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녹음기를 충전해 두고 동료가 놀러 가자고 불러내자 기쁘게 따라나섰다.“얼른 다녀와. 희주랑 애들이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외할머니가 말했다.“최 할머니, 감사합니다!”반우희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이 아이는 참...”외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매일매일 이렇게 즐겁게 사는구나.”그때 소현정이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이 돌아와 함께 식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아래층 반찬 가게에 가서 반찬 좀 사 와라.”“명절인데 반찬을 팔겠어요?”소현정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외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장씨네 반찬 가게는 설날 아침만 빼고는 일 년 내내 문을 닫은 적이 없단다.”“엄마, 너무 오버하지 마세요.”소현정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외할머니는 직접 나갈 수밖에 없었다.외할머니가 나간 후 소현정은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몇 년 전만 해도 명절에 오성호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그 생각에 소현정은 오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다섯 번이나 시도했지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는 차가운 꾸짖음만 돌아왔다.소현정은 충격에 빠졌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렸다....외할머니가 물건을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소현정이 식탁에 엎드려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무슨 일이냐?”외할머니를 보자 소현정은 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딸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딸은 딸이었다.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소현정의 반항적인 태도가 싫었지만, 지금은 딸이 안쓰러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위로하려 했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그만 좀 하세요!”소현정이 울부짖듯 소리쳤다.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조용히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 이 손 놔요!”소현정이 외쳤다. 곧 경계심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낮췄다.“손 놓으세요!”“너, 네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한 거야?”외할머니는 소현정의 손목을 붙잡고 녹음기를 빼앗으려 했다.“뭐가요. 엄마가 잘못 들었어요!”“나 아직 정신 멀쩡해!”외할머니는 얼굴이 붉어지며 딸을 매섭게 바라보며 다급하게 움직였다.“시연이 네 딸이 아닌 거지 그렇지?”“네!”소현정은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당연히 내 딸이죠! 시연이가 내 딸이 아니면 누구 딸이겠어요!”“아니야. 아니야.”외할머니는 연신 되뇌며 소현정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였다.“너 거짓말하고 있어! 방금 내가 똑똑히 들었어!”소현정이 반박하려 했지만, 외할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쩐지...네가 왜 시연이를 보러 오지 않는지...”수많은 의심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그녀는 양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러 번 영상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안시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그때...외할머니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 모든 생각을 부정했다. 차라리 소현정이 정말로 매정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나았지 세상에 진짜로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소현정은 당황했다. 그녀는 엄마가 뭔가를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현정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엄마, 제발 모른 척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내 아들이자 엄마의 외손자가 곧 양씨 가문의 회장이 될 거예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제발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부처님이시여.외할머니는 딸의 광기와 욕망에 찬 얼굴을 보며 그 모습이 낯설고 두려웠다.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그녀는 어떻게 이런 딸을 낳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소현정의 뺨을 내리쳤다!“너 이러고도 사람이야?”소현정은
소현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세 명의 아이...소현정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때 희주가 아무 경계도 없이 다가와 말했다.“이모, 어디 가세요?”소현정은 순간적인 위기 속에서 재빠르게 희주의 손을 잡아끌며 승주에게 다급히 말했다.“승주야, 빨리! 이모 좀 도와줘. 외할머니가 갑자기 아파서 쓰러지셨어!”보통의 아이였다면 당황했을 텐데 조숙한 승주는 침착하게 손목에 찬 애플워치로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차를 요청했다.소현정은 승주가 직원들에게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온몸이 떨렸다.“오빠, 언니에게도 연락해요!”희주는 승주에게 상기시키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던 이웃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승주는 반우희에게도 연락했고 반우희는 근처에 있어서 구급차보다 먼저 도착했다.현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고 소현정은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머릿속도 멍해졌다. 그녀의 정신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아들, 돈, 엄마...’아니야!소현정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일어나 엄마가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무작정 뛰어가 그녀를 덮쳤다.“엄마...”“나를 좀 봐요. 제발 나를 봐요!”주변 사람들은 소현정이 감정적으로 격해지자 다가가 그녀를 붙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구급차가 도착했고 보호자인 소현정은 따라가야 했다.반우희는 젤 끝으로 밀려났다.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구급차에 함께 올라탔다....원주에서.안시연은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러 나가려던 중 반우희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우희 씨?”“언니, 안시연 언니!”다급한 목소리에 안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우희 씨, 무슨 일이에요?”“언니, 빨리 집에 와요! 외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안시연의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었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반우희는 막연한 추측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 외할머니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 그리고 소현정의 격한 감정 이 모든 것을 보고 두 모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하지만 외할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반우희는 잠시 안도한 뒤 곧바로 물었다.“외할머니, 안시연 언니에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이 말을 듣자 외할머니는 반우희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떼려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수술실 앞에 도착했을 때 반우희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외할머니, 조금만 더 버티세요. 안시연 언니가 곧 도착할 거예요!”“가족분들은 이쪽으로 물러나 주세요.”그 익숙한 말이 다시 들려왔다.반우희는 그 말이 주는 무력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홍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말이었다.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반우희는 복도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깊은숨을 내뱉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이 도착했다.연정훈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장과 최고의 의사들이 모여들었다.얼마 전 새로 합류한 최정예 의료팀이 있다고도 했다.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희망의 불씨를 품으며 조용히 기다렸다....원주에서.양지원과 양석진은 차를 타고 막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양지원은 긴장한 듯 가져온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안시연이 이 선물을 좋아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양 대표님, 안시연 씨가 15분 전에 갑자기 기차역으로 향했고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습니다.”양지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죠?”“조사한 결과 안시연 씨 외할머니와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안전을 위해 저희가 계속 안시연 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양지원은 즉시 차를 돌려 경인으로 향했다.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안시연의
안시연은 수술실 밖에서 마치 외할머니를 본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외할머니는 그날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환하게 웃으며 안시연에게 손을 흔들며 잘 있으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안시연의 눈앞은 눈물로 흐릿해졌고 정신은 점점 몽롱해지며 외할머니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그 순간, 병원장의 낮고 미안한 목소리가 귀가에 스며들었다.“연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안시연은 이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소리치며 그들에게 계속해서 응급처치해달라고 외쳤다.“최선을 다했다니, 최선을 다했다니!”병원장은 연신 사과했지만, 안시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껴안으며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셔츠를 필사적으로 꽉 잡았다.“연정훈 씨! 전문가를 불러와요. 외할머니를 살려주세요!”연정훈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안시연은 결국 무너져 내려 거의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그녀는 연정훈의 품속에서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외할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수술실 밖에는 죽음의 냉기가 감돌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꼭 껴안고 그녀가 마음속에 가득했던 감정을 쏟아내도록 했다.결국 안시연은 기력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돌아가셨다고요?!”양지원은 소식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태가 위중하셨고 결국 소생하지 못하셨습니다.”“그러면 안시연 씨는요?”양지원은 재빨리 물었다.양창수가 대답했다.“연정훈이 시연 씨를 데리고 갔어요.”양지원은 소파에 앉으며 양석진을 바라보았다.양석진이 물었다.“병이 악화한 원인은 밝혀졌어?”“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양창수가 대답했다.“병이 발작했을 때는 집에 있었고 아이가 신고해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합니다.”양석진은 침착하게 지시했다.“경위를 명확히 파악해. 그리고 소현정을 감시해. 오늘 밤
“외할머니?”텅 빈 곳 속에서 안시연은 연신 외할머니를 불렀다.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안시연은 마치 영혼이 떠나간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외할머니? 외할머니?!”발밑의 땅이 사라진 듯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안시연의 두려운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그때 침실 문이 급히 열리고 연정훈이 문가에 나타났다.여기는 그들의 안방이었다.안시연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떠오르는 빛을 발견한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와 연정훈에게로 달려갔다.“연정훈 씨, 우리 외할머니 어디 계세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몸을 부축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시연, 외할머니는 이미...”“아니에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시연은 분명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그녀는 재빨리 연정훈을 지나쳐 무언가를 확인하려 했지만, 계단 끝에서 거실에 앉아 있는 반우희를 보게 되었다.“우희 씨...”안시연은 힘겹게 표정을 추스르며 조용히 물었다.“우리 외할머니 어디 계세요?”반우희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반우희의 표정을 본 안시연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손발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은 금세 창백해지더니 뒤로 쓰러졌다.다행히 연정훈이 안시연 뒤에 있었다.“의사 불러 주세요!”짧은 순간 동안 안시연은 다시 기절했다.큰 슬픔 앞에서 사람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연약해진다.안시연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깊은 절망에 잠식되어 헤어 나올 힘조차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건 단 한 사람 계속해서 안시연의 손을 붙들고 있던 사람뿐이었다. 마치 안시연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듯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로 연정훈이었을 것이다.그가 맞다.눈물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안시연은 연정훈이 얼마나 오래 잠을 자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연정훈의 눈에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안시
“병원에서 사람을 죽인 거예요! 무슨 전문가들이라더니 우리 엄마가 멀쩡했는데 어떻게 응급처치에 실패할 수 있어요?!”안시연이 연정훈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소현정은 병원장 사무실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항의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소현정은 고혈압으로 기절하며 큰 고통을 겪었다.사건 후 소현정은 집으로 돌아갔다.몸이 회복되자마자 병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음이 약해진 반우희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안시연이 도착하자 소현정은 절박하게 안시연을 붙잡고 말했다.“너 잘 왔어. 바로 이 사람들이 네 외할머니를 죽인 거야!”소현정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눈을 크게 뜨고는 안시연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처럼 보였다.이 순간, 안시연은 소현정이 마치 딸처럼 엄마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소현정은 더욱 강조하며 말했다.“너의 외할머니는 그냥 집에서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더니 거실에서 넘어졌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도 의식이 있었단 말이야!”그러면서 소현정은 반우희를 잡아당겼다.“이 아이한테 물어봐!”반우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저는...”안시연은 소현정을 보지 않고 병원장을 바라보았다.병원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연정훈이 함께 있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수술 전 과정이 녹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병원은 조사에 협조하겠습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현재 심정을 이해했고 그녀가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는 진수빈에게 법적 절차를 밟아 수술의 구체적인 상황을 조사하라고 즉시 지시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말했다.“부승원에게 이 일을 맡길게. 만약 누군가의 실수가 있었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안시연은 수술에 문제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전문가들이었고 실수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하지만 운명은 안시연을 더욱 괴롭히려는 듯했다.그날 오후 의료진 내부에서 수술 중에 심각한 과실이 있었다는 내용이
부승원은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는 순간 연정훈 대신 마음속으로 긴장했다.역시 그 불길은 연정훈에게 번졌다.안시연은 겉으로는 차분하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눈빛은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소현주 씨는 분명히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변의 많은 의사들이 소현주 씨가 아프다는 걸 몰랐겠어요?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먹지 않으면서요.”“연정훈 씨, 제발 저를 도와줘요.”“알겠어.”연정훈은 안시연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아니에요...”안시연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연정훈의 손을 놓고 두 걸음 물러섰다. 두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강하게 부정하듯 말했다.“철저히 조사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도 소현주 씨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연정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법은 공정하게 판단할 거야.”“그럴 리가 없어요!”안시연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녀는 부승원을 가리키며 외쳤다.“못 들었어요? 소현주 씨가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소현주 씨는 아픈 사람이에요! 소현주 씨는 의사라는 직업을 잃는 것뿐이에요. 저의 외할머니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비웃듯 냉소적으로 웃었다.연정훈을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당신이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소현주 씨는 직업조차 잃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의사로 남아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어요!”연정훈이 다가가 안시연을 달래려 했지만, 안시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반우희가 안시연을 붙잡고 말했다.“언니, 진정해요. 이건 소 선생님의 잘못이지 연정훈 씨의 잘못 아니잖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반우희 씨는 모르겠지만, 소현주 씨는 정훈 씨의 전 여자친구예요.”“조현병이라는 보호막이 없어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도와줄 거예요!”충격에 빠진 반우희는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시연에게 차분하게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