켁켁!양지원은 죽을 거의 뿜을 뻔했다.재빨리 휴지를 꺼내 입을 닦고는 양석진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양창수!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했으면서 다 말해버렸네!’양석진은 양지원의 반응을 보고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아까워서 그래?”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재수 없었을 뿐 전혀 아깝지 않았다.“아깝지 않아요.”양석진은 느리게 말했다.“홧김에 그런 말 하지 마. 나중에 내가 정말 사람을 시켜 처리하면 그때 와서 울면서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나 말고.”“석진 씨가 하면 안 돼요!”양지원이 양석진의 말을 끊었다.‘석진 씨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양석진은 잠시 침묵했다. 방금 전까지는 담담했지만, 다음 순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양지원은 의아했다. 아직도 숟가락을 들고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석진 씨, 제가 이미 다 준비해 놓았어요. 죽이지 못하더라도 화서시에 갇힐 거예요.”양지원은 잠시 멈칫하고 덧붙였다.“석진 씨, 이 일에 손대지 마세요. 괜히 당신만 곤란해질 거예요.”양석진은 커피 테이블 밑에서 원래 없을 담배를 찾으려 하다가 양지원의 말을 듣고는 잠시 양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석진 씨가...오해했나?’양석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양지원 앞에 앉았다.“오성호가 밖에 다른 여자가 있어서 마음을 그렇게 독하게 먹은 거야?”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양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자꾸 오성호 씨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미워할 것까지는 없어요. 우리 결혼할 때부터 오성호 씨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어요.”“그러면 왜 결혼했어?”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조용히 그릇 안의 죽을 저으며 불편함을 느꼈다.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심혜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양석진의 사업을 위해서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가문과의 결혼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할까?’모든 이유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양지원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선물 리스트를 작성하다가 결국 지쳐 잠들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밖에서는 양창수와 손문병이 차 안에서 통창을 통해 양석진이 양지원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뚜렷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양창수는 혀를 찼다.손문병은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얼굴은 점잖았지만 행동은 완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했다.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러니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애가 있는 부부는 쉽게 이혼 못 한다고용.”왜 ‘용’이라는 말투로 말하는지 의문스럽다.양창수는 손문병을 흘겨보았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양창수는 놀라서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어떤 지시 있으십니까?”“들어와.”양창수는 신나는 듯한 표정으로 정색하고 물었다.“위층으로 올라가도 되나요?”‘괜히 볼 것 못 볼 것을 보게 되는 거 아니야.’양석진이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거실에서 기다려.”쳇.결국 위층은 안 되는 거였다.양창수는 가볍게 기침하고 옷을 정리한 뒤에 차에서 내렸다.손문병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고 왜 자신은 부르지 않느냐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양창수는 고개를 들어 콧대를 세웠다.‘훗! 네 차례는 아직 아니다.’양창수는 거실에 들어가 반나절을 기다린 끝에 양석진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양창수는 양석진의 셔츠 목 부분을 힐끗 보았다.깔끔했다.에휴.양석진은 양창수에게 리스트를 건네며 말했다.“창고에서 이 물건들 다 찾아.”양창수는 대충 훑어보며 전부 보석, 옷,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인 것을 알았다.“과자는 마트에서 사 와. 많이 사.”양석진이 말했다.“알겠습니다.”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준비를 했다.그런데 갑자기 양석진이 그를 불렀다.“나도 같이 갈 거야.”양창수는 급히 양석진을 말렸다.“아니.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서 사 오게 할게요.”“안 돼.”“시간 남으면 그동안 과자라도 포장하시죠. 그것도 나름
반우희는 녹음기를 충전해 두고 동료가 놀러 가자고 불러내자 기쁘게 따라나섰다.“얼른 다녀와. 희주랑 애들이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외할머니가 말했다.“최 할머니, 감사합니다!”반우희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이 아이는 참...”외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매일매일 이렇게 즐겁게 사는구나.”그때 소현정이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이 돌아와 함께 식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아래층 반찬 가게에 가서 반찬 좀 사 와라.”“명절인데 반찬을 팔겠어요?”소현정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외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장씨네 반찬 가게는 설날 아침만 빼고는 일 년 내내 문을 닫은 적이 없단다.”“엄마, 너무 오버하지 마세요.”소현정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외할머니는 직접 나갈 수밖에 없었다.외할머니가 나간 후 소현정은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몇 년 전만 해도 명절에 오성호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그 생각에 소현정은 오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다섯 번이나 시도했지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는 차가운 꾸짖음만 돌아왔다.소현정은 충격에 빠졌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렸다....외할머니가 물건을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소현정이 식탁에 엎드려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무슨 일이냐?”외할머니를 보자 소현정은 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딸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딸은 딸이었다.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소현정의 반항적인 태도가 싫었지만, 지금은 딸이 안쓰러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위로하려 했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그만 좀 하세요!”소현정이 울부짖듯 소리쳤다.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조용히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 이 손 놔요!”소현정이 외쳤다. 곧 경계심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낮췄다.“손 놓으세요!”“너, 네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한 거야?”외할머니는 소현정의 손목을 붙잡고 녹음기를 빼앗으려 했다.“뭐가요. 엄마가 잘못 들었어요!”“나 아직 정신 멀쩡해!”외할머니는 얼굴이 붉어지며 딸을 매섭게 바라보며 다급하게 움직였다.“시연이 네 딸이 아닌 거지 그렇지?”“네!”소현정은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당연히 내 딸이죠! 시연이가 내 딸이 아니면 누구 딸이겠어요!”“아니야. 아니야.”외할머니는 연신 되뇌며 소현정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였다.“너 거짓말하고 있어! 방금 내가 똑똑히 들었어!”소현정이 반박하려 했지만, 외할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쩐지...네가 왜 시연이를 보러 오지 않는지...”수많은 의심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그녀는 양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러 번 영상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안시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그때...외할머니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 모든 생각을 부정했다. 차라리 소현정이 정말로 매정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나았지 세상에 진짜로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소현정은 당황했다. 그녀는 엄마가 뭔가를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현정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엄마, 제발 모른 척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내 아들이자 엄마의 외손자가 곧 양씨 가문의 회장이 될 거예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제발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부처님이시여.외할머니는 딸의 광기와 욕망에 찬 얼굴을 보며 그 모습이 낯설고 두려웠다.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그녀는 어떻게 이런 딸을 낳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소현정의 뺨을 내리쳤다!“너 이러고도 사람이야?”소현정은
소현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세 명의 아이...소현정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때 희주가 아무 경계도 없이 다가와 말했다.“이모, 어디 가세요?”소현정은 순간적인 위기 속에서 재빠르게 희주의 손을 잡아끌며 승주에게 다급히 말했다.“승주야, 빨리! 이모 좀 도와줘. 외할머니가 갑자기 아파서 쓰러지셨어!”보통의 아이였다면 당황했을 텐데 조숙한 승주는 침착하게 손목에 찬 애플워치로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차를 요청했다.소현정은 승주가 직원들에게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온몸이 떨렸다.“오빠, 언니에게도 연락해요!”희주는 승주에게 상기시키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던 이웃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승주는 반우희에게도 연락했고 반우희는 근처에 있어서 구급차보다 먼저 도착했다.현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고 소현정은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머릿속도 멍해졌다. 그녀의 정신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아들, 돈, 엄마...’아니야!소현정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일어나 엄마가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무작정 뛰어가 그녀를 덮쳤다.“엄마...”“나를 좀 봐요. 제발 나를 봐요!”주변 사람들은 소현정이 감정적으로 격해지자 다가가 그녀를 붙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구급차가 도착했고 보호자인 소현정은 따라가야 했다.반우희는 젤 끝으로 밀려났다.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구급차에 함께 올라탔다....원주에서.안시연은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러 나가려던 중 반우희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우희 씨?”“언니, 안시연 언니!”다급한 목소리에 안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우희 씨, 무슨 일이에요?”“언니, 빨리 집에 와요! 외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안시연의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었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반우희는 막연한 추측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 외할머니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 그리고 소현정의 격한 감정 이 모든 것을 보고 두 모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하지만 외할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반우희는 잠시 안도한 뒤 곧바로 물었다.“외할머니, 안시연 언니에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이 말을 듣자 외할머니는 반우희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떼려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수술실 앞에 도착했을 때 반우희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외할머니, 조금만 더 버티세요. 안시연 언니가 곧 도착할 거예요!”“가족분들은 이쪽으로 물러나 주세요.”그 익숙한 말이 다시 들려왔다.반우희는 그 말이 주는 무력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홍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말이었다.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반우희는 복도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깊은숨을 내뱉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이 도착했다.연정훈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장과 최고의 의사들이 모여들었다.얼마 전 새로 합류한 최정예 의료팀이 있다고도 했다.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희망의 불씨를 품으며 조용히 기다렸다....원주에서.양지원과 양석진은 차를 타고 막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양지원은 긴장한 듯 가져온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안시연이 이 선물을 좋아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양 대표님, 안시연 씨가 15분 전에 갑자기 기차역으로 향했고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습니다.”양지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죠?”“조사한 결과 안시연 씨 외할머니와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안전을 위해 저희가 계속 안시연 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양지원은 즉시 차를 돌려 경인으로 향했다.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안시연의
안시연은 수술실 밖에서 마치 외할머니를 본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외할머니는 그날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환하게 웃으며 안시연에게 손을 흔들며 잘 있으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안시연의 눈앞은 눈물로 흐릿해졌고 정신은 점점 몽롱해지며 외할머니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그 순간, 병원장의 낮고 미안한 목소리가 귀가에 스며들었다.“연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안시연은 이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소리치며 그들에게 계속해서 응급처치해달라고 외쳤다.“최선을 다했다니, 최선을 다했다니!”병원장은 연신 사과했지만, 안시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껴안으며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셔츠를 필사적으로 꽉 잡았다.“연정훈 씨! 전문가를 불러와요. 외할머니를 살려주세요!”연정훈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안시연은 결국 무너져 내려 거의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그녀는 연정훈의 품속에서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외할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수술실 밖에는 죽음의 냉기가 감돌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꼭 껴안고 그녀가 마음속에 가득했던 감정을 쏟아내도록 했다.결국 안시연은 기력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돌아가셨다고요?!”양지원은 소식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태가 위중하셨고 결국 소생하지 못하셨습니다.”“그러면 안시연 씨는요?”양지원은 재빨리 물었다.양창수가 대답했다.“연정훈이 시연 씨를 데리고 갔어요.”양지원은 소파에 앉으며 양석진을 바라보았다.양석진이 물었다.“병이 악화한 원인은 밝혀졌어?”“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양창수가 대답했다.“병이 발작했을 때는 집에 있었고 아이가 신고해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합니다.”양석진은 침착하게 지시했다.“경위를 명확히 파악해. 그리고 소현정을 감시해. 오늘 밤
“외할머니?”텅 빈 곳 속에서 안시연은 연신 외할머니를 불렀다.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안시연은 마치 영혼이 떠나간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외할머니? 외할머니?!”발밑의 땅이 사라진 듯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안시연의 두려운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그때 침실 문이 급히 열리고 연정훈이 문가에 나타났다.여기는 그들의 안방이었다.안시연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떠오르는 빛을 발견한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와 연정훈에게로 달려갔다.“연정훈 씨, 우리 외할머니 어디 계세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몸을 부축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시연, 외할머니는 이미...”“아니에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시연은 분명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그녀는 재빨리 연정훈을 지나쳐 무언가를 확인하려 했지만, 계단 끝에서 거실에 앉아 있는 반우희를 보게 되었다.“우희 씨...”안시연은 힘겹게 표정을 추스르며 조용히 물었다.“우리 외할머니 어디 계세요?”반우희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반우희의 표정을 본 안시연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손발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은 금세 창백해지더니 뒤로 쓰러졌다.다행히 연정훈이 안시연 뒤에 있었다.“의사 불러 주세요!”짧은 순간 동안 안시연은 다시 기절했다.큰 슬픔 앞에서 사람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연약해진다.안시연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깊은 절망에 잠식되어 헤어 나올 힘조차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건 단 한 사람 계속해서 안시연의 손을 붙들고 있던 사람뿐이었다. 마치 안시연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듯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로 연정훈이었을 것이다.그가 맞다.눈물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안시연은 연정훈이 얼마나 오래 잠을 자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연정훈의 눈에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안시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