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수는 30년 넘게 양석진 밑에서 일했다. 양석진이 양지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있다면 아주 은밀한 부분이었다.예를 들어 양석진과 양지원 사이에 은밀한 관계가 있었는지 말이다...손문병의 말도 틀린 게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양지원과 다른 남자의 아이라면 양석진은 분노할 게 분명했다.양창수는 의자에 앉아 계속 담배를 피웠다.손문병은 계속 부추기듯이 말했다.“양석진 씨가 화병이라도 나서 돌아가시면 아마 전국적으로 보도되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겠습니까?”양창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손문병 씨는 양석진 씨가 돌아가신 후의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네요.”손문병은 잠시 말없이 있었고 양창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 일이 잘 풀리면 양석진에게는 일적이조인 셈이었다. 첫 번째는 양지원과의 아이가 생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양지원이 오성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양석진이 이 사실을 알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군.’손문병이 가볍게 기침했다.양창수가 말했다.“할 말 있으면 말하세요.”“제가 좀 성급한 제안이 있긴 한데 일이 빠르게 풀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양창수는 고개를 들었다....양지원은 2층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가다 마침 양창수와 마주쳤다.“디저트를 준비해 두었으니 가서 좀 드세요.”양지원이 말했다.양창수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살피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디저트는 괜찮습니다. 대신 확인할 게 좀 있습니다.”양지원의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양창수의 미소를 보며 양지원은 더욱 긴장감을 느꼈다.“무슨 일인데요?”“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가시죠.”양창수가 손짓으로 안내한 곳은 온실이었다.양지원은 양창수를 잠시 바라본 후 따라나섰다.온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방 안은 따뜻했고 주변의 꽃들도 잘 가꿔져 있었다.양지원은 차를 준비하라고 시키고 양창수에게 자리를 권했다.“어서 말하세요
“오성호 씨를 먼저 처리할 생각인가요?”온실에서 양창수는 양지원의 말을 듣고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오성호 씨는 이미 화서시에 도착했어요. 그 후의 일은 제가 모두 준비해 놨어요.”참, 빠르다.양창수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띠며 물었다.“예전에 그렇게 오성호 씨를 의지하셨는데 이제 이렇게 쉽게 놓을 수 있나요?”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에게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 평생 후회로 남은 상처였다.양창수에게 약점을 들킨 탓에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 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저는 양씨 가문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미 다 설명했으니 양창수 씨도 알아서 판단하길 바랍니다.”“일이 끝나면 바로 양석진 씨에게 말씀하실 겁니까?”“...네.”양창수는 속으로 비웃었다.이 말투로 보아 양지원은 스스로 말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양창수는 양지원이 진심으로 당황해 보였기에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먼저 비밀로 해드릴 수는 있겠지만, 이후 일은 저에게 맡겨 주셔야 합니다.”양지원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양창수가 덧붙였다.“이런 일은 큰아씨보다 제가 더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정말 양석진 씨에게 말하지 않을 건가요?”“말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말하지 않길 바라시는 건가요?”양창수는 비꼬듯 되물었다.양지원의 표정은 금세 무거워졌다.양창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이런 고집불통인 성격은 양석진 씨니까 참아주는 거지.’‘됐어. 먼저 큰아씨를 진정시켜야겠어.’저택에는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만약 양석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양지원이 분노할 테고 그로 인해 양석진도 사태를 수습하기 어려워질 것이었다.양창수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3시쯤 양석진 씨가 총통부 쪽 집에서 손님을 맞이할 예정입니다. 그 손님 중에 여성분도 있으니 한 번 다녀오세요. 일이 끝날 때까지는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양석진 씨께선 눈치채지 않으셔야 합니다.”양지원은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양창수를 바라보았다.
쾅!거실 문이 바람에 의해 세게 닫혔다.양지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얼굴을 돌려 양석진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양석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양지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두 걸음 후 양석진의 구두 끝이 양지원의 하이힐 끝에 닿았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그녀는 싱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양지원의 머리 위에는 양석진이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그녀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양석진을 올려다봤지만, 평소처럼 ‘석진 씨’라고 부르며 부를 수 없었다.“오빠...”양석진은 그 말을 듣자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고 차가웠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양석진의 가슴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명백히 커다란 충격 속에서도 광기나 분노에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한참 동안 대치가 이어졌다.양석진은 입을 열고 평온한 목소리로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창수에게서 방금 몇 가지 얘기를 들었어.”양지원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꽉 쥐었다.“양창수가 오후에 너를 찾아갔고 네가 인정했다고 했어.”“난...”“양창수에게 녹음이 있어.”양지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양창수...죽을 놈의 양창수!’긴장으로 굳어 있던 양지원의 어깨는 완전히 늘어졌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비즈니스의 냉철함은 모두 무너져내렸고 한순간에 여러 해 전으로 돌아가 양석진에게 혼나던 모습이 되었다.양지원의 반응을 본 양석진은 마음속이 요동치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양석진은 입을 열고 다시 물었다.“양창수가 말한 것이 다 사실이야?”“...”양지원은 어떻게 양석진에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다퉜던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 후에 약도 먹지 않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허락했던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임신한 후 매일 걱정했지만, 그 아이가 양석진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크게 실망했다.양지원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석진은
거실에는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스쳤다.양석진의 목소리엔 긴장감이 서렸다.“네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양지원은 양석진을 안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오성호가 함부로 남의 아이를 데려와 바꿔치기할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맞아?”“...그런 거 아니에요.”“그런 네가 무슨 근거로 확신해?”“그냥 알 수 있어요.”양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평소처럼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 속엔 부끄러워 차마 다 말하지 못하는 어색함이 스며 있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을 바라보며 양석진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억눌린 감정이 꿈틀댔다.만약 양지원이 양혁수가 반드시 오성호의 아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가 관계를 맺은 사람은 오직 오성호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그럴 리 없다.만약 그랬다면 양지원은 더 일찍 알아차렸을 것이다.양석진의 시선을 느낀 양지원은 부끄러워져서 두 걸음 물러난 뒤, 옆으로 몸을 돌렸다.양지원은 정말로 양석진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오성호가 약을 썼던 것은 분명했지만, 그녀는 너무 어리석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성호가 자신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양지원은 그저 양석진과만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으나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지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너무 늦었어요. 시연 씨가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 공적인 이유를 내세워 출발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당신을 주시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석진 씨도 시연 씨도 위험해질 겁니다.”양석진은 대답하지 않았다.양지원은 그를 한 번 흘깃 쳐다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양석진은 분명 그녀가 오랜 세월 고집을 부린 탓에 그들의 아이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눈가가 뜨거워졌고 지원은 빠르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애
부엌에서.양석진은 소매를 반쯤 걷고 얼굴을 굳힌 채 조리대 앞에 서서 몇 개의 냄비를 확인했다. 뒤에서는 오븐 안에 아직도 한가득 디저트가 있었고 양석진은 디저트를 조심스럽게 꺼냈다.양지원은 문 앞에 멈춰 서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한번 쳐다보았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양석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디저트 좀 옮겨줘.”“네!”일이 생긴 양지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작은 접시에 담긴 블루베리 파이를 우아하게 들어 나갔다.양석진은 양지원에게 한 번에 간식을 다 가져가라고 쟁반을 가져다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진지하게 걸어 나가는 양지원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양석진은 한동안 말없이 양지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했다.양지원은 옛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수년 동안 양석진은 양혁수를 자주 보지 못했기에 양지원이 이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더 이상 예전의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지금에서야 안시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이 정말로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0여 년 동안 양지원을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양지원이 보낸 쿠키에 독이 들어 있었다 해도 양석진은 그것을 아껴 조금씩 먹었을 것이다. 마치 서서히 독에 물드는 것처럼 말이다.생각할수록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이제 이 자리에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한심하다는 생각에 답답함이 밀려왔다.그때 양창수의 말을 따랐어야 했다.오성호를 없애고 양지원을 지구 어딘가 외진 곳에 던져놨으면 그녀를 길들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 끝났어. 아이가 아이를 낳을 만큼 세월을 허비했으니!’양지원은 블루베리 파이를 내려놓고 자리를 살짝 조정한 후 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석진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했다.양석진이 여전히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아 겁에 질린 그녀는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작은 접시들을 하
켁켁!양지원은 죽을 거의 뿜을 뻔했다.재빨리 휴지를 꺼내 입을 닦고는 양석진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양창수!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했으면서 다 말해버렸네!’양석진은 양지원의 반응을 보고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아까워서 그래?”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재수 없었을 뿐 전혀 아깝지 않았다.“아깝지 않아요.”양석진은 느리게 말했다.“홧김에 그런 말 하지 마. 나중에 내가 정말 사람을 시켜 처리하면 그때 와서 울면서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나 말고.”“석진 씨가 하면 안 돼요!”양지원이 양석진의 말을 끊었다.‘석진 씨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양석진은 잠시 침묵했다. 방금 전까지는 담담했지만, 다음 순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양지원은 의아했다. 아직도 숟가락을 들고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석진 씨, 제가 이미 다 준비해 놓았어요. 죽이지 못하더라도 화서시에 갇힐 거예요.”양지원은 잠시 멈칫하고 덧붙였다.“석진 씨, 이 일에 손대지 마세요. 괜히 당신만 곤란해질 거예요.”양석진은 커피 테이블 밑에서 원래 없을 담배를 찾으려 하다가 양지원의 말을 듣고는 잠시 양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석진 씨가...오해했나?’양석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양지원 앞에 앉았다.“오성호가 밖에 다른 여자가 있어서 마음을 그렇게 독하게 먹은 거야?”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양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자꾸 오성호 씨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미워할 것까지는 없어요. 우리 결혼할 때부터 오성호 씨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어요.”“그러면 왜 결혼했어?”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조용히 그릇 안의 죽을 저으며 불편함을 느꼈다.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심혜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양석진의 사업을 위해서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가문과의 결혼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할까?’모든 이유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양지원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선물 리스트를 작성하다가 결국 지쳐 잠들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밖에서는 양창수와 손문병이 차 안에서 통창을 통해 양석진이 양지원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뚜렷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양창수는 혀를 찼다.손문병은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얼굴은 점잖았지만 행동은 완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했다.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러니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애가 있는 부부는 쉽게 이혼 못 한다고용.”왜 ‘용’이라는 말투로 말하는지 의문스럽다.양창수는 손문병을 흘겨보았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양창수는 놀라서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어떤 지시 있으십니까?”“들어와.”양창수는 신나는 듯한 표정으로 정색하고 물었다.“위층으로 올라가도 되나요?”‘괜히 볼 것 못 볼 것을 보게 되는 거 아니야.’양석진이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거실에서 기다려.”쳇.결국 위층은 안 되는 거였다.양창수는 가볍게 기침하고 옷을 정리한 뒤에 차에서 내렸다.손문병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고 왜 자신은 부르지 않느냐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양창수는 고개를 들어 콧대를 세웠다.‘훗! 네 차례는 아직 아니다.’양창수는 거실에 들어가 반나절을 기다린 끝에 양석진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양창수는 양석진의 셔츠 목 부분을 힐끗 보았다.깔끔했다.에휴.양석진은 양창수에게 리스트를 건네며 말했다.“창고에서 이 물건들 다 찾아.”양창수는 대충 훑어보며 전부 보석, 옷,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인 것을 알았다.“과자는 마트에서 사 와. 많이 사.”양석진이 말했다.“알겠습니다.”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준비를 했다.그런데 갑자기 양석진이 그를 불렀다.“나도 같이 갈 거야.”양창수는 급히 양석진을 말렸다.“아니.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서 사 오게 할게요.”“안 돼.”“시간 남으면 그동안 과자라도 포장하시죠. 그것도 나름
반우희는 녹음기를 충전해 두고 동료가 놀러 가자고 불러내자 기쁘게 따라나섰다.“얼른 다녀와. 희주랑 애들이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외할머니가 말했다.“최 할머니, 감사합니다!”반우희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이 아이는 참...”외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매일매일 이렇게 즐겁게 사는구나.”그때 소현정이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이 돌아와 함께 식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아래층 반찬 가게에 가서 반찬 좀 사 와라.”“명절인데 반찬을 팔겠어요?”소현정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외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장씨네 반찬 가게는 설날 아침만 빼고는 일 년 내내 문을 닫은 적이 없단다.”“엄마, 너무 오버하지 마세요.”소현정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외할머니는 직접 나갈 수밖에 없었다.외할머니가 나간 후 소현정은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몇 년 전만 해도 명절에 오성호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그 생각에 소현정은 오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다섯 번이나 시도했지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는 차가운 꾸짖음만 돌아왔다.소현정은 충격에 빠졌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렸다....외할머니가 물건을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소현정이 식탁에 엎드려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무슨 일이냐?”외할머니를 보자 소현정은 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딸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딸은 딸이었다.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소현정의 반항적인 태도가 싫었지만, 지금은 딸이 안쓰러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위로하려 했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그만 좀 하세요!”소현정이 울부짖듯 소리쳤다.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조용히 음식을 준비하던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