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안시연도 소현주 의사가 연정훈 과거의 여자가 맞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연정훈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의사가 퇴근했고 남자 의사 한 분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날이 상당히 추운 건지 따뜻한 병원 안에 들어선 연정훈의 몸에서 냉기가 사라지지 않았다.“좀 어때?”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챙겼다.안시연은 조금 전보다 많이 진정되었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다행히 외할머니한테 아무 문제없대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강한 척하는 게 눈에 보여 자신의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내가 돌아왔으니 남은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게.”“괜찮아요.”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서 나오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난 멀쩡해요. 방금 외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연정훈은 촉촉한 안시연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 아주 잘했어.”안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의사 사무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소현주가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외할머니 곁을 지킬 거야?”연정훈의 물음에 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의사가 그러는데 외할머니 푹 쉬어야 한대요. 그래서 간병인 두 명한테 맡기고 난 내일 낮에 오려고요.”최미란이 쓰러졌는데 안시연까지 무너질 수 없었다.많이 성숙한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안시연과 함께 한동안 병실 앞을 지키다가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조이현이 난동을 부린 사건은 크다고 하면 크고, 사소하다면 또 사소한 일이었다. 특히 연정훈 쪽 사람이 신고한 것이니 경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법대로 하세요. 처벌받을 건 당연히 받아야죠.”연정훈은 그 끝으로 전화를 끊고 안시연에게 물었다.“고소할 거야?”“네!”대답하는 안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조이현은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온갖 준비를 마쳐 최미란에게 충격을 주었고
서랍을 열자 도장 같은 물건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가장 깊숙한 곳에는 벨벳 재질의 짙은 색 액세서리 박스가 있었다.안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박스를 꺼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사파이어에 감탄을 자아냈다.이 목걸이의 이름이 스탄티스, 벤더였던 거로 기억했다.스탄티스.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그리고 불변의 사랑을 의미했다.연정훈과 소현주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본 적이 없어도 이 목걸이 하나에 질투에 눈이 멀 것 같았다.자리에 앉은 안시연은 오늘 만났던 소현주를 떠올렸다.그때, 서재 문이 벌컥 열리고 안시연은 손에 쥔 물건을 서랍 안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액세서리 박스를 닫아버렸다.유난히 조용한 방안에서 딸깍 닫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리자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안시연이 보였다.연정훈은 안시연 손에 쥔 목걸이를 발견했으나 평온하게 드라이기를 들고 안시연 맞은편에 앉았다.안시연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이렇게 빨리 씻은 거예요?”“요즘 돈 들어갈 곳이 많이 수도세 아끼려고.”연정훈의 농담에 안시연이 미소를 지었고 목걸이를 원상 복구하고 연정훈의 옆에 앉았다.“내가 말려줄까요?”“그럼 나야 감사하지.”연정훈이 드라이기를 넘겼다.안시연은 의자 등받이 뒤로 서서 거의 연정훈을 끌어안는 자세로 머리를 말렸다.연정훈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안시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얼마 후 안시연은 건조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다 됐어요.”그리고 드라이기를 정리했다.연정훈은 다시 눈을 뜨고 정리하고 있는 안시연에게 물었다.“그 목걸이 신경 쓰여?”안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저 목걸이 보면 그때 추억이 생각나지 않아요?”“난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어.”“그래도... 간직하고 있잖아요.”“아니. 간직한 게 아니라 잊어버린 거야.”안시연은 옛날 기억을 끄집어냈다.“브랜드 사에서 선물한 그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이 목걸이 나한테 준다고 말하더니 다시 몰래 챙겨갔
“누가 그래?”연정훈의 질문에 안시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누군가 나한테 알려줬어요.”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누가 자주 너한테 이런 말을 했던 거야?”안시연은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거론된 차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김세연이 처음 안시연을 내쫓았을 때도 소현주라는 이름이 나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다녔던 학교에 대한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만약 또 누군가 너한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한다면 꼭 나한테 알려줘. 내가 처리할게.”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말없이 연정훈을 쳐다보았는데 방금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어쩔 수 없이 연정훈은 바른대로 대답했다.“의사 맞아.”안시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오늘 만난 소현주 의사가 바로 소문 속 소씨 가문 아가씨라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만나 보니 과연 남달랐다.연정훈을 떠나고도 멋지게 제 전공을 살려 사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그래서 참지 못하고 또 질문했다.“왜 헤어진 건데요?”연정훈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그 사람이 원하는 걸 내가 해주지 못했고 그 사람에게 더 좋은 선택이 생겼거든.”안시연은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연정훈이 내내 잊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 연정훈 씨가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그건 그 사람 선택이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어.”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 들고 안방으로 걸어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두 팔을 감쌌고 여전히 불안해했다.그러자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우린 헤어지기 전이였어.”그러니 소현주의 배신이었다는 걸 의미했다.안시연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연정훈의 성격상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대답을 듣고 모든 상황이 납득되었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아직도 걱정돼?”연정훈은 안
퇴근할 무렵, 안시연은 간병인의 연락을 받았다.“안시연 씨. 연 대표님이 오셨어요.”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다.그러자 간병인은 사건전말을 세세히 설명했다. 알고 보니 최미란은 간병인을 수상히 여겨 간병인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을 말하지 않으면 당장 링거 뽑고 퇴원하겠다고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사에게 연락했고 연정훈에게도 연락이 갔던 것이었다.그 결과 연정훈이 병원을 찾아갔다.안시연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으로 뒤쫓았지만 병실 밖엔 이미 진수빈이 도착해 있었다.급하게 달려오는 안시연을 보며 진수빈이 말했다.“너무 급해 마세요. 연 대표님 할머님과 얘기 잘하고 계세요.”무슨 얘기?안시연은 연정훈이 최미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래서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서, 최미란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었으며 연정훈은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우리 시연이 어렸을 때는 사과를 많이 안 좋아했어요. 겨우 얼리고 달래서 한 조각씩 먹였어요.”“시연이 지금도 사과 좋아하지 않아요.”둘의 대화에 안시연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최미란은 아침보다 훨씬 편안해진 얼굴로 안시연에게 물었다.“퇴근한 거니?”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절반 나눠 최미란과 안시연에게 나눠줬다.“난 배고프지 않아요.”그러자 연정훈은 최미란을 향해 말했다.“봐요. 지금도 안 먹잖아요.”그 말에 최미란이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반쪽짜리 사과를 다시 절반으로 잘라 안시연에게 건넸다.“조금이라도 먹어. 저녁 먹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하니까.”“그래요.”안시연은 얼떨결에 사과를 받아쥐었다.그러자 최미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릴 때보다는 말을 잘 듣는구먼.”안시연이 조금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혔다.“할머니...”병실은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안시연은 연정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드
연정훈은 소현주를 발견하고 얼굴을 살짝 굳혔고 안시연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세상의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연정훈의 옛 애인을 안시연이 먼저 마주쳤고 오늘 드디어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소현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연정훈과 안시연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며 얼굴을 굳혔다.몇 초 후, 정신을 차린 소현주가 먼저 그곳으로 다가갔다.소현주의 등장에 연정훈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젯밤 소현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걸 보아 두 사람이 먼저 만났다는 걸 이미 예상한 터였다.소현주가 입을 열었다.“오랜만이야.”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의도가 다분하게 물었다.“소현주 의사와 아는 사이였어요?”“...”안시연과 소현주는 말없이 연정훈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래.”연정훈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안시연을 제 옆으로 당기고 소현주에게 인사를 시켰다.“여긴 내 여자 친구, 안시연.”소현주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그러나 다시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을 향해 악수를 건넸다.“우리 어제도 만났지만 다시 인사해요.”안시연도 소현주의 손을 잡았다.짧은 접촉이었지만 왠지 소현주가 껄끄럽게 느껴졌다.다행히 연정훈은 이런 어색한 상황이 계속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현주와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고 안시연의 손을 잡고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소현주는 덩그러니 자리에 남겨졌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안시연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고개를 돌리니 태연하게 미소를 짓는 소현주가 보였다.다른 동기가 소현주를 찾자 소현주는 연정훈이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기와 대화했다.차에 오르고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소현주 만나고 와서 날 떠본 거야?”“맞아요.”안시연이 솔직하게 인정하자 연정훈도 할 말이 없었다.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다니. 연정훈은 잔꾀 많은 소현주가 손을 댄 게 아닌지 의심이 갔다.
반우희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반우희는 편한 운동복 차림에 한 손에는 삶은 옥수수를 들고 있었고 안시연과 연정훈을 향해 두 눈을 반짝였다.“안시연 씨도 여기 살아요?”안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 외할머니가 곧 여기로 이사 올 거예요.”“정말 이런 우연이!”비록 작은 우연이었지만 안시연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지인이 위층에서 지낸다면 외할머니가 이곳에서 지내도 안심을 할 수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반우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두 사람이 대화하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집안에는 쌓인 먼지가 많았고 저녁 여가 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청소하려 했다. 안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청소 도구도 빌렸다.그리고 반우희는 위층을 향해 한껏 목청을 높였는데 버섯 머리의 세 아이가 쪼르르 내려왔다. 남자아이 두 명과 여자아이 한 명이었는데 모두 10살 정도로 보였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반우희 씨 동생이에요?”반우희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안녕하세요!”버섯 머리 세 명이 꾸벅 인사를 올렸다.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 안에 뒀던 간식을 넘겨줬다.간식을 받은 아이들은 소매를 걷으며 너도나도 일을 돕겠다고 했다.집안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가장 밝은 남자아이의 이름은 승주였고 연정훈을 힐끗 살피며 몰래 안시연에게 말했다.“누나 남자 친구는 참 게을러요.”“...”연정훈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갔다.그러나 안시연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는 옥수수를 지그시 입에 물더니 깨끗한 수건을 연정훈에게 건넸다.“연정훈 씨도 쉬지 말고 빨리 창문부터 닦아요.”연정훈은 눈앞이 캄캄해졌다.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떠올리며 연정훈은 수건을 받아 쥐었다.안시연은 말없이 수건을 들고 창문을 닦는 연정훈이 조금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몰래 자신을 반성했다.연정훈은 자신을 위해 계속 변하고 있으니 굳이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실 진수빈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연정훈을 찾았다. 두 사람의 연애 시절도 지켜봤었던 진수빈이라 연정훈이 소현주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비운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만약 소현주에게 정말 문제가 생긴다면 진수빈은 사실을 알리지 않은 죄를 뒤집어쓸 수 있었다.이에 진수빈은 선택권을 연정훈에게 넘기기로 했다.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연정훈이 고개를 들자 작은 고개는 쏘옥 다시 들어갔다가 또 몰래 빼꼼 내밀었다.승주라는 이름의 남자아이였다.저 꼬마가 대체 어디에서부터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안시연은 바로 위층에 있었고 꼬마가 이상한 말이라도 꺼낸다면 연정훈은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연정훈은 직접 소현주를 구하러 갈 마음이 없었다. 못 들은 척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아량을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다.“경찰에 신고해.”그리고 연정훈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남겨진 진수빈은 단순히 경찰에 신고할 것인지, 아니면 연정훈의 이름을 빌려 경찰 쪽에 연락을 남길 것인지를 고민했다.‘에휴.’위층의 안시연은 연정훈이 다시 돌아온 걸 발견하고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연정훈은 옆에서 간을 보는 개구쟁이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소현주에게 일이 생겼다는데 경찰에 대신 신고해 줬어.”안시연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 표정으로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갔다.“무...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은 바른대로 말했다.“식사 자리에서 곤란한 상황이 생겼대.”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직접 연락해 도와달라고 했어요?”“난 연락처 차단했고 운전기사를 통해 나에게 알렸어.”“그렇구나...”옆의 반우희는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빠르게 소란을 피우는 세 아이를 진정시켰다.그때, 연정훈의 핸드폰이 울렸다.직감적으로 소현주와 관련된 일이라는 게 느껴졌다.연정훈이 전화를 받았고 대화 내용은 회사에 관련된 것이었다.“지금 회사에 가봐야겠어. 넌 여기에서 기
연정훈이 회사로 돌아간 건 정말 급한 볼일이 생긴 게 맞았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해결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꽤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한참 바삐 움직이는데 진수빈이 연락을 와 소현주 사건을 해결했다고 전했다.사인하던 연정훈의 손이 뚝 멈춰 섰다. 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통화를 종료했고 소현주 연락처 차단을 풀었다.얼마 뒤 소현주가 전화를 걸어왔다.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두 사람은 한참 침묵을 유지했다.결국 참지 못한 소현주가 피곤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오늘 저녁엔 고마웠어.”연정훈은 펜을 내려 두고 의자 등받이 몸을 기댔다.“내가 전에 했던 말 잊었어?”“기억해...”“그럼 오늘 직접 신고했어야지.”그 말에 소현주가 냉소를 터뜨렸다.“정훈아, 내가 신고했다면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그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야.”냉기가 도는 연정훈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전화를 끊었을 것이다.하지만 소현주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한때 연정훈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으로 연정훈의 차가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정훈아, 아직도 나한테 많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아.”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연정훈은 무표정으로 다시 펜을 들고 문서를 처리했다.차단을 해제한 건 소현주와 과거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한 주일 시간 줄게. 안시연 외할머니를 다른 의사에게 넘겨.”차단을 푼 게 겨우 이 이유인 것을 소현주는 예상하지 못했다.소현주는 한발 늦어버렸다.“난 내 힘으로 정당한 경로로 취직했어. 안시연 씨 만난 건 단지 우연일 뿐이야.”소현주가 덤덤하게 변명했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우연은 존재하지 않아.”“나랑 자주 만나는 게 불편하대?”“이런 이유라면 너 정말 실망이야.”연정훈은 소현주가 잔꾀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안시연은 소현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선택했으니 안시연을 감싸고 도는 게 당연했다.소현주는 한참 침묵했다.“연정훈,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