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차는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소현주는 구급차에 오르는 내내 울면서 외쳤다.“정훈아! 저 사람 일부러 그런 거야! 날 쳐 죽이려고 했어!”연정훈과 안시연은 빗속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두 사람 모두 흠뻑 젖었다.안시연이 말했다.“차량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일부러 칠 생각은 없었어요.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진 거예요!”소현주가 자신의 병을 몰랐다고 한 것처럼 안시연도 일부러 소현주를 치려고 했던 사실을 부인했다. 더구나 차량은 빠르게 달리지 않았고 제한 속도를 넘기지 않았으며 정작 소현주를 향해 달리다가 방향을 돌려버렸었다. 만약 소현주가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사고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때 부승원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음을 알렸다.그러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이 말을 반복했다.“나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면 돼! 절대 말 바꾸지 마!”안시연은 이런 연정훈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정훈도 두려워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눈물은 빗물과 함께 흘렀다.안시연은 침묵을 지켰고 연정훈과 부승원의 동행하에 경찰 조사를 마쳤다.조사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행여나 안시연이 말실수를 할까 노심초사했다.경찰서에서 나오고 부승원이 먼저 떠났다. 두 사람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근처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분위기는 얼어붙어 무서운 기운이 감돌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꼭 감고 자리에 몸을 기댔다.“내가 말했잖아! 그 사람 반드시 받아야 할 처벌받게 해주겠다고!”‘그런데 왜 스스로 움직이는 거야! 방향 판을 돌리지 않았다면 소현주는 중상이거나 죽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안시연 넌 인생 망치는 거라고!’안시연은 아주 덤덤했다.“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현주 씨 깨어나면 날 고소할 거예요.”“그런데 며칠 전 나처럼 원하는 결과를 가질 수는
소현주의 한쪽 발목은 분쇄성 골절 진단을 받았고 회복 불가 판정을 받았다.마취에서 깨어난 소현주는 아주 우울해했다.그리고 안시연이 눈에 들어오자 소현주는 당장 안시연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다.안시연은 병실에 들어서며 문을 닫았고 연정훈을 병실 밖으로 단절시켰다.소현주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연정훈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하지만 문에 기댄 안시연이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는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을 방해한다면 자해할 거라고 말해 뒀거든요.”소현주는 이불을 꽉 쥐었다. 마치 위험에 처한 짐승처럼 자신을 노리는 사냥감을 향해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것 같았다.“그런 시선으로 날 보지 마요. 무슨 피해자라도 된 것 같잖아요.”안시연이 비아냥거렸다.“그쪽이 날 쳤잖아요!”소현주가 고집스레 말했다.안시연은 소현주의 말투 그대로 따라 하며 말했다.“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만약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지지 않았다면 차에 치이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소현주는 무언가 떠오른 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장례식장에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거죠!”“내가 뭐라고 했는데요?”“날 칠 거라고 했잖아요!”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안시연이 얼굴의 미소를 지우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버튼을 눌렀다.이어 소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소현주 씨는 자신의 증상을 미리 알고 있었나 봐요.”소현주가 얼어붙었다.몇 초 뒤, 소현주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증거는 무효 처리될 거예요.”“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죠.”안시연이 핸드폰을 거두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그쪽이 실형을 받는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그리고 시선은 소현주의 발목으로 향했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장애라는 말에 소현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시연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내가
부승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안시연의 부탁한 대로 부승원은 또 다른 변호사와 함께 왔다.“현재로서는 이 사고가 일반 교통사고로 처리될 듯합니다.”변호사가 말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후속 상황은 모두 변호사님께 맡기겠습니다. 정상 절차에 따라 처리해 주세요. 법적 책임이 제게 있다면 인정할 것이고 없다면 그걸로 끝내 주세요.”잠시 생각하던 안시연은 연정훈 쪽을 슬쩍 바라본 후 말했다.“이 일에는 누구도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부탁드립니다.”변호사는 많은 자료를 챙겨 나갔고 부승원은 여유롭게 자리를 지켰다.연정훈은 매우 바빠 보였다. 아마 며칠간 쌓인 업무가 많았지만, 연정훈은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그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부승원은 안시연에게 물었다.“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연정훈에게 복수하려는 의도인가요?”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지었다.“부 변호사님, 저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요.”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남자를 복수하기엔 너무 충동적인 일이었다.“그렇다면 왜 이런 결정을 한 겁니까?”만약 소현주가 안시연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다면 안시연은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하면 짧게나마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다.안시연은 대답했다.“그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 싫을 뿐이에요.”부승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랑에 빠진 남녀는 정말 두려운 존재다.연정훈이 만난 두 여자는 연정훈이 여성을 두려워하게 할 정도로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오랜 친구로서 그는 연정훈을 위해 몇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시연 씨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출관 전에 연정훈과 제가 소현주 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안시연은 멈칫했다.부승원은 말을 이었다.“둘 사이의 일은 대략 알고 있어요. 소현주 씨에 대해 연정훈이 오해받고 있는 것 같아요. 연정훈이 소현주 씨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큰 빚을 느끼고 있는
연정훈은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운 후 안시연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사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기억을 간직한 곳이었다.안시연의 집은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렸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승주가 동생들과 함께 나타났다.안시연은 그들을 부르며 음식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의 소리는 맑고 순수해 슬픔과 침묵을 뚫고 겨울조차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아이들의 소리는 맑고 순수하여 슬픔과 침묵을 뚫고 겨울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언니, 아저씨와 함께 올라가서 밥 먹어요. 내가 요리해 줄게요.”승주가 말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야. 또 나한테 라면 끓여주려고 하는 거지?”승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아니면 소세지 추가해 줄게요!”안시연은 승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돌아서 연정훈에게 말했다.“반우희 씨를 초대해서 저녁을 먹으려 해요. 조금 늦게 가도 될까요?”“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지내도 돼. 저녁에 와서 너와 함께 있어 줄게.”연정훈이 말했다.“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가 불편할 거라는 걸 알아요.”“잠시 망설이다가 안시연이 덧붙였다.“나도 불편해요.”외할머니가 없어진 이 집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슬픔을 느끼고 참지 못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반우희 씨를 초대해서 혼자 요리할 거야?”“반우희 씨와 물어볼게요.”“혼자서 하려면 내가 여기 남아 도와줄까?”연정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정훈 씨가 도와주면 승주보다 못할 거예요.”승주가 끼어들며 말했다.“언니,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언니와 함께하고 싶어 해요.”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카라를 정리해 주었다.“정훈 씨는 가서 일 보세요. 요즘 일이 많이 쌓였을 거예요.”“괜찮아. 누군가 처리하고 있어.”“누군가가 처리하더라도 정훈 씨가 직접 하는
소현정이 외할머니의 약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안시연은 의심하지 않았다. 소현정은 원래 이런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딸로서 어머니의 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안시연은 답답함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며칠 전 반우희는 안시연과 함께하며 수술 당일의 상황을 들려주었다.외할머니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소현정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으셨다.소현정에게는 외할머니를 해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도 안시연은 이제 이 엄마를 더 이상 마음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수술대에서 돌아가신 것은 소현주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지만, 외할머니께 약을 챙겨 드리지 않은 소현정도 책임이 있다!어차피 모녀간에 애정도 없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안시연이 더 묻지 않자 소현정은 안도하며 슬쩍 안시연의 속마음을 떠보려 했다.소현정은 최근 오성호와 연락이 끊겼고 며칠 동안 여러 차례 항공권 예약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면서 불안감이 커졌다.어젯밤 마침내 항공권 예약에 성공한 소현정은 급히 화서시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소현정이 안시연에게 물었다.안시연은 말했다.“사고를 냈으니 소송이 걸릴 것 같아요. 당분간은 경인시에 머물려고요.”소현정은 그제야 생각났다.에휴.어제 그 장면은 정말 무서웠다. 역시 양씨 가문의 자식이다. 조금만 더 핸들을 덜 돌렸더라면 그 여의사의 다리는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하지만 그 여의사도 죽어 마땅하다!나중에 오씨 사모님이 되면 소현주는 반드시 이 일을 다시 청산할 것이다.소현정은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너무 무모했어. 외할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안시연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소현정은 속으로 비웃었다.사실 안시연이 정말 소현주를 치어 죽였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외할머니에게 복수할 기회였으니 말이다.안시연이 소송 이야기를 꺼내자 소현정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소현정은 며칠 동안 어머니를 실수로
양주에서 반우희가 유학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야외에서 세 사람은 매운 홍탕을 주문했다.뜨거운 김이 피어오르자 반우희가 가방에서 금괴를 꺼내 안시연과 희주에게 하나씩 건넸다.반우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안시연은 당황했다.“?”반우희는 긴 벤치에 웅크려 앉아 매운 국물 때문에 입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안시연 씨는 그냥 넘어가요. 시연 씨에게는 연정훈이 있으니 돈 걱정은 없을 테니까요. 희주 씨는 받아두세요. 떠나기 전에 우리 인연의 증표로 주는 거예요.”반우희는 좋아서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덧붙였다.“너무 귀중해서 받아도 되는 건가요...?”“됐으니 연기하지 말고 그냥 받아둬요. 나중에 필요할 때 바로 가서 바꿔 쓰면 돼요.”“알았어요!”반우희는 기쁘게 금괴를 받아서 들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부승희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알고 보니 이번엔 이승우가 진심이었다고 했다. 바람둥이 같던 귀공자가 드디어 철이 든 것이다.반우희가 마음을 정리하고 급히 떠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부승희 씨, 그러면 이후에 다시 돌아오나요?”반우희가 물었다.“돌아오죠.”부승희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못 돌아올 이유는 없어요.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유산들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요.”반우희는 어이없었다.“...”사실 그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당분간은 만날 수 없겠죠.”부승희는 술잔을 들어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자, 건배해요. 우리 그리 길지 않은 우정을 위해서.”안시연과 반우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반우희는 작별 인사를 유난히 거창하게 했다. 반우희가 물었다.“언니, 이 말 몇 번이나 했어요?”“수없이 했지만, 너희가 마지막 타자예요”“...”역시.안시연이 말했다.“저도 곧 해외로 나가볼 생각이에요.”“어디로요?”“북유럽?”부승희는 그녀와 하이 파이브를 하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찾
집에 돌아온 안시연은 드디어 두 마리의 알파카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안시연이 거실에서 알파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을 때 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애완동물 간식을 뜯어주고 있었다.안시연이 돌아서서 연정훈에게 물었다.“정훈씨가 나비와 영준이를 데려갈 생각 있어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하고는 물었다.“뭐라고?”안시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혹시 구속될지도 모르니 당신이 키우기 힘들면 알파카들을 양혁수 씨에게 맡기려고 해요.”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무 일도 없을 거야.”안시연은 말했다.“부승원 씨에게 모든 절차를 정당한 법에 따라 진행하자고 했어요.”“...”‘법’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경직되었다. 안시연은 여유롭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무사히 넘어가더라도 잠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몇 달 정도 소요될 것 같아요. 알파카들을 돌보는 게 정훈 씨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집에 아주머니도 있으니 힘들지 않을 거야.”안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그러면 집에서 키우기로 해요. 정훈 씨도 시간 날 때 산책시켜 주세요.”“알겠어.”알파카들을 집에 남겨두기로 하니 연정훈은 안심이 됐다.안시연은…알파카들을 정말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이 사실에 그는 내심 자신을 비웃었다.어느 날 알파카 두 마리와 함께 안전감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안시연이 먼저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연정훈도 굳이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이 흘러갔고 밤이 되면 그들은 해외 풍경에 관해 이야기하며 함께 앉아 있었다.연정훈이 여러 번 동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안시연은 매번 거절했다.“혼자 여행하고 싶어요. 그런 적이 없어서요.”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를 따라갈 사람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그는 안시연이 무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사실 그렇기도 했다. 모두가 놀란 것은 관련 부서가 사건을 조사했을 때 소현주가 안시연을 고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일부러 안시연
안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 혼자 떠나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연정훈이 안시연 곁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도 같이 갈 수는 없을까?”“정훈 씨, 그렇게 바쁜데 시간이 돼요?”“연차 있어.”안시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설도 지났으니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나 때문에 일을 미루지 마세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정훈이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았다.연정훈은 말없이 안시연을 안고 있었고 그의 숨결에서 묵직한 감정이 느껴졌다.안시연은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얼굴을 돌려 미소 지었다.“나중에. 나중에 같이 가요.”‘나중에’라는 말을 듣자 문득 자신이 안시연에게 여러 번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안시연의 눈이 동그래졌고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연정훈은 조용히 안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작은 금속 반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안시연은 곧바로 그것을 알아보았다.반년 전 호텔에서 연정훈이 끼고 있던 반지였다. 그때 안시연은 그것이 그의 결혼반지라고 여겼다.연정훈이 조용히 말했다.“어느 점쟁이가 우리 엄마를 속였지. 이 반지를 끼면 좋은 인연을 불러온다고 했거든.”안시연은 손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럼...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해.”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얼굴에 살며시 입 맞추며 말했다. “네가 돌아오면 같이 점쟁이에게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하자.”안시연은 목이 조금 마른 듯 입술을 오므리며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살며시 비볐다.“...좋아요.”짐 정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샤워하고 큰 소파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눴다.대화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밤이 깊어지자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침대에서 잠들었다.안시연은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악몽은 아니었지만, 이유 없이 눈이 떠졌다.얼굴을 돌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