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스쳤다.양석진의 목소리엔 긴장감이 서렸다.“네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양지원은 양석진을 안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오성호가 함부로 남의 아이를 데려와 바꿔치기할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맞아?”“...그런 거 아니에요.”“그런 네가 무슨 근거로 확신해?”“그냥 알 수 있어요.”양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평소처럼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 속엔 부끄러워 차마 다 말하지 못하는 어색함이 스며 있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을 바라보며 양석진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억눌린 감정이 꿈틀댔다.만약 양지원이 양혁수가 반드시 오성호의 아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가 관계를 맺은 사람은 오직 오성호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그럴 리 없다.만약 그랬다면 양지원은 더 일찍 알아차렸을 것이다.양석진의 시선을 느낀 양지원은 부끄러워져서 두 걸음 물러난 뒤, 옆으로 몸을 돌렸다.양지원은 정말로 양석진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오성호가 약을 썼던 것은 분명했지만, 그녀는 너무 어리석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성호가 자신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양지원은 그저 양석진과만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으나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지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너무 늦었어요. 시연 씨가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 공적인 이유를 내세워 출발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당신을 주시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석진 씨도 시연 씨도 위험해질 겁니다.”양석진은 대답하지 않았다.양지원은 그를 한 번 흘깃 쳐다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양석진은 분명 그녀가 오랜 세월 고집을 부린 탓에 그들의 아이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눈가가 뜨거워졌고 지원은 빠르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애
부엌에서.양석진은 소매를 반쯤 걷고 얼굴을 굳힌 채 조리대 앞에 서서 몇 개의 냄비를 확인했다. 뒤에서는 오븐 안에 아직도 한가득 디저트가 있었고 양석진은 디저트를 조심스럽게 꺼냈다.양지원은 문 앞에 멈춰 서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한번 쳐다보았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양석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디저트 좀 옮겨줘.”“네!”일이 생긴 양지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작은 접시에 담긴 블루베리 파이를 우아하게 들어 나갔다.양석진은 양지원에게 한 번에 간식을 다 가져가라고 쟁반을 가져다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진지하게 걸어 나가는 양지원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양석진은 한동안 말없이 양지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했다.양지원은 옛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수년 동안 양석진은 양혁수를 자주 보지 못했기에 양지원이 이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더 이상 예전의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지금에서야 안시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이 정말로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0여 년 동안 양지원을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양지원이 보낸 쿠키에 독이 들어 있었다 해도 양석진은 그것을 아껴 조금씩 먹었을 것이다. 마치 서서히 독에 물드는 것처럼 말이다.생각할수록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이제 이 자리에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한심하다는 생각에 답답함이 밀려왔다.그때 양창수의 말을 따랐어야 했다.오성호를 없애고 양지원을 지구 어딘가 외진 곳에 던져놨으면 그녀를 길들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 끝났어. 아이가 아이를 낳을 만큼 세월을 허비했으니!’양지원은 블루베리 파이를 내려놓고 자리를 살짝 조정한 후 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석진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했다.양석진이 여전히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아 겁에 질린 그녀는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작은 접시들을 하
켁켁!양지원은 죽을 거의 뿜을 뻔했다.재빨리 휴지를 꺼내 입을 닦고는 양석진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양창수!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했으면서 다 말해버렸네!’양석진은 양지원의 반응을 보고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아까워서 그래?”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재수 없었을 뿐 전혀 아깝지 않았다.“아깝지 않아요.”양석진은 느리게 말했다.“홧김에 그런 말 하지 마. 나중에 내가 정말 사람을 시켜 처리하면 그때 와서 울면서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나 말고.”“석진 씨가 하면 안 돼요!”양지원이 양석진의 말을 끊었다.‘석진 씨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양석진은 잠시 침묵했다. 방금 전까지는 담담했지만, 다음 순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양지원은 의아했다. 아직도 숟가락을 들고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석진 씨, 제가 이미 다 준비해 놓았어요. 죽이지 못하더라도 화서시에 갇힐 거예요.”양지원은 잠시 멈칫하고 덧붙였다.“석진 씨, 이 일에 손대지 마세요. 괜히 당신만 곤란해질 거예요.”양석진은 커피 테이블 밑에서 원래 없을 담배를 찾으려 하다가 양지원의 말을 듣고는 잠시 양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석진 씨가...오해했나?’양석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양지원 앞에 앉았다.“오성호가 밖에 다른 여자가 있어서 마음을 그렇게 독하게 먹은 거야?”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양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자꾸 오성호 씨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미워할 것까지는 없어요. 우리 결혼할 때부터 오성호 씨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어요.”“그러면 왜 결혼했어?”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조용히 그릇 안의 죽을 저으며 불편함을 느꼈다.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심혜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양석진의 사업을 위해서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가문과의 결혼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할까?’모든 이유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양지원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선물 리스트를 작성하다가 결국 지쳐 잠들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밖에서는 양창수와 손문병이 차 안에서 통창을 통해 양석진이 양지원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뚜렷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양창수는 혀를 찼다.손문병은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얼굴은 점잖았지만 행동은 완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했다.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러니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애가 있는 부부는 쉽게 이혼 못 한다고용.”왜 ‘용’이라는 말투로 말하는지 의문스럽다.양창수는 손문병을 흘겨보았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양창수는 놀라서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어떤 지시 있으십니까?”“들어와.”양창수는 신나는 듯한 표정으로 정색하고 물었다.“위층으로 올라가도 되나요?”‘괜히 볼 것 못 볼 것을 보게 되는 거 아니야.’양석진이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거실에서 기다려.”쳇.결국 위층은 안 되는 거였다.양창수는 가볍게 기침하고 옷을 정리한 뒤에 차에서 내렸다.손문병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고 왜 자신은 부르지 않느냐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양창수는 고개를 들어 콧대를 세웠다.‘훗! 네 차례는 아직 아니다.’양창수는 거실에 들어가 반나절을 기다린 끝에 양석진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양창수는 양석진의 셔츠 목 부분을 힐끗 보았다.깔끔했다.에휴.양석진은 양창수에게 리스트를 건네며 말했다.“창고에서 이 물건들 다 찾아.”양창수는 대충 훑어보며 전부 보석, 옷,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인 것을 알았다.“과자는 마트에서 사 와. 많이 사.”양석진이 말했다.“알겠습니다.”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준비를 했다.그런데 갑자기 양석진이 그를 불렀다.“나도 같이 갈 거야.”양창수는 급히 양석진을 말렸다.“아니.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서 사 오게 할게요.”“안 돼.”“시간 남으면 그동안 과자라도 포장하시죠. 그것도 나름
반우희는 녹음기를 충전해 두고 동료가 놀러 가자고 불러내자 기쁘게 따라나섰다.“얼른 다녀와. 희주랑 애들이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외할머니가 말했다.“최 할머니, 감사합니다!”반우희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이 아이는 참...”외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매일매일 이렇게 즐겁게 사는구나.”그때 소현정이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이 돌아와 함께 식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아래층 반찬 가게에 가서 반찬 좀 사 와라.”“명절인데 반찬을 팔겠어요?”소현정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외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장씨네 반찬 가게는 설날 아침만 빼고는 일 년 내내 문을 닫은 적이 없단다.”“엄마, 너무 오버하지 마세요.”소현정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외할머니는 직접 나갈 수밖에 없었다.외할머니가 나간 후 소현정은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몇 년 전만 해도 명절에 오성호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그 생각에 소현정은 오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다섯 번이나 시도했지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는 차가운 꾸짖음만 돌아왔다.소현정은 충격에 빠졌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렸다....외할머니가 물건을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소현정이 식탁에 엎드려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무슨 일이냐?”외할머니를 보자 소현정은 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딸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딸은 딸이었다.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소현정의 반항적인 태도가 싫었지만, 지금은 딸이 안쓰러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위로하려 했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그만 좀 하세요!”소현정이 울부짖듯 소리쳤다.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조용히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 이 손 놔요!”소현정이 외쳤다. 곧 경계심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낮췄다.“손 놓으세요!”“너, 네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한 거야?”외할머니는 소현정의 손목을 붙잡고 녹음기를 빼앗으려 했다.“뭐가요. 엄마가 잘못 들었어요!”“나 아직 정신 멀쩡해!”외할머니는 얼굴이 붉어지며 딸을 매섭게 바라보며 다급하게 움직였다.“시연이 네 딸이 아닌 거지 그렇지?”“네!”소현정은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당연히 내 딸이죠! 시연이가 내 딸이 아니면 누구 딸이겠어요!”“아니야. 아니야.”외할머니는 연신 되뇌며 소현정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였다.“너 거짓말하고 있어! 방금 내가 똑똑히 들었어!”소현정이 반박하려 했지만, 외할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쩐지...네가 왜 시연이를 보러 오지 않는지...”수많은 의심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그녀는 양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러 번 영상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안시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그때...외할머니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 모든 생각을 부정했다. 차라리 소현정이 정말로 매정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나았지 세상에 진짜로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소현정은 당황했다. 그녀는 엄마가 뭔가를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현정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엄마, 제발 모른 척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내 아들이자 엄마의 외손자가 곧 양씨 가문의 회장이 될 거예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제발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부처님이시여.외할머니는 딸의 광기와 욕망에 찬 얼굴을 보며 그 모습이 낯설고 두려웠다.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그녀는 어떻게 이런 딸을 낳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소현정의 뺨을 내리쳤다!“너 이러고도 사람이야?”소현정은
소현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세 명의 아이...소현정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때 희주가 아무 경계도 없이 다가와 말했다.“이모, 어디 가세요?”소현정은 순간적인 위기 속에서 재빠르게 희주의 손을 잡아끌며 승주에게 다급히 말했다.“승주야, 빨리! 이모 좀 도와줘. 외할머니가 갑자기 아파서 쓰러지셨어!”보통의 아이였다면 당황했을 텐데 조숙한 승주는 침착하게 손목에 찬 애플워치로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차를 요청했다.소현정은 승주가 직원들에게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온몸이 떨렸다.“오빠, 언니에게도 연락해요!”희주는 승주에게 상기시키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던 이웃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승주는 반우희에게도 연락했고 반우희는 근처에 있어서 구급차보다 먼저 도착했다.현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고 소현정은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머릿속도 멍해졌다. 그녀의 정신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아들, 돈, 엄마...’아니야!소현정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일어나 엄마가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무작정 뛰어가 그녀를 덮쳤다.“엄마...”“나를 좀 봐요. 제발 나를 봐요!”주변 사람들은 소현정이 감정적으로 격해지자 다가가 그녀를 붙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구급차가 도착했고 보호자인 소현정은 따라가야 했다.반우희는 젤 끝으로 밀려났다.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구급차에 함께 올라탔다....원주에서.안시연은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러 나가려던 중 반우희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우희 씨?”“언니, 안시연 언니!”다급한 목소리에 안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우희 씨, 무슨 일이에요?”“언니, 빨리 집에 와요! 외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안시연의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었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반우희는 막연한 추측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 외할머니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 그리고 소현정의 격한 감정 이 모든 것을 보고 두 모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하지만 외할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반우희는 잠시 안도한 뒤 곧바로 물었다.“외할머니, 안시연 언니에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이 말을 듣자 외할머니는 반우희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떼려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수술실 앞에 도착했을 때 반우희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외할머니, 조금만 더 버티세요. 안시연 언니가 곧 도착할 거예요!”“가족분들은 이쪽으로 물러나 주세요.”그 익숙한 말이 다시 들려왔다.반우희는 그 말이 주는 무력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홍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말이었다.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반우희는 복도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깊은숨을 내뱉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이 도착했다.연정훈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장과 최고의 의사들이 모여들었다.얼마 전 새로 합류한 최정예 의료팀이 있다고도 했다.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희망의 불씨를 품으며 조용히 기다렸다....원주에서.양지원과 양석진은 차를 타고 막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양지원은 긴장한 듯 가져온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안시연이 이 선물을 좋아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양 대표님, 안시연 씨가 15분 전에 갑자기 기차역으로 향했고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습니다.”양지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죠?”“조사한 결과 안시연 씨 외할머니와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안전을 위해 저희가 계속 안시연 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양지원은 즉시 차를 돌려 경인으로 향했다.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안시연의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