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반우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다행히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언니, 나 상처만 금방 치료할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줘요.”진료실 안에서 반우희가 고개를 내밀고 안시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반우희는 안시연을 부르는 호칭부터 친근하게 변했다.안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안 가요.”반우희는 웃으며 돌아서더니 의사에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안시연은 복도에 앉아 연정훈에게 오늘 밤 집에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문자를 보냈다.[곧 도착할 거야.]안시연은 그 몇 글자를 보고 마음속의 어둠이 절반 이상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전에 겪은 위험한 일은 굳이 말하지 않은 채 답장을 보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응.]답장을 받은 안시연은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훈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밤 8시가 지났고 반우희의 상처는 깔끔하게 치료되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안시연은 약을 챙기고 반우희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양원장을 마주쳤다.양원장은 안시연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반우희의 상처를 먼저 걱정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재단 건은 안시연 씨 덕분이에요. 의료 사업에 대한 안시연 씨의 큰 지원에 제가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안시연은 의문스러웠다.“네?”양원장이 말했다.“덕분에 연정훈 대표님이 이미 저희와 연락을 취하셨어요. 이제 저는 이 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네...”안시연은 예의상 간단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이 이 재단에 투자한 것은 아마 안시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날 그녀가 제안했을 때 이미 연정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양원장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이 회장님 일행이 이미 밖에 계십니다. 안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시면 같이 가서 차 한잔하시는 게 어떨까요?”안시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8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차를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재단에 대해 말했을 때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주며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본인의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사실 연정훈은 진작에 재단 전체를 소현주에게 맡기겠다고 소현주와 약속한 상태였다.연정훈은 매일 집에 돌아가 밥을 먹고 안시연의 옆에서 잤다. 하지만 안시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시연이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연정훈은 어쩌면 이미 소현주의 집을 드나들었을지도 모른다.과연 집이 맞긴 한 걸까? 어쩌면 호텔일지도 모르겠다.얼마나 친밀한 사이길래 소현주가 좋아하는 냄새까지 묻혀온단 말인가.“시연 씨,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원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안시연에게 말했다. 반짝이는 눈은 안시연을 속이 메스껍게 만들었다.소현주는 이미 몸을 돌렸지만 안시연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안시연은 표정 따위 없는 무념무상이었지만 소현주는 옅은 미소를 짓는 것도 모자라 안시연을 향해 살짝 고개도 끄덕였다.“웩!”안시연은 구역질을 하며 황급히 풀숲으로 달려갔다.반우희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저녁도 먹지 않아 공복이었으므로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위는 여전히 경련이 일어나 진짜 토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반우희는 재빨리 물을 사다 안시연에게 주고 조심스레 등도 토닥여줬다.“위가 불편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갈까요?”반우희는 잔뜩 걱정하며 물었다.텅 빈 공허한 눈으로 풀숲을 바라보던 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그럼...”반우희가 보기에 안시연은 영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안시연은 애써 진정하고는 반우희에게 말했다.“우리 경찰서도 가야 해요.”“오, 그러네요.”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는 저 혼자 가도 되니까 언니는 불편하면 안 가도 돼요.”“괜찮아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눈만 바라보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팔을 내밀었다.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남자는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안시연과 이마를 맞대고 물었다.“갑자기 술은 왜 마신 거야?”안시연은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 연정훈의 목을 감싸며 가볍게 속삭였다.“정훈 씨가 하도 안 와서 기다리다 짜증이 나서 그랬어요.”“이런 식으로 성질을 부린다고?”남자는 안시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조금 늦은 것뿐이잖아.”안시연은 입꼬리를 당겨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연정훈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떨어지며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목에도 키스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가끔 보여주는 주동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술을 마신 후의 나른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연정훈을 금방 달아오르게 했다.연정훈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도 안시연의 옆모습을 감상하면서 그녀를 달랬다.“조금만 기다려 줄래? 금방 씻고 올게.”안시연은 대답 대신 조용히 연정훈의 목 부근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무슨 냄새 맡는 거야? 나 오늘 담배 안 피웠어. 요즘은 담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안시연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차디찬 냉담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정훈 씨 몸에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던 중이었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정도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귀를 작게 꼬집고는 말했다.“또 멋대로 생각한 거야?”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딘가 잘못됐음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안시연의 눈동자를 마주한 연정훈은 말없이 눈썹만 꿈틀거렸다.둘을 감싸던 묘한 흥분감은 모두 사라졌다.“왜 그래?”연정훈
하나의 거짓말은 무수한 거짓말을 낳는다.연정훈은 한치의 후회도 없이 안시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소현주를 보러 갔어.”안시연은 순간 숨이 턱 막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에야 안시연은 겨우 입을 뗐다.“그때 한 번뿐만이 아니죠?”“...”“우리가 병원에서 그분을 만났던 날, 아, 두 분이 다시 만난 날이기도 하겠네요. 그날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만나러 갔어요.”연정훈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며 말했다.“그때는 얘기할 게 있어서 만난 거야.”“무슨 얘기 했는데요?”안시연은 한 걸음 한 걸음 연정훈에게 다가가며 몰아붙였다.“정훈 씨가 얼마나 소현주 씨를 그리워했는지, 아니면 소현주 씨가 정훈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나요?”연정훈의 미간은 더욱 일그러졌다.연정훈은 잘못한 것도 맞고 그것 때문에 안시연에게 미안한 것도 맞았지만 무엇보다도 안시연을 좋아했다. 하지만 뼛속에 새겨진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만은 꺾이지 않았기에 사형 선고 같은 안시연의 촘촘한 의심에 반감이 들었다.안시연은 술을 마셨지만 머리와 발음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또렷해졌다.안시연은 입술을 한번 축이고 잔뜩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몸을 돌려 찬물 한잔을 따라서는 선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그 두 번 말고도 만나 적이 있나요?”“없어.”“아직도 절 속일 건가요?”안시연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재단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어떻게 사적으로 몇 번 만나서 소통도 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나요?”‘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연정훈은 그제야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연약함을 보아냈고 사태가 더는 악화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재단에 관한 일이라면 이해해.”“말해보세요, 듣고 있잖아요.”안시연은 옅은 웃음으로 회답했다.하지만 안시연이 침착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연정훈은 알아챌 수 있었다.연정훈은 생애 처음으로 범죄자처럼 심문을 당했지만 하나하나
역겹다.안시연은 결국 그 말을 뱉어버렸다.연정훈의 낯빛은 여간 어두운 게 아니었다.거실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안시연은 상처 입은 눈을 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훈 씨가 약속했잖아요, 더는 절 속이지 않겠다고요.”연정훈은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반박하지 못했다.연정훈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시연에게 사과했다.“너한테 숨긴 건 내 잘못이 맞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난 정말 소현주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너한테 약속한 그 날부터 내 마음속은 온통 너였어.”안시연이 조금 진정된 것으로 보이자 연정훈의 안시연의 손목을 끌어당겼다.하지만 안시연은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연정훈의 손을 뿌리쳤다.그 동작이 하도 컸던 탓에 손에 쥐고 있던 반지도 날아가 버렸다.안시연의 손에서 탈출한 반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안시연은 잔뜩 흔들리는 눈빛으로 얼른 허리를 숙여 반지를 찾았다.연정훈도 잠시 감정을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둘은 마침내 발견했다.반지는 테이블 모서리에 있었다.연정훈은 걸음을 옮겼고 안시연도 마찬가지였다.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안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안시연은 손끝에 닿는 느낌을 확인하고는 반지를 가져갔다.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안시연은 반지를 들어 올리며 쓸쓸하게 웃었다.“이게 바로 정훈 씨가 말한 온통 저밖에 없다던 그 마음인가요?”“저희 외할머니께서 주신 반지를 정훈 씨는 떳떳하게 끼고 싶지 않아 하네요. 제가 주제넘은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외할머니를 위해 주문한 목걸이는 정훈 씨 서재 서랍 안에서 고스란히 모셔져 있잖아요!”연정훈은 분명 목걸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해줬지만 안시연은 지금 이런 순간에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렸다.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려 눈썹을 마구 찌푸리고 말했다.“넌 지금 쓸모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연정훈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그 어떤 해석도 듣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더는 다툴 힘이 없었고 알코올에 잠식된 신경은 언제든지 그녀를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더 보고는 눈을 내리깐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연정훈은 지금 이런 상태의 안시연을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재빨리 다가가 안시연을 끌어안았다.“놔줘요!”안시연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뒤에서 끌어안은 연정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연정훈에 의해 몸이 돌려졌고 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밀어내는 동시에 참지 못하고 그를 때려버렸다.혼란한 틈 속에서 손이 주제를 모르고 나댔다.짝!뺨이 얼얼했다.안시연은 선체로 굳어버렸다.옆으로 돌아간 연정훈의 뺨에는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둘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안시연의 손은 덜덜 떨렸고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연정훈은 턱에 힘을 주고 2초간의 침묵 끝에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너 지금 제정신 아니니까 밖에 나가지 마. 화를 내더라도 집에서 내.”안시연은 자신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난 연정훈의 눈가를 보았다.안시연은 멍하니 넋이 나간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안시연이 방심한 틈을 타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아끌고 위층으로 향했다.침실에 들어선 후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침대에 앉혔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옷장을 열어 옷을 꺼냈다. 샤워하려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그렇게 다투고 난 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연정훈은 안시연보다 먼저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손으로 누르고는 시선을 내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날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오늘 밤은 내가 서재에서 잘게. 넌 여기 있어. 술 좀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저 정신 멀쩡해요.”“너 취했어.”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런 연정훈의 평온함
연정훈은 서재로 돌아가 서둘러 샤워를 했다.샤워하는 동안에도 연정훈은 아주머니에게 안시연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10시쯤 되자 안시연은 갑자기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전 외할머니한테 갈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간 안시연은 연정훈과 대치해야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붉은 얼굴을 보고 그녀가 반쯤 취해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연정훈은 참을성을 가지고 안시연을 설득했다.“너 지금이 상태로 가면 외할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어.”“반우희 씨를 찾아가도 돼요!”“그 아가씨는 집에 아이들도 있잖아. 이 밤중에 찾아가서 귀찮게 하려고 그래?”“그럼 호텔에서 묵으면 되죠!”어쨌든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아주머니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둘이 또 싸우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위층의 두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연정훈도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반우희한테 데려다줄게.”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그저 차갑게 얼어붙은 태도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고는 마당에서 연정훈을 기다렸다.연정훈은 직접 차를 몰아 안시연을 아파트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끝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안전띠를 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로 올라갔다.연정훈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안시연을 자극할까 봐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칠흑 같은 복도에서 빠른 걸음으로 반쯤 걸어간 안시연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안시연은 벽을 짚고 서서 주위의 어둠과 적막함을 느꼈다. 혈액 속에서 들끓었던 알코올도 점차 차게 식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당연히 외할머니를 보러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을 외할머니가 본다면 걱정하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단지 연정훈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을 뿐이다.그 집은 둘이 함께 살아온 추억으로 가득하다.침실의 구석구석에도 그들의
“제가 꼬셔서 넘어오게 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네가 정말 안시연을 꼬셔서 넘어오게 만들면 그때 인정해줄게.”양지원은 속으로 어차피 양혁수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양혁수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그래요. 어머니께서 인정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해요.”양혁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양지원은 몸을 곧게 세우며 물었다.“너 뭐 하려고 그러니?”“어머니한테 콩국 좀 사다 드리려고요.”“무섭게 왜 갑자기 안 하던 효도를 하고 그러니.”양혁수는 그저 웃었다.“기다리세요. 이 아들이 콩국 사 들고 돌아와서 효도할게요.”양지원은 양혁수가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릴까 봐 당부했다.“이 늦은 밤에 괜히 찾아가서 재수 없게 굴지 말아라. 이 시간이면 다들 잠들었을 거야.”양지원은 ‘잠들었을 거다’라는 말을 괜히 더 강조했다. 양혁수는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미 잠들었다면 그거야말로 양혁수에게는 그 둘에게 혼란을 주기 딱 좋은 기회였다.양혁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밖으로 나가면서 바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밤에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안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겨 설명해야 했다.양혁수는 전화를 걸면서도 안시연이 과연 받을까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안시연이 바로 받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여보세요?”양혁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놀랄까 봐 황급히 응답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자 듣고 있던 양혁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선배님 우셨어요?”“...”안시연은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물었다.“무슨 일이야?”‘반복재생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양혁수는 잠깐 조용히 생각하다가 말했다.“이 밤에 불쑥 전화를 드린 건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의 어머니께서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이 없었다.말을 마친 양혁수는 뒤늦게 본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