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은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는 순간 연정훈 대신 마음속으로 긴장했다.역시 그 불길은 연정훈에게 번졌다.안시연은 겉으로는 차분하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눈빛은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소현주 씨는 분명히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변의 많은 의사들이 소현주 씨가 아프다는 걸 몰랐겠어요?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먹지 않으면서요.”“연정훈 씨, 제발 저를 도와줘요.”“알겠어.”연정훈은 안시연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아니에요...”안시연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연정훈의 손을 놓고 두 걸음 물러섰다. 두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강하게 부정하듯 말했다.“철저히 조사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도 소현주 씨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연정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법은 공정하게 판단할 거야.”“그럴 리가 없어요!”안시연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녀는 부승원을 가리키며 외쳤다.“못 들었어요? 소현주 씨가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소현주 씨는 아픈 사람이에요! 소현주 씨는 의사라는 직업을 잃는 것뿐이에요. 저의 외할머니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비웃듯 냉소적으로 웃었다.연정훈을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당신이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소현주 씨는 직업조차 잃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의사로 남아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어요!”연정훈이 다가가 안시연을 달래려 했지만, 안시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반우희가 안시연을 붙잡고 말했다.“언니, 진정해요. 이건 소 선생님의 잘못이지 연정훈 씨의 잘못 아니잖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반우희 씨는 모르겠지만, 소현주 씨는 정훈 씨의 전 여자친구예요.”“조현병이라는 보호막이 없어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도와줄 거예요!”충격에 빠진 반우희는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시연에게 차분하게
변호사 사무실에서.이승우는 부승원의 설명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완전 막무가내 아니에요?”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반우희와 부승희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아닌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아니, 제 말이 틀렸어요?”“그럼 이승우 씨는 시연 언니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요?”“...”“거봐요. 이승우 씨도 대답할 수 없잖아요.”이승우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우선 연정훈이 몰래 연명걸을 처리한 건 안시연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이것도 잘못된 건가요?”“진짜 사랑해서 그런 건데 잘못이라고 치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반우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소현주 의사를 왜 그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는 거죠?”“...”‘어린 녀석이 한 마디도 지지 않네.’가만히 듣고 있던 부승희가 입을 열었다.“그럼 반우희 씨 말대로면 정훈 오빠가 소현주 씨를 몰래 처리하거나 거짓 증거를 만들어 감방에 보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반우희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그러자 이승우가 기세등등하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야.’반우희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불법 행위는 틀린 게 맞아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시연 언니가 이해돼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이성을 지킬 수 있겠어요? 언니가 이성을 되찾는다면 다시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죠.”세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부승원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희가 제 오빠 옆구리를 톡 치며 말했다.“어이 변호사님은 할 말 없어?”“안시연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세 사람이 바로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부승원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연정훈이 정말 하늘 아래 부끄럼이 하나도 없었다면 왜 안시연 씨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겠어?”“상대가 소현주만 아니었다면 연정훈은 절대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테고 안시연 씨가 손해를 보는 일
안시연은 연정훈이 소현주에게 직접 벌을 주라는 게 아니었다. 만약 연정훈이 소현주의 죽음을 원하냐고 묻는다면 안시연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연명걸의 일에도 안시연은 연정훈이 안 좋은 일에 연루될 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말렸었다.하지만 연정훈이 소현주의 일에 자꾸 변명을 늘여놓자 안시연은 너무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안시연이 무너질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연정훈이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다른 사람의 편을 든다면 안시연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시연의 애인이 아니던가!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안시연은 이성을 되찾고 부승원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부승원을 집으로 불렀다.“내가 변호할게요.”부승원의 말에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소현주 씨는...”이름만 뱉었을 뿐인데 안시연은 호흡이 가빠졌다.부승원은 이를 눈치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난 변호사고 법으로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 어떤 사람도 내 원칙을 어긋나게 할 수 없고 아무리 연정훈이라고 해도 변함이 없어요. 소현주 씨에게 잘못이 있다면 끝까지 싸울게요.”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절대 간섭하지 않을게.”“저는 지금 당사자와 사건에 대해 얘기 중이니 연정훈 씨의 의견은 듣지 않겠습니다.”“...”안시연은 부승원을 믿었다.“그럼 작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부승원이 노트북을 꺼내 들며 말했다.“말하세요.”“만약 형량을 받을 수 있다면 실형 선고를 바라며,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배상을 포기할게요.”부승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먼저 말씀드리자면 현재 상황이 안시연 씨에게 더 불리한 상황이에요. 병원 쪽 입장을 알아봤는데 이 사건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 아주 큰 숫자의 배상금을 제시하고 있어요.”안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변호사님 그거 아세요? 제 남자 친구가 얼마 전에 그 병원에 억 단위로 기부했어요. 그러면 그 배상금이 제 남자
연정훈에게 소현주란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과거의 연정훈은 사랑과 죄책감 두 감정은 전혀 섞일 리가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현재 두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다.굳어버린 연정훈을 살피며 부승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 씨에게 감정이 남은 거야?”“아니.”“그럼, 대체 뭔데?”연정훈은 부승원을 한참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사귀는 동안 어머니가 삼촌을 시켜 뒷조사하게 했어. 그런데 우리가 다툰 날 소현주가 홀로 뛰쳐나갔고 삼촌이 그 틈을 타서 나쁜 짓을 했어.”“공휘?”“그래.”공휘가 어떤 사람인지는 부승원도 잘 알고 있었다. 연정훈이 많이 간추려 말했지만 부승원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눈치를 챘다.‘이게...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지.’소현주의 사고는 연정훈의 엄마로 비롯된 일이었으니 연정훈이 한평생 소현주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엔 소현주가 안시연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안시연은 충분히 소현주에게 죗값을 물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정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연정훈이 안시연을 위해 소현주를 감방에 보낸다는 것도 참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이 이 사건을 방관하여 안시연의 외할머니를 죽인 소현주를 법 테두리 밖으로 보낸다면 안시연에게 너무 몹쓸 짓이었다.부승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퇴양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그때, 부승원은 갑자기 촉이 왔다.“소현주 씨 사건 증거 제대로 확인해 봤어?”“동영상 확인했어.”“...”‘어휴. 참 매몰차긴.’부승원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그럼 동영상은...”“검증받았는데 합성 아니래.”부승원은 정말 할 말을 잃었다.그래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럼 넌 정말 답도 없네.”“...”“안시연 씨는 알고 있어?”부승원의 질문에 연정훈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고 부승원은 바로 눈치를 챘다.연정훈이 소현주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 걸 이해할 수는 있었다. 연정훈은 이 사건에 있어 간접 가해자이자
부승원이 떠나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안시연은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그 옆에 다가가니 종이에 적은 리스트는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이었다.“이건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게. 쉬고 있어.”안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쳐다도 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혼자 힘으로 하고 싶어요.”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안시연은 몇 글자를 끄적이다가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빠르게 닦아내고 다시 글을 쓰는 걸 반복했다.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그 행동을 저지했다.“벌써 나와 선을 긋는 거야?”안시연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한참 뒤 안시연이 힘겹게 말을 시작했다.“지금 연정훈 씨와 이런 얘기할 기분 아니에요. 무사히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싶어요.”“그 다음엔?”그 다음엔...안시연도 그다음을 몰랐다.하지만 지금, 이번 생에 주어진 행복과 희망을 단숨에 뺏겨버린 기분이 들었다.이젠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다.안시연이 아무 말도 없자 연정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소현주 때문에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그래요. 지금 연정훈 씨가 많이 원망스러워요.”안시연은 고분고분하게 인정했다.그리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 씨를 원망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연정훈은 마음이 너무 아파 호흡이 가빠졌다.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안시연이 말했다.“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그 말에 내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알기나 해요?”“그렇게 되면 소현주는 손쉽게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텐데 고작 그런 말로 내 입을 막으려고 했어요?”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전에 내가 소현주에게 빚진 게 있다는 말 기억해?”“그래서 지금 그걸 갚겠다고요?”“아니.”“그럼, 뭔데요?”“지금 네가 불법이든 합법이든 소현주를 손보고 싶다면 난 절대 간섭하지 않을게. 하지만 시연아, 난 내 손으로 소현주를 두 번 망가뜨릴 수는 없어.”안시연은 마음이 흔들렸다. 연정훈에게 말하지 못할 상황이 있을 거
이제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심장이 조각조각 부서져 갔다.아무리 많은 변명을 대도 연정훈은 이길 수가 없었다.안시연을 지켜 주겠다고, 경인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정말 연정훈이 필요한 순간, 연정훈은 변명밖에 늘어놓지 못했다.그리고 빌어먹을 변명은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외할머니 장례를 마치는 대로 우리 사이도 정리해요.”“우린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내가 살 수 있게 이만 놔 줘요.”사랑하기에 그만하자는 말이 너무 대질 적으로 느껴졌다.그리고 살 수 있게 놔달라는 말은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연정훈은 서재 소파에 앉아 브랜드 사에서 보내온 수많은 반지 디자인을 살폈다. 머릿속엔 반년 사이의 추억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사랑을 원하는 순간부터 연정훈의 사랑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그 사랑을 지금 제대로 알아차렸는데 이만 놓아주어야 했다.후드득.눈물이 반지 디자인 위로 떨어졌다.연정훈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크게 심호흡을 뱉었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니코틴의 자극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담배가 꺼지면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반복하자 서재는 담배 연기로 꽉 차버렸다.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이곳에서 연정훈은 숨을 돌리고 있었다.‘아니. 우리 둘 사이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어. 정말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어.’...부승원은 사건 현장을 다녀왔다. 연정훈이 자신의 제안을 빠르게 반박했지만 변호사의 촉이 안시연의 어머니가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그래서 직접 확인해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다.아래층에서 이웃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반우희가 보였다.부승원은 반우희를 카페로 데리고 가 디테일을 묻기 시작했다.“직업이 변호사 아니에요? 왜 탐정 일까지 겸하고 있는 거예요?”반우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줘.”반
그때 카페 직원이 다가왔다.“아무것도 필요 없어요.”“...”시키지 않고 자리만 떡하니 차지한다니, 직원은 어이가 없었다.머쓱해진 반우희가 대신 메뉴판을 받아 쥐며 말했다.“일단 메뉴 한번 확인해 볼게요. 잠시만요.”“네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승주의 얘기를 확인하느라 바빴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며 메뉴판을 훑었고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다.“저도 소현정 이모를 의심하긴 했어요... 그런데 설마 이모일 리가 있겠어요? 이모는 할머니 친딸이잖아요. 할머니가 이모를 가리키지도 않았고요.”“세상 그 어느 어머니가 자기 딸을 범죄자라고 알리겠어?”“그건... 맞아요.”반우희는 빨대를 입에 물고 굳은 얼굴로 살짝 끄덕였다.멀지 않은 곳에서 직원이 반우희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에게 말했다.“변호사님, 질문 다 하셨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미련 없이 일어나는 반우희에 부승원은 조금 의아해했다.하지만 그날 자신이 뱉은 말을 떠올리며 반우희가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반우희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직원이 계산서를 들고 부승원에게 내밀었다.“총 12만 원입니다. 어떻게 계산하시겠어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밀크티 두 잔에 12만 원?계산서를 훑은 부승원은 입가가 굳어갔다.계산서에는 무려 가게의 절반가량의 메뉴가 찍혀 있었다.고개를 돌리니 반우희가 포장된 간식을 양손에 나눠 들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나이도 어린 게 잔머리만 좋아서.’부승원은 말없이 계산을 마쳤다....연정훈은 장례식장에서 나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연정훈의 말 대로 부승원은 소현주를 사무실로 불렀다.짧은 두 날 사이 소현주도 많이 초췌해지고 피곤해 보였다.그러나 연정훈을 발견하고 구세주라도 찾은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정훈아,
소현주는 몇 초간 상황 파악을 마치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날 정신 병원에 가두려고?”“네 병, 치료받아야 하지 않겠어?”연정훈이 되물었다.“지금 안시연 씨를 위해 화풀이해 주는 거잖아!”소현주가 눈을 붉혔다.“법률상 난 무죄니까 안시연 씨를 대신해 날 벌주려고!”“정훈아,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네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은 나였어. 그런데 안시연 씨가 생겼다고 나한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네 어머니가...”“잊어버린 거 아니야.”연정훈이 소현주의 말을 잘랐다.그 일을 잊지 못해 지금 이렇게 발이 묶여 버렸다.“재판이 끝나고 네가 정말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난 널 치료받게 할 거야. 퇴원 기준에 도달하면 그때에는 퇴원해도 좋아.”소현주가 냉소를 터뜨렸다.“퇴원 기준? 그런 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연정훈이 안시연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연정훈은 자신의 원칙을 깨면서 안시연을 위해 복수를 하려 했다.그러자 소현주가 차가운 얼굴로 집요하게 말했다.“나한테 보상해 준다고 말했잖아.”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했다.“내가 빚진 건 내가 갚아. 그러나 네가 안시연 씨에게 빚진 건 피할 수 없어. 두 일은 전혀 다른 결이야.”“그러니 지금부터 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너의 유죄를 증명할 거야.”소현주가 길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내가 고의로 그랬든 고의가 아니었든 설사 정훈이 네가 증거를 위조한다고 해도 난 큰 처벌을 받지 않아!”“네가 큰 벌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야.”“안시연 씨...”“시연이는 그저 네가 받아야 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니까.”연정훈은 아주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이런 연정훈의 모습에 소현주는 마음이 차게 식어갔다.몇 년 동안 자리를 비웠더니 연정훈의 마음에는 안시연만 남아 있었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것도 겨우 반년가량에 불과했다!불만, 질투, 두려움 등 모든 감정이 뒤섞여 결국 원한으로 되었다.‘내가 추락하면 너희들도 편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야!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
‘망했어.’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이 점점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시연은 충분히 반우희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정권을 부승원에게 넘겨버린 상황이 의아했다. 결국 양시연이 부승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 보였다.“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반우희가 초조하게 물었다. 송민재는 살짝 기침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기다려야죠. 부 변호사 쪽에서 곧 팀 명단을 보내줄 겁니다. 만약 그 명단에 우희 씨 이름이 없다면 그때 가서 부 변호사에게 직접 부탁하세요.”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맥이 빠졌다.‘부승원의 성격에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통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녀는 부승원의 사무실 쪽을 몰래 훔쳐보며 첫 번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 시각 부승원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무슨 일이야?”비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업무를 간단히 보고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반우희 씨 문제는 우리 쪽 인원을 배정해서 처리해도 괜찮을까요?”그제야 부승원이 고개를 들었고 비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를 띠고 덧붙였다.“게다가 만약 우리가 부주의하게 처리해서 사기 사건 같은 문제라도 연루되면 업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부승원은 비서의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침묵에 비서가 당황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비서는 이미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특혜를 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의 뒷수습도 자신이 처리했기 때문이다.잠시 후 부승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또 같은 실수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할 거야.”“알겠습니다.”비서는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라지 않았고 부승원의 얼굴을 살짝 살피며 조용히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부승원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부승원은 잠시 생각에
“양시연 언니, 저 오늘부터 같이 갈 수 있는 건가요?”반우희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양시연은 부승원의 반응을 떠올리며 눈앞의 작고 귀여운 소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양시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었고 반우희는 애교를 부리며 양시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은 안 돼요.”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응?’반우희는 금세 자세를 고치며 애처로운 얼굴로 물었다.“저 안 데려가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너를 이용해 큰 물고기를 낚으려는 거야.’양시연은 반우희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부 변호사님께 이미 얘기했어요. 며칠 뒤에 부 변호사님이 팀을 이끌고 정인에 들어가실 건데 우희 씨도 그 팀에 합류해서 함께 가면 돼요. 이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에요.”반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반짝였다.‘좀 돌아가는 느낌인데 그냥 바로 데려가면 되잖아.’반우희는 계속해서 간절한 표정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길어야 삼사일 내로 우희 씨도 정인에 갈 수 있을 거예요.”“그럼...”“240만이에요.”양시연은 장난스럽게 윙크했고 반우희는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흔들었다.“그럼 언니, 조심히 가세요!”“다음에 봐요.”양시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났고 뒤에서 반우희는 마치 만화 속 캐릭터처럼 환한 얼굴로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너무 좋아!’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는 유리창 너머로 부승원의 냉혹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한편 위층에서 양시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해결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연정훈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렇게 쉽게?]양시연은 다리를 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타이핑을 이어갔다.[부승원 씨가 처음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살짝 놀라게 했더니 배우고 싶다고
양시연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고 송민재는 빠르게 반응하며 반우희를 끌어당겼다.“알았어요. 우희 씨의 일은 나중에 얘기하고 먼저 양시연 씨와 부 변호사님과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해요.”“네? 그런데 저는...”“그만 말해요.”송민재는 반우희를 끌고 나갔지만 반우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양시연을 간절히 바라봤다.‘언니, 저를 잊지 마세요.’양시연은 침묵했다.“...”사무실 문이 닫히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승원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연필을 쓰레기통에 던졌다.“연정훈이 양시연 씨에게 남겨준 팀이 부족해서 나한테 폐품을 구하러 온 거에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저 입은 연정훈보다 더 못됐어.’양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방문한 이유를 말했지만 부승원은 대답했다.“능력이 부족해서 그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부 변호사님, 겸손하시네요. 능력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급하게 찾아온 게 문제겠죠. 바쁘신데 시간을 낼 수 없는 것도 이해합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 선반에서 파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양시연은 다시 한번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변호사님, 연정훈 씨의 부탁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배려해 주세요.”부승원은 대답했다.“전 협력자를 찾을 때는 상대의 능력과 안목만 봅니다. 누구의 체면도 보지 않죠.”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부 변호사님,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부승원은 얼핏 미소를 보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반우희를 눈여겨본 사람이 누구죠?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의 안목이나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봅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반우희를 먼저 눈여겨본 건 부 변호사님 아니었나요?”부승원은 잠시 멈칫하며 이마를 찌푸렸고 양시연은 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내가 봤을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정훈 씨, 정말로 염치없는 거 알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양시연에게 입이 막힌 채로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양시연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손으로 연정훈의 귀를 잡아당겼다.“나이 많은 엉큼한 아저씨.”연정훈은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껴안으며 말했다.“자꾸 나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마.”“당신 나이 많고 늙었잖아요. 완전 늙었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 번 뒤집어 양시연을 아래로 눌렀다.“한 번만 더 말해봐.”양시연은 즉시 기가 죽어 연정훈의 어깨를 떠받치며 작게 외쳤다.“허리 아프다니까요!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그리고는 발로 그를 한 번 툭 찼다.“이 정도로는 당신이 원하는 아들이나 딸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돌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기운을 조금 회복한 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아 걸치고 명령하듯 말했다.“나 샤워 좀 시켜줘요.”연정훈은 기꺼이 수고할 마음이 가득했고 양시연이 허리가 아프다고 했기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웠다.욕실로 들어가자 양시연은 물속에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사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늦어질수록 몸의 회복이 더디니 차라리 빨리 낳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하나만 낳는다면 왕자님도 좋고 공주님도 좋겠지만 둘을 낳으려면 양시연이 고생해야 한다.‘정말 고민이네. 진짜 인간의 진화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바로바로 낳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연정훈은 먼저 욕조 옆에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그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정훈 씨는 아들이 좋나요? 아니면 딸이 좋나요?”“둘 다 좋지.”양시연은 몸을 일으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