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반우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다행히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언니, 나 상처만 금방 치료할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줘요.”진료실 안에서 반우희가 고개를 내밀고 안시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반우희는 안시연을 부르는 호칭부터 친근하게 변했다.안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안 가요.”반우희는 웃으며 돌아서더니 의사에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안시연은 복도에 앉아 연정훈에게 오늘 밤 집에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문자를 보냈다.[곧 도착할 거야.]안시연은 그 몇 글자를 보고 마음속의 어둠이 절반 이상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전에 겪은 위험한 일은 굳이 말하지 않은 채 답장을 보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응.]답장을 받은 안시연은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훈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밤 8시가 지났고 반우희의 상처는 깔끔하게 치료되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안시연은 약을 챙기고 반우희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양원장을 마주쳤다.양원장은 안시연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반우희의 상처를 먼저 걱정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재단 건은 안시연 씨 덕분이에요. 의료 사업에 대한 안시연 씨의 큰 지원에 제가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안시연은 의문스러웠다.“네?”양원장이 말했다.“덕분에 연정훈 대표님이 이미 저희와 연락을 취하셨어요. 이제 저는 이 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네...”안시연은 예의상 간단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이 이 재단에 투자한 것은 아마 안시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날 그녀가 제안했을 때 이미 연정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양원장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이 회장님 일행이 이미 밖에 계십니다. 안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시면 같이 가서 차 한잔하시는 게 어떨까요?”안시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8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차를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재단에 대해 말했을 때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주며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본인의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사실 연정훈은 진작에 재단 전체를 소현주에게 맡기겠다고 소현주와 약속한 상태였다.연정훈은 매일 집에 돌아가 밥을 먹고 안시연의 옆에서 잤다. 하지만 안시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시연이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연정훈은 어쩌면 이미 소현주의 집을 드나들었을지도 모른다.과연 집이 맞긴 한 걸까? 어쩌면 호텔일지도 모르겠다.얼마나 친밀한 사이길래 소현주가 좋아하는 냄새까지 묻혀온단 말인가.“시연 씨,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원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안시연에게 말했다. 반짝이는 눈은 안시연을 속이 메스껍게 만들었다.소현주는 이미 몸을 돌렸지만 안시연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안시연은 표정 따위 없는 무념무상이었지만 소현주는 옅은 미소를 짓는 것도 모자라 안시연을 향해 살짝 고개도 끄덕였다.“웩!”안시연은 구역질을 하며 황급히 풀숲으로 달려갔다.반우희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저녁도 먹지 않아 공복이었으므로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위는 여전히 경련이 일어나 진짜 토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반우희는 재빨리 물을 사다 안시연에게 주고 조심스레 등도 토닥여줬다.“위가 불편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갈까요?”반우희는 잔뜩 걱정하며 물었다.텅 빈 공허한 눈으로 풀숲을 바라보던 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그럼...”반우희가 보기에 안시연은 영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안시연은 애써 진정하고는 반우희에게 말했다.“우리 경찰서도 가야 해요.”“오, 그러네요.”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는 저 혼자 가도 되니까 언니는 불편하면 안 가도 돼요.”“괜찮아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눈만 바라보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팔을 내밀었다.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남자는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안시연과 이마를 맞대고 물었다.“갑자기 술은 왜 마신 거야?”안시연은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 연정훈의 목을 감싸며 가볍게 속삭였다.“정훈 씨가 하도 안 와서 기다리다 짜증이 나서 그랬어요.”“이런 식으로 성질을 부린다고?”남자는 안시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조금 늦은 것뿐이잖아.”안시연은 입꼬리를 당겨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연정훈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떨어지며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목에도 키스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가끔 보여주는 주동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술을 마신 후의 나른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연정훈을 금방 달아오르게 했다.연정훈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도 안시연의 옆모습을 감상하면서 그녀를 달랬다.“조금만 기다려 줄래? 금방 씻고 올게.”안시연은 대답 대신 조용히 연정훈의 목 부근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무슨 냄새 맡는 거야? 나 오늘 담배 안 피웠어. 요즘은 담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안시연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차디찬 냉담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정훈 씨 몸에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던 중이었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정도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귀를 작게 꼬집고는 말했다.“또 멋대로 생각한 거야?”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딘가 잘못됐음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안시연의 눈동자를 마주한 연정훈은 말없이 눈썹만 꿈틀거렸다.둘을 감싸던 묘한 흥분감은 모두 사라졌다.“왜 그래?”연정훈
하나의 거짓말은 무수한 거짓말을 낳는다.연정훈은 한치의 후회도 없이 안시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소현주를 보러 갔어.”안시연은 순간 숨이 턱 막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에야 안시연은 겨우 입을 뗐다.“그때 한 번뿐만이 아니죠?”“...”“우리가 병원에서 그분을 만났던 날, 아, 두 분이 다시 만난 날이기도 하겠네요. 그날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만나러 갔어요.”연정훈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며 말했다.“그때는 얘기할 게 있어서 만난 거야.”“무슨 얘기 했는데요?”안시연은 한 걸음 한 걸음 연정훈에게 다가가며 몰아붙였다.“정훈 씨가 얼마나 소현주 씨를 그리워했는지, 아니면 소현주 씨가 정훈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나요?”연정훈의 미간은 더욱 일그러졌다.연정훈은 잘못한 것도 맞고 그것 때문에 안시연에게 미안한 것도 맞았지만 무엇보다도 안시연을 좋아했다. 하지만 뼛속에 새겨진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만은 꺾이지 않았기에 사형 선고 같은 안시연의 촘촘한 의심에 반감이 들었다.안시연은 술을 마셨지만 머리와 발음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또렷해졌다.안시연은 입술을 한번 축이고 잔뜩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몸을 돌려 찬물 한잔을 따라서는 선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그 두 번 말고도 만나 적이 있나요?”“없어.”“아직도 절 속일 건가요?”안시연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재단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어떻게 사적으로 몇 번 만나서 소통도 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나요?”‘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연정훈은 그제야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연약함을 보아냈고 사태가 더는 악화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재단에 관한 일이라면 이해해.”“말해보세요, 듣고 있잖아요.”안시연은 옅은 웃음으로 회답했다.하지만 안시연이 침착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연정훈은 알아챌 수 있었다.연정훈은 생애 처음으로 범죄자처럼 심문을 당했지만 하나하나
역겹다.안시연은 결국 그 말을 뱉어버렸다.연정훈의 낯빛은 여간 어두운 게 아니었다.거실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안시연은 상처 입은 눈을 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훈 씨가 약속했잖아요, 더는 절 속이지 않겠다고요.”연정훈은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반박하지 못했다.연정훈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시연에게 사과했다.“너한테 숨긴 건 내 잘못이 맞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난 정말 소현주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너한테 약속한 그 날부터 내 마음속은 온통 너였어.”안시연이 조금 진정된 것으로 보이자 연정훈의 안시연의 손목을 끌어당겼다.하지만 안시연은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연정훈의 손을 뿌리쳤다.그 동작이 하도 컸던 탓에 손에 쥐고 있던 반지도 날아가 버렸다.안시연의 손에서 탈출한 반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안시연은 잔뜩 흔들리는 눈빛으로 얼른 허리를 숙여 반지를 찾았다.연정훈도 잠시 감정을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둘은 마침내 발견했다.반지는 테이블 모서리에 있었다.연정훈은 걸음을 옮겼고 안시연도 마찬가지였다.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안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안시연은 손끝에 닿는 느낌을 확인하고는 반지를 가져갔다.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안시연은 반지를 들어 올리며 쓸쓸하게 웃었다.“이게 바로 정훈 씨가 말한 온통 저밖에 없다던 그 마음인가요?”“저희 외할머니께서 주신 반지를 정훈 씨는 떳떳하게 끼고 싶지 않아 하네요. 제가 주제넘은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외할머니를 위해 주문한 목걸이는 정훈 씨 서재 서랍 안에서 고스란히 모셔져 있잖아요!”연정훈은 분명 목걸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해줬지만 안시연은 지금 이런 순간에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렸다.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려 눈썹을 마구 찌푸리고 말했다.“넌 지금 쓸모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연정훈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그 어떤 해석도 듣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더는 다툴 힘이 없었고 알코올에 잠식된 신경은 언제든지 그녀를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더 보고는 눈을 내리깐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연정훈은 지금 이런 상태의 안시연을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재빨리 다가가 안시연을 끌어안았다.“놔줘요!”안시연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뒤에서 끌어안은 연정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연정훈에 의해 몸이 돌려졌고 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밀어내는 동시에 참지 못하고 그를 때려버렸다.혼란한 틈 속에서 손이 주제를 모르고 나댔다.짝!뺨이 얼얼했다.안시연은 선체로 굳어버렸다.옆으로 돌아간 연정훈의 뺨에는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둘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안시연의 손은 덜덜 떨렸고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연정훈은 턱에 힘을 주고 2초간의 침묵 끝에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너 지금 제정신 아니니까 밖에 나가지 마. 화를 내더라도 집에서 내.”안시연은 자신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난 연정훈의 눈가를 보았다.안시연은 멍하니 넋이 나간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안시연이 방심한 틈을 타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아끌고 위층으로 향했다.침실에 들어선 후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침대에 앉혔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옷장을 열어 옷을 꺼냈다. 샤워하려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그렇게 다투고 난 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연정훈은 안시연보다 먼저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손으로 누르고는 시선을 내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날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오늘 밤은 내가 서재에서 잘게. 넌 여기 있어. 술 좀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저 정신 멀쩡해요.”“너 취했어.”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런 연정훈의 평온함
연정훈은 서재로 돌아가 서둘러 샤워를 했다.샤워하는 동안에도 연정훈은 아주머니에게 안시연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10시쯤 되자 안시연은 갑자기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전 외할머니한테 갈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간 안시연은 연정훈과 대치해야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붉은 얼굴을 보고 그녀가 반쯤 취해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연정훈은 참을성을 가지고 안시연을 설득했다.“너 지금이 상태로 가면 외할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어.”“반우희 씨를 찾아가도 돼요!”“그 아가씨는 집에 아이들도 있잖아. 이 밤중에 찾아가서 귀찮게 하려고 그래?”“그럼 호텔에서 묵으면 되죠!”어쨌든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아주머니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둘이 또 싸우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위층의 두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연정훈도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반우희한테 데려다줄게.”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그저 차갑게 얼어붙은 태도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고는 마당에서 연정훈을 기다렸다.연정훈은 직접 차를 몰아 안시연을 아파트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끝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안전띠를 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로 올라갔다.연정훈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안시연을 자극할까 봐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칠흑 같은 복도에서 빠른 걸음으로 반쯤 걸어간 안시연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안시연은 벽을 짚고 서서 주위의 어둠과 적막함을 느꼈다. 혈액 속에서 들끓었던 알코올도 점차 차게 식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당연히 외할머니를 보러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을 외할머니가 본다면 걱정하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단지 연정훈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을 뿐이다.그 집은 둘이 함께 살아온 추억으로 가득하다.침실의 구석구석에도 그들의
“제가 꼬셔서 넘어오게 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네가 정말 안시연을 꼬셔서 넘어오게 만들면 그때 인정해줄게.”양지원은 속으로 어차피 양혁수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양혁수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그래요. 어머니께서 인정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해요.”양혁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양지원은 몸을 곧게 세우며 물었다.“너 뭐 하려고 그러니?”“어머니한테 콩국 좀 사다 드리려고요.”“무섭게 왜 갑자기 안 하던 효도를 하고 그러니.”양혁수는 그저 웃었다.“기다리세요. 이 아들이 콩국 사 들고 돌아와서 효도할게요.”양지원은 양혁수가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릴까 봐 당부했다.“이 늦은 밤에 괜히 찾아가서 재수 없게 굴지 말아라. 이 시간이면 다들 잠들었을 거야.”양지원은 ‘잠들었을 거다’라는 말을 괜히 더 강조했다. 양혁수는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미 잠들었다면 그거야말로 양혁수에게는 그 둘에게 혼란을 주기 딱 좋은 기회였다.양혁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밖으로 나가면서 바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밤에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안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겨 설명해야 했다.양혁수는 전화를 걸면서도 안시연이 과연 받을까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안시연이 바로 받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여보세요?”양혁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놀랄까 봐 황급히 응답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자 듣고 있던 양혁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선배님 우셨어요?”“...”안시연은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물었다.“무슨 일이야?”‘반복재생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양혁수는 잠깐 조용히 생각하다가 말했다.“이 밤에 불쑥 전화를 드린 건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의 어머니께서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이 없었다.말을 마친 양혁수는 뒤늦게 본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