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조금 멈칫했다.다른 여자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테지만 반우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변호사님께 사심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변호사가 되지 못하는 벌을 받겠습니다!”이승우가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변호사 하고 싶은 이유가 승원이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반우희는 여전히 바른 자세였다.안시연은 반우희가 정자세로 선 모습이 왠지 어색하게 보였다.“아니에요. 전 정말 법이 좋고 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반우희의 말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그러나 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에이, 난 또 우리 오빠 좋아하는 줄 알았네.”“아니에요.”반우희가 다시 자리에 앉자 곁에 앉은 부승원은 덤덤한 얼굴로 와인을 삼켰다.그때, 이승우 옆자리 여자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맹세는 주먹 쥐고 하는 게 맞아요?”...그러자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이승우는 여자의 이마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우린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돼.”여자는 부끄러운 듯 이승우의 품을 파고들었고 부승희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반우희를 향했으나 반우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그러나 안시연은 반우희의 귓불이 살짝 빨개진 걸 눈치챘고 빨개진 귓불은 반짝이는 불꽃 아래에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사람들은 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부승원을 살폈다.부승원은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에 있는 다른 여변호사와 대화를 나눴다.부승원은 차가운 성격이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그러니 부승원이 왈가닥 소녀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반우희가 조용해진 걸 발견한 안시연이 먼저 다가가 말했다.“우희 씨, 우리도 이만 돌아갈까요? 외할머니가 기다릴 거예요.”“아... 네!”반우희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부승희는 그제야 방금 자신의 질문이 선을 넘은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술을 마셨더니
김세연이 연달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연정훈은 모두 거절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댄 채로 물었다.“가족 모임 없어요?”“없는데? 그럼 너희 집에서 같이 밥 먹어도 돼?”“...”이에 안시연이 작게 중얼거렸다.“정말 뻔뻔하긴.”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나이가 서른 가까이 되도록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뻔뻔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안시연은 여러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연정훈이 강제로 자신의 품 안으로 앉게 했다. 안시연이 입을 열려고 하면 바로 키스로 말을 삼키게 했다.“음...”안시연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연정훈은 술을 마셨고 좀 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안시연을 꽉 끌어안고 뜨거운 온기를 품은 손으로 안시연의 스웨터 위를 더듬었다.동거했을 때는 밤낮으로 붙어 지냈으니 이렇게 오래 떨어지긴 처음이었다. 그렇다 보니 더 예민해지고 작은 자극에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안시연이 작게 신음을 뱉자, 차 안의 공기는 더 뜨거워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들어 자기 다리 위로 앉혔다. 그리고 정면으로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안시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아래로 꾹꾹 눌러 자극을 주었다.안시연은 달뜬 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혔으며 온몸의 힘이 풀렸다.“기사, 기사가 있어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목에 키스하며 말했다.“담배 피우러 나갔어.”“그래도 안 돼요...”연정훈은 한 손으로 안시연의 두 팔목을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스웨터를 올려 허리를 더 깊게 매만졌다. 이어 손은 서서히 안시연의 바지 벨트로 향했다.“연정훈 씨...”안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작은 목소리로 연정훈의 이름을 속삭였다.“소리 내지 말고 천천히 느껴.”안시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이 불덩이가 된 것 같았다.외할머니는 집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차 안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았다.머릿속으로 아우성을 쳐도 이미
부승원은 한참이 지나도록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안시연은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었다. 차 안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고 자칫하면 불장난이 또 시작될 수 있었다.“내가 내려서 확인해 볼게요, 변호사님이 우희 씨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안시연은 옷을 정리하고 차에서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안시연은 또 얼굴을 붉혔다.연정훈도 안시연을 따라 차에서 내려 건물로 향했다.“여기까지 온 이상 외할머니께 인사는 드려야지.”연정훈의 당당한 모습에 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 명절에 연정훈 가문이 가족 모임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 본인의 집을 찾는다니. 이러다가 연정훈의 어머니가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두 사람이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층계 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어. 너랑 난 절대 가능성이 없다고.”차가운 목소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안시연은 그 자리에 굳었다.너무 심한 말에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어버렸고 부승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아이들의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말해줄게. 네가 변호사가 될 가능성은 없어.”“그런데 난...”“네가 읽고 있는 책은 너에게 오히려 독이 될 거야.”“...”“그리고 안시연 씨와 연정훈을 그만 지켜봐. 네가 안시연 씨를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도 미지수인데 너라고 다를 것 같아?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현실 직시 제대로 하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바라고 살아.”안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안시연 뒤에 선 연정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이 미지수라니.부승원은 거절하려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만 말하지 왜 애꿎은 다른 커플을 저주한다는 말인가?부승원은 할 얘기를 마치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리고 안
[선물이요?]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이 답했다.[외투 주머니 확인해 봐.]주머니?안시연은 의아해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거실에 내려놓은 외투를 찾아 양쪽 주머니를 뒤졌다.왼쪽 주머니에는 어느 주얼리 브랜드의 영수증이 있었다.그리고 안시연은 이 브랜드가 보석 브랜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이 메시지를 또 보내왔고 안시연은 깜짝 놀라 굳어버린 몸을 서서히 돌렸다.[그건 예약금 영수증이고 이미 여러 디자인을 골라뒀어. 출장 다녀오면 같이 가서 결정하자.]안시연은 그 자리에 멈췄다.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긴 안시연은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망설였다.며칠 전만 해도 결혼 생각이 없다더니 갑자기 무슨 감정 변화가 찾아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도 또 자신을 홀리는 수작이 아닌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정말 나와 결혼하려는 걸까?’[이 브랜드가 별로라면 다른 브랜드도 좋아.]연정훈의 메시지를 보며 안시연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한참 고민 끝에 메시지를 전송했다.[여긴 대부분 결혼반지일 텐데요.][나도 알아.]...[결혼하는데 반지 아니면 뭘 사겠어?]연정훈은 아주 직진이었다.안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맞은 편의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서프라이즈가 아니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된 기분은 뜬구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칫하면 구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찾아왔다.그래서 자꾸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 있는데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왔다.갑작스러운 벨 소리는 조용한 집에서 유난히 우렁차게 들려 황급히 거절 버튼을 눌렀다.[가족이 자고 있어요.][난 너도 잠이 든 줄 알고.]...안시연은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한 손으로 타자했다.[내가 원하는 결혼은 혼인 서류를 작성하고 법적 효력이 있는 부부 사이를 원하는 거예요. 반지 하나만 있는 그런 결혼이 아니에요.][응. 일반적인 결혼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그날 밤 안시연은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다행히 그다음 날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연정훈도 아마 고객사를 만나러 가야 할 테니 시간이 없을 것이다.도심과 조금 떨어진 이곳은 친구와 가족이 없다면 명절 느낌이 덜했다.안시연은 반우희와 버섯 머리 아이들과 근처를 함께 걸었고 명절 기운을 조금 느꼈다.그리고 이른 시간, 양혁수가 문자를 보내왔다.[해피 뉴이어.]안시연은 이모티콘으로 답변했다.양혁수는 읽었지만 다른 말이 없었다. 왠지 양혁수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점심시간이 되고 주임이KTX 시간을 놓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설 연휴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회사는 왜 너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외할머니는 푸념하시며 안시연을 위한 간식을 챙겨주었다.소현정은 한편에 앉아 간식이나 먹으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오성호는 화서시로 떠났다. 이틀 전 양지원이 새해부터 양혁수가 일을 이어받게 할 것이라 말했고 아예 화서시의 전체 산업을 양혁수에게 물려줄 것이라 했다.‘흥.’‘내 아들은 양씨 가문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데 저 계집애는 마음대로 하라지 뭐.’안시연은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불안한 마음이 더 증폭되었다.“내가 곁에 없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꼭 연락하세요. 급한 일이면 위층의 우희 씨를 찾으셔도 되고요.”안시연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늘어놓았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무슨 걱정을 해? 네 엄마가 여기 있는데.”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소현정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 지긋한 외할머니가 아직도 삼시 세끼를 차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외할머니만 아니었다면 엄마와의 관계는 진작 끊었을 것이다.시간이 되고 외할머니가 아래층까지 안시연을 바래다주었다.택시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안시연은 짐을 싣고 난 뒤에 외할머니한테 폭 안기며 말했다.“혼자 있어도 잘 지내야 해요.”“그래. 걱정하지 말거라.”자꾸 불안
양창수가 그곳으로 가보니 의자에 묶인 손문병은 다친 곳이 별로 없었다.‘허? 그런데 벌써 입을 연 거야?’양창수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아가씨를 위해 어떤 일을 했나요?”손문병은 몸집이 큰 편이고 아주 진중한 얼굴이었다.주변 사람들을 힐끔 둘러보던 손문병이 입을 열었다.“주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 주세요.”“빨리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말 크게 다칠 테니까.”손문병이 말했다.“아가씨는 오성호를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양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뭐라고요?”“양혁수 도련님은 아가씨의 아이가 아닙니다.”양창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나 손문병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무자비하게 사실을 폭로했다.“안시연이라는 여자아이가 아가씨의 딸입니다.”이 말을 마치고 손문병은 양창수를 바라보았다.양창수는 큰 충격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이런 일로 농담한다면 정말 목숨이 위험해질 겁니다.”“제가 직접 친자 결과를 받아왔습니다.”양창수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엄청난 진실에 양창수는 차라리 헛소리라고 믿고 싶었다.양창수는 뒤로 뒷걸음 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2초 뒤, 양창수가 분노 가득한 얼굴로 손문병을 바라보았다.“감히 이렇게 큰 일을 의원님에게 숨기다니!”‘정말 죽으려고 작정했나?’“아가씨가 그렇게 지시했습니다.”“아가씨가 죽으라고 하면 그쪽은 정말 죽을 수 있어요?”“그건 아닙니다.”“...”양창수는 두 눈을 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 이상 손문병과 쓸데없는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사건 전말을 알아내야 했다.손문병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제가 보고를 하지 않았던 건 사실 찝찝한 구석이 하나 있어서 그랬습니다.”“말해요!”“안시연 씨는 아가씨의 친딸이 맞지만 그렇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양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거야 당연히...”“안시연 씨는 양혁수 도련님과 혈연관계가 없습니다.”너무 큰 정보량에 양창수는 다시 한번 벙어리가
양창수는 30년 넘게 양석진 밑에서 일했다. 양석진이 양지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있다면 아주 은밀한 부분이었다.예를 들어 양석진과 양지원 사이에 은밀한 관계가 있었는지 말이다...손문병의 말도 틀린 게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양지원과 다른 남자의 아이라면 양석진은 분노할 게 분명했다.양창수는 의자에 앉아 계속 담배를 피웠다.손문병은 계속 부추기듯이 말했다.“양석진 씨가 화병이라도 나서 돌아가시면 아마 전국적으로 보도되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겠습니까?”양창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손문병 씨는 양석진 씨가 돌아가신 후의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네요.”손문병은 잠시 말없이 있었고 양창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 일이 잘 풀리면 양석진에게는 일적이조인 셈이었다. 첫 번째는 양지원과의 아이가 생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양지원이 오성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양석진이 이 사실을 알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군.’손문병이 가볍게 기침했다.양창수가 말했다.“할 말 있으면 말하세요.”“제가 좀 성급한 제안이 있긴 한데 일이 빠르게 풀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양창수는 고개를 들었다....양지원은 2층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가다 마침 양창수와 마주쳤다.“디저트를 준비해 두었으니 가서 좀 드세요.”양지원이 말했다.양창수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살피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디저트는 괜찮습니다. 대신 확인할 게 좀 있습니다.”양지원의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양창수의 미소를 보며 양지원은 더욱 긴장감을 느꼈다.“무슨 일인데요?”“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가시죠.”양창수가 손짓으로 안내한 곳은 온실이었다.양지원은 양창수를 잠시 바라본 후 따라나섰다.온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방 안은 따뜻했고 주변의 꽃들도 잘 가꿔져 있었다.양지원은 차를 준비하라고 시키고 양창수에게 자리를 권했다.“어서 말하세요
“오성호 씨를 먼저 처리할 생각인가요?”온실에서 양창수는 양지원의 말을 듣고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오성호 씨는 이미 화서시에 도착했어요. 그 후의 일은 제가 모두 준비해 놨어요.”참, 빠르다.양창수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띠며 물었다.“예전에 그렇게 오성호 씨를 의지하셨는데 이제 이렇게 쉽게 놓을 수 있나요?”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에게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 평생 후회로 남은 상처였다.양창수에게 약점을 들킨 탓에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 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저는 양씨 가문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미 다 설명했으니 양창수 씨도 알아서 판단하길 바랍니다.”“일이 끝나면 바로 양석진 씨에게 말씀하실 겁니까?”“...네.”양창수는 속으로 비웃었다.이 말투로 보아 양지원은 스스로 말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양창수는 양지원이 진심으로 당황해 보였기에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먼저 비밀로 해드릴 수는 있겠지만, 이후 일은 저에게 맡겨 주셔야 합니다.”양지원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양창수가 덧붙였다.“이런 일은 큰아씨보다 제가 더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정말 양석진 씨에게 말하지 않을 건가요?”“말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말하지 않길 바라시는 건가요?”양창수는 비꼬듯 되물었다.양지원의 표정은 금세 무거워졌다.양창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이런 고집불통인 성격은 양석진 씨니까 참아주는 거지.’‘됐어. 먼저 큰아씨를 진정시켜야겠어.’저택에는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만약 양석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양지원이 분노할 테고 그로 인해 양석진도 사태를 수습하기 어려워질 것이었다.양창수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3시쯤 양석진 씨가 총통부 쪽 집에서 손님을 맞이할 예정입니다. 그 손님 중에 여성분도 있으니 한 번 다녀오세요. 일이 끝날 때까지는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양석진 씨께선 눈치채지 않으셔야 합니다.”양지원은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양창수를 바라보았다.
‘꿈이야. 꿈이었어.’양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악몽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온몸으로 오싹하게 만들었다.‘아니다.’소현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것을 양시연도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살... 소현주 씨가 정말 자살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소현주 씨가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임성원이 굳이 연정훈 씨에게 보고했고 심지어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강조했어.’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연정훈이 깨어난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쯤 감긴 눈으로 양시연의 등을 바라보며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감쌌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돌아서기 전에 양시연의 입에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소현주 씨가 자살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양시연은 눈을 감으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소현주 씨가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정말 얌전히 있었단 말이에요? 왜 하필 오늘 임성원 씨가 갑자기 전화한 거죠?”연정훈은 얼굴에 평정을 유지한 채 양시연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시연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나를 속이고 있잖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성원 씨는 당신이 지시한 일을 처리한 거죠? 맞아요? 다만 임성원 씨가 일이 망쳐서 오늘 당신에게 보고하러 전화를 한 거죠.”‘아니. 그뿐만이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소현주의 일을 숨긴 이유는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시연은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 연정훈이 사용하는 어떤 수단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이 이미 눈치챘으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괜히 의심을 사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말했다.“소현주가 자살 시도를 했는데 실패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있어.”양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쪽에서 왜 당신한테 바로 연락한 거예요?”“내가 계속 소현주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했거든. 혹시라도 소현주가 나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연정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소현주라는 여자가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갑자기 나아질 리는 없었다.아마 소현주는 양시연과 연정훈을 이미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면 소현주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현주 씨가 계속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가끔 자살 시도를 한다고 해도 당신이 소현주 씨를 평생 책임질 거예요?”연정훈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내가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소현주 씨 문제에 계속 얽히다 보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사고를 치고 누군가가 조사하면 당신이 연결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리고 예전에 소현주 씨와 공휘 일도 있고요. 공휘는 당신 어머니 쪽 집안사람이고 소현주 씨가 찍은 영상은 당신조차 속일 만큼 완벽했어요. 그 영상이 증거로 쓰이기라도 하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세상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당신 어머니를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연정훈은 이미 이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고려해 두었었고 만약 오늘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소현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 것이다.양시연이 말한 것처럼 소현
양시연은 집에 도착한 후에도 사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땅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그냥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남자들끼리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피를 조금 흘려야 동정을 얻는 법이지.”“됐어요. 부승희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라고요. 이승우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양시연은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연정훈은 그녀가 배고플까 봐 간식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샤워를 마친 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간식을 맛있게 즐겼다. 중간에 연정훈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그녀는 서재로 가서 영어 소설 두 권을 골라 들었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전화는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다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서랍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연정훈은 평소 양시연에게 비밀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물어보면 암호나 열쇠를 알려주곤 했다.양시연은 전에 그가 알려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네자 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혹시 사모님이세요?”“네 저예요. 임성원 씨죠?”“맞습니다.”“무슨 일인가요?”“도...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양시연은 순간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어떤 일이기에 나에게는 말을 안 하는 거지?’“급한 일인가요? 급하면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아니요 급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도련님께 나중에 전화하라고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양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연정훈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성원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
좋은 명절 설날 첫날 결국 분위기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이 났다.이승우는 고집을 부리며 사람들 앞에서 부승희를 강제로 데려갔고 이를 지켜보던 양시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정말 이상한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그럴 리 없다니요? 이승우 씨가 부승희 씨를 강제로 데려가는 걸 봤잖아요.”“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지. 이승우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부승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려고 하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진짜야? 가짜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옆에 앉아 눈을 감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연정훈의 말에 신뢰도가 살짝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근데 이승우 씨는 어떻게 모연준 씨가 문제 있다는 걸 알았을까요?”연정훈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답했다.“뻔하잖아. 이승우는 부승희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모연준한테 문제가 없어도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낼 놈이야. 게다가 모연준도 딱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잖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이 사건 정말 골치 아프네.”...남산 저택 아래의 가로수길에서 롤스로이스가 멈춰 서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부승희는 곧장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이승우는 그녀를 따라갔다.이승우가 부승희의 팔을 붙잡자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돌아서며 그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짝!’소리가 크게 울렸다.이승우는 이미 얼굴에 마른 핏자국과 치료되지 않은 이마의 상처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방금 맞은 따귀로 인해 그의 잘생긴 얼굴은 더욱 참혹하게 보였다.부승희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손을 뿌리치고 다시 그의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이승우는 도망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맞았고 부승희가 멈추자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더 때릴 거야?”‘짝!’부승희는 다시 한 번 세게 이승우의 뺨을 내리쳤고 그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토해냈다.“여기
이승우와 모연준이 싸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양시연과 연정훈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무도회를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승주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급히 말했다.“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봤을 때는 이미 싸우고 있었어요. 근데 서로 말은 안 하고 싸우기만 하더라고요. 왜 싸우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승주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싸움이 고조되지 않은 채 욕설도 오가지 않은 것이 못내 답답한 듯했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다 왔어요. 바로 저 앞이에요.”승주는 다급하게 외쳤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끌며 더 빠르게 움직였다.방 입구 바로 앞의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들이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수선했다.반우희도 홀 한쪽에 있었는데 아마 부승희를 말리려다 부승원에게 밀려난 듯했다. 전체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모연준은 몇몇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승우 또한 제지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승우의 이마에서 선명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이렇게 심하게 싸운 건가?’양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승우 머리 다친 건 부승희가 때린 거예요.”양시연은 더욱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을 밀어 싸움을 말리러 가라고 했지만 연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이승우의 반응을 보라고 했다.홀 중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승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의 상처를 만졌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그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승우는 조용히 부승희를 응시했다.부승희는 모연준의 앞에 서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이승우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부승희 너 진짜 대단하다. 저놈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이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부승희
양시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연준 씨에게 문제가 있다면 부승원 씨가 이미 알아냈을 텐데 부승희 씨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있어요?”연정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으로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걸음을 옮기며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부승희 성격을 알잖아. 부승원이 설령 뭔가 알았다 해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을 거야. 암시 정도로 끝냈겠지. 부승희가 직접 고른 남자가 문제 있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부승희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면 배신도 못 참지만 자신의 선택이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건 더 못 견딜 것이다.그래도 부승원은 딱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할 말을 전했을 것이다.그들은 방에서 나와 위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무도회는 건물 꼭대기에 있었고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주변 건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무도회 중앙에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양시연은 춤에 자신이 없었지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연정훈은 격식을 차린 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부드러운 리듬에 맞춰 움직였고 양시연도 그의 목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정훈 씨와 부승원 씨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당신 생각엔 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연정훈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쓰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며 대답했다.“부승원을 누가 알겠어.”“...”“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들이 잘살든 못살든 우린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양시연은 그를 흘겨보며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당신과 형제 맺는 사람은 정말 불쌍하네요. 좋은 일은 안 하면서 불난 데 부채질이나 하고 말이에요.”‘장서진 얘기를 괜히 꺼내서 부 변호사를 속상하게 만들고.’연정훈은 당당히 말했다.“나는 부승원이 더 이상 속지 않도록 돕고 싶었어. 정말로.”“당신은 마
반우희는 솔직하게 말했다.“친구 한 명이 돈이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승주랑 상의하고 건담 피규어를 팔았어요.”“의리 있네요.”이승우가 반우희를 칭찬하자 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그 친구가 누구예요?”연정훈이 갑자기 물었고 반우희는 물으면 뭐든 답하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말했다.“장서진이요.”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물었다.“그때 승주 생일 때 너희 집에 왔던 그 남자애 맞죠?”“네. 맞아요.”‘오호라.’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허리를 살짝 밀며 눈짓했다.‘정훈 씨, 엄청 예리하네요.’연정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고 사실 그는 반우희의 친구가 그 한 명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만남에서 그의 관심은 온전히 양시연에게 쏠려 있었지만 장서진과 반우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이승우는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일부러 말했다.“재산 다 털어서 도와줄 정도면 진짜 친한 친구인가 보네요.”반우희는 가슴을 툭 치며 대답했다.“저랑 장서진은 함께 자랐어요. 장서진의 일이 곧 제 일이죠. 돈이 뭐가 대수겠어요.”“말 잘하네요.”이승우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응원하듯 말한 후 일부러 부승원을 힐끗 쳐다봤다.‘쯧쯧.’부승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밀며 조용히 말했다.“끝.”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부승희는 제일 먼저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돈 내야지.”조금 떨어진 곳에서 승주가 크게 반우희를 불렀고 반우희는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그쪽으로 뛰어갔다.반우희가 떠나자마자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반우희 씨가 너를 피하는 것 같은데?”부승원은 속으로 불쾌함을 느꼈다. 반우희가 자신의 물건까지 팔아가며 돈을 빌려준 상대가 그 남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자신도 힘든 처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구세주 노릇을 하는 거지?’이승우의 말을 곱씹으며 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가 나를 피한다고?’곰곰
이승우와 그의 진짜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양시연도 연정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시작은 화려했지만 끝은 초라했고 결국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이승우답게 제멋대로 굴다가 끝난 일이었다.이승우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부승희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양시연조차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연정훈은 이를 단순히 해석했다.“아마도 조금 모자라서 그럴 거야.”양시연은 그 말에 장난스럽게 응수했다.“정훈 씨는 다른 사람 얘기할 때는 유독 말을 잘하네요.”연정훈은 침묵했다.“...”지금도 양시연이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는 것을 본 연정훈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물었다.“어디 보고 있어?”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기대 안겼고 연정훈은 한 손으로 대충 포커를 하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렸는데 이승우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포커 테이블에서 애정행각이라니 진짜 양심도 없네.”연정훈은 양시연을 흘끗 바라봤고 그녀는 눈치를 채더니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면 어쩔 건데?’이승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부승희는 양시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시연 씨도 이제 많이 뻔뻔해졌네요.”양시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곁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들게 마련이죠.”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대화에 어이없어하며 잠시 침묵했다.“...”이들의 유쾌한 티키타카가 오가는 동안 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그였기에 지금 그의 기분을 짐작하기는 더욱 어려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반우희가 이승우의 뒤에 조용히 다가왔다. 이승우는 입이 독한 편이라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제 뒤에 서지 마세요. 우희 씨가 내 패를 훔쳐보고 부 변호사님한테 일러바칠까 봐 무섭단 말이에요.”반우희는 순간 멈칫하며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고 당황하며 더듬거렸다.“그럴 리 없어요. 저는 절대 반칙 같은 거 안 해요.”이승우는 비웃으며 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