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이 회사로 돌아간 건 정말 급한 볼일이 생긴 게 맞았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해결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꽤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한참 바삐 움직이는데 진수빈이 연락을 와 소현주 사건을 해결했다고 전했다.사인하던 연정훈의 손이 뚝 멈춰 섰다. 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통화를 종료했고 소현주 연락처 차단을 풀었다.얼마 뒤 소현주가 전화를 걸어왔다.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두 사람은 한참 침묵을 유지했다.결국 참지 못한 소현주가 피곤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오늘 저녁엔 고마웠어.”연정훈은 펜을 내려 두고 의자 등받이 몸을 기댔다.“내가 전에 했던 말 잊었어?”“기억해...”“그럼 오늘 직접 신고했어야지.”그 말에 소현주가 냉소를 터뜨렸다.“정훈아, 내가 신고했다면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그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야.”냉기가 도는 연정훈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전화를 끊었을 것이다.하지만 소현주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한때 연정훈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으로 연정훈의 차가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정훈아, 아직도 나한테 많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아.”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연정훈은 무표정으로 다시 펜을 들고 문서를 처리했다.차단을 해제한 건 소현주와 과거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한 주일 시간 줄게. 안시연 외할머니를 다른 의사에게 넘겨.”차단을 푼 게 겨우 이 이유인 것을 소현주는 예상하지 못했다.소현주는 한발 늦어버렸다.“난 내 힘으로 정당한 경로로 취직했어. 안시연 씨 만난 건 단지 우연일 뿐이야.”소현주가 덤덤하게 변명했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우연은 존재하지 않아.”“나랑 자주 만나는 게 불편하대?”“이런 이유라면 너 정말 실망이야.”연정훈은 소현주가 잔꾀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안시연은 소현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선택했으니 안시연을 감싸고 도는 게 당연했다.소현주는 한참 침묵했다.“연정훈,
배신은 말 그대로 배신이었고 그 어떤 이유를 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연정훈에게 있어 이유는 결국 변명이었고 굳이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연정훈이 아무 말없자 소현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 넌 재벌가 도련님이었고 난 내 최선을 다해 겨우 좋은 학교를 나왔지. 그래도 우린 대화가 잘 통했고 바라보는 미래도 일치해 어쩌면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그래서 우리가 결혼하고 함께 그릴 미래를 꿈꿨지.”소현주는 덤덤하게 말을 꺼냈으나 자꾸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낮아졌고 어느새 눈시울마저 붉어졌다.“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난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잘 수 없었고 넌 나와의 결혼을 약속하지 않아 더욱 불안에 휩싸였지.”소현주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소현주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연정훈은 이런 소현주의 모습에도 전혀 미동이 없었으며 차가운 얼굴을 유지했다.소현주가 두 눈을 감더니 가방에서 USB 하나를 꺼냈다.“내가 널 떠나게 된 건 네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목이 메어 한참 뜸을 들인 소현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날 성폭행했어.”큰 사무실에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이 찾아왔다.연정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소현주는 조용히 손에 쥔 USB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그날 차 안의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이야.”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연정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사람을 시켜 아들의 여자 친구를 성폭행하다니 김세연의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연정훈이 믿지 못하자 소현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공휘라는 사람 알지?”그 이름에 연정훈이 표정을 팍 찡그렸다.공휘는 김세연의 사촌 동생으로 늘 철없이 허송세월하는 사람이었다.“그러니까 어머니가 삼촌을 시
연씨 저택 거실에서.“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김세연이 불같이 화를 냈고 잠이 확 깨었다.“내가... 내가 사람을 시켜 뭘 했다고?”김세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무서운 얼굴의 연정훈을 보며 김세연은 뒷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난 공휘를 시켜 소현주의 배경을 캐보라고 한 적은 있어.”“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삼촌을 시킨 거예요?”김세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래서 어깨까지 내려온 외투를 다시 걸치며 소파에 앉았다. 이어 애써 침착하게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공휘 그 녀석도 참 멋대로였지. 처음엔 쓸모 있는 정보를 넘겨줬지만 그 후엔 소식이 뜸했어...”김세연은 말을 뚝 멈췄다.그리고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공휘가 정보를 주지 않은 이유가 설마...’김세연은 고개를 번쩍 들고 연정훈과 탁자 위의 USB를 번갈아 보았다.“이 안에 든 걸 확인해 봤어?”연정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김세연은 제 아들을 잘 알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 야밤에 굳이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조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과거 공휘의 설명되지 않던 행동과 소현주가 갑자기 에릭과 눈이 맞았던 그 이유가 순간 납득이 되었다.“난...”김세연은 몸을 일으켜 연정훈에게 다가가며 변명했다.“공휘를 시켜 조사를 해보라고 했지. 소현주에게 손을 댈 줄은 나도 몰랐어...”연정훈은 지금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정말 갑자기 뺨을 세게 맞은 것처럼 분통했는데 더 화가 나는 건 되받아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연정훈의 표정을 살피며 김세연이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사람 시켜 다시 조사해 보는 게 어떨까?”김세연은 잘못을 혼자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사람을 시켜 삼촌을 국내로 데려올게요.”김세연이 손을 휘휘 저었다.“그럴 필요 없단다.”김세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몇 달 전 약에 취해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 병원에 입
“시연 언니,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벌써 새벽이 되고 아이들은 위층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반우희는 안시연이 신경 쓰여 여태껏 안시연의 옆을 지켰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마 연정훈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이곳에서 기다리기로 약속을 했으니 안시연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 연정훈에게 문자나 보낼 뿐이었다.[많이 피곤하죠? 일찍 돌아와요.]연정훈은 한참 뒤에 회답했다.[그래.]안시연은 문자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반우희에게 말했다.“저도 이만 돌아가 보려고요.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우희 씨도 빨리 올라가서 쉬어요.”반우희는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나 돌아간다는 안시연의 말에 빠르게 몸을 일으켜 버릴 쓰레기봉투를 대신 챙겼다.방금 눈이 내린 경인은 날씨가 쌀쌀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래서 외투를 고쳐 입고 차에 올라탔다.눈이 내린 도시는 아주 예뻤고 집에 돌아가 우유 두 잔을 데워 놓으면 연정훈이 잠들기 전에 마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인덕원에서.연정훈의 차량은 별장 밖에 한참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연정훈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배 반 갑을 태웠다.어느새 추위에 몸이 꽁꽁 얼어붙자, 큰마음을 먹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소현주는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다.연정훈이 이곳으로 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얼굴을 마주했다.문을 열자 느껴지는 온기에 연정훈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이 별장은 연정훈이 소현주에게 선물한 별장이었다. 이곳에서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많은 추억이 묻어있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소현주는 말없이 연정훈에게 슬리퍼를 꺼내주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슬리퍼 대신 맨발로 집안에 들어섰다.소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어 따뜻한 물을 연정훈에게 건네주고 맞은편에 앉았다.한참 침묵 끝에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소현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경인에 남아 교수님 밑에서 몇
인덕원 별장 거실에서 소현주는 최근 일상을 연정훈에게 모두 전했다.소현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연정훈의 인상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지난달 엄마가 엘라국에서 병에 걸려 돌아가셨어.”“에릭은 그쯤에 바람을 피웠고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았어.”“그래서 자주 과거의 선택을 후회했지. 내가 왜 그 사건으로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건지. 그리고 결혼하지 않겠다는 네 말에 충동적으로 에릭과 결혼을 한 것도 너무 후회돼.”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현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울기보다 더 슬퍼 보였다.“급하게 성산시로 돌아와 너에게 전화를 걸었어. 너무 힘들어서 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거든. 혹시라도 네가 아직도 날 기다리지 않을까 생각했어.”“그냥... 빨리 돌아와 널 만나고 싶었어.”연정훈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입을 꾹 다물었으나 연정훈도 점점 먹먹해졌다.지금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아니 담배보다 더 센 무언가가 연정훈의 머릿속을 점령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대체 소현주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를 몰랐고 그 어떤 말을 해도 소현주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물질적인 보상 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그래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소현주는 이미 잃을 걸 모두 잃은 사람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우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지?”소현주가 마지막으로 물었다.“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게.”연정훈의 대답에 소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소현주는 숨이 점점 가빠졌고 연정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말해.”“아무한테도 나한테 생긴 일 얘기하지 말아줘. 특히 안시연 씨에게는 비밀로 해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동정한다면 난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소현주가 부탁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할게.”“이걸 제외하고 다른 건 필요 없어.”소현주가 힘겹게
연정훈이 집에 도착했을 때 안시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소음에 안시연은 금세 잠에서 깨어났다.연정훈은 외투를 벗고 조용히 뒤에서 안시연을 안았다.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몸을 돌리려다 진한 담배 냄새를 맡았다.“왜 이렇게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안시연은 일부러 싫은 척하며 몸을 일으켜 연정훈을 밀었다.“어서 가서 씻어요.”연정훈은 밤새 두통에 시달렸지만, 안시연을 보자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그는 손을 들어 안시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사나워.”안시연은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연정훈이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걸 알았기에 연정훈을 진짜로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연정훈의 지친 얼굴을 보며 안시연은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왜 이렇게 늦게까지 일한 거예요? 몸도 좀 아껴야죠.”연정훈은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래는 집에 안 오려고 했어. 거의 회사에서 잘 뻔했지.”“근데 왜 다시 돌아왔어요?”안시연은 이미 답을 알면서도 장난스럽게 물었다.연정훈이 말했다.“네가 혼자서 잠을 못 잘까 봐.”“혼자서도 잘 자거든요.”안시연은 그의 볼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골초 정훈 씨 없이 더 잘 잘 수 있어요.”“골초?”“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가까이 다가가 장난스럽게 코를 찡그렸다.“정훈 씨, 완전 담배 냄새에 절인 것 같아요.”연정훈의 지친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그는 눈을 감고 안시연을 어깨에 기대게 했다.“샤워 안 하면 안 될까? 나 좀 싫어하지 말고.”안시연은 연정훈의 귀에 바짝 다가가 한 글자씩 천천히 속삭였다.“그건 꿈도 꾸지 마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띠었다.안시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을 일으켰다.“어서 씻으세요. 제가 옷을 챙겨드릴게요. 씻고 나면 편안하게 쉴 수 있어요.”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안시연은 만족하며 돌아서서 연정훈
연정훈도 안시연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소현주와 관련이 있었기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한 소현주를 만난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 재앙이 닥칠 게 뻔했다.최단 시간 내에 소현주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고 소현주와 확실히 선을 긋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연정훈은 일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것을 가장 싫어했지만, 이 일만큼은 결코 단호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소현주에게 요구를 강요할 수 없었고 소현주의 고통에서 연정훈의 마음을 죄책감 없이 떼어내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안고 누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손을 뻗어 연정훈의 찌푸린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며 말했다.“잘 자요.”“잘 자.”...최미란은 병원에 이틀 더 입원했는데, 상태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퇴원을 원했다.안시연은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어 결국 의사에게 건강 상태를 물어보았다.마침, 당직이었던 사람이 소현주였다.소현주는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환자의 상태를 이야기할 때는 매우 집중한 모습이었다.“할머님의 상태는 이제 꽤 괜찮습니다. 퇴원하셔도 됩니다. 다만 약은 제때 드셔야 하고 퇴원 후에도 주의 깊게 상태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다시는 지난번처럼 되지 않도록 하세요.”소현주는 안시연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여기에 제 연락처가 있으니 퇴원 후에 일상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하세요.”안시연은 미묘한 감정을 억누르고 명함을 받았다.안시연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소현주는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의사로서 사적인 감정이 제 일에 영향을 주지 않아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소현주의 말은 오히려 자신이 편협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듯했다.“소현주 선생님의 전문성을 믿어요.”“그렇다면 다행이네요.”대화는 짧게 끝났고 안시연은 소현주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그녀의 생활 습관을 살펴보고 공기 중의 냄새까지 세심하게 맡았다.소독약 냄새만 가득했다.안시연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미쳤어. 어느 의사가 근무 중에 향초를 피우겠어
원장은 노련하게 더는 안시연을 압박하지 않고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했다.안시연은 병원에서 외할머니의 퇴원 절차를 모두 마치고 오후에 외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소현정에게서 몇 차례 전화가 왔지만, 매번 내일 돌아오겠다고 하면서도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안시연은 마음속에 쌓인 불만이 커지고 소현정에 대한 혐오감도 더욱 깊어졌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을 타일렀다.“너희 엄마도 힘들어.”“남의 가정에 끼어든 건데 부인께서 더 힘들었겠죠.”안시연은 무심코 말대꾸했다.외할머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자신의 감정이 격해진 걸 깨달은 안시연은 약간 후회하며 목소리를 낮췄다.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 엄마가 잘못한 건 맞아...”외할머니는 본래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딸이 저지른 일이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딸은 딸이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존재였다.안시연은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집은 제가 깨끗이 청소해 놓았어요. 들어가셔서 보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가 다시 사러 갈게요.”외할머니를 퇴원시키기 위해 온 차는 연정훈이 준비한 고급 차량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렇게 화려한 차를 타는 것이 불편했다.“무슨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니. 아깝잖아.”낡은 아파트에 도착한 후 안시연은 외할머니를 부축하며 올라갔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범한 집 안의 거실이 보였고 두 사람은 왠지 눈시울이 붉어졌다.과거 외할머니가 병을 앓았을 때 안시연은 더 이상 외할머니를 퇴원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젠 괜찮아. 다 지나갔어.’외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안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착한 우리 시연아.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구나.”“외할머니만 건강하시다면, 어떤 고생도 할 수 있어요.”안시연은 외할머니를 의자에 앉히고 무릎을 꿇고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사람이 없을 때 외할머니는 슬쩍 안시연에게 물었다.“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 거니?”안시연은 외할머니가 자신과 연정훈의 관계가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