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심장이 조각조각 부서져 갔다.아무리 많은 변명을 대도 연정훈은 이길 수가 없었다.안시연을 지켜 주겠다고, 경인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정말 연정훈이 필요한 순간, 연정훈은 변명밖에 늘어놓지 못했다.그리고 빌어먹을 변명은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외할머니 장례를 마치는 대로 우리 사이도 정리해요.”“우린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내가 살 수 있게 이만 놔 줘요.”사랑하기에 그만하자는 말이 너무 대질 적으로 느껴졌다.그리고 살 수 있게 놔달라는 말은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연정훈은 서재 소파에 앉아 브랜드 사에서 보내온 수많은 반지 디자인을 살폈다. 머릿속엔 반년 사이의 추억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사랑을 원하는 순간부터 연정훈의 사랑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그 사랑을 지금 제대로 알아차렸는데 이만 놓아주어야 했다.후드득.눈물이 반지 디자인 위로 떨어졌다.연정훈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크게 심호흡을 뱉었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니코틴의 자극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담배가 꺼지면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반복하자 서재는 담배 연기로 꽉 차버렸다.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이곳에서 연정훈은 숨을 돌리고 있었다.‘아니. 우리 둘 사이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어. 정말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어.’...부승원은 사건 현장을 다녀왔다. 연정훈이 자신의 제안을 빠르게 반박했지만 변호사의 촉이 안시연의 어머니가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그래서 직접 확인해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다.아래층에서 이웃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반우희가 보였다.부승원은 반우희를 카페로 데리고 가 디테일을 묻기 시작했다.“직업이 변호사 아니에요? 왜 탐정 일까지 겸하고 있는 거예요?”반우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줘.”반
그때 카페 직원이 다가왔다.“아무것도 필요 없어요.”“...”시키지 않고 자리만 떡하니 차지한다니, 직원은 어이가 없었다.머쓱해진 반우희가 대신 메뉴판을 받아 쥐며 말했다.“일단 메뉴 한번 확인해 볼게요. 잠시만요.”“네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승주의 얘기를 확인하느라 바빴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며 메뉴판을 훑었고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다.“저도 소현정 이모를 의심하긴 했어요... 그런데 설마 이모일 리가 있겠어요? 이모는 할머니 친딸이잖아요. 할머니가 이모를 가리키지도 않았고요.”“세상 그 어느 어머니가 자기 딸을 범죄자라고 알리겠어?”“그건... 맞아요.”반우희는 빨대를 입에 물고 굳은 얼굴로 살짝 끄덕였다.멀지 않은 곳에서 직원이 반우희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에게 말했다.“변호사님, 질문 다 하셨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미련 없이 일어나는 반우희에 부승원은 조금 의아해했다.하지만 그날 자신이 뱉은 말을 떠올리며 반우희가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반우희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직원이 계산서를 들고 부승원에게 내밀었다.“총 12만 원입니다. 어떻게 계산하시겠어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밀크티 두 잔에 12만 원?계산서를 훑은 부승원은 입가가 굳어갔다.계산서에는 무려 가게의 절반가량의 메뉴가 찍혀 있었다.고개를 돌리니 반우희가 포장된 간식을 양손에 나눠 들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나이도 어린 게 잔머리만 좋아서.’부승원은 말없이 계산을 마쳤다....연정훈은 장례식장에서 나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연정훈의 말 대로 부승원은 소현주를 사무실로 불렀다.짧은 두 날 사이 소현주도 많이 초췌해지고 피곤해 보였다.그러나 연정훈을 발견하고 구세주라도 찾은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정훈아,
소현주는 몇 초간 상황 파악을 마치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날 정신 병원에 가두려고?”“네 병, 치료받아야 하지 않겠어?”연정훈이 되물었다.“지금 안시연 씨를 위해 화풀이해 주는 거잖아!”소현주가 눈을 붉혔다.“법률상 난 무죄니까 안시연 씨를 대신해 날 벌주려고!”“정훈아,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네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은 나였어. 그런데 안시연 씨가 생겼다고 나한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네 어머니가...”“잊어버린 거 아니야.”연정훈이 소현주의 말을 잘랐다.그 일을 잊지 못해 지금 이렇게 발이 묶여 버렸다.“재판이 끝나고 네가 정말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난 널 치료받게 할 거야. 퇴원 기준에 도달하면 그때에는 퇴원해도 좋아.”소현주가 냉소를 터뜨렸다.“퇴원 기준? 그런 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연정훈이 안시연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연정훈은 자신의 원칙을 깨면서 안시연을 위해 복수를 하려 했다.그러자 소현주가 차가운 얼굴로 집요하게 말했다.“나한테 보상해 준다고 말했잖아.”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했다.“내가 빚진 건 내가 갚아. 그러나 네가 안시연 씨에게 빚진 건 피할 수 없어. 두 일은 전혀 다른 결이야.”“그러니 지금부터 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너의 유죄를 증명할 거야.”소현주가 길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내가 고의로 그랬든 고의가 아니었든 설사 정훈이 네가 증거를 위조한다고 해도 난 큰 처벌을 받지 않아!”“네가 큰 벌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야.”“안시연 씨...”“시연이는 그저 네가 받아야 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니까.”연정훈은 아주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이런 연정훈의 모습에 소현주는 마음이 차게 식어갔다.몇 년 동안 자리를 비웠더니 연정훈의 마음에는 안시연만 남아 있었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것도 겨우 반년가량에 불과했다!불만, 질투, 두려움 등 모든 감정이 뒤섞여 결국 원한으로 되었다.‘내가 추락하면 너희들도 편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야!
안시연은 거절하고 싶었다. 가족끼리 도란도란 도시락을 먹는데 자신이 그곳에 낄 이유가 없었다.양혁수도 이를 눈치채고 바로 거절했다.“부근에 밥집이 많아요. 근처에서 먹으면 돼요.”양지원이 살짝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지금 집밥 무시하는 거야?”“너무 적어서 두 사람이 먹기엔 부족하잖아요.”“그럼 너 말고 안시연 씨 먹게 해.”???양지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넌 조용히 차에 앉아 있어. 마침 안시연 씨에게 물을 말도 있거든.”“시연 씨에게 뭘 물어보시려고요?”양지원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묘하게 위협적이었다.그러자 양혁수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알겠어요. 먹으면 될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안시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차에 타요. 제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도 돼요.”안시연은 안 그래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는데 지금 이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러나 양지원과 양석진이 정말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럼 실례할게요.”“편하게 앉아요.”고분고분 차에 올라타는 안시연에 양지원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보았다.양석진은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시선은 안시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안시연은 저번 만남보다 더 살이 빠졌고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팠다.양혁수는 서둘러 도시락을 열어 모든 반찬을 꺼냈다.안시연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양지원에게 물었다.“하실 말씀이 뭔가요?”양지원은 돌아가신 대표를 방패막이로 삼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즘 조문을 오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마치 대표의 사생활을 캐는 것처럼 위장했다.안시연은 아는 게 별로 없었으나 아는 만큼 답했다.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이거 먹어봐요.”양혁수는 고기 한 점을 골라 안시연의 앞접시에 올랐다.“고마워.”안시연은 젓가락을 들었고 조심스럽게 반찬을 입에 넣었다.바짝 긴장한 안시연을 보며 양지원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양씨
양혁수가 자리를 비우자, 차 안은 조용해졌다.안시연은 반찬을 조금씩 꼬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참다못한 양지원이 양혁수의 젓가락을 들어 안시연에게 반찬을 집어 주었다.“많이 먹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개를 들어 양지원의 눈을 마주하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져 코끝이 시려왔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양 대표님.”양지원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양지원은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시기가 적당하지 않은 듯싶어 마음을 꾹꾹 눌렀다.그 옆의 양석진은 긴장한 마음을 숨긴 채로 물었다.“외할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나요?”안시연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오자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래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네.”양지원이 바로 휴지를 건넸다.안시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휴지를 받아쥐었다.그리고 양석진이 질문을 이어갔다.“병원 측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안시연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병원에서는 대부분 의료 사고로 치부할 텐데요.”안시연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네, 정말 그러네요.”양지원의 눈빛이 바뀌었다.“외할머니 일은 병원 측 문제인가요?”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어느 의사가 약용량을 잘못 주사해 의료 과실이에요.”양지원과 양석진은 미리 사건 조사를 마쳐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저 안시연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이런 질문을 했다.“정훈이가 있으니 그 의사 책임을 피하지 못하겠네요.”양지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눈물이 멈추지 않아 안시연은 휴지로 눈을 꾹꾹 눌렀다.양지원은 마음이 너무 아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또 휴지 두어 장을 뽑아 건넸다.“왜 그래요?”안시연은 휴지를 모두 주먹 안으로 말아쥐었고 고개를 점점 숙였다.처음부터 안시연은 양지원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호감을 느꼈고 오늘따라 다
양지원은 안시연의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내가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양지원은 아주 완벽하게 위장했다. 마치 연정훈의 행동에 불만이 생겨 안시연을 돕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안시연이 감동을 한 얼굴로 말했다.“감사합니다.”그때, 양혁수가 드디어 딸기를 사 들고 차로 돌아왔다.양혁수는 불만을 터뜨렸다.“3kg 딸기가 이렇게 많았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래?”그리고 딸기를 힐끗 보며 말했다.“뭐, 좀 많긴 하네.”“...”‘그래, 엄마가 직접 딸기를 사봤겠어?’그리고 얼마 먹지 못한 안시연을 발견한 양혁수는 안시연을 강제로 몇 술 더 뜨게 했다.얼마 뒤, 안시연은 차에서 내렸고 양혁수가 바래다주었다.두 사람이 멀리 떠나가자 양지원은 창가에 손을 올린 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이곳을 찾아오기 전 양지원과 양혁수는 안시연이 외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사실을 알리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하지만 고통에 잠겨 있는 아이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는 건 더 큰 혼란을 조성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양창수를 시켜 알아보니 할머니 발인이 내일이라고 하더라.”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장례를 마치고 안시연이 경인을 떠나 먼 나라로 출국하게 된다면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사실을 고백하고 제대로 보상해 줄 거야.”양지원의 말에 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뿐만이 아니야.”양지원이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양석진이 안시연을 퍽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느껴졌다.원주에서 지내며 자주 안시연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양석진은 안시연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사람을 시켜 바로 알아보게 했다.“그 의사 말이에요. 내가 손을 대고 싶은데.”양지원의 말에 양석진이 인상을 찌푸렸다.“안돼.”양지원이 반박하려 하자 양석진이 이렇게 타일렀다.“네가 손을 댄다고 해도 기껏해야 1년 정도 실형을 받을 거야.”“하루라도 더
안시연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옆에서 지키기로 했다.연정훈도 장례식장을 찾았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그렇게 늦은 밤이 되고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어깨 위로 겉옷을 걸쳐주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안시연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러다가 안시연은 몸을 돌려 복도 창가로 향해 내리는 비를 가만히 구경했다.안시연은 겁이 많은 편이었으나 외할머니의 장례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있어도 두려운 감정이 없었다.아니 오히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장례를 마치고 잠시 다른 곳에서 생각을 비우고 싶어요.”안시연의 갑작스러운 말에 연정훈이 물었다.“어디 가고 싶어?”안시연이 고개를 돌렸다.“전에 날 해외로 보내려고 했잖아요. 그때 어디로 보내려고 했어요?”“시연아, 그건 너무 예전의 일이잖아.”“사실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요. 겨우 반년 전의 일인데요.”“...”연정훈이 침묵했다.“나랑 북유럽 다녀올래?”“북유럽이요?”잠시 고민하던 안시연이 말했다.“나쁘지 않네요.”“그런데 혼자 다녀오고 싶어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너무 침착한 안시연은 이성을 잃은 것보다 더 불안했다.안시연은 헤어진다는 말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연정훈의 성격상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더 이상 논쟁을 이어 가기도 지쳐 빨리 떠나고 싶었다.한 사람을 떠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했다.더구나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충분한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안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았다.어느새 바람이 더 거세져 갔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에 서서 비바람을 대신 맞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안심하고 쉬고 와. 재판은 나와 부승원이 알아서 잘 해결할게.”안시연은 가만히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소현주가 무죄 판결이든 유죄 판결이든 마땅한 벌은 받게 될 거야.”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
소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외할머니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윤리 도덕 따위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니 너무 역겨워서 들을 수가 없거든요.”소현주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소현주의 병은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약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커지고 매일매일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소현주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안시연 씨, 말 가려서 해주세요.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결국은 살인자잖아요.”소현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짜냈다.“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다른 방법은 없어요.”“당연히 그렇겠죠.”안시연은 등받이 몸을 기대더니 연정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쪽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될 거예요.”소현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정훈이 몰래 안시연에게 그 어떤 약속을 했을까 걱정이 되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소현주에게 증거를 찾을 거라고 말했고 아무리 안시연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증거를 위조할 리는 없었다.“정훈이가 사적으로 날 처리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현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그 사람을 잘 모르나 봐요.”안시연은 마음이 아팠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정말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제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안시연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소현주의 시선이 슬쩍 그곳을 향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자세히 보지 않을래요?”안시연의 미소에 소현주는 주춤하다가 종이를 건네받았다.주문 내역서였다.반지...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러나 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 나한테 청혼했어요.”소현주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문 내역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일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