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 혼자 떠나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연정훈이 안시연 곁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도 같이 갈 수는 없을까?”“정훈 씨, 그렇게 바쁜데 시간이 돼요?”“연차 있어.”안시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설도 지났으니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나 때문에 일을 미루지 마세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정훈이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았다.연정훈은 말없이 안시연을 안고 있었고 그의 숨결에서 묵직한 감정이 느껴졌다.안시연은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얼굴을 돌려 미소 지었다.“나중에. 나중에 같이 가요.”‘나중에’라는 말을 듣자 문득 자신이 안시연에게 여러 번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안시연의 눈이 동그래졌고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연정훈은 조용히 안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작은 금속 반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안시연은 곧바로 그것을 알아보았다.반년 전 호텔에서 연정훈이 끼고 있던 반지였다. 그때 안시연은 그것이 그의 결혼반지라고 여겼다.연정훈이 조용히 말했다.“어느 점쟁이가 우리 엄마를 속였지. 이 반지를 끼면 좋은 인연을 불러온다고 했거든.”안시연은 손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럼...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해.”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얼굴에 살며시 입 맞추며 말했다. “네가 돌아오면 같이 점쟁이에게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하자.”안시연은 목이 조금 마른 듯 입술을 오므리며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살며시 비볐다.“...좋아요.”짐 정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샤워하고 큰 소파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눴다.대화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밤이 깊어지자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침대에서 잠들었다.안시연은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악몽은 아니었지만, 이유 없이 눈이 떠졌다.얼굴을 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연정훈은 그 평범했던 아침을 떠올리며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지고 후회가 밀려왔다.그는 안시연의 결단을 과소평가했고 그들 사이의 거리가 이토록 깊을 줄은 몰랐다.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기억 속에는 이미 돌아서 버린 안시연의 뒷모습만이 남아 있었다.연정훈은 알지 못했지만, 안시연은 돌아서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 안시연은 빠르게 걸어 나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그를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면 자신이 후회할까 연정훈이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게 될까 겁이 났다.앞길은 멀었고 이제 혼자서 걸어가야 했다.어떻게 비행기에 올랐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도착 후 일정을 세심하게 준비했지만, 안시연은 그의 계획에 따라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가져온 현금은 많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충분했다. 안시연이 머무를 곳을 찾아 새로운 도시에서 자리를 잡기에는 충분한 부족하지 않았다.안정을 찾은 뒤 연정훈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그도 더 이상 자신을 붙잡지 않으리라 여겼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감으며 안시연은 머리가 터질 듯했다.사랑하던 사람을 스스로 떼어내는 일이 이런 느낌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이번 생에서 연정훈을 사랑한 만큼 또 다른 이를 사랑할 힘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이륙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정훈 씨가 아직 공항에 있을까? 지금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리고...안시연은 눈물을 닦고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반지는 여전히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시선을 돌리더니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어 손에 단단히 쥐었다.비행기가 이륙했다.하늘 위에 떠 있던 마음이 마침내 잔잔해졌다.안시연은 눈을 감으며 마음속으로 경인과 모든 것을 작별했다.몽롱한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여자 목소리였다. 안시연은 눈살을 살짝
3년 후.JX 법률 사무소에서.햇살이 새로 놓인 로비 휴게 테이블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반우희는 옆으로 누운 채 살짝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고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듯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그때 갑자기 누군가 테이블을 두드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상사가 지나가는 것을 본 반우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뒤를 따랐다.“송 변호사님, 벌써 돌아오신 거예요?”송 변호사는 반우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반우희는 뒤에서 굉장히 아부하면서 따라갔다.송 변호사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지만, 경제 사건에서 큰 성과를 내어 부승원의 오른팔이자 법률 사무소의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반우희는 송 변호사의 비서도 아니고 그 비서의 보조로 주로 사무실의 잡일을 맡고 있었다.반우희는 말주변이 좋아서 사무실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송 변호사도 반우희를 꽤 신경 써 주었다. 그녀가 한참 떠들어댄 뒤 작은 선물 상자를 하나 던져 주었다.반우희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저에게 주시는 거예요?”송 변호사는 소파에 편히 앉아 말했다.“부 변호사님과 출장을 갔을 때 사장님께서 동행한 여성 직원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 가져왔습니다.”반우희는 감동하였다.“송 변호사님.”“앞으로 무슨 일이든 송 변호사님을 위해 할게요! 역시 우리 법률 사무소에서 최고입니다!”“면접 날 처음 뵀을 때부터 느꼈어요. 변호사님은 정말 따뜻한 분이시더라고요!”부승원이 송 변호사의 사무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반우희의 온갖 아부의 말을 정확히 들었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간신히 학력 문제를 해결하고 법률 사무소에 들어와 잡일을 하는 주제에 매일 웃고 떠들기만 해서는 시험을 통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송 변호사님은 정직하고 유능하세요. 부 변호사님보다 더 뛰어나신 것 같아요!”송 변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웃었다.부승원은 어이없었다.“...”
농담은 잠시뿐 송민재는 반우희가 하나씩 해낼 수 있도록 세심히 가르쳐주었다.이번에 법률 사무소에 새로 온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송민재가 채용했지만, 유일하게 반우희만은 부승원이 직접 뽑은 인물이었다.재미있는 건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한 번도 따뜻한 표정을 지어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반우희는 여전히 부승원이 자신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었다고 여겼다.‘쯧쯧.’“이거 복사하고 다과도 준비해 주세요. 잠시 후 메인 회의실에서 만나요.”반우희가 조심스레 물었다.“저도 함께 들어가도 되나요?”“물론이죠. 대단한 기밀은 아니니까요.”반우희는 득의양양해서는 서류를 인쇄하러 갔다.그들의 법률 사무소는 오랜 세월 정인 그룹과 긴밀히 협력해 왔으며 그 중심에는 부승원과 연 대표의 깊은 개인적 친분이 자리하고 있었다.‘맞다...’갑자기 생각난 듯 반우희는 고개를 돌려 송민재에게 물었다.“송 변호사님, 정인 그룹에서 오는 손님이 연 대표님이실까요?”송민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답했다.“확실하진 않아요. 상황 봐야 합니다.”정인 그룹은 최근 몇 년간 요양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해 왔고 새로 시작한 요양 법무 프로젝트도 이 법률 사무소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워낙 크고 확장 속도도 빨라서 이번 프로젝트가 그들에게 반드시 중요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표가 직접 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연정훈 씨가 궁금한 거예요?”송민재이 물었다.반우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함께 식사도 해봤기에 궁금한 건 없었다.반우희는 그저 연정훈이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3년 전 안시연이 말없이 사라진 후 반우희는 연정훈을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마주하는 건 늘 경제 뉴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연정훈은 정인 그룹을 이끌며 다양한 신흥 산업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었고 지금 경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연정훈일 것이다.“연 대표님과 부 변호사님이 친하시니까요. 반우희 씨도 법률 사무소에 들어온 이
대표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고 회의가 시작되었다.옆에 있는 보조들이 기록하고 있었고 반우희도 작은 공책을 꺼내 들었지만 한참을 들어도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슬쩍 옆의 동료를 바라보았다.그 동료는 새 모양 이모지를 그리고 있었다.반우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그래. 다들 똑같군.’그녀는 집중하려 애쓰며 이해한 부분과 궁금한 점을 기록해 두고 회의가 끝나면 종 변호사에게 물어보려 했다.그러던 중 연정훈이 문서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부승원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 감지하고 물었다.“문제가 있어?”연정훈은 들고 있던 문서를 조용히 부승원에게 건네주었다.부승원은 문서를 받아 확인하며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이 부동산 소유권 양도서 누가 정리한 거죠?”반우희는 숨이 멎는 듯했다.모두 반우희가 정리한 것이었다...반우희는 간신히 용기를 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부승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 문서를 반우희에게 내던졌다.“페이지가 빠졌군.”‘뭐?’반우희는 당황한 채 앞으로 나가 문서를 받았다. 시간에 쫓겨 검토할 새도 없이 곧바로 사과부터 했다.반우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녀는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법률 사무소 내에서 부승원이 업무에 대한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특히 부하 직원이 저지르는 초보적인 실수는 그의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다. 반우희가 저지른 이번 단순한 실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송민재도 긴장한 채 속으로 ‘이 아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그가 분위기를 풀어주려 입을 열려는 찰나 연정훈이 슬쩍 반우희를 흘깃 보았다.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연정훈은 잠시 놀란 듯한 눈빛을 보였으나 곧 평온한 표정을 되찾고 고개를 돌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다시 한번 인쇄해 오세요.”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급히 문서를 수정하러 나가면서도 속으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누구도 연정훈이 이렇게 너그럽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부승
부승원의 시선이 ‘양시연’이라는 이름에 잠시 머물렀다. 몇 초 후 그는 서류를 담담히 닫아 왼쪽에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묘지를 짓겠다고?”연정훈이 말했다.“문제 있어?”그저 상업적 수단일 뿐이다.부승원이 대답했다.“...문제없어.”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은 의미가 없지. 협력하는 게 낫지. 땅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면서.”연정훈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나면 저렴하게 사용권을 사들여 고급 묘지를 짓는 거지. 땅은 여전히 쓸 수 있을 테야.”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반우희는 겉으론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연정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천재다.돈을 벌 줄 아는 천재란 이런 사람인가 싶었다.부승원은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이 땅에는 작게나마 문제가 많아. 이번 기회에 다 해결해 버리자.”연정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네가 전적으로 처리해도 좋아.”정인과 JX는 지난 몇 년간 다양한 협력을 이어왔고 양사의 고위층과 변호사들은 이제 서로에게 오랜 친구나 다름없었다. 업무가 끝난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연 대표님, 저녁 시간 괜찮으신가요?”연정훈은 말을 건 변호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저녁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함께할 수 없어요.”“네. 유감입니다.”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정인 쪽 고위 임원은 연정훈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측하였다. 몇 년 사이 연정훈이 참석하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직접 대접받곤 했다.30대 초반의 그는 업계의 노련한 전문가처럼 보였다.다른 이들이 모두 흩어진 후 연정훈은 부승원의 사무실로 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부승원이 상징적으로 물었다.“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아니. 다른 일이 있어”부승원은 속으로 비웃었다.‘무슨 할 일이 있겠어.
강남시티에서.연정훈이 집에 도착하자 아주머니가 나비를 데리고 나왔다.아주머니는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늦으셔서 제가 산책을 대신 나갈까 했어요.”연정훈은 목줄을 받아들며 말했다.“제가 데리고 갈게요.”“네.”아주머니가 물었다.“저녁 드시고 나서 산책하시는 게 어떠세요?”“괜찮아요. 한 바퀴 돌고 나서 먹을게요.”“알겠습니다.”최근 한 달 동안 연정훈이 매일 나비와 산책을 나서는 모습이 이제 아주머니에게 익숙해졌다. 나비는 체중이 많이 나가 의사가 다이어트를 권했던 참이었다.수천억 자산을 가진 회장이 양을 이렇게 세심하게 챙긴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나비는 다소 게으른 편이라 영준이와 비교하면 훨씬 더 몸집이 크다.연정훈이 산책을 시키려고 목줄을 잡으니 나비는 가기 싫다는 눈치였다.“안 가면 내일 저녁밥 못 먹는다.”길가에서 사람과 양의 익숙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나비는 고집스럽게 꿈쩍도 안 했고 연정훈은 목줄을 살짝 당기며 나비에게 말했다.“빨리 앞으로 걸어가.”나비는 자리에서 걷는 시늉만 하며 연정훈의 말을 흘려들었다.연정훈이 나비를 냉랭하게 보며 힘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그러자 고집 센 나비는 걸어가다 멈춰 서서 심통을 부리는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초여름 밤의 공기는 적당히 서늘해 산책하기 좋았다. 그렇게 둘은 빌라 주변을 몇 번 돌아본 후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 검은색 털 뭉치가 소파 옆에서 졸고 있었다.나비는 즐겁게 집 안을 뛰어다니며 아들을 깨우고 연정훈 곁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연정훈이 저녁을 먹으려 하자 나비는 끊임없이 머리로 그의 다리를 밀어댔다.아주머니가 말했다.“아마 간식을 먹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녁을 덜 먹었나 봐요.”연정훈은 손으로 나비의 머리를 그의 다리에서 떼어냈다.나비는 다시 머리를 올리며 끈질기게 매달렸다.그는 어이없다는 듯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틀 사이에 체중이 좀 줄었나요?”“네. 계속 줄고 있어요.”연정훈은 고
토요일 저녁.반우희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길가에서 부승원의 차에 올랐다.부승원은 반우희의 A라인 치마와 흰 셔츠를 힐끗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부 변호사님, 이거 정장 맞죠?”“응.”반우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부승원이 차를 출발시키자 반우희는 거울을 열어 머리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면 새 셔츠를 하나 꼭 사야겠다.최근 온몸에 고르게 살이 많이 쪘다. 가슴까지 살이 붙어버려 셔츠가 조금 작게 느껴졌다.에휴.지난 몇 년간 안시연이 준 4천만과 부승희 씨가 준 금괴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말 바쁘게 일하면서도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을 것이다.승주와 다른 두 아이의 학비 그리고 그녀의 학위 취득 비용까지 모두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부 변호사님, 안시연 언니 다시 돌아올까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모르지.”‘조금 후면 알게 될 거야.’반우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부승희 씨도 오랫동안 못 봤네요.”“승희는 새해에 돌아왔었어.”“정말이에요?”“그런데 친구가 너무 많아서 너를 챙길 시간이 없었어.”반우희는 침묵했다.“...”정말 짜증이 난다.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하자 부승원이 갑자기 반우희에게 경고했다.“잠시 후 사람을 만나면 좀 자제해.”반우희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다른 몇 명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고 반우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방의 문을 열기 전 묘한 긴장감이 스쳤다.스크린을 지나가자 앞사람들이 키가 커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변호사님, 오랜만이에요.”응???반우희는 즉시 눈이 반짝였다.익숙한 목소리였다.다만 기억 속의 온화함에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부승원이 말했다.“제 예상이 맞았네요.”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경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