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가 자리를 비우자, 차 안은 조용해졌다.안시연은 반찬을 조금씩 꼬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참다못한 양지원이 양혁수의 젓가락을 들어 안시연에게 반찬을 집어 주었다.“많이 먹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개를 들어 양지원의 눈을 마주하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져 코끝이 시려왔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양 대표님.”양지원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양지원은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시기가 적당하지 않은 듯싶어 마음을 꾹꾹 눌렀다.그 옆의 양석진은 긴장한 마음을 숨긴 채로 물었다.“외할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나요?”안시연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오자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래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네.”양지원이 바로 휴지를 건넸다.안시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휴지를 받아쥐었다.그리고 양석진이 질문을 이어갔다.“병원 측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안시연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병원에서는 대부분 의료 사고로 치부할 텐데요.”안시연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네, 정말 그러네요.”양지원의 눈빛이 바뀌었다.“외할머니 일은 병원 측 문제인가요?”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어느 의사가 약용량을 잘못 주사해 의료 과실이에요.”양지원과 양석진은 미리 사건 조사를 마쳐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저 안시연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이런 질문을 했다.“정훈이가 있으니 그 의사 책임을 피하지 못하겠네요.”양지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눈물이 멈추지 않아 안시연은 휴지로 눈을 꾹꾹 눌렀다.양지원은 마음이 너무 아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또 휴지 두어 장을 뽑아 건넸다.“왜 그래요?”안시연은 휴지를 모두 주먹 안으로 말아쥐었고 고개를 점점 숙였다.처음부터 안시연은 양지원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호감을 느꼈고 오늘따라 다
양지원은 안시연의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내가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양지원은 아주 완벽하게 위장했다. 마치 연정훈의 행동에 불만이 생겨 안시연을 돕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안시연이 감동을 한 얼굴로 말했다.“감사합니다.”그때, 양혁수가 드디어 딸기를 사 들고 차로 돌아왔다.양혁수는 불만을 터뜨렸다.“3kg 딸기가 이렇게 많았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래?”그리고 딸기를 힐끗 보며 말했다.“뭐, 좀 많긴 하네.”“...”‘그래, 엄마가 직접 딸기를 사봤겠어?’그리고 얼마 먹지 못한 안시연을 발견한 양혁수는 안시연을 강제로 몇 술 더 뜨게 했다.얼마 뒤, 안시연은 차에서 내렸고 양혁수가 바래다주었다.두 사람이 멀리 떠나가자 양지원은 창가에 손을 올린 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이곳을 찾아오기 전 양지원과 양혁수는 안시연이 외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사실을 알리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하지만 고통에 잠겨 있는 아이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는 건 더 큰 혼란을 조성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양창수를 시켜 알아보니 할머니 발인이 내일이라고 하더라.”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장례를 마치고 안시연이 경인을 떠나 먼 나라로 출국하게 된다면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사실을 고백하고 제대로 보상해 줄 거야.”양지원의 말에 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뿐만이 아니야.”양지원이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양석진이 안시연을 퍽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느껴졌다.원주에서 지내며 자주 안시연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양석진은 안시연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사람을 시켜 바로 알아보게 했다.“그 의사 말이에요. 내가 손을 대고 싶은데.”양지원의 말에 양석진이 인상을 찌푸렸다.“안돼.”양지원이 반박하려 하자 양석진이 이렇게 타일렀다.“네가 손을 댄다고 해도 기껏해야 1년 정도 실형을 받을 거야.”“하루라도 더
안시연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옆에서 지키기로 했다.연정훈도 장례식장을 찾았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그렇게 늦은 밤이 되고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어깨 위로 겉옷을 걸쳐주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안시연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러다가 안시연은 몸을 돌려 복도 창가로 향해 내리는 비를 가만히 구경했다.안시연은 겁이 많은 편이었으나 외할머니의 장례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있어도 두려운 감정이 없었다.아니 오히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장례를 마치고 잠시 다른 곳에서 생각을 비우고 싶어요.”안시연의 갑작스러운 말에 연정훈이 물었다.“어디 가고 싶어?”안시연이 고개를 돌렸다.“전에 날 해외로 보내려고 했잖아요. 그때 어디로 보내려고 했어요?”“시연아, 그건 너무 예전의 일이잖아.”“사실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요. 겨우 반년 전의 일인데요.”“...”연정훈이 침묵했다.“나랑 북유럽 다녀올래?”“북유럽이요?”잠시 고민하던 안시연이 말했다.“나쁘지 않네요.”“그런데 혼자 다녀오고 싶어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너무 침착한 안시연은 이성을 잃은 것보다 더 불안했다.안시연은 헤어진다는 말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연정훈의 성격상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더 이상 논쟁을 이어 가기도 지쳐 빨리 떠나고 싶었다.한 사람을 떠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했다.더구나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충분한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안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았다.어느새 바람이 더 거세져 갔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에 서서 비바람을 대신 맞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안심하고 쉬고 와. 재판은 나와 부승원이 알아서 잘 해결할게.”안시연은 가만히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소현주가 무죄 판결이든 유죄 판결이든 마땅한 벌은 받게 될 거야.”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
소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외할머니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윤리 도덕 따위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니 너무 역겨워서 들을 수가 없거든요.”소현주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소현주의 병은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약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커지고 매일매일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소현주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안시연 씨, 말 가려서 해주세요.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결국은 살인자잖아요.”소현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짜냈다.“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다른 방법은 없어요.”“당연히 그렇겠죠.”안시연은 등받이 몸을 기대더니 연정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쪽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될 거예요.”소현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정훈이 몰래 안시연에게 그 어떤 약속을 했을까 걱정이 되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소현주에게 증거를 찾을 거라고 말했고 아무리 안시연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증거를 위조할 리는 없었다.“정훈이가 사적으로 날 처리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현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그 사람을 잘 모르나 봐요.”안시연은 마음이 아팠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정말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제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안시연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소현주의 시선이 슬쩍 그곳을 향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자세히 보지 않을래요?”안시연의 미소에 소현주는 주춤하다가 종이를 건네받았다.주문 내역서였다.반지...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러나 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 나한테 청혼했어요.”소현주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문 내역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일
소현주는 아주 득의양양해서 안시연을 쳐다봤고 순수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이건 몰랐죠?”안시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쪽 죽일 거예요.”그 말에 소현주는 조금 당황하다가 바로 미소를 지었다.도발하고 있는 소현주에 연정훈은 참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그곳으로 걸어갔다.활짝 웃고 있는 소현주를 보며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이 선물한 차를 타고 그쪽 쳐버릴 거예요.”소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래요?”“장례식장 바로 앞에서 차를 타고 그쪽 쳐버릴 거라고요!”“좋아요.”소현주는 갑자기 차분해졌고 이에 안시연이 더 미친 것처럼 보였다.연정훈이 가깝게 다가오자 소현주는 안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그럼 기대할게요.”그 말을 마치자 연정훈은 마침 안시연의 등 뒤에 도착했고 방어적인 자세로 안시연을 자신의 뒤로 당겼다.말다툼은 이만하면 되었다.소현주는 아주 침착하게 연정훈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안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별말 하지 않았는걸요.”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소현주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며 그저 안시연을 다른 곳으로 당겼다.“발인 곧 시작해. 외할머니 마지막으로 보러 가자.”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렇게 두 사람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소현주는 죽일 것처럼 등 뒤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래, 어디 한 번 해봐.’소현주는 안시연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었다.그것도 장례식장,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말이다.연정훈은 충분히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는데 안시연이 차로 친다면 평생 죄책감으로 묶어 둘 수 있었다.외할머니의 발인은 빠르게 시작되었고 가족은 소현정과 안시연 두 사람뿐이었다. 부승원은 대리 변호사 신분으로 발인에 참석했고 반우희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찾았다.몇 시간 후, 안 그래도 가냘프던 외할머니는 작은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안시연은 유
구급차는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소현주는 구급차에 오르는 내내 울면서 외쳤다.“정훈아! 저 사람 일부러 그런 거야! 날 쳐 죽이려고 했어!”연정훈과 안시연은 빗속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두 사람 모두 흠뻑 젖었다.안시연이 말했다.“차량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일부러 칠 생각은 없었어요.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진 거예요!”소현주가 자신의 병을 몰랐다고 한 것처럼 안시연도 일부러 소현주를 치려고 했던 사실을 부인했다. 더구나 차량은 빠르게 달리지 않았고 제한 속도를 넘기지 않았으며 정작 소현주를 향해 달리다가 방향을 돌려버렸었다. 만약 소현주가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사고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때 부승원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음을 알렸다.그러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이 말을 반복했다.“나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면 돼! 절대 말 바꾸지 마!”안시연은 이런 연정훈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정훈도 두려워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눈물은 빗물과 함께 흘렀다.안시연은 침묵을 지켰고 연정훈과 부승원의 동행하에 경찰 조사를 마쳤다.조사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행여나 안시연이 말실수를 할까 노심초사했다.경찰서에서 나오고 부승원이 먼저 떠났다. 두 사람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근처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분위기는 얼어붙어 무서운 기운이 감돌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꼭 감고 자리에 몸을 기댔다.“내가 말했잖아! 그 사람 반드시 받아야 할 처벌받게 해주겠다고!”‘그런데 왜 스스로 움직이는 거야! 방향 판을 돌리지 않았다면 소현주는 중상이거나 죽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안시연 넌 인생 망치는 거라고!’안시연은 아주 덤덤했다.“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현주 씨 깨어나면 날 고소할 거예요.”“그런데 며칠 전 나처럼 원하는 결과를 가질 수는
소현주의 한쪽 발목은 분쇄성 골절 진단을 받았고 회복 불가 판정을 받았다.마취에서 깨어난 소현주는 아주 우울해했다.그리고 안시연이 눈에 들어오자 소현주는 당장 안시연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다.안시연은 병실에 들어서며 문을 닫았고 연정훈을 병실 밖으로 단절시켰다.소현주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연정훈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하지만 문에 기댄 안시연이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는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을 방해한다면 자해할 거라고 말해 뒀거든요.”소현주는 이불을 꽉 쥐었다. 마치 위험에 처한 짐승처럼 자신을 노리는 사냥감을 향해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것 같았다.“그런 시선으로 날 보지 마요. 무슨 피해자라도 된 것 같잖아요.”안시연이 비아냥거렸다.“그쪽이 날 쳤잖아요!”소현주가 고집스레 말했다.안시연은 소현주의 말투 그대로 따라 하며 말했다.“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만약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지지 않았다면 차에 치이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소현주는 무언가 떠오른 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장례식장에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거죠!”“내가 뭐라고 했는데요?”“날 칠 거라고 했잖아요!”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안시연이 얼굴의 미소를 지우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버튼을 눌렀다.이어 소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소현주 씨는 자신의 증상을 미리 알고 있었나 봐요.”소현주가 얼어붙었다.몇 초 뒤, 소현주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증거는 무효 처리될 거예요.”“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죠.”안시연이 핸드폰을 거두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그쪽이 실형을 받는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그리고 시선은 소현주의 발목으로 향했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장애라는 말에 소현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시연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내가
부승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안시연의 부탁한 대로 부승원은 또 다른 변호사와 함께 왔다.“현재로서는 이 사고가 일반 교통사고로 처리될 듯합니다.”변호사가 말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후속 상황은 모두 변호사님께 맡기겠습니다. 정상 절차에 따라 처리해 주세요. 법적 책임이 제게 있다면 인정할 것이고 없다면 그걸로 끝내 주세요.”잠시 생각하던 안시연은 연정훈 쪽을 슬쩍 바라본 후 말했다.“이 일에는 누구도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부탁드립니다.”변호사는 많은 자료를 챙겨 나갔고 부승원은 여유롭게 자리를 지켰다.연정훈은 매우 바빠 보였다. 아마 며칠간 쌓인 업무가 많았지만, 연정훈은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그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부승원은 안시연에게 물었다.“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연정훈에게 복수하려는 의도인가요?”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지었다.“부 변호사님, 저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요.”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남자를 복수하기엔 너무 충동적인 일이었다.“그렇다면 왜 이런 결정을 한 겁니까?”만약 소현주가 안시연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다면 안시연은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하면 짧게나마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다.안시연은 대답했다.“그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 싫을 뿐이에요.”부승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랑에 빠진 남녀는 정말 두려운 존재다.연정훈이 만난 두 여자는 연정훈이 여성을 두려워하게 할 정도로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오랜 친구로서 그는 연정훈을 위해 몇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시연 씨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출관 전에 연정훈과 제가 소현주 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안시연은 멈칫했다.부승원은 말을 이었다.“둘 사이의 일은 대략 알고 있어요. 소현주 씨에 대해 연정훈이 오해받고 있는 것 같아요. 연정훈이 소현주 씨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큰 빚을 느끼고 있는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