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고 조이현은 미친 것처럼 아우성쳤다. 몇 개월 전 우아하고 도도하던 조이현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안시연 씨, 저희가 내쫓을까요?”경호원의 물음에 안시연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경찰에 신고부터 해주세요.”“네.”경호원이 경찰에 신고하자마자 주지혁이 도착했다.조이현에 비해 주지혁은 번듯한 정장 차림에 예전과 같은 반반한 얼굴이었고 조이현을 바라보는 시선에 지겨움이 가득했다.주지혁은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을 발견하고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바로 조이현을 낚아채고 밖으로 끌었다.“여기까지 와서 왜 난동을 피워?”주지혁이 도착하고 조이현은 더 흥분에 겨워 소리쳤다.“이래도 안시연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야? 내가 안시연 찾아오자마자 달려왔잖아. 너 안시연 못 잊었잖아!”조이현은 주지혁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꿈속에서 안시현 이름 불러서 뭐 해? 안시연은 돈 많은 남자 찾아 잘만 사는데.”안시연은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다.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주지혁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조씨 가문의 사위가 되겠다고 그 난리를 부리고 떠난 사람이 왜 그런 짓이나 하는 건지 참.안시연이 주지혁을 향해 말했다.“당장 데리고 가요. 안 그러면 우리 쪽에서 손 쓸 거니까.”안시연의 말에 조이현은 악독한 표정을 짓더니 주지혁의 손에서 벗어나 안시연을 향해 달려왔다.상황은 또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졌다.안시연은 행여나 최미란이 알게 될까 빠르게 사람을 시켜 조이현을 붙잡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 최미란을 진정시키려 했다.그런데 몸을 돌리니 병실 문이 벌써 열려 있었다.그 순간 안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게다가 조이현이 아무렇게나 흩뿌린 사진 중 몇 장이 최미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최미란이 허리를 숙여 사진을 주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막을 기회조차 없었다.그리고 이 틈을 타 조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할머님! 댁 손녀는 몸 파는 사람이에요! 스폰서를 찾
같은 시간 연정훈은 출장 중이었고 급하게 연락을 받았다.안시연은 수술실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경호원이 연정훈에게 연락했다.“핸드폰 그 사람한테 넘겨요.”“네.”경호원은 텅 빈 눈을 하는 안시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안시연 씨, 연정훈 대표님 전화입니다.”연정훈이라는 세 글자에 안시연은 조금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곧 죄책감에 시달렸다.만약 연정훈과 엮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시연아.”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은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사실 그건 아니었다.연정훈이 없었다면 안시연은 오늘까지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연정훈 씨...”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목이 메어왔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바로 병원장한테 연락해 제일 능력 좋은 의사를 보낼 테니 외할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안시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통화 종료 후 몇 분 뒤 낯선 얼굴의 의사가 찾아왔다.안시연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시야가 흐려졌고 많은 사람 중 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현주 씨 먼저 준비하고 있어요. 나랑 같이 들어가요.”“네.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주세요.”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시연도 대화 내용을 들었지만 최미란의 걱정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최미란이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왔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안시연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병원장은 안시연과 함께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고 했고 안시연은 최미란을 잠시 챙기다가 의사를 따라갔다.사무실 안에는 적지 않은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안시연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어르신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인 편입니다. 너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고 수술 경과도 좋습니다
안시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안시연도 소현주 의사가 연정훈 과거의 여자가 맞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연정훈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의사가 퇴근했고 남자 의사 한 분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날이 상당히 추운 건지 따뜻한 병원 안에 들어선 연정훈의 몸에서 냉기가 사라지지 않았다.“좀 어때?”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챙겼다.안시연은 조금 전보다 많이 진정되었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다행히 외할머니한테 아무 문제없대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강한 척하는 게 눈에 보여 자신의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내가 돌아왔으니 남은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게.”“괜찮아요.”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서 나오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난 멀쩡해요. 방금 외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연정훈은 촉촉한 안시연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 아주 잘했어.”안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의사 사무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소현주가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외할머니 곁을 지킬 거야?”연정훈의 물음에 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의사가 그러는데 외할머니 푹 쉬어야 한대요. 그래서 간병인 두 명한테 맡기고 난 내일 낮에 오려고요.”최미란이 쓰러졌는데 안시연까지 무너질 수 없었다.많이 성숙한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안시연과 함께 한동안 병실 앞을 지키다가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조이현이 난동을 부린 사건은 크다고 하면 크고, 사소하다면 또 사소한 일이었다. 특히 연정훈 쪽 사람이 신고한 것이니 경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법대로 하세요. 처벌받을 건 당연히 받아야죠.”연정훈은 그 끝으로 전화를 끊고 안시연에게 물었다.“고소할 거야?”“네!”대답하는 안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조이현은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온갖 준비를 마쳐 최미란에게 충격을 주었고
서랍을 열자 도장 같은 물건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가장 깊숙한 곳에는 벨벳 재질의 짙은 색 액세서리 박스가 있었다.안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박스를 꺼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사파이어에 감탄을 자아냈다.이 목걸이의 이름이 스탄티스, 벤더였던 거로 기억했다.스탄티스.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그리고 불변의 사랑을 의미했다.연정훈과 소현주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본 적이 없어도 이 목걸이 하나에 질투에 눈이 멀 것 같았다.자리에 앉은 안시연은 오늘 만났던 소현주를 떠올렸다.그때, 서재 문이 벌컥 열리고 안시연은 손에 쥔 물건을 서랍 안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액세서리 박스를 닫아버렸다.유난히 조용한 방안에서 딸깍 닫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리자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안시연이 보였다.연정훈은 안시연 손에 쥔 목걸이를 발견했으나 평온하게 드라이기를 들고 안시연 맞은편에 앉았다.안시연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이렇게 빨리 씻은 거예요?”“요즘 돈 들어갈 곳이 많이 수도세 아끼려고.”연정훈의 농담에 안시연이 미소를 지었고 목걸이를 원상 복구하고 연정훈의 옆에 앉았다.“내가 말려줄까요?”“그럼 나야 감사하지.”연정훈이 드라이기를 넘겼다.안시연은 의자 등받이 뒤로 서서 거의 연정훈을 끌어안는 자세로 머리를 말렸다.연정훈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안시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얼마 후 안시연은 건조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다 됐어요.”그리고 드라이기를 정리했다.연정훈은 다시 눈을 뜨고 정리하고 있는 안시연에게 물었다.“그 목걸이 신경 쓰여?”안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저 목걸이 보면 그때 추억이 생각나지 않아요?”“난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어.”“그래도... 간직하고 있잖아요.”“아니. 간직한 게 아니라 잊어버린 거야.”안시연은 옛날 기억을 끄집어냈다.“브랜드 사에서 선물한 그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이 목걸이 나한테 준다고 말하더니 다시 몰래 챙겨갔
“누가 그래?”연정훈의 질문에 안시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누군가 나한테 알려줬어요.”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누가 자주 너한테 이런 말을 했던 거야?”안시연은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거론된 차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김세연이 처음 안시연을 내쫓았을 때도 소현주라는 이름이 나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다녔던 학교에 대한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만약 또 누군가 너한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한다면 꼭 나한테 알려줘. 내가 처리할게.”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말없이 연정훈을 쳐다보았는데 방금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어쩔 수 없이 연정훈은 바른대로 대답했다.“의사 맞아.”안시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오늘 만난 소현주 의사가 바로 소문 속 소씨 가문 아가씨라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만나 보니 과연 남달랐다.연정훈을 떠나고도 멋지게 제 전공을 살려 사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그래서 참지 못하고 또 질문했다.“왜 헤어진 건데요?”연정훈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그 사람이 원하는 걸 내가 해주지 못했고 그 사람에게 더 좋은 선택이 생겼거든.”안시연은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연정훈이 내내 잊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 연정훈 씨가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그건 그 사람 선택이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어.”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 들고 안방으로 걸어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두 팔을 감쌌고 여전히 불안해했다.그러자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우린 헤어지기 전이였어.”그러니 소현주의 배신이었다는 걸 의미했다.안시연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연정훈의 성격상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대답을 듣고 모든 상황이 납득되었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아직도 걱정돼?”연정훈은 안
퇴근할 무렵, 안시연은 간병인의 연락을 받았다.“안시연 씨. 연 대표님이 오셨어요.”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다.그러자 간병인은 사건전말을 세세히 설명했다. 알고 보니 최미란은 간병인을 수상히 여겨 간병인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을 말하지 않으면 당장 링거 뽑고 퇴원하겠다고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사에게 연락했고 연정훈에게도 연락이 갔던 것이었다.그 결과 연정훈이 병원을 찾아갔다.안시연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으로 뒤쫓았지만 병실 밖엔 이미 진수빈이 도착해 있었다.급하게 달려오는 안시연을 보며 진수빈이 말했다.“너무 급해 마세요. 연 대표님 할머님과 얘기 잘하고 계세요.”무슨 얘기?안시연은 연정훈이 최미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래서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서, 최미란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었으며 연정훈은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우리 시연이 어렸을 때는 사과를 많이 안 좋아했어요. 겨우 얼리고 달래서 한 조각씩 먹였어요.”“시연이 지금도 사과 좋아하지 않아요.”둘의 대화에 안시연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최미란은 아침보다 훨씬 편안해진 얼굴로 안시연에게 물었다.“퇴근한 거니?”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절반 나눠 최미란과 안시연에게 나눠줬다.“난 배고프지 않아요.”그러자 연정훈은 최미란을 향해 말했다.“봐요. 지금도 안 먹잖아요.”그 말에 최미란이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반쪽짜리 사과를 다시 절반으로 잘라 안시연에게 건넸다.“조금이라도 먹어. 저녁 먹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하니까.”“그래요.”안시연은 얼떨결에 사과를 받아쥐었다.그러자 최미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릴 때보다는 말을 잘 듣는구먼.”안시연이 조금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혔다.“할머니...”병실은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안시연은 연정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드
연정훈은 소현주를 발견하고 얼굴을 살짝 굳혔고 안시연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세상의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연정훈의 옛 애인을 안시연이 먼저 마주쳤고 오늘 드디어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소현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연정훈과 안시연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며 얼굴을 굳혔다.몇 초 후, 정신을 차린 소현주가 먼저 그곳으로 다가갔다.소현주의 등장에 연정훈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젯밤 소현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걸 보아 두 사람이 먼저 만났다는 걸 이미 예상한 터였다.소현주가 입을 열었다.“오랜만이야.”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의도가 다분하게 물었다.“소현주 의사와 아는 사이였어요?”“...”안시연과 소현주는 말없이 연정훈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래.”연정훈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안시연을 제 옆으로 당기고 소현주에게 인사를 시켰다.“여긴 내 여자 친구, 안시연.”소현주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그러나 다시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을 향해 악수를 건넸다.“우리 어제도 만났지만 다시 인사해요.”안시연도 소현주의 손을 잡았다.짧은 접촉이었지만 왠지 소현주가 껄끄럽게 느껴졌다.다행히 연정훈은 이런 어색한 상황이 계속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현주와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고 안시연의 손을 잡고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소현주는 덩그러니 자리에 남겨졌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안시연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고개를 돌리니 태연하게 미소를 짓는 소현주가 보였다.다른 동기가 소현주를 찾자 소현주는 연정훈이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기와 대화했다.차에 오르고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소현주 만나고 와서 날 떠본 거야?”“맞아요.”안시연이 솔직하게 인정하자 연정훈도 할 말이 없었다.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다니. 연정훈은 잔꾀 많은 소현주가 손을 댄 게 아닌지 의심이 갔다.
반우희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반우희는 편한 운동복 차림에 한 손에는 삶은 옥수수를 들고 있었고 안시연과 연정훈을 향해 두 눈을 반짝였다.“안시연 씨도 여기 살아요?”안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 외할머니가 곧 여기로 이사 올 거예요.”“정말 이런 우연이!”비록 작은 우연이었지만 안시연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지인이 위층에서 지낸다면 외할머니가 이곳에서 지내도 안심을 할 수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반우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두 사람이 대화하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집안에는 쌓인 먼지가 많았고 저녁 여가 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청소하려 했다. 안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청소 도구도 빌렸다.그리고 반우희는 위층을 향해 한껏 목청을 높였는데 버섯 머리의 세 아이가 쪼르르 내려왔다. 남자아이 두 명과 여자아이 한 명이었는데 모두 10살 정도로 보였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반우희 씨 동생이에요?”반우희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안녕하세요!”버섯 머리 세 명이 꾸벅 인사를 올렸다.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 안에 뒀던 간식을 넘겨줬다.간식을 받은 아이들은 소매를 걷으며 너도나도 일을 돕겠다고 했다.집안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가장 밝은 남자아이의 이름은 승주였고 연정훈을 힐끗 살피며 몰래 안시연에게 말했다.“누나 남자 친구는 참 게을러요.”“...”연정훈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갔다.그러나 안시연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는 옥수수를 지그시 입에 물더니 깨끗한 수건을 연정훈에게 건넸다.“연정훈 씨도 쉬지 말고 빨리 창문부터 닦아요.”연정훈은 눈앞이 캄캄해졌다.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떠올리며 연정훈은 수건을 받아 쥐었다.안시연은 말없이 수건을 들고 창문을 닦는 연정훈이 조금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몰래 자신을 반성했다.연정훈은 자신을 위해 계속 변하고 있으니 굳이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주와 아이들은 숙제하러 방으로 돌아갔다.반우희는 부승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고 부승원에게 자리를 찾아준 뒤 열심히 문제지를 풀었다.부승원은 그제야 반우희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자신이 반우희에게 잘해주는 날이면 반우희는 보답을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정말 바보 같긴.’“2년 안으로 사법고시 넘을 자신 있어?”반우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자신 있습니다!”“사법고시 넘으면 뭘 할 건데?”“음... 사건 받아야죠?”“...”“꿈도 야무져. 그렇게 쉽게 사건 의뢰가 들어올 것 같아?”반우희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그때, 부승원은 부모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 있어?”“지금 하고 있잖아요?”“그거 말고. 좋은 대학 다니고 싶은 그런 거 말이야.”“에이. 학력도 안 좋은데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그게 뭐가 중요해. 너만 좋다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어느 대학인데요?”“세계 어디든.”반우희는 멈칫하더니 펜을 내려두고 부승원을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날... 해외로 보내려는 거예요?”반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연애를 실컷 하고 해외로 보내, 반 헤어짐 상태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설명하려고 했으나 말 대신 볼을 쭉 잡아당겼다.“해외 연수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금 성적으로는 돈 가득 쏟아부어도 안 돼.”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그쵸? 아무리 나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렇게 뭐든지 해주면 안 되는 거죠.”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 연수 가고 싶어?”부승원은 다시 떠보듯 물었고 반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요.”“왜?”반우희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부승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반우희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요?”반우희가 다가오자 희주는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비밀이에요.”반우희는 몰래 혀를 찼다.다른 한편, 배가 부른 승주는 애어른처럼 요즘 가정 상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우리가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신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 사람 덕분이죠.”그러자 반우희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바로 누나... 의 남자 친구 덕분이에요!”“...”“야!”반우희는 승주는 슬쩍 노려봤으나 승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몰래 맥주 맛을 보더니 쓴맛에 혀를 두르며 말했다.“매형, 솔직히 우리 셋이 발목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꼬맹이들은 모두 부승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털털한 반우희와는 달리 세 아이는 아닌 척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그래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게 불편하고 누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가재를 입에 넣더니 승주와 짠을 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실력으론 너희 셋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승주는 몰래 숨을 돌리며 부승원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식사 막바지에 다다르니 가재는 줄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 오갔다.반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찾았다.희주도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다.부승원은 승주가 아직도 저에게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누나한테 들어보니 매형 어머니가 오늘 누나 만났다면서요?”부승원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말했다.“그래. 조금 긴장한 건지 딸꾹질했는데 그것도 너한테 말한 거야?”“별건 아니고, 너무 창피했다면서 누나가 용기를 달라고 했어요.”“어머니가 우희 괴롭힌 거 아니야. 우희가 지레 겁을 먹은 거지.”“누나는 언젠간 삼촌 어머니가 드라마처럼 수표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누나는 어떻게 할 대책이었는데?”“대책이라
부승원은 승주의 초대를 받고 반우희의 집으로 향했다.집 안은 벌써 떠들썩했는데 승주와 반우희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었다.“마늘 향이 제일 맛있어!”“에이 마라가 찐이죠!”승주가 반우희를 타이르듯 말했다.“마늘 향 먹으면 양치해도 마늘 향이 남는데 남자 친구랑 뽀뽀할 수 있겠어요?”“...”반우희는 순식간에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틈을 타 승주가 마지막 승부사를 날렸다.“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요. 우리 마라 맛으로 해요!”“마늘 맛 조금만.”반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마늘 맛도 조금 해줘. 너희 누나 정말 먹는 거에 진심이라니까.”부승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 목소리에 승주와 반우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우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왔어요?”승주는 그사이에 삶은 가재를 한입 먹으며 부승원을 불렀다.“삼촌, 여기로 와서 앉아요. 동준아, 우리 매형한테 술 따라드려!”“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주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삼촌이었다가 매형이었다가 호칭 좀 통일하면 안 돼?”“나한테는 삼촌이지만 누나의 남자 친구일 때는 매형이니까 틀린 거 없잖아요!”승주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어휴. 좀 조용히 해!”그러나 승주는 이런 일로 풀이 죽을 아이가 아니었고 바로 가재를 입안 가득 넣었다.부승원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남은 거 뭐 있어? 내가 할게.”그러자 반우희가 말했다.“오이무침할 줄 알아요?”“응.”“그럼 부탁할게요.”주방에는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온도가 아주 뜨거웠다.부승원은 언젠간 이 집의 가전제품을 다 새것으로 갈아주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손놀림이 빠른 부승원은 빠르게 오이무침을 완성했다.반우희는 가재를 입맛별로 나눠 상에 올렸고 작은 상이 부러질 듯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되었다.부승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집을 오갔던 터라 이젠 익숙하게 밥상 앞에 앉았다.희주는 부승
날이 어두워지고 부승원은 본가로 향했다.부승희는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원을 발견한 채애정은 활짝 웃으며 손 씻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약속인 것이냐?”아버지 부형석의 질문에 부승원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대답했다.“네.”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니 부모님은 부승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대신 꿀물로 속을 채우게 했다.“네 어머니가 오늘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어. 복스럽게 생겼다던데.”“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예쁘던데 나이가 좀 어려요.”채애정의 말에도 부승원은 묵묵히 꿀물을 마시며 대꾸하지 않았다.한참 뒤 부혁석이 물었다.“그 아이랑은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무슨 말씀인지?”부형석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봤고 채애정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마요. 우리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래요?’부형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질문을 이어가기로 했다.“나와 네 어머니의 생각은 그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네 옆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해외 연수를 다녀와 몇 년 뒤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그러자 채애정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본인 생각이면서 왜 나까지 함께 묶고 그래요?’부형석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게를 잡았다.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이런 부승원의 모습에 채애정과 부형석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내려놓은 잔만 챙겨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도련님 부승원에게 쉽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부승원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시선에 두 사람은 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졌다.“몇 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가 결혼하면 그래도 짝으로 걸맞으니 창피하지 않으실 거고, 내가 그동안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실 거잖아요. 그 아이는 돈과 명예를 가졌으니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그렇죠?
부승원의 사무실에서.소파에 앉은 반우희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가 너무 웃겨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당당하더니 우리 어머니 만나고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반우희는 영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렇게 넋이 빠진 모습으로 있지 말고 여기로 와.”반우희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그리고 턱받침을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어머님이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면 어떡해요?”부승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마음에 안 들면 뭐 어때?”반우희가 입을 삐죽이더니 평소대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이게 다 변호사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부승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정말? 네가 내 생각을 했다고?”반우희는 작게 콧방귀를 뀌더니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어머님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변호사님이 날 만나지 못할 테니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으로 조금 더 당겨 앉으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이도 들고 나한테 이렇게 돈도 많이 쏟았는데 결혼까지 가지 못하면 변호사님만 억울하잖아요.”그리고 반우희는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꽤 양심 발언이네? 내가 억울할 가봐 걱정도 하고?”반우희는 다시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난 늘 그랬어요. 다른 사람한테 빚지고는 못 살아요.”“내가 제안 하나 할까?”부승원은 펜을 내리고 옆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 아마도 옆방에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그 말에 반우희는 바로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이에 부승원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결국 너도 말뿐이네.”반우희는 한숨만 풀풀 내쉬었고 더 고민에 휩싸였다.‘정신 차려 반우희! 너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그리고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승주한테 조언을 받아야겠어요.”‘승주한테 조언을 받는
딸꾹!딸꾹!반우희는 부승원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부승원은 몸을 돌려 반우희를 살폈다.“왜 그래?”‘그게 아니라.’반우희는 서둘러 부승원을 당겨 채애정의 시선을 가렸다.지금 딸꾹질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게 뻔했고 못생기게 보일 수는 없었다.부승원은 자기 셔츠 끝자락을 잡은 반우희를 보며 빠르게 자리에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 그리고 채애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게...”채애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부승원이 반우희를 챙기느라 손이 부족하자 채애정은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우희 씨, 괜찮아요?”“딸꾹... 네! 딸꾹... 괜... 찮습니다!”“...”부승원은 물을 건네받고 직접 반우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까?”반우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어머님만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부승원이 옆에 있었기에 반우희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드디어 딸꾹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채애정이 다가가 또 말을 걸었다.그런데!반우희는 더 긴장되어, 또 딸꾹, 하고 딸꾹질하고 말았다.“...”딸꾹!딸꾹!결국 다시 시작이 되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긴장이 되어 딸꾹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거의 자신의 품에 가두다시피 하며 채애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채애정은 더 이상 대화는 무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먼저 가볼게. 내가 뭐 겁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란 거야?”“오신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정말 연애 좀 한다고 이 엄마는 뒷전인 거니?’‘어휴. 그래도 드디어 연애한다니 다행이긴 해.’채애정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었다.그때, 반우희가 빠르게 부승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반우희가 핸드폰에 적은 문자를 확인하고 채애정을 다시 불렀다.채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
“이름은 뭐예요?”“반우희입니다. 넉넉할 우와 기쁠 희입니다.”“그래요?”“그럼, 나이는?”“스물두 살입니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반우희는 도시락을 손에 쥐었지만 한 입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질문에만 꼬박꼬박 대답했다.“괜찮아요. 편하게 먹어요.”채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크게 한 입 떠먹었다.채애정은 다정한 말투로 또 질문을 이었다.“승원이가 없어도 혼자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반우희는 채애정이 아직 본인과 부승원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조금 머리를 굴려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평소에 사내 식당을 이용하고 자주 사무실에 오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채애정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반우희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반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아니에요.”채애정은 동그란 얼굴의 반우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부승희가 반우희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인상도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우희의 나이를 들은 채애정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제 아들이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부승희의 말 대로 그동안 할 건 다 하고 산 모양이었다.게다가 그 깔끔하던 아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도 용납하고 있다니,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그래 스물둘이면 미성년자도 아니고 괜찮지, 뭐.’반우희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채애정이 계속 반찬을 집어주는 덕에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채애정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수표 한 장 던져주면서 아들이랑 헤어지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음...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그러나 그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위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반우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내가 가서 밥 먹여줄까?”“좋죠.”“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연정훈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치자 양시연은 다급하게 말렸다.“그러지 마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그럼 밥 먹을 때 영상 통화할까? 같이 먹고 싶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좋아요.”한참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양시연은 방금 주지혁과 만났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지혁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조이현을 말리지 못한다고 해도 간섭은 할 거예요. 앞으로도 조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조이현이 가문을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애초에 조씨 가문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게 한 건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주지혁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바로 조이현을 처리할 것이다.하지만 주지혁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오늘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는 건 되려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연재혁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데 더 이상 조씨 가문이 논란을 만들게 하지 막아야만 했다.만약 주지혁이 계속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고 굳이 논란을 피운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이러한 얘기를 했었고 양시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시켜 주 대표 조사하라고 해.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건 좋은 데 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되잖아.”“나도 알아요.”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양시연도 회사에 도착했다.이어 점심을 주문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반우희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요즘엔 사내 식당도 아닌 양시연의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양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혼자 먹기엔 버거워 반우희와 함께 나눴었다.그런데 멀리서 보니 오늘엔 연정훈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반우희는 도시락을 들고 양시연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부승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오늘 부승원은 점심 약속이 있어 사무실을 비웠다.그래서 부승원의 큰
점심시간이 되자 양시연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주지혁 앞에서 게걸스레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간단히 배만 채우며 바로 조이현이 신고한 일을 입에 올렸다.주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이 일은 정말 나도 몰랐어.”양시연은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현 씨가 이러는 건 정말 난동이고 민폐예요. 난 이현 씨에게 잘못한 거 하나 없고 잘못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거죠.”주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아, 내가 미안해.”“지난 일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발 본인 아내 간수를 잘하라고 말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줘요.”양시연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손끝을 바라봤다. 과거의 양시연은 일하는 데 불편하고 집안일하는데 거슬린다며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그리고 차라리 네일 하는 돈으로 간식이나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힘들게 돈을 버는 주지혁을 마음 아파하며 선물한 팔찌도 마다했었다.돈 모아서 결혼하자고 말했던 과거 양시연을 떠올리며 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쓴 차를 들이켰다.“돌아가서 잘 얘기해 볼게.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그러길 바랄게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책임질 가족도, 사업도 있는 사람이에요. 조씨 가문은 경인에서 좋은 입지를 가졌고 지혁 씨도 승승장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요.”‘행복이라...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미친 조이현은 평생 내게 들러붙으러 작정을 한 것 같은데.’주지혁은 더 올라가려면 피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을힘을 다해야 조이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주지혁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시연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연정훈의 부담을 덜어주려 온 것 같았고, 진심으로 연정훈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는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