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수술실 밖에서 마치 외할머니를 본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외할머니는 그날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환하게 웃으며 안시연에게 손을 흔들며 잘 있으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안시연의 눈앞은 눈물로 흐릿해졌고 정신은 점점 몽롱해지며 외할머니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그 순간, 병원장의 낮고 미안한 목소리가 귀가에 스며들었다.“연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안시연은 이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소리치며 그들에게 계속해서 응급처치해달라고 외쳤다.“최선을 다했다니, 최선을 다했다니!”병원장은 연신 사과했지만, 안시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껴안으며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셔츠를 필사적으로 꽉 잡았다.“연정훈 씨! 전문가를 불러와요. 외할머니를 살려주세요!”연정훈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안시연은 결국 무너져 내려 거의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그녀는 연정훈의 품속에서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외할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수술실 밖에는 죽음의 냉기가 감돌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꼭 껴안고 그녀가 마음속에 가득했던 감정을 쏟아내도록 했다.결국 안시연은 기력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돌아가셨다고요?!”양지원은 소식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태가 위중하셨고 결국 소생하지 못하셨습니다.”“그러면 안시연 씨는요?”양지원은 재빨리 물었다.양창수가 대답했다.“연정훈이 시연 씨를 데리고 갔어요.”양지원은 소파에 앉으며 양석진을 바라보았다.양석진이 물었다.“병이 악화한 원인은 밝혀졌어?”“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양창수가 대답했다.“병이 발작했을 때는 집에 있었고 아이가 신고해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합니다.”양석진은 침착하게 지시했다.“경위를 명확히 파악해. 그리고 소현정을 감시해. 오늘 밤
“외할머니?”텅 빈 곳 속에서 안시연은 연신 외할머니를 불렀다.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안시연은 마치 영혼이 떠나간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외할머니? 외할머니?!”발밑의 땅이 사라진 듯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안시연의 두려운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그때 침실 문이 급히 열리고 연정훈이 문가에 나타났다.여기는 그들의 안방이었다.안시연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떠오르는 빛을 발견한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와 연정훈에게로 달려갔다.“연정훈 씨, 우리 외할머니 어디 계세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몸을 부축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시연, 외할머니는 이미...”“아니에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시연은 분명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그녀는 재빨리 연정훈을 지나쳐 무언가를 확인하려 했지만, 계단 끝에서 거실에 앉아 있는 반우희를 보게 되었다.“우희 씨...”안시연은 힘겹게 표정을 추스르며 조용히 물었다.“우리 외할머니 어디 계세요?”반우희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반우희의 표정을 본 안시연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손발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은 금세 창백해지더니 뒤로 쓰러졌다.다행히 연정훈이 안시연 뒤에 있었다.“의사 불러 주세요!”짧은 순간 동안 안시연은 다시 기절했다.큰 슬픔 앞에서 사람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연약해진다.안시연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깊은 절망에 잠식되어 헤어 나올 힘조차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건 단 한 사람 계속해서 안시연의 손을 붙들고 있던 사람뿐이었다. 마치 안시연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듯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로 연정훈이었을 것이다.그가 맞다.눈물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안시연은 연정훈이 얼마나 오래 잠을 자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연정훈의 눈에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안시
“병원에서 사람을 죽인 거예요! 무슨 전문가들이라더니 우리 엄마가 멀쩡했는데 어떻게 응급처치에 실패할 수 있어요?!”안시연이 연정훈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소현정은 병원장 사무실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항의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소현정은 고혈압으로 기절하며 큰 고통을 겪었다.사건 후 소현정은 집으로 돌아갔다.몸이 회복되자마자 병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음이 약해진 반우희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안시연이 도착하자 소현정은 절박하게 안시연을 붙잡고 말했다.“너 잘 왔어. 바로 이 사람들이 네 외할머니를 죽인 거야!”소현정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눈을 크게 뜨고는 안시연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처럼 보였다.이 순간, 안시연은 소현정이 마치 딸처럼 엄마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소현정은 더욱 강조하며 말했다.“너의 외할머니는 그냥 집에서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더니 거실에서 넘어졌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도 의식이 있었단 말이야!”그러면서 소현정은 반우희를 잡아당겼다.“이 아이한테 물어봐!”반우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저는...”안시연은 소현정을 보지 않고 병원장을 바라보았다.병원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연정훈이 함께 있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수술 전 과정이 녹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병원은 조사에 협조하겠습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현재 심정을 이해했고 그녀가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는 진수빈에게 법적 절차를 밟아 수술의 구체적인 상황을 조사하라고 즉시 지시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말했다.“부승원에게 이 일을 맡길게. 만약 누군가의 실수가 있었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안시연은 수술에 문제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전문가들이었고 실수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하지만 운명은 안시연을 더욱 괴롭히려는 듯했다.그날 오후 의료진 내부에서 수술 중에 심각한 과실이 있었다는 내용이
부승원은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는 순간 연정훈 대신 마음속으로 긴장했다.역시 그 불길은 연정훈에게 번졌다.안시연은 겉으로는 차분하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눈빛은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소현주 씨는 분명히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변의 많은 의사들이 소현주 씨가 아프다는 걸 몰랐겠어요?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먹지 않으면서요.”“연정훈 씨, 제발 저를 도와줘요.”“알겠어.”연정훈은 안시연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아니에요...”안시연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연정훈의 손을 놓고 두 걸음 물러섰다. 두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강하게 부정하듯 말했다.“철저히 조사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도 소현주 씨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연정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법은 공정하게 판단할 거야.”“그럴 리가 없어요!”안시연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녀는 부승원을 가리키며 외쳤다.“못 들었어요? 소현주 씨가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소현주 씨는 아픈 사람이에요! 소현주 씨는 의사라는 직업을 잃는 것뿐이에요. 저의 외할머니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비웃듯 냉소적으로 웃었다.연정훈을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당신이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소현주 씨는 직업조차 잃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의사로 남아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어요!”연정훈이 다가가 안시연을 달래려 했지만, 안시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반우희가 안시연을 붙잡고 말했다.“언니, 진정해요. 이건 소 선생님의 잘못이지 연정훈 씨의 잘못 아니잖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반우희 씨는 모르겠지만, 소현주 씨는 정훈 씨의 전 여자친구예요.”“조현병이라는 보호막이 없어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도와줄 거예요!”충격에 빠진 반우희는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시연에게 차분하게
변호사 사무실에서.이승우는 부승원의 설명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완전 막무가내 아니에요?”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반우희와 부승희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아닌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아니, 제 말이 틀렸어요?”“그럼 이승우 씨는 시연 언니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요?”“...”“거봐요. 이승우 씨도 대답할 수 없잖아요.”이승우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우선 연정훈이 몰래 연명걸을 처리한 건 안시연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이것도 잘못된 건가요?”“진짜 사랑해서 그런 건데 잘못이라고 치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반우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소현주 의사를 왜 그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는 거죠?”“...”‘어린 녀석이 한 마디도 지지 않네.’가만히 듣고 있던 부승희가 입을 열었다.“그럼 반우희 씨 말대로면 정훈 오빠가 소현주 씨를 몰래 처리하거나 거짓 증거를 만들어 감방에 보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반우희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그러자 이승우가 기세등등하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야.’반우희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불법 행위는 틀린 게 맞아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시연 언니가 이해돼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이성을 지킬 수 있겠어요? 언니가 이성을 되찾는다면 다시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죠.”세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부승원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희가 제 오빠 옆구리를 톡 치며 말했다.“어이 변호사님은 할 말 없어?”“안시연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세 사람이 바로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부승원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연정훈이 정말 하늘 아래 부끄럼이 하나도 없었다면 왜 안시연 씨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겠어?”“상대가 소현주만 아니었다면 연정훈은 절대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테고 안시연 씨가 손해를 보는 일
안시연은 연정훈이 소현주에게 직접 벌을 주라는 게 아니었다. 만약 연정훈이 소현주의 죽음을 원하냐고 묻는다면 안시연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연명걸의 일에도 안시연은 연정훈이 안 좋은 일에 연루될 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말렸었다.하지만 연정훈이 소현주의 일에 자꾸 변명을 늘여놓자 안시연은 너무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안시연이 무너질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연정훈이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다른 사람의 편을 든다면 안시연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시연의 애인이 아니던가!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안시연은 이성을 되찾고 부승원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부승원을 집으로 불렀다.“내가 변호할게요.”부승원의 말에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소현주 씨는...”이름만 뱉었을 뿐인데 안시연은 호흡이 가빠졌다.부승원은 이를 눈치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난 변호사고 법으로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 어떤 사람도 내 원칙을 어긋나게 할 수 없고 아무리 연정훈이라고 해도 변함이 없어요. 소현주 씨에게 잘못이 있다면 끝까지 싸울게요.”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절대 간섭하지 않을게.”“저는 지금 당사자와 사건에 대해 얘기 중이니 연정훈 씨의 의견은 듣지 않겠습니다.”“...”안시연은 부승원을 믿었다.“그럼 작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부승원이 노트북을 꺼내 들며 말했다.“말하세요.”“만약 형량을 받을 수 있다면 실형 선고를 바라며,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배상을 포기할게요.”부승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먼저 말씀드리자면 현재 상황이 안시연 씨에게 더 불리한 상황이에요. 병원 쪽 입장을 알아봤는데 이 사건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 아주 큰 숫자의 배상금을 제시하고 있어요.”안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변호사님 그거 아세요? 제 남자 친구가 얼마 전에 그 병원에 억 단위로 기부했어요. 그러면 그 배상금이 제 남자
연정훈에게 소현주란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과거의 연정훈은 사랑과 죄책감 두 감정은 전혀 섞일 리가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현재 두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다.굳어버린 연정훈을 살피며 부승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 씨에게 감정이 남은 거야?”“아니.”“그럼, 대체 뭔데?”연정훈은 부승원을 한참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사귀는 동안 어머니가 삼촌을 시켜 뒷조사하게 했어. 그런데 우리가 다툰 날 소현주가 홀로 뛰쳐나갔고 삼촌이 그 틈을 타서 나쁜 짓을 했어.”“공휘?”“그래.”공휘가 어떤 사람인지는 부승원도 잘 알고 있었다. 연정훈이 많이 간추려 말했지만 부승원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눈치를 챘다.‘이게...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지.’소현주의 사고는 연정훈의 엄마로 비롯된 일이었으니 연정훈이 한평생 소현주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엔 소현주가 안시연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안시연은 충분히 소현주에게 죗값을 물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정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연정훈이 안시연을 위해 소현주를 감방에 보낸다는 것도 참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이 이 사건을 방관하여 안시연의 외할머니를 죽인 소현주를 법 테두리 밖으로 보낸다면 안시연에게 너무 몹쓸 짓이었다.부승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퇴양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그때, 부승원은 갑자기 촉이 왔다.“소현주 씨 사건 증거 제대로 확인해 봤어?”“동영상 확인했어.”“...”‘어휴. 참 매몰차긴.’부승원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그럼 동영상은...”“검증받았는데 합성 아니래.”부승원은 정말 할 말을 잃었다.그래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럼 넌 정말 답도 없네.”“...”“안시연 씨는 알고 있어?”부승원의 질문에 연정훈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고 부승원은 바로 눈치를 챘다.연정훈이 소현주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 걸 이해할 수는 있었다. 연정훈은 이 사건에 있어 간접 가해자이자
부승원이 떠나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안시연은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그 옆에 다가가니 종이에 적은 리스트는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이었다.“이건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게. 쉬고 있어.”안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쳐다도 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혼자 힘으로 하고 싶어요.”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안시연은 몇 글자를 끄적이다가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빠르게 닦아내고 다시 글을 쓰는 걸 반복했다.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그 행동을 저지했다.“벌써 나와 선을 긋는 거야?”안시연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한참 뒤 안시연이 힘겹게 말을 시작했다.“지금 연정훈 씨와 이런 얘기할 기분 아니에요. 무사히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싶어요.”“그 다음엔?”그 다음엔...안시연도 그다음을 몰랐다.하지만 지금, 이번 생에 주어진 행복과 희망을 단숨에 뺏겨버린 기분이 들었다.이젠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다.안시연이 아무 말도 없자 연정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소현주 때문에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그래요. 지금 연정훈 씨가 많이 원망스러워요.”안시연은 고분고분하게 인정했다.그리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 씨를 원망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연정훈은 마음이 너무 아파 호흡이 가빠졌다.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안시연이 말했다.“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그 말에 내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알기나 해요?”“그렇게 되면 소현주는 손쉽게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텐데 고작 그런 말로 내 입을 막으려고 했어요?”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전에 내가 소현주에게 빚진 게 있다는 말 기억해?”“그래서 지금 그걸 갚겠다고요?”“아니.”“그럼, 뭔데요?”“지금 네가 불법이든 합법이든 소현주를 손보고 싶다면 난 절대 간섭하지 않을게. 하지만 시연아, 난 내 손으로 소현주를 두 번 망가뜨릴 수는 없어.”안시연은 마음이 흔들렸다. 연정훈에게 말하지 못할 상황이 있을 거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