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차라리 내가 정리한 내용을 보여줄게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의 원본 이메일을 보고 그 사람의 상황을 분석해 보고 싶었다.“원본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필요 없어요. 시간 낭비예요. 어차피 조금 후 점심 먹어야 하잖아요.”“나와 점심 한 끼 먹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안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흘끗 쳐다보았다. 안시연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연정훈이 이렇게 질질 끌지 않았다면 둘은 이미 헤어졌을 것이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정리한 내용이나 보여줘.”안시연은 짧게 대답하고 휴대폰을 연정훈에게 건넸다.그녀는 아주 자세하게 정리해 두었고 안시연의 질문과 상대방 이메일의 캡처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질문은 간단했고 그 캡처된 내용은 연정훈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스크린 너머에서 연정훈은 묘한 익숙함을 느끼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질문하는 방식이 자신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상대방이 남성일 것이라고 연정훈은 거의 확신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질문이 너무 어려워 연정훈을 난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정훈 씨, 메모장에 적어둘게요. 돌아가서 정리해서 확인해 보세요.”연정훈이 말했다.“알았어.”그제야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평화로워졌고 마치 오랜 시간 전에 서로 잘 알지 못했던 예의 바른 관계로 돌아간 듯했다.연정훈은 운전석에 앉아서 최신 유행 휴대폰 케이스를 씌운 안시연의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며 안시연은 조수석에서 초콜릿 모찌 한 상자를 열었다.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다시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블루투스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안시연은 화면을 힐끗 보았고 ‘엄마’라는 이름이 나타났다.연정훈도 그 화면을 보았다.연정훈이 소현주 일에 대해 따져 묻고 난 뒤, 그는 아직 김세연을 만나지 않았으며 이번이 김세연이 연정훈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안 받아요?”안시연이 그에게 물었다.
양지원은 조금 전에 깨어났다.양지원이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양민아가 양지원을 위해 뜨거운 죽을 식히고 있었다.어린 딸이 엄마를 알뜰살뜰 살피는 모습에 다들 효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가식적인 가면 아래 양민아는 사실...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양혁수가 빼꼼 들어오더니 양지원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역시 엄마는 달라요. 병문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다 섰다고요.”양지원은 양혁수를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자리에는 양지원도 함께였기에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누구 왔어?”“안시연 씨요.”그 말에 양민아가 실수로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양지원은 감정에 북받쳤지만 양민아의 소란에 다시 경계 태세를 했다.그리고 침착하게 물었다.“안시연 씨는 어떻게 왔어?”“누가 바래다줬어요.”“연정훈?”이에 양혁수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오라고 해.”“네.”병실 문이 더 크게 열리고 안시연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연정훈도 따라 들어왔다.안시연은 편안한 옷차림에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데 목에는 귀여운 머플러가 둘려 있었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두 볼에는 빨간 홍조가 나타났으며 이에 또래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안시연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양지원은 천천히 안시연의 얼굴을 살폈다.눈, 코, 입, 얼굴형까지.그리고 안시연이 쿠키를 먹고 식물 중독에 걸렸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양지원은 의사에게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 물었고, 의사는 체질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다. 모든 사람이 양석진과 안시연처럼 격한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안시연...어쩌면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생각에 양지원은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으며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양 대표님.”안시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 다정하게 양지원을 불렀다.양지원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양지원에게 볼일이 있어 보이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양 대표님 바빠 보이시는데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양지원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안시연을 올려다보았다.속은 문드러지고 해졌지만 행여나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벨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안시연과 연정훈이 돌아갈 준비를 했고 양지원은 덤덤하게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연정훈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께서 걱정이 많았을 텐데 괜찮다고 말 좀 전해주렴.”“네. 몸조리 잘하시고 설 연휴에 다시 보러 올게요.”“그래.”양지원은 양민아를 시켜 손님 배웅을 하라고 했다.양민아는 아직 친자 확인 결과를 받지 못했다. 벌써 이틀 동안 안절부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안시연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양지원의 얼굴만 살피고 있었다.하지만 양지원의 얼굴을 아무리 살펴도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양민아는 미소를 지은 채로 안시연과 연정훈을 배웅했고 조금 있다가 센터에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한 무리 사람들이 모두 병실을 나서고 양지원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건지 양지원이 전화를 걸려는 순간 양석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양지원이 심호흡을 하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지원아.”양석진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다.“병원에 입원한 거야?”양석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지원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양석진은 나이가 지긋하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양지원은 눈물을 들킬 까 빠르게 벽을 향해 돌아누웠으며 한참 호흡을 고르게 하고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조금 피곤했나 봐요.”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무슨 일 있었어?”“아무 일도 없어요...”“그런데 왜 울어?”그 순간 양지원은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렸다.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양지원은 몸을 일으켜 빠르게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양지원은 쉽
복도에서 안시연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양혁수의 기분이 조금 울적해 보이자 안시연이 먼저 양혁수에게 말을 걸었다.“양 대표님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양혁수는 양지원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안시연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이제 어딜 가는 거예요?”“집으로 가야죠.”“오늘은 시간이 없고 이틀 뒤에 다시 약속 잡아요.”양혁수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리도록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안시연과 연정훈이 앞줄에 섰고 양혁수는 두 사람 뒤에 섰다. 그래서 양혁수와 대화하려면 안시연은 계속 고개를 돌려야 했는데 그래도 귀찮은 내색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그렇다 보니 안시연은 내내 연정훈을 등지고 고개를 돌린 자세였다.몇 초 사이 연정훈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렸다.양민아는 세 사람의 오른쪽 쪽에 섰고 불편해하는 연정훈을 눈치챘다. 그런데 여전히 양혁수와 ‘알콩달콩’ 대화하고 있는 모습에 양민아도 화가 났다.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양민아는 왠지 벌써 걱정이 태산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커졌다.그리고 양민아는 또 다른 의문이 하나 있었다.만약 양혁수가 정말 소현정의 자식이라면 안시연과 양혁수는 배다른 형제였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는 걸까?설마...양지원이 다른 사람과 아이를...이 생각만 하면 양민아는 소름이 돋았다.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한 무리 사람이 그 안에서 내렸다.안시연은 양혁수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 했고 양민아는 연정훈과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모든 게 무산이 되었다.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떠나버린 것이었다.남겨진 양민아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졌고 양혁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안세연은 두어 번 뒤를 돌아다보다가 연정훈의 빠른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긴 다리로 이렇게 빨리 걸다니, 짧은 다리 안시연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
안시연은 연정훈이 정말 연락을 한 건지 잠시 고민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지금 전화 걸어봐도 좋아.”“...”안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다시 차에 올랐다.‘바래다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 뭐. 어차피 연정훈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 연정훈 시간이 좀 비싼 것도 아니고.’안시연이 또다시 번복이라도 할 까봐 연정훈은 노심초사해했다.“안전벨트.”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이 묵묵히 벨트를 착용했다.딸깍.안전벨트가 잠금장치인 듯 안심하며 연정훈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동네 부근에 도착하고 연정훈은 뒷좌석의 선물 세트와 안시연의 짐을 위층으로 올렸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을 발견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뒤를 따른 연정훈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연정훈더러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며 제안했다.“이 사람 바빠요.”안시연이 대신 거절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우선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안시연의 말대로 했다.“조금 있다가 약속이 하나 있어서 오늘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틀 뒤 설 연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래, 그래.”외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주방에서 소현정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귀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운도 참 좋지. 정말 연정훈을 꼬시기라도 한 거야?’그러나 이 생각에 소현정은 또 짜증이 났고 괜스레 긴장되었으며 오성호에게 빨리 이 사실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이제 모든 걸 서둘러야 했다. 사실이 들통이 나기 전에 오성호가 하루빨리 양지원의 사업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여우 같은 모녀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건지 운도 참 좋았다.다른 한편, 안시연은 연정훈을 배웅하러 집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나선 안시연은 바로 표정을 굳혔다.바람보다도 더 빠른 태도 전환에 연정훈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안시연이 슬쩍 손을 뒤로 빼버렸다.그렇게 층계 앞까지 걸어간 안시연이 말했다.“이만 가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안시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연정훈을 등진 채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며칠 만나지 못한 사이 연정훈은 입만 더 번드르르해진 것 같았다. 강남에서 질문했을 때만 해도 연정훈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안시연이 조금 흔들렸다는 걸 눈치챈 연정훈이 뒤로 안시연을 꼭 껴안았다.안시연은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이 손 놔요.”“지금 나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이틀 뒤 연휴에 널 데리러 올게. 우리 같이 밥 먹자.”연정훈은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으며 삐진 여자 친구를 달래는 말투였다.안시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날 외할머니랑 있을 거예요.”“외할머니한테 2시간만 허락 맡을게.”“허락 못 맡아요.”안시연은 왠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조금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품 안에서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연정훈이 두 팔로 안시연을 꽉 껴안고 말없이 체온을 나누었다.안시연은 여전히 뾰로통해 했지만 방금처럼 가시를 세우지는 않았다.얼마 뒤 연정훈은 안시연의 턱을 잡고 빠르게 입술에 뽀뽀했다.!그리고 연정훈은 바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새해 선물은 이미 강남에 준비해 뒀어.”“...”“그러니까 나랑 밥 좀 먹자. 선물 받아 가고 올해 행복하게 지내는 거야. 우리 이렇게 서먹하게 지내지 말자, 응?”연정훈이 안시연을 얼리고 달래며 자신의 울타리에 서서히 가두었다.안시연은 더 이상 연정훈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으나 사람 마음은 칼같이 잘리는 게 아니었기에 자꾸 흔들렸다.성공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금씩 다가갔다.입술이 맞닿고 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다.그러나 그때!안시연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연정훈을 밀어내며 품 안에서 뛰쳐나왔다.“...”거의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연정훈이 입맛을 다셨다.“시연아.”“빨리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시연이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했다.
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부승희와 반우희가 보였다.반우희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해피 뉴 이어.”“해피 뉴 이어.”막 스타일링을 마친 부승희는 머리가 찰랑거렸다. 부승희는 연 푸른 색 털 외투와 하얀 바지를 맞춰 입었다.그리고 외출용 부츠는 비율을 더 길게 보이게 했다.반우희는 부승희의 옆에서 왠지 더 자그마하게 보였다.“이 집 너무 찾기 힘들었어요. 정훈 오빠는 왜 이런 집을 찾아준 거예요?”부승희가 입을 삐죽였다.그러자 반우희가 되물었다.“여기가 찾기 어려웠어요?”“네? 아... 아니에요.”“...”안시연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이 집은 제 어머니가 외할머니랑 같이 살려고 찾은 집이에요.”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데리러 왔는데 마침 반우희와 마주쳤다. 그리고 반우희까지 함께 데리고 가려고 했다. 왠지 반우희라면 자신의 얼음 같은 오빠를 녹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가요. 제가 작은 파티를 하나 주최했어요.”그리고 부승희는 방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외할머니에게 말했다.“외할머니, 저희 안시연 씨랑 놀러 갈게요.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외할머니는 부승희를 처음 만났지만 스스럼없는 부승희에 조금 당황해했다.“어? 그래, 그래.”외할머니는 얼떨결에 대답했고 안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아직 시간도 이르니 외출해 바깥 공기를 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안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두 사람과 밖으로 나갔다. 반우희는 어린 동생들도 함께 데리고 떠났다.그렇다 보니 차 안은 북적북적 소란스러웠다.부승희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 간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부승희가 말한 파티는 인조 호수를 낀 파티장에 위치했으며 온갖 오락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바닥에는 인조 눈도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 위에도 예쁘게 장식을 하니 바깥세상과는 동떨어진 동화 세계 같았다.그리고 누군가 준비한 과일 와인의 향이 아주 좋았다.차에서 내린
양씨 저택.새해 전날 어르신이 집을 찾았고 저택 안의 사람들은 애써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그러나 위층 양지원의 방은 전등 하나 켜지 않고 캄캄했다.어젯밤 양지원은 친자 확인 결과를 받았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정말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그리고 안시연이 친딸이 맞았으며 안시연과 양혁수는 혈연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만약 양혁수가 오성호의 자식이라면 안시연은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딸일 것이다.행여나 검사 결과에 문제가 존재할까 양지원은 사람을 시켜 다시 검사를 진행해 보라고 했다.하지만 결과는 일치했다.사실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양지원은 오늘 하루 양혁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똑똑똑.노크 소리와 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삼촌 왔어요.”양지원은 심장이 철렁했다.양지원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조금 더 열렸다.양혁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여사님, 아들 들어가도 될까요?”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고 이틀 동안 양지원의 이상을 눈치챘다.양지원도 이를 알아차렸고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서 침대 무드 등을 더 어둡게 조절하며 말했다.“들어오렴. 그리고 엄마 외투 좀 찾아줘.”“네, 좋아요.”양혁수는 미소를 띤 채로 방 안에 들어갔다.정원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양지원은 심장이 쿵쾅거렸으며 양혁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양혁수는 외투를 양지원에게 건넸다.“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그래.”어둠 속에서 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천천히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양석진의 등장에 거실은 더 북적거렸다.양지원은 층계에서 양석진과 시선을 마주했다.“몸은 좀 어때?”양석진의 질문에 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많이 좋아졌어요.”저녁 식사 전 양석진은 간단하게 세수하려 했다.그래서 양지원을 지나쳐 방으로 걸어가는 데 무의식적으로 움찔거리는 양지원이 보였다. 양지원은 짙은 다크써클이 내려오고 많이 수척해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정훈 씨, 정말로 염치없는 거 알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양시연에게 입이 막힌 채로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양시연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손으로 연정훈의 귀를 잡아당겼다.“나이 많은 엉큼한 아저씨.”연정훈은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껴안으며 말했다.“자꾸 나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마.”“당신 나이 많고 늙었잖아요. 완전 늙었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 번 뒤집어 양시연을 아래로 눌렀다.“한 번만 더 말해봐.”양시연은 즉시 기가 죽어 연정훈의 어깨를 떠받치며 작게 외쳤다.“허리 아프다니까요!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그리고는 발로 그를 한 번 툭 찼다.“이 정도로는 당신이 원하는 아들이나 딸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돌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기운을 조금 회복한 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아 걸치고 명령하듯 말했다.“나 샤워 좀 시켜줘요.”연정훈은 기꺼이 수고할 마음이 가득했고 양시연이 허리가 아프다고 했기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웠다.욕실로 들어가자 양시연은 물속에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사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늦어질수록 몸의 회복이 더디니 차라리 빨리 낳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하나만 낳는다면 왕자님도 좋고 공주님도 좋겠지만 둘을 낳으려면 양시연이 고생해야 한다.‘정말 고민이네. 진짜 인간의 진화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바로바로 낳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연정훈은 먼저 욕조 옆에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그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정훈 씨는 아들이 좋나요? 아니면 딸이 좋나요?”“둘 다 좋지.”양시연은 몸을 일으키
양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반대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부드럽지만 강렬하게 입술을 맞추며 설득했고 양시연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거짓말하지 마세요. 호텔에 없을 리가 없잖아요...”“이 방은 내가 출장 때마다 묵는 곳이야. 항상 나를 위해 준비된 방이지. 여길 여자를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런 건 있을 리가 없잖아.”양시연은 그의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머뭇거리는 사이 연정훈은 그녀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 단숨에 그녀를 제압했다.“아!”양시연의 몸은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가 곧 힘없이 풀어지며 축 늘어졌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어깨를 몇 번 주먹으로 두드렸지만 결국 연정훈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이렇게 살짝 취한 모습을 몹시 좋아했다. 두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미세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도도하고 맑았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촉촉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입술로 바뀌는 모습이 연정훈의 눈을 사로잡았다.그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마치 만취한 사람처럼 끝도 없이 양시연을 갈망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방 안의 공기는 뜨거움으로 가득 찼으며 양시연은 다리가 후들거렸고 연정훈의 팔을 붙잡으며 숨이 찬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연정훈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췄고 숨이 막힐 듯한 순간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양시연에게 쏟아부었다.양시연은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감각에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연정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양시연은 울먹이며 간신히 말했다.“그만...그만해요. 약...약 먹어야 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얼굴을 가까이 댄 채 땀이 번진 둘 사이를 달래듯 속삭였다.“약 안 먹어도 상관없어. 누가 너 보고 약 먹으라고 했어?”“임신하면 어떡하려고요...”양시연의 말을 들은 연정훈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임신하
양시연은 의자에 기대어 연정훈의 입맞춤에 눌려 있다가 잠시 후 온몸에서 힘이 빠져 연정훈의 어깨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낮고 떨리는 신음은 연정훈을 자극해 그녀를 더욱 애틋하고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양시연의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벌어졌고 연정훈의 긴 다리가 가까이 밀려 들어왔다.치마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손바닥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지자 양시연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며 연정훈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졌다.고조된 감정 속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으로 깊게 묻었다. 그러나 연정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려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문득 천장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정훈 씨...멈춰요.”갑작스러운 저항에 연정훈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러는데?”“이 차 안에서는 안 돼요. 이건 아빠 쪽에서 보낸 차라서 혹시라도 기록이 남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곤란해요.”양시연의 단호한 목소리에 연정훈은 이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이 차를 타는 데 문제가 있었다면 보내지 않았겠지.”“그래도 싫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움직임을 막으며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고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여러 번 입 맞추며 설득했다.“호텔로 가요. 아니면 아빠 댁으로 갑시다. 차에서는 하지 말아요.”만약 이 일로 양석진의 체면에 금이라도 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의도를 이해했고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양시연의 허리를 감싸안아 뒷좌석에서 그녀를 살며시 세우며 말했다.“그럼 호텔로 가자.”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러운 듯 연정훈의 목에 가볍게 입 맞추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정훈 씨 말을 따를게요.”양석진의 집으로 가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 작은 집의 방음이 얼마나 허술할지 알 수 없었고
문밖에 서 있던 양시연은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안쪽 상황을 염탐했다.1시간 전부터 연정훈은 양시연이 다리에서 주워 온 딸이라고 놀려대고 있었다.“아버님은 널 만날 여유가 없어.”양시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체면을 구길 수 없어 아니라고 반박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엄마랑 얘기가 끝나면 날 만날 거예요.”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양시연을 찾지 않았다.부모님의 사랑에 양시연은 동떨어진 존재인 모양이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이미 쉬고 계신 게 분명해요.”양시연은 여전히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고 연정훈은 미소만 지을 뿐 굳이 들추지 않았다.연정훈이 노트북을 닫으며 물었다.“우리 산책이나 할래?”“지금요?”“그래.”양시연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너무 늦었잖아요. 그리고 여기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어요?”“시도나 해보자. 안되면 아버님이 구하러 와주시겠지. 그 참에 얼굴도 뵈고 나쁘지 않잖아.”“...”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밤이었고 양시연은 드라이브나 할까 생각했다.그래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양창수는 예상이라도 한 건지 차키를 탁자 위로 올려 두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연정훈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늦은 시간이다 보니 인파가 많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느 레스토랑을 예약해 음식을 주문했다.넓은 공간에 두 사람만 남겨지고 옆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셰프가 있었다. 사방은 어둡고 오직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빛이 비치고 있었다.요리는 아직 세팅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와인 한잔에 얘기를 나눴다.셰프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연정훈은 빠르게 양시연을 품에 안고 키스를 했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와인병으로 시야를 조금이나마 가렸다.입술이 맞닿고 호흡이 가빠질 때쯤 연정훈은 양시연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무기력하게 품에 안겼다.연정훈은 몸을 돌려 또 양시연의 쇄골에 키스했다.“우리 내일 경인으로 돌아갈까?”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