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부승희는 그제야 방금 자신의 질문이 선을 넘은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술을 마셨더니
김세연이 연달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연정훈은 모두 거절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댄 채로 물었다.“가족 모임 없어요?”“없는데? 그럼 너희 집에서 같이 밥 먹어도 돼?”“...”이에 안시연이 작게 중얼거렸다.“정말 뻔뻔하긴.”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나이가 서른 가까이 되도록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뻔뻔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안시연은 여러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연정훈이 강제로 자신의 품 안으로 앉게 했다. 안시연이 입을 열려고 하면 바로 키스로 말을 삼키게 했다.“음...”안시연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연정훈은 술을 마셨고 좀 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안시연을 꽉 끌어안고 뜨거운 온기를 품은 손으로 안시연의 스웨터 위를 더듬었다.동거했을 때는 밤낮으로 붙어 지냈으니 이렇게 오래 떨어지긴 처음이었다. 그렇다 보니 더 예민해지고 작은 자극에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안시연이 작게 신음을 뱉자, 차 안의 공기는 더 뜨거워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들어 자기 다리 위로 앉혔다. 그리고 정면으로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안시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아래로 꾹꾹 눌러 자극을 주었다.안시연은 달뜬 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혔으며 온몸의 힘이 풀렸다.“기사, 기사가 있어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목에 키스하며 말했다.“담배 피우러 나갔어.”“그래도 안 돼요...”연정훈은 한 손으로 안시연의 두 팔목을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스웨터를 올려 허리를 더 깊게 매만졌다. 이어 손은 서서히 안시연의 바지 벨트로 향했다.“연정훈 씨...”안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작은 목소리로 연정훈의 이름을 속삭였다.“소리 내지 말고 천천히 느껴.”안시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이 불덩이가 된 것 같았다.외할머니는 집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차 안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았다.머릿속으로 아우성을 쳐도 이미
부승원은 한참이 지나도록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안시연은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었다. 차 안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고 자칫하면 불장난이 또 시작될 수 있었다.“내가 내려서 확인해 볼게요, 변호사님이 우희 씨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안시연은 옷을 정리하고 차에서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안시연은 또 얼굴을 붉혔다.연정훈도 안시연을 따라 차에서 내려 건물로 향했다.“여기까지 온 이상 외할머니께 인사는 드려야지.”연정훈의 당당한 모습에 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 명절에 연정훈 가문이 가족 모임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 본인의 집을 찾는다니. 이러다가 연정훈의 어머니가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두 사람이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층계 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어. 너랑 난 절대 가능성이 없다고.”차가운 목소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안시연은 그 자리에 굳었다.너무 심한 말에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어버렸고 부승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아이들의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말해줄게. 네가 변호사가 될 가능성은 없어.”“그런데 난...”“네가 읽고 있는 책은 너에게 오히려 독이 될 거야.”“...”“그리고 안시연 씨와 연정훈을 그만 지켜봐. 네가 안시연 씨를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도 미지수인데 너라고 다를 것 같아?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현실 직시 제대로 하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바라고 살아.”안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안시연 뒤에 선 연정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이 미지수라니.부승원은 거절하려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만 말하지 왜 애꿎은 다른 커플을 저주한다는 말인가?부승원은 할 얘기를 마치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리고 안
[선물이요?]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이 답했다.[외투 주머니 확인해 봐.]주머니?안시연은 의아해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거실에 내려놓은 외투를 찾아 양쪽 주머니를 뒤졌다.왼쪽 주머니에는 어느 주얼리 브랜드의 영수증이 있었다.그리고 안시연은 이 브랜드가 보석 브랜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이 메시지를 또 보내왔고 안시연은 깜짝 놀라 굳어버린 몸을 서서히 돌렸다.[그건 예약금 영수증이고 이미 여러 디자인을 골라뒀어. 출장 다녀오면 같이 가서 결정하자.]안시연은 그 자리에 멈췄다.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긴 안시연은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망설였다.며칠 전만 해도 결혼 생각이 없다더니 갑자기 무슨 감정 변화가 찾아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도 또 자신을 홀리는 수작이 아닌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정말 나와 결혼하려는 걸까?’[이 브랜드가 별로라면 다른 브랜드도 좋아.]연정훈의 메시지를 보며 안시연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한참 고민 끝에 메시지를 전송했다.[여긴 대부분 결혼반지일 텐데요.][나도 알아.]...[결혼하는데 반지 아니면 뭘 사겠어?]연정훈은 아주 직진이었다.안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맞은 편의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서프라이즈가 아니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된 기분은 뜬구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칫하면 구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찾아왔다.그래서 자꾸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 있는데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왔다.갑작스러운 벨 소리는 조용한 집에서 유난히 우렁차게 들려 황급히 거절 버튼을 눌렀다.[가족이 자고 있어요.][난 너도 잠이 든 줄 알고.]...안시연은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한 손으로 타자했다.[내가 원하는 결혼은 혼인 서류를 작성하고 법적 효력이 있는 부부 사이를 원하는 거예요. 반지 하나만 있는 그런 결혼이 아니에요.][응. 일반적인 결혼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그날 밤 안시연은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다행히 그다음 날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연정훈도 아마 고객사를 만나러 가야 할 테니 시간이 없을 것이다.도심과 조금 떨어진 이곳은 친구와 가족이 없다면 명절 느낌이 덜했다.안시연은 반우희와 버섯 머리 아이들과 근처를 함께 걸었고 명절 기운을 조금 느꼈다.그리고 이른 시간, 양혁수가 문자를 보내왔다.[해피 뉴이어.]안시연은 이모티콘으로 답변했다.양혁수는 읽었지만 다른 말이 없었다. 왠지 양혁수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점심시간이 되고 주임이KTX 시간을 놓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설 연휴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회사는 왜 너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외할머니는 푸념하시며 안시연을 위한 간식을 챙겨주었다.소현정은 한편에 앉아 간식이나 먹으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오성호는 화서시로 떠났다. 이틀 전 양지원이 새해부터 양혁수가 일을 이어받게 할 것이라 말했고 아예 화서시의 전체 산업을 양혁수에게 물려줄 것이라 했다.‘흥.’‘내 아들은 양씨 가문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데 저 계집애는 마음대로 하라지 뭐.’안시연은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불안한 마음이 더 증폭되었다.“내가 곁에 없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꼭 연락하세요. 급한 일이면 위층의 우희 씨를 찾으셔도 되고요.”안시연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늘어놓았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무슨 걱정을 해? 네 엄마가 여기 있는데.”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소현정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 지긋한 외할머니가 아직도 삼시 세끼를 차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외할머니만 아니었다면 엄마와의 관계는 진작 끊었을 것이다.시간이 되고 외할머니가 아래층까지 안시연을 바래다주었다.택시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안시연은 짐을 싣고 난 뒤에 외할머니한테 폭 안기며 말했다.“혼자 있어도 잘 지내야 해요.”“그래. 걱정하지 말거라.”자꾸 불안
양창수가 그곳으로 가보니 의자에 묶인 손문병은 다친 곳이 별로 없었다.‘허? 그런데 벌써 입을 연 거야?’양창수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아가씨를 위해 어떤 일을 했나요?”손문병은 몸집이 큰 편이고 아주 진중한 얼굴이었다.주변 사람들을 힐끔 둘러보던 손문병이 입을 열었다.“주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 주세요.”“빨리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말 크게 다칠 테니까.”손문병이 말했다.“아가씨는 오성호를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양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뭐라고요?”“양혁수 도련님은 아가씨의 아이가 아닙니다.”양창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나 손문병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무자비하게 사실을 폭로했다.“안시연이라는 여자아이가 아가씨의 딸입니다.”이 말을 마치고 손문병은 양창수를 바라보았다.양창수는 큰 충격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이런 일로 농담한다면 정말 목숨이 위험해질 겁니다.”“제가 직접 친자 결과를 받아왔습니다.”양창수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엄청난 진실에 양창수는 차라리 헛소리라고 믿고 싶었다.양창수는 뒤로 뒷걸음 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2초 뒤, 양창수가 분노 가득한 얼굴로 손문병을 바라보았다.“감히 이렇게 큰 일을 의원님에게 숨기다니!”‘정말 죽으려고 작정했나?’“아가씨가 그렇게 지시했습니다.”“아가씨가 죽으라고 하면 그쪽은 정말 죽을 수 있어요?”“그건 아닙니다.”“...”양창수는 두 눈을 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 이상 손문병과 쓸데없는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사건 전말을 알아내야 했다.손문병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제가 보고를 하지 않았던 건 사실 찝찝한 구석이 하나 있어서 그랬습니다.”“말해요!”“안시연 씨는 아가씨의 친딸이 맞지만 그렇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양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거야 당연히...”“안시연 씨는 양혁수 도련님과 혈연관계가 없습니다.”너무 큰 정보량에 양창수는 다시 한번 벙어리가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