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안시연뿐만 아니라 외할머니도 무척 기뻐했다.외할머니는 연정훈을 반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 음식을 데우러 부엌으로 향했다.“할머니,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안시연이 재빠르게 말했다.“알았어, 알았어,”외할머니는 웃으며 연정훈을 바라봤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건강은 괜찮으세요? 다 회복되셨나요?”“괜찮아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연이에게 말씀하세요. 저희가 준비할게요.”연정훈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외할머니는 안시연이 내온 음식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나 같은 늙은이가 뭐 그리 대단한 게 필요하겠어요?”연정훈은 따뜻하게 말했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시연이가 밤에 잠을 못 자요. 외할머니를 늘 걱정하고 있거든요.”외할머니는 미소 지었다.안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연정훈 옆에 앉았다.그들은 자연스럽게 상을 차렸다. 마치 오래된 호흡처럼 말이 없어도 서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외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놓인 듯했다. 잔을 들어 연정훈에게 먼저 건배를 건넸다.“연정훈 씨, 사업 번창하고 내년에는 더 큰 성공을 이루길 바라요.”“외할머니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연정훈이 답례했다. “그래요.”안시연은 연정훈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이거 한번 먹어봐요. 이 갈비찜은 외할머니의 메인 요리예요. 정훈 씨가 오지 않았으면 저도 못 먹었을 거예요.”연정훈은 젓가락을 들며 안시연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러면 네가 내 덕을 본 거네?”“그렇죠.”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외할머니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셨다.연정훈은 안시연과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었다. 게다가 아까 소현주 쪽 일을 마무리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외할머니와의 대화도 편안했다.연정훈은 외할머니의
거실 밥상 위, 뚝배기에서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외할머니는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안시연과 연정훈 사이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이 반지는 내가 소중히 간직해 왔단다. 언젠가 시연이가 결혼할 때 주려고 말이야.”“외할머니...”안시연은 외할머니를 말리려 눈짓을 보냈지만, 외할머니는 이미 반지를 연정훈과 안시연 앞으로 밀어두셨다.“이제 시연이가 연정훈 씨를 만났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이 없어. 이 반지를 너희에게 줄 테니, 이걸 끼고 평생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안시연의 얼굴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화끈거렸다.연정훈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혹시 외할머니를 빌미로 결혼을 재촉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안시연과 연정훈은 서로 결혼 이야기를 섣불리 꺼내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합의한 상태였다. 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연정훈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까 두려웠다.안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반지를 가져가려고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먼저 손을 내밀어 반지와 상자를 집어 들었다.그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연이를 잘 보살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기쁨에 얼굴이 밝아지며 연정훈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다.하지만 안시연은 말없이 있었다.그 순간부터 안시연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정훈에게 해명해야 할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외할머니는 피곤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배웅하며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둘은 계단을 내려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의 다 내려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 급하게 밖에서 들어오다 그들과 부딪힐 뻔했다.안시연이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반우희였다.반우희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듯 보였다. 여전히 근무복을 입고 있었으나 얼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입가에는 멍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안시연은 반우희가 걱정되어 말을
차는 나무 그늘 아래에 조용히 주차되어 있었다. 바깥은 고요했지만, 차 안은 더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안시연의 실망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위로했다.“괜찮아요...”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지만,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저...”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잠시 생각하더니 한발 물러서서 말했다.“네가 집에 가면 체인 하나 찾아줘. 그럼 내가 목걸이로 하고 다닐게.”“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말했다.“안 한다고 하니까 울기 직전이잖아.”“...”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부인했다.“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외할머니가 우리에게 이 선물을 준 건 잘 지내라고 한 거잖아. 근데 네가 이렇게 울먹이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정훈의 말에 마음속에서 억울함과 후회가 밀려왔다.연정훈은 이미 충분히 양보한 것이다. 원래 결혼반지는 그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규칙을 깬 건 안시연이고 연정훈이 선을 넘은 건 아니었다.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목을 가만히 감쌌다.연정훈은 부드럽게 안시연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이틀 동안 못 봤는데, 저녁에도 전화 안 하고 뭐 하고 있었어?”“전화했는데, 정훈 씨가 바쁘다며 대충 흘려보내더니, 말하다가 갑자기 끊어졌어요.”안시연이 살짝 투덜거리듯 말했다.“그랬나?”“정훈 씨가 인정하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 없죠.”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차 안의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안시연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품에
“원하는 건 다 줄 수 있어.”연정훈은 너그러운 어조로 말하며 품에 안긴 안시연을 내려다보았다.“네가 얌전히만 있으면 모든 게 네 거야.”안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연정훈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얌전히 있으라니요. 제가 정훈 씨가 기르는 강아지라도 된다는 거예요?”연정훈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강아지?”“네!”연정훈은 셔츠 목깃의 단추를 하나 더 풀며 목에 난 손톱자국을 가리키며 농담조로 말했다.“어느 집 강아지가 이렇게 힘이 세?”안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그 자국은 지난번 안시연이 남긴 것이었고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안시연은 그의 셔츠를 살짝 당기며 다른 곳도 확인하려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리고 위층을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외할머니가 아직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셔.”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연정훈의 가슴을 살짝 때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그는 안시연의 귓가에 속삭이며 입가에 키스를 남겼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말에 아무 일 없으면 점심에 나한테 와.”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그의 말뜻을 이미 알아차린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연정훈의 머리카락을 살짝 꼬며 대답했다.“점심에는 쉬어야 하잖아요...”“응. 우리 같이 쉬자.”연정훈의 말이 끝나자 그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차 안의 온도는 서서히 높아졌고 안시연은 참지 못한 듯 몇 번이고 신음을 내뱉었다.다행히도 연정훈은 외할머니가 집에 혼자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촉촉해진 입술이 떨어졌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얽힌 채로 있었다.15분쯤 지나서야 연정훈은 안시연을 놓아주며 올라가도록 허락했다.안시연은 위층으로 올라가며 검은색 벤틀리의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천천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안시연의 마음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였다.다른 한
“반우희 씨?”안시연이 반우희를 부르자 반우희는 잠시 눈길을 주고는 지난번처럼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반우희를 따라 올라갔다.안시연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반우희는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안시연 언니, 무슨 일이세요?”안시연은 말없이 자신의 입가와 눈가를 가리키며 반우희를 바라보았다.반우희는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일하다가 실수로 넘어졌어요. 괜찮아요.”안시연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몇 명의 아이들은 저녁 학습반에서 식사와 자습을 하고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안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안시연은 더 묻지 않고 말없이 돌아서서 내려가려 했다.반우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안시연을 불렀다.둘이 눈을 마주쳤을 때, 반우희는 조심스레 안시연을 집으로 초대했다.같은 건물이라 구조는 비슷했지만, 반우희의 집은 훨씬 더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집안 곳곳에 아이들의 생활 흔적이 묻어 있었다.안시연은 반우희가 겨우 19살인데 이렇게 가녀린 어깨로 이 집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참 힘들겠구나 싶었다.안시연은 자신도 외할머니와 함께 의지하며 자랐기에 반우희의 상황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문을 닫고 안시연은 반우희에게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 부드럽게 물었다.처음엔 말없이 있던 반우희는 이내 등을 돌리고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반우희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조용히 위로했다.반우희는 한참을 울다가 결국 진실을 말했다.반우희는 보육원에서 자랐고 12살 때 홍 할머니에게 입양되었다고 털어놓았다.“우리 보육원 원장님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몇몇 여자아이들을 괴롭혔지만, 다른 아이들은 두려워서 신고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용기를 내서 신고했어요.”“원장님은 몇 년간 감옥에 있다가 얼마 전 출소했어요.”안시연은 상황을 이해했다.“원장님이 지금도 반우희 씨를 괴롭히고 있나요?”반우희는
안시연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연정훈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연정훈은 출장으로 며칠 집을 비워야 했고 출발 직전 뭔가를 잊은 듯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그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목걸이가 목을 불편하게 눌렀다.본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였다. 이전에 점쟁이가 준 반지도 김세연이 억지로 끼우게 해서 며칠 착용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서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으면 안시연이 불안해할 것 같았다.급하게 나가려다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정원에 도착하자, 연정훈은 빠르게 걸으며 셔츠 단추를 풀어 목걸이를 조정하려 했다.그러나 목걸이가 그렇게 튼튼하지 않았던 것인지 힘을 주어 당기자 목걸이가 끊어지며 반지가 잔디밭으로 날아가 버렸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대표님, 시간이 조금 촉박합니다.”진수빈이 말했다.어쩔 수 없이, 연정훈은 정원사를 불러 반지를 찾아달라고 지시했다.“찾으면 거실에 두세요.”정원사는 걱정하지 말라며 즉시 대답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연정훈이 없는 동안 안시연은 일과 학업에 몰두했다. 운전 면허도 거의 따고 있었고 바쁘지만 알찬 나날을 보냈다.오후에는 드물게 운전사를 불렀다. 반우희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연정훈 쪽에서 아직 일이 해결됐다는 소식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반우희가 혼자 퇴근하는 것이 불안했다.“언니, 정말 고마워요.”길에서 반우희는 계속해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차 안에 있던 간식을 반우희에게 건넸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의외로 양혁수였다.“여보세요?”“어디야?”도련님의 여유롭고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와 안시연은 양혁수가 길거리 어딘가에 있음을 알아차렸다.“밖이에요?”“빨리 주소 보내줘. 밥 사줘.”여전히 명령조의 말투였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잠시 고민하다 외할머니가 사는 단지의 주소를 알려주
소현정은 처음에 양혁수를 보지 못했다. 최근 안시연의 엄마 역할에 몰입해 있던 터라 안시연을 보자마자 바로 웃으며 다가왔다.“시연아, 퇴근했는데 왜 집에 안 가고 있어?”안시연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서 양혁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이 무슨 사이야?”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이제야 기억났다. 양혁수는 소현정을 극도로 싫어했고, 양혁수의 반응을 보니 아직 소현정이 안시연의 엄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소현정도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를 보자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현재 신분이 떠올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반우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황을 살피며 말없이 서 있었다.‘대체 무슨 상황이지?’양혁수는 다시 한번 안시연에게 물었다.“안시연, 소현정 씨와 무슨 관계야?”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머릿속을 정리한 후, 양혁수에게 설명하려 했다.그러나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맞은편에 서 있던 소현정이 갑자기 안시연 뒤쪽을 보며 무서운 표정으로 외쳤다.“조심해!”안시연이 반응할 새도 없이 소현정이 달려들었지만, 안시연에게 다가오지 못했다.안시연을 밀어낸 것은 바로 그녀 뒤에 있던 반우희였다.안시연과 반우희, 소현정과 양혁수는 각각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고 그 사이로 작은 픽업트럭이 빠르게 지나갔다.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안시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손바닥이 뜨겁게 아파졌다.작은 픽업트럭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반우희는 안시연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안시연 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맞은편에 있는 양혁수와 소현정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땅에서 일어나 얼굴이 굳어 있었다.소현정은 잠시 얼어있다가 맞은편을 보더니 빠르게 반응해 안시연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안시연은 멍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소현정은 안시연의 손을 꼭 잡으며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엄마가 너무 놀랐어. 원래 널 밀어내려고 했
‘소현정은 양혁수를 밀려고 한 거야!’양민아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차가 지나가던 순간, 소현정 역시 무의식적으로 양혁수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하마터면 그의 상태를 확인할 뻔했다.소현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제야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와 양민아는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양민아의 머릿속에 평안 부적과 출생일이 떠올랐다. 그건 안시연의 것이 아니었지만, 안시연이 가지고 있었다.양민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대담하고 황당한 가설이었지만, 어찌 보면 나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이건 너무 미친 생각이다.아니. 그럴 리가 없다.양민아는 자기 생각을 연이어 부정했지만,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저녁 바람이 불어왔고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양민아의 머릿속은 한층 맑아졌다.양민아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으니 양민아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양민아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더니 길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나 양혁수는 이미 차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양혁수?”그는 양민아를 전혀 보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며 운전사에게 명령했다.“출발해.”양민아는 차에 오르며 반대편에 있는 안시연과 소현정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다짐했다.‘서두를 필요는 없어. 시간은 충분히 있어.’길 건너편에서 안시연은 오랫동안 굳어 있었다.양혁수와 안시연의 관계는 목숨을 건 사이였다. 안시연은 양혁수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며 부모 세대의 원한을 알면서도 여전히 희미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안시연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는 화가 나서 떠났고 더 이상 안시연을 괴롭히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소현정은 안시연의 곁에 서서 양혁수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쓰렸다.친아들이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의 편을 들며 친엄마인 소현정을 쓰레기 보듯 바라봤다.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