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부승희가 진심으로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언젠가 내가 정말 가정이 필요하고 아이가 갖고 싶어지면 그때 정훈 씨에게 물어볼 거예요. 나랑 결혼 할 거냐고.”부승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결혼 안 하겠다고 하면요?”그러자 안시연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헤어지고 다음 사람을 찾으면 되죠?”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술잔을 들어 안시연과 부딪치며 말했다.“시연 씨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시연 씨한테 집 한 채 선물할게요. 축하 선물로.”이 말에 안시연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내가 못할 것 같아요?”부승희는 안시연 옆에 기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열정이 식어가면서 점점 사라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깊이 사랑에 빠지죠.”그러더니 안시연을 돌아보며 물었다.“시연 씨는 어떤 쪽인 것 같아요?”안시연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저 지금은 눈앞의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을 뿐인데 이게 과연 인생을 현명하게 즐기는 걸까? 아니면 서서히 자신을 침몰시키고 있는 걸까?그날이 오면 과연 안시연은 단호하게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까?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다.샴페인 잔을 비우자 살짝 들뜬 기분이 들었고 안시연의 가슴 속에 남아있던 불안감도 조금 가시는 듯 했다.그때 이승우가 사람들을 불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들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런 밤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안시연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할래?”그러자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린 집에 가요. 이미 늦었고 나 수업도 들어야 해요.”“수업?”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어떤 수업이요? 우리 연 교수님이 직접 가르쳐주는 수업인가?”사람들은 금
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손을 들고 있는 반우희가 눈에 들어왔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고 웃으며 말했다.“우희 씨였구나.”반우희는 안시연이 받은 선물 더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더니 선물들을 내려놓고 물었다.“도와드릴까요?”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보고 다시 반우희를 보며 말했다.“시간 있어요?”“네, 있어요.”반우희는 선물을 내려놓고 활기차게 다가와 말했다.“저 사진 잘 찍어요. 저한테 맡기세요.”그러자 안시연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부탁할게요.”“걱정 마세요.”반우희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각도를 잡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머리를 정리하고 연정훈 옆에 섰다.특별한 포즈 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반우희의 렌즈 안에서는 그 장면이 유난히 완벽해 보였다.반우희는 왼쪽 오른쪽으로 뛰며 여러 장을 찍었고 빠르게 안시연을 위해 필터와 색조까지 조정해 주었다.“이 사진들 괜찮은지 한번 보세요.”안시연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첫 번째로 나온 흑백 사진을 보았다. 오래된 사진 같은 느낌이 들었다.매우 기뻐하며 여러 장을 넘겨보는 안시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연정훈도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선물 더미에서 눈에 띄지 않던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그러자 반우희는 연신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다.“받아요.”안시연도 말했다.그리고 이곳 사장님이 준 오리구이 선물 세트도 함께 건네며 덧붙였다.“사진 찍어줘서 고마워요.”반우희는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끼고 자리를 떠났다.그때 어디선가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나 반우희를 양옆에서 잡았다.“야! 너 대박이네?!”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반우희는 상자를 열어 다이아몬드 팔찌를 보았다.그러더니 이내 입을 틀어막으며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연기했다.“빨리, 산소 가져
집에 도착했지만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릴 기미가 없자 운전기사는 눈치껏 차에서 내려 다른 차로 옮겨 타고 재빨리 떠났다.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흐릿하게 뜬 눈으로 연정훈을 바라보며 살짝 젖은 입술을 핥고 부드럽게 말했다.“도착했어요.”연정훈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좀 있다가 올라가자.”안시연은 그가 차에서 하려는 줄 알고 당황하며 연정훈의 허리띠를 살짝 당겼다.“올라가요. 차에서는 안 돼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시연의 동맥 부분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차에서 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보여줄 게 있어. 서두를 필요 없어.”안시연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로 눕혔다.안시연은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굴면 본인이 다급해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손으로 옆에 있는 담배를 찾았다.“담배 피우지 마요.”안시연은 재빠르게 담배를 가로챘다.그녀는 담뱃갑을 손에 쥐고 가슴에 꼭 안았다.연정훈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기대며 침을 꿀꺽 삼켰다.“한 대만. 나가서 피울게.”그는 설득하려 했다.“안 돼요.”안시연은 연정훈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를 안으며 담배를 그의 허리 뒤로 숨겼다.“한 대도 안 돼요.”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웃었다.술에 취한 듯한 나른함과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연정훈의 잘생긴 얼굴에 가득 번졌다.“알았어, 안 피울게.”그 말과 함께 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안시연의 턱을 잡고 진한 키스를 했다.“읍...”안시연은 고양이처럼 가벼운 신음을 내며 힘없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그녀가 손을 올리자 연정훈은 허리 뒤에 숨겨진 담배를 재빨리 빼내어 의자에 기대었다.그러고는 손에 든 담배를 치켜 들어 보이며 살짝 윙크했다.상황을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 안시연은 눈을 깜빡였다.곧바로 그
경험이 많은 남자가 한 여자에게 잘해주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다.안시연도 알았다. 안시연이 립스틱을 사는 것만큼 연정훈에게 있어 이 차는 별 부담이 되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그가 마음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기쁘고 감동했다.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얻는 것도 남들보다 훨씬 쉽게 느껴진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차로 안내하며 운전석에 앉혔다.안시연은 급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내부를 앞뒤로 둘러 보며 점점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자신만의 인테리어 계획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정훈은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는지 조수석에 기대어 쉬었다. 안시연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귀찮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웠다.차 한 대로 이렇게 좋아하니 말이다.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안시연이 다가와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속삭였다.“고마워요.”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연정훈이 준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안시연의 눈에는 연정훈을 향한 존경과 애정이 가득했다.한껏 자신감이 오른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말로만 고맙다고?”안시연은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연정훈을 안고는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그러자 연정훈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감싸 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얌전히 내 말 들어.”안시연은 부끄러움을 참으며 작게 대답했다.그녀를 무릎 위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차 안 공간이 좁아서 불편했고 이내 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차 별로네.’그때, 안시연이 연정훈을 일깨워주었다.“위로 올라가요.”“그래.”이번엔 연정훈도 바로 동의하며 그녀보다 먼저 차에서 내렸다.안시연이 두 발을 차 바닥에 디디자마자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차고에서 집 안으로 올라가는 동안 연정훈은 빠른 걸음으로 안시연을 안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욕실로 데려갔다.안시연은 더 이상 저항할 여지가 없었고 그저
그날 밤 이후로 안시연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최미란에게 본인과 주지혁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알렸다.사실 최미란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었다. 주지혁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한참 지난 일이니 관계가 틀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난 나이를 많이 먹은 건지 너희들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구나.”최미란은 어느새 코를 훌쩍이셨다.안시연은 말없이 최미란의 눈물을 닦아줬다.“지혁이 그 아이는 모난 곳이 없고 참 바른 아이였는데. 난 너희 둘이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안시연은 과거의 더러운 일을 최미란에게 알려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사람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외할머니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최미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인 건 최미란의 수술 경과가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불편한 곳이 없어 보였지만 오랜 병원 생활에 조금 지쳐 보였다.안시연은 연정훈에 대한 얘기를 꺼낼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숨겨야 했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최미란이 밤낮으로 걱정할 게 뻔했다.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최미란이 퇴원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그건 안 돼요!”안시연이 딱 잘라 말했다.병원 생활이 너무 지겨워진 최미란의 입장도 아주 굳건했다.“집은 걱정하지 말거라. 퇴원하면 네 엄마가 나랑 같이 지내며 날 보살필 테니 넌 안심하고 일하면 된단다.”안시연은 귀를 의심했다.“뭐라고요?”최미란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너희 엄마 그 사람이랑 완전히 끝냈어. 앞으로 경인시에서 지내며 너에게 해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다고 그랬어.”정말 믿을 수 없었다.소현정과 오성호가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어떻게 갑자기 헤어지겠는가?그러나 최미란은 아주 단호하게 퇴원하겠다고 했다.소현정은 아직 경인시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최미란은 안시연더러 퇴원 수속을 밟고 내일이면 퇴원하자고 졸랐다.안시연은 덜컥 겁이 났다.소현주가 경인으로 돌아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급히 퇴원
주변에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고 조이현은 미친 것처럼 아우성쳤다. 몇 개월 전 우아하고 도도하던 조이현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안시연 씨, 저희가 내쫓을까요?”경호원의 물음에 안시연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경찰에 신고부터 해주세요.”“네.”경호원이 경찰에 신고하자마자 주지혁이 도착했다.조이현에 비해 주지혁은 번듯한 정장 차림에 예전과 같은 반반한 얼굴이었고 조이현을 바라보는 시선에 지겨움이 가득했다.주지혁은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을 발견하고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바로 조이현을 낚아채고 밖으로 끌었다.“여기까지 와서 왜 난동을 피워?”주지혁이 도착하고 조이현은 더 흥분에 겨워 소리쳤다.“이래도 안시연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야? 내가 안시연 찾아오자마자 달려왔잖아. 너 안시연 못 잊었잖아!”조이현은 주지혁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꿈속에서 안시현 이름 불러서 뭐 해? 안시연은 돈 많은 남자 찾아 잘만 사는데.”안시연은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다.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주지혁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조씨 가문의 사위가 되겠다고 그 난리를 부리고 떠난 사람이 왜 그런 짓이나 하는 건지 참.안시연이 주지혁을 향해 말했다.“당장 데리고 가요. 안 그러면 우리 쪽에서 손 쓸 거니까.”안시연의 말에 조이현은 악독한 표정을 짓더니 주지혁의 손에서 벗어나 안시연을 향해 달려왔다.상황은 또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졌다.안시연은 행여나 최미란이 알게 될까 빠르게 사람을 시켜 조이현을 붙잡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 최미란을 진정시키려 했다.그런데 몸을 돌리니 병실 문이 벌써 열려 있었다.그 순간 안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게다가 조이현이 아무렇게나 흩뿌린 사진 중 몇 장이 최미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최미란이 허리를 숙여 사진을 주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막을 기회조차 없었다.그리고 이 틈을 타 조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할머님! 댁 손녀는 몸 파는 사람이에요! 스폰서를 찾
같은 시간 연정훈은 출장 중이었고 급하게 연락을 받았다.안시연은 수술실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경호원이 연정훈에게 연락했다.“핸드폰 그 사람한테 넘겨요.”“네.”경호원은 텅 빈 눈을 하는 안시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안시연 씨, 연정훈 대표님 전화입니다.”연정훈이라는 세 글자에 안시연은 조금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곧 죄책감에 시달렸다.만약 연정훈과 엮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시연아.”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은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사실 그건 아니었다.연정훈이 없었다면 안시연은 오늘까지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연정훈 씨...”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목이 메어왔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바로 병원장한테 연락해 제일 능력 좋은 의사를 보낼 테니 외할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안시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통화 종료 후 몇 분 뒤 낯선 얼굴의 의사가 찾아왔다.안시연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시야가 흐려졌고 많은 사람 중 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현주 씨 먼저 준비하고 있어요. 나랑 같이 들어가요.”“네.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주세요.”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시연도 대화 내용을 들었지만 최미란의 걱정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최미란이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왔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안시연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병원장은 안시연과 함께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고 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잠시 챙기다가 의사를 따라갔다.사무실 안에는 적지 않은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안시연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어르신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인 편입니다. 너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고 수술 경과도 좋습니다
안시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안시연도 소현주 의사가 연정훈 과거의 여자가 맞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연정훈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의사가 퇴근했고 남자 의사 한 분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날이 상당히 추운 건지 따뜻한 병원 안에 들어선 연정훈의 몸에서 냉기가 사라지지 않았다.“좀 어때?”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챙겼다.안시연은 조금 전보다 많이 진정되었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다행히 외할머니한테 아무 문제없대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강한 척하는 게 눈에 보여 자신의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내가 돌아왔으니 남은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게.”“괜찮아요.”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서 나오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난 멀쩡해요. 방금 외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연정훈은 촉촉한 안시연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 아주 잘했어.”안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의사 사무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소현주가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외할머니 곁을 지킬 거야?”연정훈의 물음에 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의사가 그러는데 외할머니 푹 쉬어야 한대요. 그래서 간병인 두 명한테 맡기고 난 내일 낮에 오려고요.”최미란이 쓰러졌는데 안시연까지 무너질 수 없었다.많이 성숙한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안시연과 함께 한동안 병실 앞을 지키다가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조이현이 난동을 부린 사건은 크다고 하면 크고, 사소하다면 또 사소한 일이었다. 특히 연정훈 쪽 사람이 신고한 것이니 경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법대로 하세요. 처벌받을 건 당연히 받아야죠.”연정훈은 그 끝으로 전화를 끊고 안시연에게 물었다.“고소할 거야?”“네!”대답하는 안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조이현은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온갖 준비를 마쳐 최미란에게 충격을 주었고
양시연은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순간 얼어붙었다.연정훈은 너무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면 아예 품속에 파묻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정신을 차린 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슨 일이에요?”‘설마 밖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건가?'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고 있었다.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은 바로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손을 그의 등에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잠시 후 연정훈은 그녀를 조금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그의 턱에 입술을 가볍게 닿게 한 뒤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려 깊은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가까워서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건물 안은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급히 달려왔다 해도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것일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아무 말 없이 연정훈의 손을 잡아 책상 쪽으로 데려갔다.그리고 티슈를 꺼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이렇게까지 급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큰일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깊게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양시연은 살짝 놀랐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런 거야?’양시연이 묻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자기 가슴과 책상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이마를 양시연의 이마에 맞대며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졌어. 다행히도 하늘은 내 편이었던 거야.’양시연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연정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뭔데 그래요? 나한테 말해 줘요. 이렇게 말 안 하면 나도 초조해진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
“사무실로 올라갈게.”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분위기가 마치 따지러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서류를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양시연은 당연히 연정훈일 거로 생각하며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그러나 돌아보니 문을 연 사람은 몇몇 임원들이었다.회의가 끝난 직후라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일이 있을 법도 했지만 양시연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앞장선 사람은 익숙한 인물 권준호였다.예전에 주지혁 남매에게 몰려 궁지에 빠졌던 그녀는 원칙을 저버리고 연정훈을 찾아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 키스를 했는데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주지혁 부부 외에 그중 한 명이 바로 권준호였다.몇 년이 흐르고 권준호는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사이 양시연은 그의 대표 부인이 되어 있었다.권준호는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 그때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양시연에게는 늘 공손했다. 덕분에 양시연도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양시연은 연정훈이 곧 도착할 거로 생각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임원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일어나 문을 열려 하자 양시연이 손짓으로 제지했다.“앉아계세요. 제가 열게요.”그녀는 이미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고 문을 열자 급하게 걸어오던 연정훈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양시연이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자 환한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짧은 순간 연정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휘둘렸고 인연이 정말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얽혀 있었고 누군가가 방해하려 해도 결국 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만나 그녀의 손을 잡을 운명이었다.양시연과 함께할 운명이라 믿어지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찼고 온몸이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마침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이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양시연이 말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
양시연은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부승원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하아. 연 교수님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네.’양시연은 침을 삼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덜 쓰일 거로 생각하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한편 연정훈은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연결되지 않았다.잠시 화면을 응시하던 연정훈은 다시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양시연에게 당장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연달아 네 번이나 전화했으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쯤 받을 법한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렇게 고민하던 순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마침내 연결되었다!“시연아!”“대체 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나 지금 회의 중이에요. 부승원 씨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고요.”“할 말이 있어.”“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봐요.”연정훈은 입을 뗐지만 정작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양시연이 답답한 듯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나...”“됐어요. 그렇게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나 먼저 끊을게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시연.”양시연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자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숨을 골랐다.밖에서는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양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었고 마음은 공처럼 이리저리 튕겨 다니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임성원의 목소리인 것을 확인한 연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 하러 들어왔어?”“도련님 혹시 배탈 나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황당했다.“...”“나 괜찮아.”“정말 괜찮으세요? 약이라도 챙겨드릴까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며 단
연씨 가문과 마씨 가문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두 가문의 노인들은 오랜 파트너였다. 그러나 연호민이 서울로 자리를 옮기고 마씨 가문의 노인이 지방에 남게 되면서 두 가문은 점차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얼마 후 마봉식은 경기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했고 이 시점에서 두 가문이 만나는 이유를 연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원래 많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 그 이메일들이 그의 머리에 쌓여서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속은 뒤집혔다. 그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싶었지만 연재혁을 화나게 할까 봐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거실에 들어서자 마봉식이 차를 끓이고 있었고 그가 그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자리를 안내했다.연정훈이 마봉식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마봉식은 무척 기뻐하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결혼식 날 바빠서 현장에 가지 못했었는데 언제 한번 네 아내를 데리고 와서 꼭 만나게 해줘.”“기회가 되면 꼭 같이 인사드리겠습니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양측은 미묘하게 탐색을 끝내고 그제야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라면 마봉식이 물러나고 연재혁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은 확실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이 시점에서 너의 아버지의 발목을 잡힐 실수를 하면 안된다.”마봉식이 그렇게 말하자 연정훈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조이현의 고소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봉식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가 말한 것은 연정훈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실제로 이런 일들을 다루는 것은 연재혁과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연정훈은 아직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옆에서 듣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뿐이었다.연정훈의 마음속은 여전히 이메일을 모두 읽어보고 진짜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중도에 마봉식이 그에게 물었다.“네 장인어른 몸 상태는 어떠냐?”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은 그들 사이에서 비밀이
연재혁이 연정훈에게 시간을 비우라 한 건 마봉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던 연정훈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시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씨 가문에 간 거 아니었어요?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요?”“아직 아버지를 만나기 전이라 그냥 너랑 얘기나 좀 하려고.”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났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살며시 내려놓았다.“오늘 밤엔 술 마실 일 없죠?”“안 마셔도 돼.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차만 마시거든.”“그 말 들으니 안심되네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난 이런 자리 자주 가는 거 별로 걱정 안 해요.”연정훈이 답했다.“나도 자주 가고 싶진 않아. 약속만 없었으면 지금쯤 집에서 널 안고 있었을 텐데.”“정말 한심해요.”양시연은 핀잔을 주며 말했다.“집 생각 그만하고 일에 집중해요.”“집중이 안 돼. 지금 당장 유턴해서 집에 가고 싶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다 당신 아버지께 혼나면 어쩌려고요?”연정훈은 눈을 감고 양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창문에 톡톡 빗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빗소리가 퍼졌다.양시연은 우산 꼭 챙기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연정훈에게 그 잔소리는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그녀가 부승원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며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했을 때 연정훈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부승원이 요즘 연애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야근까지 열심히 해?”양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얘기 제발 하지 마세요. 지금은 의지로 버티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진짜 손 털고 나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제가 죽어나겠죠.”"정 안 되면 내가 양원의 일을 그만두고 네 회사로 가서 일해줄게."“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일을 시키겠어요.”양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며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휴대폰 화면에 입맞춤을 가볍게 흉내 냈다.“알겠어. 밤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나 이제 일해야 해.”연
양시연은 몰래 엿보다가 순간 멍해졌고 부승원에게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보였다.반면 반우희는 아이스크림을 절반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부승원 옆에 꼬리처럼 붙어 있었다.양시연이 보기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반우희는 아마 부승원에게 달라붙어 키링처럼 매달렸을 것이다.양시연이 일부러 헛기침하자 반우희는 곧바로 양시연 쪽을 힐끗 보더니 티가 나지 않게 어색하게 부승원에게서 약간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의 과자 부분을 먹기 시작했다.부승원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일을 계속했다.잠시 후 그는 양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최근 계획을 이야기하며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이 정도 사소한 일로 연씨 가문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 집안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성장 환경이 다르면 사고방식도 달랐다. 양시연은 소현주가 죽었다는 사실에 사람이 죽은 이상 그 일을 잘 이용하면 큰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나 부승원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그러던 부승원이 갑자기 말했다.“그래도 불안하면 외출할 때 조심해요.”“안전 문제인가요?”부승원은 짧게 대답했다.“네.”“연씨 가문 같은 대가문은 큰일이 벌어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요.”양시연은 곧바로 평화로운 시기를 떠올리며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연서명을 떠올렸다. 물론 그 후에 조씨 가문은 사실상 몰락해 미래가 없어졌지만 연정훈의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양시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이 말을 마음에 새겼다.오후엔 바빴지만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처리 결과를 물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이미 다 처리했다고 말하며 저녁엔 경인의 현직 고위 임원을 만나야 해서 그녀를 데리러 가지 못한다고 했다.“괜찮아요.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애아기 오늘 착했어? 발길질 안 했어?”양시연은 부드럽고 차분
소현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양시연은 이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누군가 지방에 한 통의 고소장을 보냈고 고소장에는 두 부부가 권력을 이용해서 한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적혀 있었다.사실 소현주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이미 영상 자료를 통해 소현주가 죽기 전에 양시연을 만났고 양시연이 험악한 경호원들을 데리고 갔으며 대화 중 몇 차례 소현주를 제압하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다른 사람 같았으면 최소한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불려 갔을 일이었지만 양시연의 신분 덕분에 아무도 이 문제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고소장이 접수되자 연재혁은 분노한 나머지 연정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사팀에 응답하라고 했다.아침 일찍 양시연은 연정훈이 밖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양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문제없겠죠? 누가 고소했는지 알아요?”연정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익숙한 사람이긴 한데 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야.”“누군데요?”“조이현.”양시연은 정말로 뜻밖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조이현 씨가 아직도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정말 정신 나갔구나.’“만약 조이현 씨 혼자 한 짓이라면 오히려 별일 아닐 거야.”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문제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누구라고 생각해요?”“굳이 의심할 필요 없어. 곧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그는 언제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예전엔 그의 이런 태도가 오만해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든든했다.그날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양시연은 회사로 돌아온 뒤 사무실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양시연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데리러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표세연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차 안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일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걱정을 털어놨다.“누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요.”“괜한 걱정이야.”연정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당했으면 벌써 몇백 번은 죽었을 거야. 경인에서는 물론 경인 밖에서도 나한테 시비 걸 사람 몇이나 되겠어.”“말은 그렇지만...”“말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양시연은 그의 단호한 말에 살짝 안심하며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집에 도착하자 연재혁은 없었고 표세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세연은 임신한 양시연을 보자 아들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했다.“음식들 맛 좀 봐봐. 입맛에 안 맞으면 내가 말해서 새로 차리게 할게.”양시연은 식탁 위에 놓인 각 지역의 신선한 음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충분합니다. 그만하시고 어머님도 앉으세요.”표세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자는 양시연에게 음식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며 한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양시연이 거의 다 먹고 나서야 표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너의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니?”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바라봤고 연정훈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한 듯 표세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네 아빠가 알려줬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양지원의 태도로 보아 이번 양석진의 건강 문제는 비밀리에 처리되고 있을 터였다. 연재혁이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양석진의 측근도 아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