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그날 밤의 구체적인 기억을 말할 수 없었다.부승원이 자신을 끌어안고 키스하며 귓가에 숨을 내쉬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그때 반우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부승원은 그야말로 외모도 출중한 사람이었다.반우희에게 대해 부승원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그토록 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둔한 건 그렇다 쳐도 감정적으로도 둔해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참 답답한 사람이야.’ “우리 사이 여기까지야. 돈은 다시 돌려보내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냥 네가 억울한 손해를 본 거로 할 거야.”그는 냉정하게 말했다.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저... 돈 충분히 있어요. 더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말을 정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더는 법률 사무소에 이력서 넣지 마. 네 학력과 수준으로는 법률 사무원은커녕 잡일 할 자리도 없을 거야.”반우희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꿈같은 헛된 생각을 그만두고 돈을 잘 관리해 학업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그래야 생활이 나아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녀의 자질로는 변호사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반우희 같은 성격으로 변호사가 된다면 변호사 업계에 재앙이 될 것이었다.이 부분에서만큼은 반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자신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더 빨리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특성화고를 선택했다.하지만 1년 내내 이력서가 거절당하고 학력 차별을 겪으며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다.변호사가 되는 건 그녀의 꿈이었지만 부승원에게는 그 꿈이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나중에 사법시험에 꼭 합격할 거예요...”“사법시험 합격해도 넌 변호사가 되지 못할 거야.” 소녀는 고개를 떨궜다.그녀는 손을 뒤로 모으고 손가락을 힘겹게 꼬았다.“알겠어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너무 가혹한 말을 한 건 아닌지
안시연은 부승희가 진심으로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언젠가 내가 정말 가정이 필요하고 아이가 갖고 싶어지면 그때 정훈 씨에게 물어볼 거예요. 나랑 결혼 할 거냐고.”부승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결혼 안 하겠다고 하면요?”그러자 안시연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헤어지고 다음 사람을 찾으면 되죠?”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술잔을 들어 안시연과 부딪치며 말했다.“시연 씨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시연 씨한테 집 한 채 선물할게요. 축하 선물로.”이 말에 안시연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내가 못할 것 같아요?”부승희는 안시연 옆에 기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열정이 식어가면서 점점 사라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깊이 사랑에 빠지죠.”그러더니 안시연을 돌아보며 물었다.“시연 씨는 어떤 쪽인 것 같아요?”안시연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저 지금은 눈앞의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을 뿐인데 이게 과연 인생을 현명하게 즐기는 걸까? 아니면 서서히 자신을 침몰시키고 있는 걸까?그날이 오면 과연 안시연은 단호하게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까?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다.샴페인 잔을 비우자 살짝 들뜬 기분이 들었고 안시연의 가슴 속에 남아있던 불안감도 조금 가시는 듯 했다.그때 이승우가 사람들을 불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들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런 밤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안시연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할래?”그러자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린 집에 가요. 이미 늦었고 나 수업도 들어야 해요.”“수업?”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어떤 수업이요? 우리 연 교수님이 직접 가르쳐주는 수업인가?”사람들은 금
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손을 들고 있는 반우희가 눈에 들어왔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고 웃으며 말했다.“우희 씨였구나.”반우희는 안시연이 받은 선물 더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더니 선물들을 내려놓고 물었다.“도와드릴까요?”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보고 다시 반우희를 보며 말했다.“시간 있어요?”“네, 있어요.”반우희는 선물을 내려놓고 활기차게 다가와 말했다.“저 사진 잘 찍어요. 저한테 맡기세요.”그러자 안시연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부탁할게요.”“걱정 마세요.”반우희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각도를 잡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머리를 정리하고 연정훈 옆에 섰다.특별한 포즈 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반우희의 렌즈 안에서는 그 장면이 유난히 완벽해 보였다.반우희는 왼쪽 오른쪽으로 뛰며 여러 장을 찍었고 빠르게 안시연을 위해 필터와 색조까지 조정해 주었다.“이 사진들 괜찮은지 한번 보세요.”안시연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첫 번째로 나온 흑백 사진을 보았다. 오래된 사진 같은 느낌이 들었다.매우 기뻐하며 여러 장을 넘겨보는 안시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연정훈도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선물 더미에서 눈에 띄지 않던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그러자 반우희는 연신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다.“받아요.”안시연도 말했다.그리고 이곳 사장님이 준 오리구이 선물 세트도 함께 건네며 덧붙였다.“사진 찍어줘서 고마워요.”반우희는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끼고 자리를 떠났다.그때 어디선가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나 반우희를 양옆에서 잡았다.“야! 너 대박이네?!”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반우희는 상자를 열어 다이아몬드 팔찌를 보았다.그러더니 이내 입을 틀어막으며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연기했다.“빨리, 산소 가져
집에 도착했지만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릴 기미가 없자 운전기사는 눈치껏 차에서 내려 다른 차로 옮겨 타고 재빨리 떠났다.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흐릿하게 뜬 눈으로 연정훈을 바라보며 살짝 젖은 입술을 핥고 부드럽게 말했다.“도착했어요.”연정훈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좀 있다가 올라가자.”안시연은 그가 차에서 하려는 줄 알고 당황하며 연정훈의 허리띠를 살짝 당겼다.“올라가요. 차에서는 안 돼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시연의 동맥 부분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차에서 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보여줄 게 있어. 서두를 필요 없어.”안시연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로 눕혔다.안시연은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굴면 본인이 다급해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손으로 옆에 있는 담배를 찾았다.“담배 피우지 마요.”안시연은 재빠르게 담배를 가로챘다.그녀는 담뱃갑을 손에 쥐고 가슴에 꼭 안았다.연정훈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기대며 침을 꿀꺽 삼켰다.“한 대만. 나가서 피울게.”그는 설득하려 했다.“안 돼요.”안시연은 연정훈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를 안으며 담배를 그의 허리 뒤로 숨겼다.“한 대도 안 돼요.”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웃었다.술에 취한 듯한 나른함과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연정훈의 잘생긴 얼굴에 가득 번졌다.“알았어, 안 피울게.”그 말과 함께 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안시연의 턱을 잡고 진한 키스를 했다.“읍...”안시연은 고양이처럼 가벼운 신음을 내며 힘없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그녀가 손을 올리자 연정훈은 허리 뒤에 숨겨진 담배를 재빨리 빼내어 의자에 기대었다.그러고는 손에 든 담배를 치켜 들어 보이며 살짝 윙크했다.상황을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 안시연은 눈을 깜빡였다.곧바로 그
경험이 많은 남자가 한 여자에게 잘해주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다.안시연도 알았다. 안시연이 립스틱을 사는 것만큼 연정훈에게 있어 이 차는 별 부담이 되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그가 마음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기쁘고 감동했다.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얻는 것도 남들보다 훨씬 쉽게 느껴진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차로 안내하며 운전석에 앉혔다.안시연은 급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내부를 앞뒤로 둘러 보며 점점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자신만의 인테리어 계획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정훈은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는지 조수석에 기대어 쉬었다. 안시연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귀찮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웠다.차 한 대로 이렇게 좋아하니 말이다.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안시연이 다가와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속삭였다.“고마워요.”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연정훈이 준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안시연의 눈에는 연정훈을 향한 존경과 애정이 가득했다.한껏 자신감이 오른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말로만 고맙다고?”안시연은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연정훈을 안고는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그러자 연정훈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감싸 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얌전히 내 말 들어.”안시연은 부끄러움을 참으며 작게 대답했다.그녀를 무릎 위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차 안 공간이 좁아서 불편했고 이내 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차 별로네.’그때, 안시연이 연정훈을 일깨워주었다.“위로 올라가요.”“그래.”이번엔 연정훈도 바로 동의하며 그녀보다 먼저 차에서 내렸다.안시연이 두 발을 차 바닥에 디디자마자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차고에서 집 안으로 올라가는 동안 연정훈은 빠른 걸음으로 안시연을 안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욕실로 데려갔다.안시연은 더 이상 저항할 여지가 없었고 그저
그날 밤 이후로 안시연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최미란에게 본인과 주지혁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알렸다.사실 최미란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었다. 주지혁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한참 지난 일이니 관계가 틀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난 나이를 많이 먹은 건지 너희들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구나.”최미란은 어느새 코를 훌쩍이셨다.안시연은 말없이 최미란의 눈물을 닦아줬다.“지혁이 그 아이는 모난 곳이 없고 참 바른 아이였는데. 난 너희 둘이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안시연은 과거의 더러운 일을 최미란에게 알려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사람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외할머니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최미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인 건 최미란의 수술 경과가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불편한 곳이 없어 보였지만 오랜 병원 생활에 조금 지쳐 보였다.안시연은 연정훈에 대한 얘기를 꺼낼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숨겨야 했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최미란이 밤낮으로 걱정할 게 뻔했다.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최미란이 퇴원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그건 안 돼요!”안시연이 딱 잘라 말했다.병원 생활이 너무 지겨워진 최미란의 입장도 아주 굳건했다.“집은 걱정하지 말거라. 퇴원하면 네 엄마가 나랑 같이 지내며 날 보살필 테니 넌 안심하고 일하면 된단다.”안시연은 귀를 의심했다.“뭐라고요?”최미란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너희 엄마 그 사람이랑 완전히 끝냈어. 앞으로 경인시에서 지내며 너에게 해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다고 그랬어.”정말 믿을 수 없었다.소현정과 오성호가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어떻게 갑자기 헤어지겠는가?그러나 최미란은 아주 단호하게 퇴원하겠다고 했다.소현정은 아직 경인시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최미란은 안시연더러 퇴원 수속을 밟고 내일이면 퇴원하자고 졸랐다.안시연은 덜컥 겁이 났다.소현주가 경인으로 돌아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급히 퇴원
주변에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고 조이현은 미친 것처럼 아우성쳤다. 몇 개월 전 우아하고 도도하던 조이현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안시연 씨, 저희가 내쫓을까요?”경호원의 물음에 안시연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경찰에 신고부터 해주세요.”“네.”경호원이 경찰에 신고하자마자 주지혁이 도착했다.조이현에 비해 주지혁은 번듯한 정장 차림에 예전과 같은 반반한 얼굴이었고 조이현을 바라보는 시선에 지겨움이 가득했다.주지혁은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을 발견하고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바로 조이현을 낚아채고 밖으로 끌었다.“여기까지 와서 왜 난동을 피워?”주지혁이 도착하고 조이현은 더 흥분에 겨워 소리쳤다.“이래도 안시연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야? 내가 안시연 찾아오자마자 달려왔잖아. 너 안시연 못 잊었잖아!”조이현은 주지혁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꿈속에서 안시현 이름 불러서 뭐 해? 안시연은 돈 많은 남자 찾아 잘만 사는데.”안시연은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다.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주지혁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조씨 가문의 사위가 되겠다고 그 난리를 부리고 떠난 사람이 왜 그런 짓이나 하는 건지 참.안시연이 주지혁을 향해 말했다.“당장 데리고 가요. 안 그러면 우리 쪽에서 손 쓸 거니까.”안시연의 말에 조이현은 악독한 표정을 짓더니 주지혁의 손에서 벗어나 안시연을 향해 달려왔다.상황은 또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졌다.안시연은 행여나 최미란이 알게 될까 빠르게 사람을 시켜 조이현을 붙잡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 최미란을 진정시키려 했다.그런데 몸을 돌리니 병실 문이 벌써 열려 있었다.그 순간 안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게다가 조이현이 아무렇게나 흩뿌린 사진 중 몇 장이 최미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최미란이 허리를 숙여 사진을 주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막을 기회조차 없었다.그리고 이 틈을 타 조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할머님! 댁 손녀는 몸 파는 사람이에요! 스폰서를 찾
같은 시간 연정훈은 출장 중이었고 급하게 연락을 받았다.안시연은 수술실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경호원이 연정훈에게 연락했다.“핸드폰 그 사람한테 넘겨요.”“네.”경호원은 텅 빈 눈을 하는 안시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안시연 씨, 연정훈 대표님 전화입니다.”연정훈이라는 세 글자에 안시연은 조금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곧 죄책감에 시달렸다.만약 연정훈과 엮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시연아.”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은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사실 그건 아니었다.연정훈이 없었다면 안시연은 오늘까지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연정훈 씨...”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목이 메어왔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바로 병원장한테 연락해 제일 능력 좋은 의사를 보낼 테니 외할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안시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통화 종료 후 몇 분 뒤 낯선 얼굴의 의사가 찾아왔다.안시연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시야가 흐려졌고 많은 사람 중 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현주 씨 먼저 준비하고 있어요. 나랑 같이 들어가요.”“네.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주세요.”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시연도 대화 내용을 들었지만 최미란의 걱정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최미란이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왔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안시연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병원장은 안시연과 함께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고 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잠시 챙기다가 의사를 따라갔다.사무실 안에는 적지 않은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안시연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어르신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인 편입니다. 너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고 수술 경과도 좋습니다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
이튿날 아침, 비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비춰왔다.악몽에서 벗어난 양혁수는 그제야 어제 충동으로 벌인 일이 떠올랐고 왠지 이제는 후회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반항하는 걸 포기한 듯한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이 떠보듯 말을 걸었고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한 뒤에는 다시 악동으로 변했다.변여름은 아침 댓바람부터 서양식 브런치를 먹겠다고 난리였다.변여름에게 오냐오냐 귀여움을 받던 양혁수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부탁하는 변여름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그동안 변여름의 차려준 음식을 실컷 먹었으니 자신도 한 끼 정도는 기꺼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서양식 브런치야 식재료를 구우면 그만이었다.그렇게 첫째 날 아침을 무사히 마치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 변여름은 어제 먹은 브런치가 너무 맛있었다고 또 졸랐다.‘그래, 뭐. 맛있다는 데 해줘야지.’그러나 세 번째 아침엔 변여름이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난도를 높여 버렸다.‘음... 그것도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점심이 되자 변여름은 스테이크와 소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졸랐다.양혁수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말없이 스테이크를 구웠고 그 옆에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는 변여름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쭈, 지금 복수하는 건가?’‘평생 밥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한테만 요리해 주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야.’‘어쩌면 밥은 물론, 언젠간 뜨개질도 해달라고 할지도 몰라.’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양혁수의 등 뒤를 꼭 껴안았다.양혁수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한 소리 하려 했지만, 스테이크 기름이 튀어나오려 하자 먼저 변여름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변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불이 너무 세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잘하면 네가 하지 그래?”그러자 변여름은 쏙 빠져나와 등 뒤로 숨었고 양혁수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싫어요.”“난 오빠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맛이 엉망이어도
잠을 잘 때에는 변여름도 얌전한 편이었다. 양혁수에게 찰싹 들러붙긴 해도 기껏해야 팔이나 안고 잘 뿐이었다.가끔 양혁수가 밀어내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팔베개할 때도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에게서 향기로운 향이 난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변여름에게서 끈적한 허니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향기에 본인도 취해 버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다.낮에 하염없이 에든베타를 돌아다녔던 건 양시연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양혁수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싫었고, 오늘 밤 변여름이 옆에 있어 너무 다행이라 느껴졌다.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 팔을 베고 자는 변여름이 보였고, 어깨가 너무 시큰거렸지만, 양혁수는 손목을 돌려 살짝 스트레칭만 할 뿐 팔을 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변여름에게 잘 덮어줬다.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변여름이 깜짝 놀라 깨버렸다.변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양혁수의 품을 파고들었고 양혁수는 자연스레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냥 바람일 뿐이야.”변여름은 용기를 내어 창밖을 바라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눈을 비비며 이미 잠에서 깬 양혁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빠 빨리 자요...”양혁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귓가에는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창밖에는 거센 바람 소리에 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무 그림자까지 방안에 비춰오자 양혁수는 심기가 거슬렸다.그래서 침대 헤드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양혁수는 음침한 무덤 앞에 섰다.짙은 안개에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몇 번이고 양혁수의 이름을 불렀다.“혁수야, 혁수야!”“내가 네 엄마잖아. 혁수야!”피를 쏟으며 쓰러지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양혁수는 온통 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오빠?”“혁수 오빠!”그때, 변여름
두 사람이 소파 위로 함께 쓰러지듯 누울 때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양혁수의 무게가 실리자, 변여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그 소리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고 변여름은 목을 꽉 껴안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양혁수는 키스 도중에 눈을 떴고 마침 눈을 깜빡거리는 변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끈적하게 이어졌고 양혁수는 점점 변여름에게 이끌렸다.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니 지금 양혁수의 행동을 별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운 에든베타에서 변여름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변여름을 품에 안고 있으면 양혁수는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양혁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변여름의 호흡에 맞췄다.사랑에 서툰 부분에 있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변여름은 용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그동안 양혁수가 협조하지 않은 탓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그때 윗입술을 스치더니 입술 끝이 가볍게 빨렸다.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지자 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들렸지만 양혁수의 다리에 눌려 다시 꼼짝 못 하고 그의 품 안에 갇혔다.그렇게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느새 온몸으로 번져갔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꼭 껴안고 싶다가도, 온몸이 힘이 빠져 그저 그의 품으로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양혁수가 몸을 낮추고,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다.호흡마저 뺏겨버렸지만 변여름은 점점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양혁수를 믿었다.서툴던 키스는 점점 익숙하고 완벽해졌다.양혁수는 처음으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자세를 바꿔 더 깊게 변여름에게 다가갔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처음엔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 판단이 되었어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그렇게 밀어내던 변여름에게 키스를 쏟아붓다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