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는 몇 차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예전에 양지원이 샤워 중에 기절한 적이 있었던 기억에 불안해하며 문을 부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양지원은 창백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양혁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양지원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잠시 멈칫한 양혁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양지원에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에요? 삐쳤어요?”양지원은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차라리 양혁수가 못된 아이였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양지원이 키워낸 그녀를 꼭 닮은 아이로 오성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어떻게 혁수가 내 아이가 아닐 수 있을까?’양지원은 떨리는 손을 억누르지 못한 채 양혁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겨우 억눌렀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이명 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결국, 양지원은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양혁수는 깜짝 놀라 재빨리 양지원을 안고 크게 외쳤다.“집사!”저택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새해 다음 날 아침 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연정훈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며칠 만에 연정훈을 본 안시연은 그를 피하려 돌아섰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이 편의점으로 향하자 연정훈이 뒤따라오며 태연하게 말했다.“며칠 후면 설날인데 진짜 나랑 같이 안 갈 거야?”안시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설인데 집에 안 가나요?”“네가 강남으로 돌아가면 나도 집에 안 가.”“참 영광이네요.”안시연의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최근 연정훈이 안시연에게 값비싼 선물을 보낼 때마다 안시연은 이렇게 반응하곤 했다.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연정훈도 이제는 익숙해져 오히려 그런 반응이 귀엽게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최근에 소현주 만나지 않았어. 이미 선물도 보내서 고르기만 하면 끝난 거야.”안시연은
“아니에요. 차라리 내가 정리한 내용을 보여줄게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의 원본 이메일을 보고 그 사람의 상황을 분석해 보고 싶었다.“원본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필요 없어요. 시간 낭비예요. 어차피 조금 후 점심 먹어야 하잖아요.”“나와 점심 한 끼 먹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안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흘끗 쳐다보았다. 안시연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연정훈이 이렇게 질질 끌지 않았다면 둘은 이미 헤어졌을 것이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정리한 내용이나 보여줘.”안시연은 짧게 대답하고 휴대폰을 연정훈에게 건넸다.그녀는 아주 자세하게 정리해 두었고 안시연의 질문과 상대방 이메일의 캡처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질문은 간단했고 그 캡처된 내용은 연정훈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스크린 너머에서 연정훈은 묘한 익숙함을 느끼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질문하는 방식이 자신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상대방이 남성일 것이라고 연정훈은 거의 확신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질문이 너무 어려워 연정훈을 난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정훈 씨, 메모장에 적어둘게요. 돌아가서 정리해서 확인해 보세요.”연정훈이 말했다.“알았어.”그제야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평화로워졌고 마치 오랜 시간 전에 서로 잘 알지 못했던 예의 바른 관계로 돌아간 듯했다.연정훈은 운전석에 앉아서 최신 유행 휴대폰 케이스를 씌운 안시연의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며 안시연은 조수석에서 초콜릿 모찌 한 상자를 열었다.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다시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블루투스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안시연은 화면을 힐끗 보았고 ‘엄마’라는 이름이 나타났다.연정훈도 그 화면을 보았다.연정훈이 소현주 일에 대해 따져 묻고 난 뒤, 그는 아직 김세연을 만나지 않았으며 이번이 김세연이 연정훈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안 받아요?”안시연이 그에게 물었다.
양지원은 조금 전에 깨어났다.양지원이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양민아가 양지원을 위해 뜨거운 죽을 식히고 있었다.어린 딸이 엄마를 알뜰살뜰 살피는 모습에 다들 효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가식적인 가면 아래 양민아는 사실...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양혁수가 빼꼼 들어오더니 양지원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역시 엄마는 달라요. 병문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다 섰다고요.”양지원은 양혁수를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자리에는 양지원도 함께였기에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누구 왔어?”“안시연 씨요.”그 말에 양민아가 실수로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양지원은 감정에 북받쳤지만 양민아의 소란에 다시 경계 태세를 했다.그리고 침착하게 물었다.“안시연 씨는 어떻게 왔어?”“누가 바래다줬어요.”“연정훈?”이에 양혁수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오라고 해.”“네.”병실 문이 더 크게 열리고 안시연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연정훈도 따라 들어왔다.안시연은 편안한 옷차림에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데 목에는 귀여운 머플러가 둘려 있었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두 볼에는 빨간 홍조가 나타났으며 이에 또래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안시연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양지원은 천천히 안시연의 얼굴을 살폈다.눈, 코, 입, 얼굴형까지.그리고 안시연이 쿠키를 먹고 식물 중독에 걸렸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양지원은 의사에게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 물었고, 의사는 체질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다. 모든 사람이 양석진과 안시연처럼 격한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안시연...어쩌면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생각에 양지원은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으며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양 대표님.”안시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 다정하게 양지원을 불렀다.양지원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양지원에게 볼일이 있어 보이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양 대표님 바빠 보이시는데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양지원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안시연을 올려다보았다.속은 문드러지고 해졌지만 행여나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벨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안시연과 연정훈이 돌아갈 준비를 했고 양지원은 덤덤하게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연정훈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께서 걱정이 많았을 텐데 괜찮다고 말 좀 전해주렴.”“네. 몸조리 잘하시고 설 연휴에 다시 보러 올게요.”“그래.”양지원은 양민아를 시켜 손님 배웅을 하라고 했다.양민아는 아직 친자 확인 결과를 받지 못했다. 벌써 이틀 동안 안절부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안시연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양지원의 얼굴만 살피고 있었다.하지만 양지원의 얼굴을 아무리 살펴도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양민아는 미소를 지은 채로 안시연과 연정훈을 배웅했고 조금 있다가 센터에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한 무리 사람들이 모두 병실을 나서고 양지원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건지 양지원이 전화를 걸려는 순간 양석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양지원이 심호흡을 하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지원아.”양석진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다.“병원에 입원한 거야?”양석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지원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양석진은 나이가 지긋하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양지원은 눈물을 들킬 까 빠르게 벽을 향해 돌아누웠으며 한참 호흡을 고르게 하고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조금 피곤했나 봐요.”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무슨 일 있었어?”“아무 일도 없어요...”“그런데 왜 울어?”그 순간 양지원은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렸다.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양지원은 몸을 일으켜 빠르게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양지원은 쉽
복도에서 안시연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양혁수의 기분이 조금 울적해 보이자 안시연이 먼저 양혁수에게 말을 걸었다.“양 대표님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양혁수는 양지원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안시연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이제 어딜 가는 거예요?”“집으로 가야죠.”“오늘은 시간이 없고 이틀 뒤에 다시 약속 잡아요.”양혁수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리도록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안시연과 연정훈이 앞줄에 섰고 양혁수는 두 사람 뒤에 섰다. 그래서 양혁수와 대화하려면 안시연은 계속 고개를 돌려야 했는데 그래도 귀찮은 내색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그렇다 보니 안시연은 내내 연정훈을 등지고 고개를 돌린 자세였다.몇 초 사이 연정훈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렸다.양민아는 세 사람의 오른쪽 쪽에 섰고 불편해하는 연정훈을 눈치챘다. 그런데 여전히 양혁수와 ‘알콩달콩’ 대화하고 있는 모습에 양민아도 화가 났다.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양민아는 왠지 벌써 걱정이 태산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커졌다.그리고 양민아는 또 다른 의문이 하나 있었다.만약 양혁수가 정말 소현정의 자식이라면 안시연과 양혁수는 배다른 형제였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는 걸까?설마...양지원이 다른 사람과 아이를...이 생각만 하면 양민아는 소름이 돋았다.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한 무리 사람이 그 안에서 내렸다.안시연은 양혁수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 했고 양민아는 연정훈과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모든 게 무산이 되었다.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떠나버린 것이었다.남겨진 양민아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졌고 양혁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안세연은 두어 번 뒤를 돌아다보다가 연정훈의 빠른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긴 다리로 이렇게 빨리 걸다니, 짧은 다리 안시연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
안시연은 연정훈이 정말 연락을 한 건지 잠시 고민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지금 전화 걸어봐도 좋아.”“...”안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다시 차에 올랐다.‘바래다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 뭐. 어차피 연정훈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 연정훈 시간이 좀 비싼 것도 아니고.’안시연이 또다시 번복이라도 할 까봐 연정훈은 노심초사해했다.“안전벨트.”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이 묵묵히 벨트를 착용했다.딸깍.안전벨트가 잠금장치인 듯 안심하며 연정훈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동네 부근에 도착하고 연정훈은 뒷좌석의 선물 세트와 안시연의 짐을 위층으로 올렸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을 발견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뒤를 따른 연정훈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연정훈더러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며 제안했다.“이 사람 바빠요.”안시연이 대신 거절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우선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안시연의 말대로 했다.“조금 있다가 약속이 하나 있어서 오늘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틀 뒤 설 연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래, 그래.”외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주방에서 소현정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귀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운도 참 좋지. 정말 연정훈을 꼬시기라도 한 거야?’그러나 이 생각에 소현정은 또 짜증이 났고 괜스레 긴장되었으며 오성호에게 빨리 이 사실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이제 모든 걸 서둘러야 했다. 사실이 들통이 나기 전에 오성호가 하루빨리 양지원의 사업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여우 같은 모녀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건지 운도 참 좋았다.다른 한편, 안시연은 연정훈을 배웅하러 집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나선 안시연은 바로 표정을 굳혔다.바람보다도 더 빠른 태도 전환에 연정훈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안시연이 슬쩍 손을 뒤로 빼버렸다.그렇게 층계 앞까지 걸어간 안시연이 말했다.“이만 가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안시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연정훈을 등진 채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며칠 만나지 못한 사이 연정훈은 입만 더 번드르르해진 것 같았다. 강남에서 질문했을 때만 해도 연정훈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안시연이 조금 흔들렸다는 걸 눈치챈 연정훈이 뒤로 안시연을 꼭 껴안았다.안시연은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이 손 놔요.”“지금 나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이틀 뒤 연휴에 널 데리러 올게. 우리 같이 밥 먹자.”연정훈은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으며 삐진 여자 친구를 달래는 말투였다.안시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날 외할머니랑 있을 거예요.”“외할머니한테 2시간만 허락 맡을게.”“허락 못 맡아요.”안시연은 왠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조금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품 안에서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연정훈이 두 팔로 안시연을 꽉 껴안고 말없이 체온을 나누었다.안시연은 여전히 뾰로통해 했지만 방금처럼 가시를 세우지는 않았다.얼마 뒤 연정훈은 안시연의 턱을 잡고 빠르게 입술에 뽀뽀했다.!그리고 연정훈은 바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새해 선물은 이미 강남에 준비해 뒀어.”“...”“그러니까 나랑 밥 좀 먹자. 선물 받아 가고 올해 행복하게 지내는 거야. 우리 이렇게 서먹하게 지내지 말자, 응?”연정훈이 안시연을 얼리고 달래며 자신의 울타리에 서서히 가두었다.안시연은 더 이상 연정훈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으나 사람 마음은 칼같이 잘리는 게 아니었기에 자꾸 흔들렸다.성공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금씩 다가갔다.입술이 맞닿고 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다.그러나 그때!안시연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연정훈을 밀어내며 품 안에서 뛰쳐나왔다.“...”거의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연정훈이 입맛을 다셨다.“시연아.”“빨리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시연이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했다.
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부승희와 반우희가 보였다.반우희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해피 뉴 이어.”“해피 뉴 이어.”막 스타일링을 마친 부승희는 머리가 찰랑거렸다. 부승희는 연 푸른 색 털 외투와 하얀 바지를 맞춰 입었다.그리고 외출용 부츠는 비율을 더 길게 보이게 했다.반우희는 부승희의 옆에서 왠지 더 자그마하게 보였다.“이 집 너무 찾기 힘들었어요. 정훈 오빠는 왜 이런 집을 찾아준 거예요?”부승희가 입을 삐죽였다.그러자 반우희가 되물었다.“여기가 찾기 어려웠어요?”“네? 아... 아니에요.”“...”안시연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이 집은 제 어머니가 외할머니랑 같이 살려고 찾은 집이에요.”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데리러 왔는데 마침 반우희와 마주쳤다. 그리고 반우희까지 함께 데리고 가려고 했다. 왠지 반우희라면 자신의 얼음 같은 오빠를 녹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가요. 제가 작은 파티를 하나 주최했어요.”그리고 부승희는 방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외할머니에게 말했다.“외할머니, 저희 안시연 씨랑 놀러 갈게요.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외할머니는 부승희를 처음 만났지만 스스럼없는 부승희에 조금 당황해했다.“어? 그래, 그래.”외할머니는 얼떨결에 대답했고 안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아직 시간도 이르니 외출해 바깥 공기를 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안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두 사람과 밖으로 나갔다. 반우희는 어린 동생들도 함께 데리고 떠났다.그렇다 보니 차 안은 북적북적 소란스러웠다.부승희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 간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부승희가 말한 파티는 인조 호수를 낀 파티장에 위치했으며 온갖 오락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바닥에는 인조 눈도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 위에도 예쁘게 장식을 하니 바깥세상과는 동떨어진 동화 세계 같았다.그리고 누군가 준비한 과일 와인의 향이 아주 좋았다.차에서 내린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