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1일, 연정훈은 일부러 시간을 비워두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외할머니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안시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찍 가는 것이 외할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이 일정들을 다 내일로 미루는 건가요?”비서가 취소된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연정훈은 소매를 정리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동시에 지시했다.“기사에게 밑에서 대기하라고 해.” “알겠습니다.”비서가 막 나가자, 연정훈의 핸드폰이 울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인 줄 알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기억력이 좋은 덕분에 지난번 소현주가 걸었던 번호임을 금세 알아챘다. “...여보세요?”“연정훈, 나야.”“응.”연정훈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대답했다.“무슨 일이야?”“오늘 새해 전날이잖아. 아줌마가 집에서 몇 가지 요리를 준비했는데...저녁 같이 먹어줄 수 있어?”소현주가 조용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이미 저녁시간인데 그쪽으로 가는 건 적절하지 않아.”“아직 어둡지 않았어.” “...”소현주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걱정하지 마. 집에 아줌마도 있어서 우리 둘만 있는 건 아니야. 다른 뜻은 없고 그냥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얼굴 보고 얘기하자.”“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지금 말해.”연정훈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수많은 사람과 매일 머리를 굴려 가며 상대하는 그였기에 소현주가 의도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소현주는 그저 연정훈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소현주는 잠시 침묵했고 깊게 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와서 나랑 저녁을 같이 먹어줘.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좋겠어. 딱 30분이면 충분해. 해가 지면 네가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가도 돼.”“집에서 기다릴게.”소현주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연정훈은 대화 종료 화면을 보며 이마를 깊게 찌푸렸다.바로 그때, 안시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바
안시연은 양혁수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음을 느끼고 그냥 동의했다. “알겠어요.”“시간은 내가 정해도 돼?”양혁수가 물었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혁수 씨, 몸이 확실히 다 나아야 해요. 무리하게 노는 건 안 돼요.” “그리고...”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안시연은 덧붙였다. “정훈 씨한테 물어봐야 해요. 정훈 씨가 괜찮다고 해야 나갈 수 있어요.”이 말을 듣자, 양혁수는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하!”안시연은 침묵했다.“...”“너 독립한 사람 맞아? 자유는 있어? 연애 좀 한다고 연정훈한테 너를 팔아넘긴 거야?” “혁수 씨는 남자고 저는 여자잖아요. 그리고 정훈 씨는 내 남자친구죠. 혁수 씨랑 단둘이 나가려면 당연히 정훈 씨한테 말해야죠.”양혁수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안 놀아!”양혁수는 불만스럽게 말했다.안시연은 차분히 말했다.“그래도 좋아요. 집에서 잘 쉬고 있어요. 다 나으면 제가 혁수 씨 집으로 보러 갈게요.”양혁수는 화가 난 듯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꿈꾸지 마.” “물어봐. 정훈 씨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보자. 만약 정훈 씨가 진짜 남자라면 우리 셋이 같이 나가자.”연정훈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고 안시연은 생각했다.가끔 양혁수를 보면 마치 성숙하지 않은 아이처럼 행동한다고 느꼈다. 속셈도 많고 온갖 나쁜 생각이 가득하며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본심을 드러낸다.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양혁수가 다시 말했다.“시간 좀 봐서 좋은 날 골라서 우리 둘이 몰래 만나자.”봐, 또 시작이다.에휴....한편, 연정훈이 인덕원에 도착했을 때 소현주는 이미 사람들에게 요리를 차리도록 지시해 놓았다.소현주가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집에 아줌마들이 있었고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다.하지만 아줌마들이 아무리 많아도 소현주가 사는 집에는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소현주는 연정훈을 문 안으로 들였지만, 지난번처럼 슬리퍼를 건네주지 않았다. 심지어 수저와 젓가락도
아주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연신 사과했다.소현주도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연정훈! 빨리 닦아야 해!”소현주는 급히 휴지를 한 움큼 뽑아 연정훈에게 건넸다.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휴지를 받아 들고 말없이 일어나 주방 쪽 세면대로 향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속하게 얼룩을 처리하였다.소현주는 연정훈을 따라가며 깊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연정훈은 소현주의 사과를 끊고 담담하게 말했다.“회장님 쪽은 문제없을 거야. 자료 준비됐으니까, 병원으로 보내 줄게. 이 재단의 주관자는 네가 될 수 있으니 한번 생각해 봐.”소현주는 말없이 연정훈의 흠뻑 젖은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곧 안시연을 만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연정훈은 고개를 들어 소현주를 잠시 응시했다.“이렇게 엉망이 됐는데 안시연이 물어보면 뭐라고 설명할 거야?”소현주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제안했다.“위층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어때? 마침 여기 영훈 씨 옷이 있을 거야.”소현주의 말이 끝나자 연정훈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오지 않자 두 차례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응답은 없었다.안시연은 그가 바쁜가 하고 생각하며 시간이 꽤 흐른 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연결되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물소리만이 들려왔다.안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물었다.“정훈 씨, 지금 어디예요?”“집이야.”“집에 들어갔어요?”안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연정훈은 짧게 대답했다.“옷 갈아입으려고 집에 왔어. 곧 너한테 갈게.”그의 목소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샤워 중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왜 회사에서 갈아입지 않고 굳이 집에 갔을까? 회사에 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건가?’불안한 마음이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살짝 재촉하며 전화를 끊었다.“도착했어?”외할머니가 조용히 물었다.안시연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
연정훈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안시연뿐만 아니라 외할머니도 무척 기뻐했다.외할머니는 연정훈을 반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 음식을 데우러 부엌으로 향했다.“할머니,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안시연이 재빠르게 말했다.“알았어, 알았어,”외할머니는 웃으며 연정훈을 바라봤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건강은 괜찮으세요? 다 회복되셨나요?”“괜찮아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연이에게 말씀하세요. 저희가 준비할게요.”연정훈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외할머니는 안시연이 내온 음식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나 같은 늙은이가 뭐 그리 대단한 게 필요하겠어요?”연정훈은 따뜻하게 말했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시연이가 밤에 잠을 못 자요. 외할머니를 늘 걱정하고 있거든요.”외할머니는 미소 지었다.안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연정훈 옆에 앉았다.그들은 자연스럽게 상을 차렸다. 마치 오래된 호흡처럼 말이 없어도 서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외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놓인 듯했다. 잔을 들어 연정훈에게 먼저 건배를 건넸다.“연정훈 씨, 사업 번창하고 내년에는 더 큰 성공을 이루길 바라요.”“외할머니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연정훈이 답례했다. “그래요.”안시연은 연정훈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이거 한번 먹어봐요. 이 갈비찜은 외할머니의 메인 요리예요. 정훈 씨가 오지 않았으면 저도 못 먹었을 거예요.”연정훈은 젓가락을 들며 안시연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러면 네가 내 덕을 본 거네?”“그렇죠.”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외할머니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셨다.연정훈은 안시연과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었다. 게다가 아까 소현주 쪽 일을 마무리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외할머니와의 대화도 편안했다.연정훈은 외할머니의
거실 밥상 위, 뚝배기에서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외할머니는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안시연과 연정훈 사이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이 반지는 내가 소중히 간직해 왔단다. 언젠가 시연이가 결혼할 때 주려고 말이야.”“외할머니...”안시연은 외할머니를 말리려 눈짓을 보냈지만, 외할머니는 이미 반지를 연정훈과 안시연 앞으로 밀어두셨다.“이제 시연이가 연정훈 씨를 만났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이 없어. 이 반지를 너희에게 줄 테니, 이걸 끼고 평생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안시연의 얼굴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화끈거렸다.연정훈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혹시 외할머니를 빌미로 결혼을 재촉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안시연과 연정훈은 서로 결혼 이야기를 섣불리 꺼내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합의한 상태였다. 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연정훈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까 두려웠다.안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반지를 가져가려고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먼저 손을 내밀어 반지와 상자를 집어 들었다.그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연이를 잘 보살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기쁨에 얼굴이 밝아지며 연정훈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다.하지만 안시연은 말없이 있었다.그 순간부터 안시연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정훈에게 해명해야 할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외할머니는 피곤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배웅하며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둘은 계단을 내려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의 다 내려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 급하게 밖에서 들어오다 그들과 부딪힐 뻔했다.안시연이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반우희였다.반우희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듯 보였다. 여전히 근무복을 입고 있었으나 얼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입가에는 멍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안시연은 반우희가 걱정되어 말을
차는 나무 그늘 아래에 조용히 주차되어 있었다. 바깥은 고요했지만, 차 안은 더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안시연의 실망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위로했다.“괜찮아요...”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지만,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저...”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잠시 생각하더니 한발 물러서서 말했다.“네가 집에 가면 체인 하나 찾아줘. 그럼 내가 목걸이로 하고 다닐게.”“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말했다.“안 한다고 하니까 울기 직전이잖아.”“...”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부인했다.“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외할머니가 우리에게 이 선물을 준 건 잘 지내라고 한 거잖아. 근데 네가 이렇게 울먹이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정훈의 말에 마음속에서 억울함과 후회가 밀려왔다.연정훈은 이미 충분히 양보한 것이다. 원래 결혼반지는 그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규칙을 깬 건 안시연이고 연정훈이 선을 넘은 건 아니었다.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목을 가만히 감쌌다.연정훈은 부드럽게 안시연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이틀 동안 못 봤는데, 저녁에도 전화 안 하고 뭐 하고 있었어?”“전화했는데, 정훈 씨가 바쁘다며 대충 흘려보내더니, 말하다가 갑자기 끊어졌어요.”안시연이 살짝 투덜거리듯 말했다.“그랬나?”“정훈 씨가 인정하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 없죠.”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차 안의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안시연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품에
“원하는 건 다 줄 수 있어.”연정훈은 너그러운 어조로 말하며 품에 안긴 안시연을 내려다보았다.“네가 얌전히만 있으면 모든 게 네 거야.”안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연정훈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얌전히 있으라니요. 제가 정훈 씨가 기르는 강아지라도 된다는 거예요?”연정훈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강아지?”“네!”연정훈은 셔츠 목깃의 단추를 하나 더 풀며 목에 난 손톱자국을 가리키며 농담조로 말했다.“어느 집 강아지가 이렇게 힘이 세?”안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그 자국은 지난번 안시연이 남긴 것이었고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안시연은 그의 셔츠를 살짝 당기며 다른 곳도 확인하려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리고 위층을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외할머니가 아직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셔.”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연정훈의 가슴을 살짝 때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그는 안시연의 귓가에 속삭이며 입가에 키스를 남겼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말에 아무 일 없으면 점심에 나한테 와.”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그의 말뜻을 이미 알아차린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연정훈의 머리카락을 살짝 꼬며 대답했다.“점심에는 쉬어야 하잖아요...”“응. 우리 같이 쉬자.”연정훈의 말이 끝나자 그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차 안의 온도는 서서히 높아졌고 안시연은 참지 못한 듯 몇 번이고 신음을 내뱉었다.다행히도 연정훈은 외할머니가 집에 혼자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촉촉해진 입술이 떨어졌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얽힌 채로 있었다.15분쯤 지나서야 연정훈은 안시연을 놓아주며 올라가도록 허락했다.안시연은 위층으로 올라가며 검은색 벤틀리의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천천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안시연의 마음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였다.다른 한
“반우희 씨?”안시연이 반우희를 부르자 반우희는 잠시 눈길을 주고는 지난번처럼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반우희를 따라 올라갔다.안시연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반우희는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안시연 언니, 무슨 일이세요?”안시연은 말없이 자신의 입가와 눈가를 가리키며 반우희를 바라보았다.반우희는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일하다가 실수로 넘어졌어요. 괜찮아요.”안시연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몇 명의 아이들은 저녁 학습반에서 식사와 자습을 하고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안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안시연은 더 묻지 않고 말없이 돌아서서 내려가려 했다.반우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안시연을 불렀다.둘이 눈을 마주쳤을 때, 반우희는 조심스레 안시연을 집으로 초대했다.같은 건물이라 구조는 비슷했지만, 반우희의 집은 훨씬 더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집안 곳곳에 아이들의 생활 흔적이 묻어 있었다.안시연은 반우희가 겨우 19살인데 이렇게 가녀린 어깨로 이 집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참 힘들겠구나 싶었다.안시연은 자신도 외할머니와 함께 의지하며 자랐기에 반우희의 상황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문을 닫고 안시연은 반우희에게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 부드럽게 물었다.처음엔 말없이 있던 반우희는 이내 등을 돌리고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반우희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조용히 위로했다.반우희는 한참을 울다가 결국 진실을 말했다.반우희는 보육원에서 자랐고 12살 때 홍 할머니에게 입양되었다고 털어놓았다.“우리 보육원 원장님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몇몇 여자아이들을 괴롭혔지만, 다른 아이들은 두려워서 신고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용기를 내서 신고했어요.”“원장님은 몇 년간 감옥에 있다가 얼마 전 출소했어요.”안시연은 상황을 이해했다.“원장님이 지금도 반우희 씨를 괴롭히고 있나요?”반우희는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