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그날 밤의 구체적인 기억을 말할 수 없었다.부승원이 자신을 끌어안고 키스하며 귓가에 숨을 내쉬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그때 반우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부승원은 그야말로 외모도 출중한 사람이었다.반우희에게 대해 부승원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그토록 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둔한 건 그렇다 쳐도 감정적으로도 둔해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참 답답한 사람이야.’ “우리 사이 여기까지야. 돈은 다시 돌려보내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냥 네가 억울한 손해를 본 거로 할 거야.”그는 냉정하게 말했다.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저... 돈 충분히 있어요. 더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말을 정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더는 법률 사무소에 이력서 넣지 마. 네 학력과 수준으로는 법률 사무원은커녕 잡일 할 자리도 없을 거야.”반우희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꿈같은 헛된 생각을 그만두고 돈을 잘 관리해 학업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그래야 생활이 나아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녀의 자질로는 변호사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반우희 같은 성격으로 변호사가 된다면 변호사 업계에 재앙이 될 것이었다.이 부분에서만큼은 반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자신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더 빨리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특성화고를 선택했다.하지만 1년 내내 이력서가 거절당하고 학력 차별을 겪으며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다.변호사가 되는 건 그녀의 꿈이었지만 부승원에게는 그 꿈이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나중에 사법시험에 꼭 합격할 거예요...”“사법시험 합격해도 넌 변호사가 되지 못할 거야.” 소녀는 고개를 떨궜다.그녀는 손을 뒤로 모으고 손가락을 힘겹게 꼬았다.“알겠어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너무 가혹한 말을 한 건 아닌지
안시연은 부승희가 진심으로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언젠가 내가 정말 가정이 필요하고 아이가 갖고 싶어지면 그때 정훈 씨에게 물어볼 거예요. 나랑 결혼 할 거냐고.”부승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결혼 안 하겠다고 하면요?”그러자 안시연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헤어지고 다음 사람을 찾으면 되죠?”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술잔을 들어 안시연과 부딪치며 말했다.“시연 씨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시연 씨한테 집 한 채 선물할게요. 축하 선물로.”이 말에 안시연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내가 못할 것 같아요?”부승희는 안시연 옆에 기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열정이 식어가면서 점점 사라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깊이 사랑에 빠지죠.”그러더니 안시연을 돌아보며 물었다.“시연 씨는 어떤 쪽인 것 같아요?”안시연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저 지금은 눈앞의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을 뿐인데 이게 과연 인생을 현명하게 즐기는 걸까? 아니면 서서히 자신을 침몰시키고 있는 걸까?그날이 오면 과연 안시연은 단호하게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까?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다.샴페인 잔을 비우자 살짝 들뜬 기분이 들었고 안시연의 가슴 속에 남아있던 불안감도 조금 가시는 듯 했다.그때 이승우가 사람들을 불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들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런 밤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안시연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할래?”그러자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린 집에 가요. 이미 늦었고 나 수업도 들어야 해요.”“수업?”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어떤 수업이요? 우리 연 교수님이 직접 가르쳐주는 수업인가?”사람들은 금
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손을 들고 있는 반우희가 눈에 들어왔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고 웃으며 말했다.“우희 씨였구나.”반우희는 안시연이 받은 선물 더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더니 선물들을 내려놓고 물었다.“도와드릴까요?”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보고 다시 반우희를 보며 말했다.“시간 있어요?”“네, 있어요.”반우희는 선물을 내려놓고 활기차게 다가와 말했다.“저 사진 잘 찍어요. 저한테 맡기세요.”그러자 안시연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부탁할게요.”“걱정 마세요.”반우희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각도를 잡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머리를 정리하고 연정훈 옆에 섰다.특별한 포즈 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반우희의 렌즈 안에서는 그 장면이 유난히 완벽해 보였다.반우희는 왼쪽 오른쪽으로 뛰며 여러 장을 찍었고 빠르게 안시연을 위해 필터와 색조까지 조정해 주었다.“이 사진들 괜찮은지 한번 보세요.”안시연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첫 번째로 나온 흑백 사진을 보았다. 오래된 사진 같은 느낌이 들었다.매우 기뻐하며 여러 장을 넘겨보는 안시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연정훈도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선물 더미에서 눈에 띄지 않던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그러자 반우희는 연신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다.“받아요.”안시연도 말했다.그리고 이곳 사장님이 준 오리구이 선물 세트도 함께 건네며 덧붙였다.“사진 찍어줘서 고마워요.”반우희는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끼고 자리를 떠났다.그때 어디선가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나 반우희를 양옆에서 잡았다.“야! 너 대박이네?!”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반우희는 상자를 열어 다이아몬드 팔찌를 보았다.그러더니 이내 입을 틀어막으며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연기했다.“빨리, 산소 가져
집에 도착했지만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릴 기미가 없자 운전기사는 눈치껏 차에서 내려 다른 차로 옮겨 타고 재빨리 떠났다.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흐릿하게 뜬 눈으로 연정훈을 바라보며 살짝 젖은 입술을 핥고 부드럽게 말했다.“도착했어요.”연정훈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좀 있다가 올라가자.”안시연은 그가 차에서 하려는 줄 알고 당황하며 연정훈의 허리띠를 살짝 당겼다.“올라가요. 차에서는 안 돼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시연의 동맥 부분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차에서 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보여줄 게 있어. 서두를 필요 없어.”안시연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로 눕혔다.안시연은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굴면 본인이 다급해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손으로 옆에 있는 담배를 찾았다.“담배 피우지 마요.”안시연은 재빠르게 담배를 가로챘다.그녀는 담뱃갑을 손에 쥐고 가슴에 꼭 안았다.연정훈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기대며 침을 꿀꺽 삼켰다.“한 대만. 나가서 피울게.”그는 설득하려 했다.“안 돼요.”안시연은 연정훈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를 안으며 담배를 그의 허리 뒤로 숨겼다.“한 대도 안 돼요.”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웃었다.술에 취한 듯한 나른함과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연정훈의 잘생긴 얼굴에 가득 번졌다.“알았어, 안 피울게.”그 말과 함께 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안시연의 턱을 잡고 진한 키스를 했다.“읍...”안시연은 고양이처럼 가벼운 신음을 내며 힘없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그녀가 손을 올리자 연정훈은 허리 뒤에 숨겨진 담배를 재빨리 빼내어 의자에 기대었다.그러고는 손에 든 담배를 치켜 들어 보이며 살짝 윙크했다.상황을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 안시연은 눈을 깜빡였다.곧바로 그
경험이 많은 남자가 한 여자에게 잘해주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다.안시연도 알았다. 안시연이 립스틱을 사는 것만큼 연정훈에게 있어 이 차는 별 부담이 되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그가 마음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기쁘고 감동했다.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얻는 것도 남들보다 훨씬 쉽게 느껴진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차로 안내하며 운전석에 앉혔다.안시연은 급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내부를 앞뒤로 둘러 보며 점점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자신만의 인테리어 계획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정훈은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는지 조수석에 기대어 쉬었다. 안시연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귀찮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웠다.차 한 대로 이렇게 좋아하니 말이다.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안시연이 다가와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속삭였다.“고마워요.”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연정훈이 준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안시연의 눈에는 연정훈을 향한 존경과 애정이 가득했다.한껏 자신감이 오른 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말로만 고맙다고?”안시연은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연정훈을 안고는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그러자 연정훈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감싸 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얌전히 내 말 들어.”안시연은 부끄러움을 참으며 작게 대답했다.그녀를 무릎 위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차 안 공간이 좁아서 불편했고 이내 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차 별로네.’그때, 안시연이 연정훈을 일깨워주었다.“위로 올라가요.”“그래.”이번엔 연정훈도 바로 동의하며 그녀보다 먼저 차에서 내렸다.안시연이 두 발을 차 바닥에 디디자마자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차고에서 집 안으로 올라가는 동안 연정훈은 빠른 걸음으로 안시연을 안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욕실로 데려갔다.안시연은 더 이상 저항할 여지가 없었고 그저
그날 밤 이후로 안시연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최미란에게 본인과 주지혁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알렸다.사실 최미란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었다. 주지혁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한참 지난 일이니 관계가 틀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난 나이를 많이 먹은 건지 너희들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구나.”최미란은 어느새 코를 훌쩍이셨다.안시연은 말없이 최미란의 눈물을 닦아줬다.“지혁이 그 아이는 모난 곳이 없고 참 바른 아이였는데. 난 너희 둘이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안시연은 과거의 더러운 일을 최미란에게 알려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사람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외할머니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최미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인 건 최미란의 수술 경과가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불편한 곳이 없어 보였지만 오랜 병원 생활에 조금 지쳐 보였다.안시연은 연정훈에 대한 얘기를 꺼낼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숨겨야 했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최미란이 밤낮으로 걱정할 게 뻔했다.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최미란이 퇴원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그건 안 돼요!”안시연이 딱 잘라 말했다.병원 생활이 너무 지겨워진 최미란의 입장도 아주 굳건했다.“집은 걱정하지 말거라. 퇴원하면 네 엄마가 나랑 같이 지내며 날 보살필 테니 넌 안심하고 일하면 된단다.”안시연은 귀를 의심했다.“뭐라고요?”최미란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너희 엄마 그 사람이랑 완전히 끝냈어. 앞으로 경인시에서 지내며 너에게 해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다고 그랬어.”정말 믿을 수 없었다.소현정과 오성호가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어떻게 갑자기 헤어지겠는가?그러나 최미란은 아주 단호하게 퇴원하겠다고 했다.소현정은 아직 경인시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최미란은 안시연더러 퇴원 수속을 밟고 내일이면 퇴원하자고 졸랐다.안시연은 덜컥 겁이 났다.소현주가 경인으로 돌아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급히 퇴원
주변에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고 조이현은 미친 것처럼 아우성쳤다. 몇 개월 전 우아하고 도도하던 조이현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안시연 씨, 저희가 내쫓을까요?”경호원의 물음에 안시연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경찰에 신고부터 해주세요.”“네.”경호원이 경찰에 신고하자마자 주지혁이 도착했다.조이현에 비해 주지혁은 번듯한 정장 차림에 예전과 같은 반반한 얼굴이었고 조이현을 바라보는 시선에 지겨움이 가득했다.주지혁은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을 발견하고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바로 조이현을 낚아채고 밖으로 끌었다.“여기까지 와서 왜 난동을 피워?”주지혁이 도착하고 조이현은 더 흥분에 겨워 소리쳤다.“이래도 안시연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야? 내가 안시연 찾아오자마자 달려왔잖아. 너 안시연 못 잊었잖아!”조이현은 주지혁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꿈속에서 안시현 이름 불러서 뭐 해? 안시연은 돈 많은 남자 찾아 잘만 사는데.”안시연은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다.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주지혁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조씨 가문의 사위가 되겠다고 그 난리를 부리고 떠난 사람이 왜 그런 짓이나 하는 건지 참.안시연이 주지혁을 향해 말했다.“당장 데리고 가요. 안 그러면 우리 쪽에서 손 쓸 거니까.”안시연의 말에 조이현은 악독한 표정을 짓더니 주지혁의 손에서 벗어나 안시연을 향해 달려왔다.상황은 또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졌다.안시연은 행여나 최미란이 알게 될까 빠르게 사람을 시켜 조이현을 붙잡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 최미란을 진정시키려 했다.그런데 몸을 돌리니 병실 문이 벌써 열려 있었다.그 순간 안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게다가 조이현이 아무렇게나 흩뿌린 사진 중 몇 장이 최미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최미란이 허리를 숙여 사진을 주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막을 기회조차 없었다.그리고 이 틈을 타 조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할머님! 댁 손녀는 몸 파는 사람이에요! 스폰서를 찾
같은 시간 연정훈은 출장 중이었고 급하게 연락을 받았다.안시연은 수술실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경호원이 연정훈에게 연락했다.“핸드폰 그 사람한테 넘겨요.”“네.”경호원은 텅 빈 눈을 하는 안시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안시연 씨, 연정훈 대표님 전화입니다.”연정훈이라는 세 글자에 안시연은 조금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곧 죄책감에 시달렸다.만약 연정훈과 엮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시연아.”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은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사실 그건 아니었다.연정훈이 없었다면 안시연은 오늘까지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연정훈 씨...”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목이 메어왔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바로 병원장한테 연락해 제일 능력 좋은 의사를 보낼 테니 외할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안시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통화 종료 후 몇 분 뒤 낯선 얼굴의 의사가 찾아왔다.안시연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시야가 흐려졌고 많은 사람 중 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현주 씨 먼저 준비하고 있어요. 나랑 같이 들어가요.”“네.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주세요.”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시연도 대화 내용을 들었지만 최미란의 걱정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최미란이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왔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안시연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병원장은 안시연과 함께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고 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잠시 챙기다가 의사를 따라갔다.사무실 안에는 적지 않은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안시연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어르신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인 편입니다. 너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고 수술 경과도 좋습니다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