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심장이 조각조각 부서져 갔다.아무리 많은 변명을 대도 연정훈은 이길 수가 없었다.안시연을 지켜 주겠다고, 경인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정말 연정훈이 필요한 순간, 연정훈은 변명밖에 늘어놓지 못했다.그리고 빌어먹을 변명은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외할머니 장례를 마치는 대로 우리 사이도 정리해요.”“우린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내가 살 수 있게 이만 놔 줘요.”사랑하기에 그만하자는 말이 너무 대질 적으로 느껴졌다.그리고 살 수 있게 놔달라는 말은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연정훈은 서재 소파에 앉아 브랜드 사에서 보내온 수많은 반지 디자인을 살폈다. 머릿속엔 반년 사이의 추억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사랑을 원하는 순간부터 연정훈의 사랑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그 사랑을 지금 제대로 알아차렸는데 이만 놓아주어야 했다.후드득.눈물이 반지 디자인 위로 떨어졌다.연정훈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크게 심호흡을 뱉었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니코틴의 자극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담배가 꺼지면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반복하자 서재는 담배 연기로 꽉 차버렸다.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이곳에서 연정훈은 숨을 돌리고 있었다.‘아니. 우리 둘 사이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어. 정말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어.’...부승원은 사건 현장을 다녀왔다. 연정훈이 자신의 제안을 빠르게 반박했지만 변호사의 촉이 안시연의 어머니가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그래서 직접 확인해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다.아래층에서 이웃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반우희가 보였다.부승원은 반우희를 카페로 데리고 가 디테일을 묻기 시작했다.“직업이 변호사 아니에요? 왜 탐정 일까지 겸하고 있는 거예요?”반우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줘.”반
그때 카페 직원이 다가왔다.“아무것도 필요 없어요.”“...”시키지 않고 자리만 떡하니 차지한다니, 직원은 어이가 없었다.머쓱해진 반우희가 대신 메뉴판을 받아 쥐며 말했다.“일단 메뉴 한번 확인해 볼게요. 잠시만요.”“네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승주의 얘기를 확인하느라 바빴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며 메뉴판을 훑었고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다.“저도 소현정 이모를 의심하긴 했어요... 그런데 설마 이모일 리가 있겠어요? 이모는 할머니 친딸이잖아요. 할머니가 이모를 가리키지도 않았고요.”“세상 그 어느 어머니가 자기 딸을 범죄자라고 알리겠어?”“그건... 맞아요.”반우희는 빨대를 입에 물고 굳은 얼굴로 살짝 끄덕였다.멀지 않은 곳에서 직원이 반우희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에게 말했다.“변호사님, 질문 다 하셨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미련 없이 일어나는 반우희에 부승원은 조금 의아해했다.하지만 그날 자신이 뱉은 말을 떠올리며 반우희가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반우희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직원이 계산서를 들고 부승원에게 내밀었다.“총 12만 원입니다. 어떻게 계산하시겠어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밀크티 두 잔에 12만 원?계산서를 훑은 부승원은 입가가 굳어갔다.계산서에는 무려 가게의 절반가량의 메뉴가 찍혀 있었다.고개를 돌리니 반우희가 포장된 간식을 양손에 나눠 들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나이도 어린 게 잔머리만 좋아서.’부승원은 말없이 계산을 마쳤다....연정훈은 장례식장에서 나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연정훈의 말 대로 부승원은 소현주를 사무실로 불렀다.짧은 두 날 사이 소현주도 많이 초췌해지고 피곤해 보였다.그러나 연정훈을 발견하고 구세주라도 찾은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정훈아,
소현주는 몇 초간 상황 파악을 마치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날 정신 병원에 가두려고?”“네 병, 치료받아야 하지 않겠어?”연정훈이 되물었다.“지금 안시연 씨를 위해 화풀이해 주는 거잖아!”소현주가 눈을 붉혔다.“법률상 난 무죄니까 안시연 씨를 대신해 날 벌주려고!”“정훈아,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네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은 나였어. 그런데 안시연 씨가 생겼다고 나한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네 어머니가...”“잊어버린 거 아니야.”연정훈이 소현주의 말을 잘랐다.그 일을 잊지 못해 지금 이렇게 발이 묶여 버렸다.“재판이 끝나고 네가 정말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난 널 치료받게 할 거야. 퇴원 기준에 도달하면 그때에는 퇴원해도 좋아.”소현주가 냉소를 터뜨렸다.“퇴원 기준? 그런 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연정훈이 안시연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연정훈은 자신의 원칙을 깨면서 안시연을 위해 복수를 하려 했다.그러자 소현주가 차가운 얼굴로 집요하게 말했다.“나한테 보상해 준다고 말했잖아.”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했다.“내가 빚진 건 내가 갚아. 그러나 네가 안시연 씨에게 빚진 건 피할 수 없어. 두 일은 전혀 다른 결이야.”“그러니 지금부터 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너의 유죄를 증명할 거야.”소현주가 길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내가 고의로 그랬든 고의가 아니었든 설사 정훈이 네가 증거를 위조한다고 해도 난 큰 처벌을 받지 않아!”“네가 큰 벌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야.”“안시연 씨...”“시연이는 그저 네가 받아야 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니까.”연정훈은 아주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이런 연정훈의 모습에 소현주는 마음이 차게 식어갔다.몇 년 동안 자리를 비웠더니 연정훈의 마음에는 안시연만 남아 있었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것도 겨우 반년가량에 불과했다!불만, 질투, 두려움 등 모든 감정이 뒤섞여 결국 원한으로 되었다.‘내가 추락하면 너희들도 편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야!
안시연은 거절하고 싶었다. 가족끼리 도란도란 도시락을 먹는데 자신이 그곳에 낄 이유가 없었다.양혁수도 이를 눈치채고 바로 거절했다.“부근에 밥집이 많아요. 근처에서 먹으면 돼요.”양지원이 살짝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지금 집밥 무시하는 거야?”“너무 적어서 두 사람이 먹기엔 부족하잖아요.”“그럼 너 말고 안시연 씨 먹게 해.”???양지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넌 조용히 차에 앉아 있어. 마침 안시연 씨에게 물을 말도 있거든.”“시연 씨에게 뭘 물어보시려고요?”양지원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묘하게 위협적이었다.그러자 양혁수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알겠어요. 먹으면 될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안시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차에 타요. 제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도 돼요.”안시연은 안 그래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는데 지금 이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러나 양지원과 양석진이 정말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럼 실례할게요.”“편하게 앉아요.”고분고분 차에 올라타는 안시연에 양지원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보았다.양석진은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시선은 안시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안시연은 저번 만남보다 더 살이 빠졌고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팠다.양혁수는 서둘러 도시락을 열어 모든 반찬을 꺼냈다.안시연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양지원에게 물었다.“하실 말씀이 뭔가요?”양지원은 돌아가신 대표를 방패막이로 삼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즘 조문을 오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마치 대표의 사생활을 캐는 것처럼 위장했다.안시연은 아는 게 별로 없었으나 아는 만큼 답했다.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이거 먹어봐요.”양혁수는 고기 한 점을 골라 안시연의 앞접시에 올랐다.“고마워.”안시연은 젓가락을 들었고 조심스럽게 반찬을 입에 넣었다.바짝 긴장한 안시연을 보며 양지원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양씨
양혁수가 자리를 비우자, 차 안은 조용해졌다.안시연은 반찬을 조금씩 꼬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참다못한 양지원이 양혁수의 젓가락을 들어 안시연에게 반찬을 집어 주었다.“많이 먹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개를 들어 양지원의 눈을 마주하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져 코끝이 시려왔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양 대표님.”양지원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양지원은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시기가 적당하지 않은 듯싶어 마음을 꾹꾹 눌렀다.그 옆의 양석진은 긴장한 마음을 숨긴 채로 물었다.“외할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나요?”안시연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오자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래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네.”양지원이 바로 휴지를 건넸다.안시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휴지를 받아쥐었다.그리고 양석진이 질문을 이어갔다.“병원 측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안시연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병원에서는 대부분 의료 사고로 치부할 텐데요.”안시연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네, 정말 그러네요.”양지원의 눈빛이 바뀌었다.“외할머니 일은 병원 측 문제인가요?”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어느 의사가 약용량을 잘못 주사해 의료 과실이에요.”양지원과 양석진은 미리 사건 조사를 마쳐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저 안시연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이런 질문을 했다.“정훈이가 있으니 그 의사 책임을 피하지 못하겠네요.”양지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눈물이 멈추지 않아 안시연은 휴지로 눈을 꾹꾹 눌렀다.양지원은 마음이 너무 아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또 휴지 두어 장을 뽑아 건넸다.“왜 그래요?”안시연은 휴지를 모두 주먹 안으로 말아쥐었고 고개를 점점 숙였다.처음부터 안시연은 양지원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호감을 느꼈고 오늘따라 다
양지원은 안시연의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내가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양지원은 아주 완벽하게 위장했다. 마치 연정훈의 행동에 불만이 생겨 안시연을 돕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안시연이 감동을 한 얼굴로 말했다.“감사합니다.”그때, 양혁수가 드디어 딸기를 사 들고 차로 돌아왔다.양혁수는 불만을 터뜨렸다.“3kg 딸기가 이렇게 많았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래?”그리고 딸기를 힐끗 보며 말했다.“뭐, 좀 많긴 하네.”“...”‘그래, 엄마가 직접 딸기를 사봤겠어?’그리고 얼마 먹지 못한 안시연을 발견한 양혁수는 안시연을 강제로 몇 술 더 뜨게 했다.얼마 뒤, 안시연은 차에서 내렸고 양혁수가 바래다주었다.두 사람이 멀리 떠나가자 양지원은 창가에 손을 올린 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이곳을 찾아오기 전 양지원과 양혁수는 안시연이 외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사실을 알리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하지만 고통에 잠겨 있는 아이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는 건 더 큰 혼란을 조성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양창수를 시켜 알아보니 할머니 발인이 내일이라고 하더라.”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장례를 마치고 안시연이 경인을 떠나 먼 나라로 출국하게 된다면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사실을 고백하고 제대로 보상해 줄 거야.”양지원의 말에 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뿐만이 아니야.”양지원이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양석진이 안시연을 퍽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느껴졌다.원주에서 지내며 자주 안시연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양석진은 안시연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사람을 시켜 바로 알아보게 했다.“그 의사 말이에요. 내가 손을 대고 싶은데.”양지원의 말에 양석진이 인상을 찌푸렸다.“안돼.”양지원이 반박하려 하자 양석진이 이렇게 타일렀다.“네가 손을 댄다고 해도 기껏해야 1년 정도 실형을 받을 거야.”“하루라도 더
안시연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옆에서 지키기로 했다.연정훈도 장례식장을 찾았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그렇게 늦은 밤이 되고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어깨 위로 겉옷을 걸쳐주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안시연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러다가 안시연은 몸을 돌려 복도 창가로 향해 내리는 비를 가만히 구경했다.안시연은 겁이 많은 편이었으나 외할머니의 장례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있어도 두려운 감정이 없었다.아니 오히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장례를 마치고 잠시 다른 곳에서 생각을 비우고 싶어요.”안시연의 갑작스러운 말에 연정훈이 물었다.“어디 가고 싶어?”안시연이 고개를 돌렸다.“전에 날 해외로 보내려고 했잖아요. 그때 어디로 보내려고 했어요?”“시연아, 그건 너무 예전의 일이잖아.”“사실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요. 겨우 반년 전의 일인데요.”“...”연정훈이 침묵했다.“나랑 북유럽 다녀올래?”“북유럽이요?”잠시 고민하던 안시연이 말했다.“나쁘지 않네요.”“그런데 혼자 다녀오고 싶어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너무 침착한 안시연은 이성을 잃은 것보다 더 불안했다.안시연은 헤어진다는 말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연정훈의 성격상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더 이상 논쟁을 이어 가기도 지쳐 빨리 떠나고 싶었다.한 사람을 떠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했다.더구나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충분한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안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았다.어느새 바람이 더 거세져 갔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에 서서 비바람을 대신 맞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안심하고 쉬고 와. 재판은 나와 부승원이 알아서 잘 해결할게.”안시연은 가만히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소현주가 무죄 판결이든 유죄 판결이든 마땅한 벌은 받게 될 거야.”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
소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외할머니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윤리 도덕 따위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니 너무 역겨워서 들을 수가 없거든요.”소현주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소현주의 병은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약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커지고 매일매일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소현주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안시연 씨, 말 가려서 해주세요.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결국은 살인자잖아요.”소현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짜냈다.“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다른 방법은 없어요.”“당연히 그렇겠죠.”안시연은 등받이 몸을 기대더니 연정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쪽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될 거예요.”소현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정훈이 몰래 안시연에게 그 어떤 약속을 했을까 걱정이 되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소현주에게 증거를 찾을 거라고 말했고 아무리 안시연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증거를 위조할 리는 없었다.“정훈이가 사적으로 날 처리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현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그 사람을 잘 모르나 봐요.”안시연은 마음이 아팠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정말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제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안시연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소현주의 시선이 슬쩍 그곳을 향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자세히 보지 않을래요?”안시연의 미소에 소현주는 주춤하다가 종이를 건네받았다.주문 내역서였다.반지...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러나 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 나한테 청혼했어요.”소현주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문 내역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일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
‘망했어.’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이 점점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시연은 충분히 반우희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정권을 부승원에게 넘겨버린 상황이 의아했다. 결국 양시연이 부승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 보였다.“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반우희가 초조하게 물었다. 송민재는 살짝 기침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기다려야죠. 부 변호사 쪽에서 곧 팀 명단을 보내줄 겁니다. 만약 그 명단에 우희 씨 이름이 없다면 그때 가서 부 변호사에게 직접 부탁하세요.”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맥이 빠졌다.‘부승원의 성격에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통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녀는 부승원의 사무실 쪽을 몰래 훔쳐보며 첫 번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 시각 부승원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무슨 일이야?”비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업무를 간단히 보고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반우희 씨 문제는 우리 쪽 인원을 배정해서 처리해도 괜찮을까요?”그제야 부승원이 고개를 들었고 비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를 띠고 덧붙였다.“게다가 만약 우리가 부주의하게 처리해서 사기 사건 같은 문제라도 연루되면 업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부승원은 비서의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침묵에 비서가 당황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비서는 이미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특혜를 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의 뒷수습도 자신이 처리했기 때문이다.잠시 후 부승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또 같은 실수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할 거야.”“알겠습니다.”비서는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라지 않았고 부승원의 얼굴을 살짝 살피며 조용히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부승원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부승원은 잠시 생각에
“양시연 언니, 저 오늘부터 같이 갈 수 있는 건가요?”반우희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양시연은 부승원의 반응을 떠올리며 눈앞의 작고 귀여운 소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양시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었고 반우희는 애교를 부리며 양시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은 안 돼요.”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응?’반우희는 금세 자세를 고치며 애처로운 얼굴로 물었다.“저 안 데려가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너를 이용해 큰 물고기를 낚으려는 거야.’양시연은 반우희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부 변호사님께 이미 얘기했어요. 며칠 뒤에 부 변호사님이 팀을 이끌고 정인에 들어가실 건데 우희 씨도 그 팀에 합류해서 함께 가면 돼요. 이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에요.”반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반짝였다.‘좀 돌아가는 느낌인데 그냥 바로 데려가면 되잖아.’반우희는 계속해서 간절한 표정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길어야 삼사일 내로 우희 씨도 정인에 갈 수 있을 거예요.”“그럼...”“240만이에요.”양시연은 장난스럽게 윙크했고 반우희는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흔들었다.“그럼 언니, 조심히 가세요!”“다음에 봐요.”양시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났고 뒤에서 반우희는 마치 만화 속 캐릭터처럼 환한 얼굴로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너무 좋아!’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는 유리창 너머로 부승원의 냉혹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한편 위층에서 양시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해결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연정훈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렇게 쉽게?]양시연은 다리를 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타이핑을 이어갔다.[부승원 씨가 처음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살짝 놀라게 했더니 배우고 싶다고
양시연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고 송민재는 빠르게 반응하며 반우희를 끌어당겼다.“알았어요. 우희 씨의 일은 나중에 얘기하고 먼저 양시연 씨와 부 변호사님과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해요.”“네? 그런데 저는...”“그만 말해요.”송민재는 반우희를 끌고 나갔지만 반우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양시연을 간절히 바라봤다.‘언니, 저를 잊지 마세요.’양시연은 침묵했다.“...”사무실 문이 닫히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승원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연필을 쓰레기통에 던졌다.“연정훈이 양시연 씨에게 남겨준 팀이 부족해서 나한테 폐품을 구하러 온 거에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저 입은 연정훈보다 더 못됐어.’양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방문한 이유를 말했지만 부승원은 대답했다.“능력이 부족해서 그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부 변호사님, 겸손하시네요. 능력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급하게 찾아온 게 문제겠죠. 바쁘신데 시간을 낼 수 없는 것도 이해합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 선반에서 파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양시연은 다시 한번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변호사님, 연정훈 씨의 부탁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배려해 주세요.”부승원은 대답했다.“전 협력자를 찾을 때는 상대의 능력과 안목만 봅니다. 누구의 체면도 보지 않죠.”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부 변호사님,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부승원은 얼핏 미소를 보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반우희를 눈여겨본 사람이 누구죠?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의 안목이나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봅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반우희를 먼저 눈여겨본 건 부 변호사님 아니었나요?”부승원은 잠시 멈칫하며 이마를 찌푸렸고 양시연은 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내가 봤을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정훈 씨, 정말로 염치없는 거 알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양시연에게 입이 막힌 채로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양시연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손으로 연정훈의 귀를 잡아당겼다.“나이 많은 엉큼한 아저씨.”연정훈은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껴안으며 말했다.“자꾸 나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마.”“당신 나이 많고 늙었잖아요. 완전 늙었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 번 뒤집어 양시연을 아래로 눌렀다.“한 번만 더 말해봐.”양시연은 즉시 기가 죽어 연정훈의 어깨를 떠받치며 작게 외쳤다.“허리 아프다니까요!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그리고는 발로 그를 한 번 툭 찼다.“이 정도로는 당신이 원하는 아들이나 딸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돌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기운을 조금 회복한 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아 걸치고 명령하듯 말했다.“나 샤워 좀 시켜줘요.”연정훈은 기꺼이 수고할 마음이 가득했고 양시연이 허리가 아프다고 했기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웠다.욕실로 들어가자 양시연은 물속에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사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늦어질수록 몸의 회복이 더디니 차라리 빨리 낳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하나만 낳는다면 왕자님도 좋고 공주님도 좋겠지만 둘을 낳으려면 양시연이 고생해야 한다.‘정말 고민이네. 진짜 인간의 진화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바로바로 낳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연정훈은 먼저 욕조 옆에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그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정훈 씨는 아들이 좋나요? 아니면 딸이 좋나요?”“둘 다 좋지.”양시연은 몸을 일으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