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연정훈은 그 평범했던 아침을 떠올리며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지고 후회가 밀려왔다.그는 안시연의 결단을 과소평가했고 그들 사이의 거리가 이토록 깊을 줄은 몰랐다.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기억 속에는 이미 돌아서 버린 안시연의 뒷모습만이 남아 있었다.연정훈은 알지 못했지만, 안시연은 돌아서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 안시연은 빠르게 걸어 나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그를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면 자신이 후회할까 연정훈이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게 될까 겁이 났다.앞길은 멀었고 이제 혼자서 걸어가야 했다.어떻게 비행기에 올랐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도착 후 일정을 세심하게 준비했지만, 안시연은 그의 계획에 따라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가져온 현금은 많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충분했다. 안시연이 머무를 곳을 찾아 새로운 도시에서 자리를 잡기에는 충분한 부족하지 않았다.안정을 찾은 뒤 연정훈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그도 더 이상 자신을 붙잡지 않으리라 여겼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감으며 안시연은 머리가 터질 듯했다.사랑하던 사람을 스스로 떼어내는 일이 이런 느낌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이번 생에서 연정훈을 사랑한 만큼 또 다른 이를 사랑할 힘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이륙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정훈 씨가 아직 공항에 있을까? 지금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리고...안시연은 눈물을 닦고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반지는 여전히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시선을 돌리더니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어 손에 단단히 쥐었다.비행기가 이륙했다.하늘 위에 떠 있던 마음이 마침내 잔잔해졌다.안시연은 눈을 감으며 마음속으로 경인과 모든 것을 작별했다.몽롱한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여자 목소리였다. 안시연은 눈살을 살짝
3년 후.JX 법률 사무소에서.햇살이 새로 놓인 로비 휴게 테이블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반우희는 옆으로 누운 채 살짝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고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듯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그때 갑자기 누군가 테이블을 두드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상사가 지나가는 것을 본 반우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뒤를 따랐다.“송 변호사님, 벌써 돌아오신 거예요?”송 변호사는 반우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반우희는 뒤에서 굉장히 아부하면서 따라갔다.송 변호사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지만, 경제 사건에서 큰 성과를 내어 부승원의 오른팔이자 법률 사무소의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반우희는 송 변호사의 비서도 아니고 그 비서의 보조로 주로 사무실의 잡일을 맡고 있었다.반우희는 말주변이 좋아서 사무실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송 변호사도 반우희를 꽤 신경 써 주었다. 그녀가 한참 떠들어댄 뒤 작은 선물 상자를 하나 던져 주었다.반우희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저에게 주시는 거예요?”송 변호사는 소파에 편히 앉아 말했다.“부 변호사님과 출장을 갔을 때 사장님께서 동행한 여성 직원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 가져왔습니다.”반우희는 감동하였다.“송 변호사님.”“앞으로 무슨 일이든 송 변호사님을 위해 할게요! 역시 우리 법률 사무소에서 최고입니다!”“면접 날 처음 뵀을 때부터 느꼈어요. 변호사님은 정말 따뜻한 분이시더라고요!”부승원이 송 변호사의 사무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반우희의 온갖 아부의 말을 정확히 들었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간신히 학력 문제를 해결하고 법률 사무소에 들어와 잡일을 하는 주제에 매일 웃고 떠들기만 해서는 시험을 통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송 변호사님은 정직하고 유능하세요. 부 변호사님보다 더 뛰어나신 것 같아요!”송 변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웃었다.부승원은 어이없었다.“...”
농담은 잠시뿐 송민재는 반우희가 하나씩 해낼 수 있도록 세심히 가르쳐주었다.이번에 법률 사무소에 새로 온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송민재가 채용했지만, 유일하게 반우희만은 부승원이 직접 뽑은 인물이었다.재미있는 건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한 번도 따뜻한 표정을 지어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반우희는 여전히 부승원이 자신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었다고 여겼다.‘쯧쯧.’“이거 복사하고 다과도 준비해 주세요. 잠시 후 메인 회의실에서 만나요.”반우희가 조심스레 물었다.“저도 함께 들어가도 되나요?”“물론이죠. 대단한 기밀은 아니니까요.”반우희는 득의양양해서는 서류를 인쇄하러 갔다.그들의 법률 사무소는 오랜 세월 정인 그룹과 긴밀히 협력해 왔으며 그 중심에는 부승원과 연 대표의 깊은 개인적 친분이 자리하고 있었다.‘맞다...’갑자기 생각난 듯 반우희는 고개를 돌려 송민재에게 물었다.“송 변호사님, 정인 그룹에서 오는 손님이 연 대표님이실까요?”송민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답했다.“확실하진 않아요. 상황 봐야 합니다.”정인 그룹은 최근 몇 년간 요양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해 왔고 새로 시작한 요양 법무 프로젝트도 이 법률 사무소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워낙 크고 확장 속도도 빨라서 이번 프로젝트가 그들에게 반드시 중요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표가 직접 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연정훈 씨가 궁금한 거예요?”송민재이 물었다.반우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함께 식사도 해봤기에 궁금한 건 없었다.반우희는 그저 연정훈이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3년 전 안시연이 말없이 사라진 후 반우희는 연정훈을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마주하는 건 늘 경제 뉴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연정훈은 정인 그룹을 이끌며 다양한 신흥 산업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었고 지금 경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연정훈일 것이다.“연 대표님과 부 변호사님이 친하시니까요. 반우희 씨도 법률 사무소에 들어온 이
대표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고 회의가 시작되었다.옆에 있는 보조들이 기록하고 있었고 반우희도 작은 공책을 꺼내 들었지만 한참을 들어도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슬쩍 옆의 동료를 바라보았다.그 동료는 새 모양 이모지를 그리고 있었다.반우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그래. 다들 똑같군.’그녀는 집중하려 애쓰며 이해한 부분과 궁금한 점을 기록해 두고 회의가 끝나면 종 변호사에게 물어보려 했다.그러던 중 연정훈이 문서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부승원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 감지하고 물었다.“문제가 있어?”연정훈은 들고 있던 문서를 조용히 부승원에게 건네주었다.부승원은 문서를 받아 확인하며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이 부동산 소유권 양도서 누가 정리한 거죠?”반우희는 숨이 멎는 듯했다.모두 반우희가 정리한 것이었다...반우희는 간신히 용기를 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부승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 문서를 반우희에게 내던졌다.“페이지가 빠졌군.”‘뭐?’반우희는 당황한 채 앞으로 나가 문서를 받았다. 시간에 쫓겨 검토할 새도 없이 곧바로 사과부터 했다.반우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녀는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법률 사무소 내에서 부승원이 업무에 대한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특히 부하 직원이 저지르는 초보적인 실수는 그의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다. 반우희가 저지른 이번 단순한 실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송민재도 긴장한 채 속으로 ‘이 아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그가 분위기를 풀어주려 입을 열려는 찰나 연정훈이 슬쩍 반우희를 흘깃 보았다.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연정훈은 잠시 놀란 듯한 눈빛을 보였으나 곧 평온한 표정을 되찾고 고개를 돌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다시 한번 인쇄해 오세요.”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급히 문서를 수정하러 나가면서도 속으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누구도 연정훈이 이렇게 너그럽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부승
부승원의 시선이 ‘양시연’이라는 이름에 잠시 머물렀다. 몇 초 후 그는 서류를 담담히 닫아 왼쪽에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묘지를 짓겠다고?”연정훈이 말했다.“문제 있어?”그저 상업적 수단일 뿐이다.부승원이 대답했다.“...문제없어.”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은 의미가 없지. 협력하는 게 낫지. 땅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면서.”연정훈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나면 저렴하게 사용권을 사들여 고급 묘지를 짓는 거지. 땅은 여전히 쓸 수 있을 테야.”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반우희는 겉으론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연정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천재다.돈을 벌 줄 아는 천재란 이런 사람인가 싶었다.부승원은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이 땅에는 작게나마 문제가 많아. 이번 기회에 다 해결해 버리자.”연정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네가 전적으로 처리해도 좋아.”정인과 JX는 지난 몇 년간 다양한 협력을 이어왔고 양사의 고위층과 변호사들은 이제 서로에게 오랜 친구나 다름없었다. 업무가 끝난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연 대표님, 저녁 시간 괜찮으신가요?”연정훈은 말을 건 변호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저녁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함께할 수 없어요.”“네. 유감입니다.”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정인 쪽 고위 임원은 연정훈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측하였다. 몇 년 사이 연정훈이 참석하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직접 대접받곤 했다.30대 초반의 그는 업계의 노련한 전문가처럼 보였다.다른 이들이 모두 흩어진 후 연정훈은 부승원의 사무실로 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부승원이 상징적으로 물었다.“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아니. 다른 일이 있어”부승원은 속으로 비웃었다.‘무슨 할 일이 있겠어.
강남시티에서.연정훈이 집에 도착하자 아주머니가 나비를 데리고 나왔다.아주머니는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늦으셔서 제가 산책을 대신 나갈까 했어요.”연정훈은 목줄을 받아들며 말했다.“제가 데리고 갈게요.”“네.”아주머니가 물었다.“저녁 드시고 나서 산책하시는 게 어떠세요?”“괜찮아요. 한 바퀴 돌고 나서 먹을게요.”“알겠습니다.”최근 한 달 동안 연정훈이 매일 나비와 산책을 나서는 모습이 이제 아주머니에게 익숙해졌다. 나비는 체중이 많이 나가 의사가 다이어트를 권했던 참이었다.수천억 자산을 가진 회장이 양을 이렇게 세심하게 챙긴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나비는 다소 게으른 편이라 영준이와 비교하면 훨씬 더 몸집이 크다.연정훈이 산책을 시키려고 목줄을 잡으니 나비는 가기 싫다는 눈치였다.“안 가면 내일 저녁밥 못 먹는다.”길가에서 사람과 양의 익숙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나비는 고집스럽게 꿈쩍도 안 했고 연정훈은 목줄을 살짝 당기며 나비에게 말했다.“빨리 앞으로 걸어가.”나비는 자리에서 걷는 시늉만 하며 연정훈의 말을 흘려들었다.연정훈이 나비를 냉랭하게 보며 힘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그러자 고집 센 나비는 걸어가다 멈춰 서서 심통을 부리는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초여름 밤의 공기는 적당히 서늘해 산책하기 좋았다. 그렇게 둘은 빌라 주변을 몇 번 돌아본 후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 검은색 털 뭉치가 소파 옆에서 졸고 있었다.나비는 즐겁게 집 안을 뛰어다니며 아들을 깨우고 연정훈 곁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연정훈이 저녁을 먹으려 하자 나비는 끊임없이 머리로 그의 다리를 밀어댔다.아주머니가 말했다.“아마 간식을 먹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녁을 덜 먹었나 봐요.”연정훈은 손으로 나비의 머리를 그의 다리에서 떼어냈다.나비는 다시 머리를 올리며 끈질기게 매달렸다.그는 어이없다는 듯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틀 사이에 체중이 좀 줄었나요?”“네. 계속 줄고 있어요.”연정훈은 고
토요일 저녁.반우희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길가에서 부승원의 차에 올랐다.부승원은 반우희의 A라인 치마와 흰 셔츠를 힐끗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부 변호사님, 이거 정장 맞죠?”“응.”반우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부승원이 차를 출발시키자 반우희는 거울을 열어 머리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면 새 셔츠를 하나 꼭 사야겠다.최근 온몸에 고르게 살이 많이 쪘다. 가슴까지 살이 붙어버려 셔츠가 조금 작게 느껴졌다.에휴.지난 몇 년간 안시연이 준 4천만과 부승희 씨가 준 금괴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말 바쁘게 일하면서도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을 것이다.승주와 다른 두 아이의 학비 그리고 그녀의 학위 취득 비용까지 모두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부 변호사님, 안시연 언니 다시 돌아올까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모르지.”‘조금 후면 알게 될 거야.’반우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부승희 씨도 오랫동안 못 봤네요.”“승희는 새해에 돌아왔었어.”“정말이에요?”“그런데 친구가 너무 많아서 너를 챙길 시간이 없었어.”반우희는 침묵했다.“...”정말 짜증이 난다.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하자 부승원이 갑자기 반우희에게 경고했다.“잠시 후 사람을 만나면 좀 자제해.”반우희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다른 몇 명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고 반우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방의 문을 열기 전 묘한 긴장감이 스쳤다.스크린을 지나가자 앞사람들이 키가 커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변호사님, 오랜만이에요.”응???반우희는 즉시 눈이 반짝였다.익숙한 목소리였다.다만 기억 속의 온화함에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부승원이 말했다.“제 예상이 맞았네요.”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경
안시연은 테이블을 돌며 차례로 술을 권했지만,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정인과 부승원 측 사람들은 노련한 이들이라 처음엔 안시연을 그저 젊고 예쁜 여자로만 보며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몇 잔의 술을 주고받은 후 그들은 진지하게 대응하며 적당히 웃어넘기기 시작했다.안시연도 그들이 처음부터 사용권을 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럼에도 이 사용권은 반드시 따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안시연의 목표는 정인의 지분 참여를 끌어내 쌍방이 협력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었다.하지만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상대방이 이미 자신의 의중을 꿰뚫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불리해질 뿐이었다.이것이 바로 상대가 부승원임을 알면서도 안시연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최소한 벽처럼 완고한 상대는 아닐 거로 생각했다.담소 중 안시연은 술기운을 빌려 조심스럽게 하소연을 시작했다.새롭게 맡은 자리에서 몹시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는 듣는 이 누구에게도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더구나 그녀처럼 눈에 띄는 미녀가 공격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니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는 저절로 부드러워졌다.하지만 이내 그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으며 안시연의 배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을 나서기 전 양지원이 해준 말이 생각났다.즐거우면 일하고 싫어지면 다 팔아버리고 땅을 다시 사서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자존심이 상할 뿐 아니라 돌아가면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놀림을 받을 게 뻔했다.‘아니. 그건 싫어. 그만두면 안되.’안시연은 포기하려는 마음을 떨쳐내고 다시 의욕을 다잡으며 협상에 집중했다.그때 중간에 반우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언니, 저쪽이 땅을 안 팔 생각인가 봐요. 게다가 언니 땅에 묘지를 짓겠다고 하네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곧 반우희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연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
‘망했어.’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이 점점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시연은 충분히 반우희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정권을 부승원에게 넘겨버린 상황이 의아했다. 결국 양시연이 부승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 보였다.“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반우희가 초조하게 물었다. 송민재는 살짝 기침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기다려야죠. 부 변호사 쪽에서 곧 팀 명단을 보내줄 겁니다. 만약 그 명단에 우희 씨 이름이 없다면 그때 가서 부 변호사에게 직접 부탁하세요.”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맥이 빠졌다.‘부승원의 성격에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통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녀는 부승원의 사무실 쪽을 몰래 훔쳐보며 첫 번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 시각 부승원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무슨 일이야?”비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업무를 간단히 보고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반우희 씨 문제는 우리 쪽 인원을 배정해서 처리해도 괜찮을까요?”그제야 부승원이 고개를 들었고 비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를 띠고 덧붙였다.“게다가 만약 우리가 부주의하게 처리해서 사기 사건 같은 문제라도 연루되면 업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부승원은 비서의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침묵에 비서가 당황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비서는 이미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특혜를 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의 뒷수습도 자신이 처리했기 때문이다.잠시 후 부승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또 같은 실수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할 거야.”“알겠습니다.”비서는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라지 않았고 부승원의 얼굴을 살짝 살피며 조용히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부승원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부승원은 잠시 생각에
“양시연 언니, 저 오늘부터 같이 갈 수 있는 건가요?”반우희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양시연은 부승원의 반응을 떠올리며 눈앞의 작고 귀여운 소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양시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었고 반우희는 애교를 부리며 양시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은 안 돼요.”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응?’반우희는 금세 자세를 고치며 애처로운 얼굴로 물었다.“저 안 데려가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너를 이용해 큰 물고기를 낚으려는 거야.’양시연은 반우희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부 변호사님께 이미 얘기했어요. 며칠 뒤에 부 변호사님이 팀을 이끌고 정인에 들어가실 건데 우희 씨도 그 팀에 합류해서 함께 가면 돼요. 이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에요.”반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반짝였다.‘좀 돌아가는 느낌인데 그냥 바로 데려가면 되잖아.’반우희는 계속해서 간절한 표정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길어야 삼사일 내로 우희 씨도 정인에 갈 수 있을 거예요.”“그럼...”“240만이에요.”양시연은 장난스럽게 윙크했고 반우희는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흔들었다.“그럼 언니, 조심히 가세요!”“다음에 봐요.”양시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났고 뒤에서 반우희는 마치 만화 속 캐릭터처럼 환한 얼굴로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너무 좋아!’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는 유리창 너머로 부승원의 냉혹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한편 위층에서 양시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해결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연정훈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렇게 쉽게?]양시연은 다리를 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타이핑을 이어갔다.[부승원 씨가 처음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살짝 놀라게 했더니 배우고 싶다고
양시연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고 송민재는 빠르게 반응하며 반우희를 끌어당겼다.“알았어요. 우희 씨의 일은 나중에 얘기하고 먼저 양시연 씨와 부 변호사님과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해요.”“네? 그런데 저는...”“그만 말해요.”송민재는 반우희를 끌고 나갔지만 반우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양시연을 간절히 바라봤다.‘언니, 저를 잊지 마세요.’양시연은 침묵했다.“...”사무실 문이 닫히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승원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연필을 쓰레기통에 던졌다.“연정훈이 양시연 씨에게 남겨준 팀이 부족해서 나한테 폐품을 구하러 온 거에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저 입은 연정훈보다 더 못됐어.’양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방문한 이유를 말했지만 부승원은 대답했다.“능력이 부족해서 그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부 변호사님, 겸손하시네요. 능력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급하게 찾아온 게 문제겠죠. 바쁘신데 시간을 낼 수 없는 것도 이해합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 선반에서 파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양시연은 다시 한번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변호사님, 연정훈 씨의 부탁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배려해 주세요.”부승원은 대답했다.“전 협력자를 찾을 때는 상대의 능력과 안목만 봅니다. 누구의 체면도 보지 않죠.”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부 변호사님,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부승원은 얼핏 미소를 보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반우희를 눈여겨본 사람이 누구죠?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의 안목이나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봅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반우희를 먼저 눈여겨본 건 부 변호사님 아니었나요?”부승원은 잠시 멈칫하며 이마를 찌푸렸고 양시연은 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내가 봤을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정훈 씨, 정말로 염치없는 거 알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양시연에게 입이 막힌 채로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양시연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손으로 연정훈의 귀를 잡아당겼다.“나이 많은 엉큼한 아저씨.”연정훈은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껴안으며 말했다.“자꾸 나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마.”“당신 나이 많고 늙었잖아요. 완전 늙었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 번 뒤집어 양시연을 아래로 눌렀다.“한 번만 더 말해봐.”양시연은 즉시 기가 죽어 연정훈의 어깨를 떠받치며 작게 외쳤다.“허리 아프다니까요!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그리고는 발로 그를 한 번 툭 찼다.“이 정도로는 당신이 원하는 아들이나 딸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돌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기운을 조금 회복한 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아 걸치고 명령하듯 말했다.“나 샤워 좀 시켜줘요.”연정훈은 기꺼이 수고할 마음이 가득했고 양시연이 허리가 아프다고 했기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웠다.욕실로 들어가자 양시연은 물속에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사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늦어질수록 몸의 회복이 더디니 차라리 빨리 낳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하나만 낳는다면 왕자님도 좋고 공주님도 좋겠지만 둘을 낳으려면 양시연이 고생해야 한다.‘정말 고민이네. 진짜 인간의 진화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바로바로 낳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연정훈은 먼저 욕조 옆에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그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정훈 씨는 아들이 좋나요? 아니면 딸이 좋나요?”“둘 다 좋지.”양시연은 몸을 일으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