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꼬셔서 넘어오게 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네가 정말 안시연을 꼬셔서 넘어오게 만들면 그때 인정해줄게.”양지원은 속으로 어차피 양혁수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양혁수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그래요. 어머니께서 인정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해요.”양혁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양지원은 몸을 곧게 세우며 물었다.“너 뭐 하려고 그러니?”“어머니한테 콩국 좀 사다 드리려고요.”“무섭게 왜 갑자기 안 하던 효도를 하고 그러니.”양혁수는 그저 웃었다.“기다리세요. 이 아들이 콩국 사 들고 돌아와서 효도할게요.”양지원은 양혁수가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릴까 봐 당부했다.“이 늦은 밤에 괜히 찾아가서 재수 없게 굴지 말아라. 이 시간이면 다들 잠들었을 거야.”양지원은 ‘잠들었을 거다’라는 말을 괜히 더 강조했다. 양혁수는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미 잠들었다면 그거야말로 양혁수에게는 그 둘에게 혼란을 주기 딱 좋은 기회였다.양혁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밖으로 나가면서 바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밤에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안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겨 설명해야 했다.양혁수는 전화를 걸면서도 안시연이 과연 받을까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안시연이 바로 받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여보세요?”양혁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놀랄까 봐 황급히 응답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자 듣고 있던 양혁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선배님 우셨어요?”“...”안시연은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물었다.“무슨 일이야?”‘반복재생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양혁수는 잠깐 조용히 생각하다가 말했다.“이 밤에 불쑥 전화를 드린 건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의 어머니께서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이 없었다.말을 마친 양혁수는 뒤늦게 본
양혁수는 안시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짝 냄새를 맡고는 물었다.“많이 마셨어요?”안시연은 몸을 움직여 양혁수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양혁수는 안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이렇게 취하셨는데 연정훈 씨는 선배님이 그냥 나오게 내버려 뒀어요? 늑대가 선배님 물어갈까 봐 걱정도 안 되시나 봐요.”“나 이래 보여도 정신은 맑아.”참 겁도 없다.양혁수는 손으로 가위를 만들어 안시연의 눈앞에서 흔들었다.“이게 몇으로 보여요?”“... 팔.”“어이구 진짜 말짱하네요?”“...”안시연은 온몸이 아팠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안시연을 본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다리를 쭉 뻗고는 말했다.“뭐 좀 먹을래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위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그럼 제가 알아서 주문하고 올게요.”양혁수는 몸을 일으켜 QR코드를 찍어 경인의 지역 특색 음식을 한가득 시켰다. 그중에 콩국 두 접시는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우리 집 아가씨 거예요.”안시연은 콩국을 힐끗 보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연정훈이 아팠던 날, 안시연은 한밤중에 양나비를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연정훈에게 줄 콩국을 샀지만 양혁수의 차에 모두 쏟아버리고 말았다.그때도 밤새 다퉜었다.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하지만 이 짧은 반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한 나머지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 것이다.양혁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이보세요, 선배! 무슨 생각 해요?”안시연은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붙잡아 왔다.양혁수는 혀를 찼다.“지금 저를 앞에 두고 마음속으로는 연정훈 씨를 생각하는 거예요?”“...”안시연은 양혁수가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양혁수는 안시연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맞게 짚었음을 알아챘다.양혁수는 순간 기분이 잡쳤지만 죽 한 그릇을 안시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좀 먹어요. 얼굴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남자랑 싸웠다고 혼도
연정훈은 본인이 충분한 매너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달려들어 가 애송이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건 본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여겼다.안시연에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건 연정훈도 안다.안시연이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원했고 그게 양혁수라는 점도 이해한다.시간이 되면 얌전히 자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연정훈은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이 정말로 양혁수와 무슨 일을 벌일까 의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원래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양혁수가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둘 나오자 새삼 입맛이 돌았다.중간에 닭발 한 접시가 나왔다. 양혁수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닭발의 뼈를 발라냈다. 막힘없는 양혁수의 전문적인 손놀림은 안시연을 놀라게 했다.“... 배웠어?”“우리 집이 전생에 무뼈닭발을 팔던 집이었거든요.”안시연은 또 바람 빠지게 피식 웃었다.“먹어요. 그리고 힘없이 처져있지 말아요. 보고 있는 제가 다 힘들어요.”양혁수는 분명 찻잔을 들고 있었음에도 술을 마시는 모양으로 쿨하게 두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그러려면 양혁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혁수 씨 상처는 어떻게 됐어?”“지금 벗어서 보여드릴까요?”“... 아무래도 그만하는 게 좋겠어.”“그래요. 날씨도 추워서 저도 감기 걸릴까 봐 무섭네요.”...두 사람은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음식을 거의 바닥냈다.양혁수는 안시연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며 밤공기를 마시게 해줄 계획으로 안시연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차에 앉은 안시연은 또다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까 많이 먹은 탓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더 심해졌다.“나 좀 쉬고 싶어...”양혁수는 둘의 좌석을 모두 뒤로 눕히고 선루프를 열어 안시연에게 별을 보여주었다.안시연은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는 외로운 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음은 평온
안시연은 밝은 빛에 놀라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있는 양혁수의 얼굴을 발견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무의식 간에 뒤로 물러났다.양혁수는 쯧쯧 혀를 찼다.양혁수는 손을 들어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닌 차에 시동을 걸고 따라서 라이트를 켰다.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어떤 재수 없는 사람이 이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확인하려 했다.사실 양혁수도 맞은 편의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두 자동차 라이트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마주 보고 밝히고 있으니 시야에는 온통 하얀 빛만이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3초 정도 대치 끝에 상대방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양혁수는 작게 욕을 읊조리며 차에서 내렸다.양혁수는 칼에 찔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난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안시연은 손을 뻗어 양혁수를 잡아 세웠다.“충동적으로 굴지 마.”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안시연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강렬한 빛을 뚫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어렴풋이 확인했다.‘연정훈? 하!’순식간에 침착해진 양혁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안시연에게 더 바짝 붙었다.안시연이 여전히 당황해하고 있을 때 차 문손잡이가 당겨졌다.눈치 빠른 양혁수가 한발 먼저 차 문을 잠갔다.그러고 나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두드리는 힘은 전혀 작지 않았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두 눈을 마주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연정훈이었다.안시연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 뭘 무서워하고 그래요. 저 사람은 전애인과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잖아요. 근데 선배님이 저 좀 만나고 저랑 말 몇 마디 한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요.”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의 말이 맞았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현주의 냄새를 온몸 가득 묻히고 온 연정훈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었다.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참을 대치했다.그러자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
외투에 아직 연정훈의 체온이 남아 있었고 안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결국 다시 삼키고 말았다.연정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안시연에게 옷을 덮어준 뒤, 연정훈은 단호하게 안시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힘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안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집에 가기 싫어?”연정훈이 말하는 집은 당연히 강남을 뜻했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부감을 드러냈다.“난 외할머니댁으로 갈 거예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며 안시연을 억지로 데려가려는 듯했다.“정훈 씨!”안시연이 막 목소리를 높히자 차 안에 있던 양혁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빠르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시연 씨가 정훈 씨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것을 모르겠어요?”양혁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도발적인 태도로 말했다.“연 대표님, 억지로 데려갈 필요는 없잖아요?”연정훈은 양혁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양혁수는 혀를 차며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안시연의 다른 손을 잡아당겼다.안시연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그녀는 거의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날 뻔했지만, 순간 왼손이 다시 연정훈의 손에 잡혔다.순식간에 상황은 민망해졌다.밤이 깊어 길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한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그들은 모두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호화로운 차를 배경으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모습은 지나치게 이목을 끌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안시연의 얼굴은 화끈거렸고 창피함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두 손을 뺐다.양혁수가 미친 듯이 행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연정훈도 평소와는 다르게 안시연을 꽉 잡고 있었다.두 남자가 힘을 세게 주었고 안시연의 두 손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함을 참았다.갑자기, 왼손이 풀렸다.안시연은 잠시 멍해졌다.양혁수가 그
양혁수의 성격을 알면 양혁수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리 부탁해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명령은 더더욱 통하지 않을 것이다.연정훈이 양혁수에게 손을 놓으라고 할수록 양혁수는 오히려 더 태연하게 손을 꽉 잡았다!안시연은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둘 다 손 놓아줘요!”안시연은 최대한 큰 소리로 말하며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양혁수가 고집스러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따라 연정훈까지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며 손을 놓지 않았다.안시연은 직감했다. 이대로 가면 연정훈이 정말로 양혁수에게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세 사람 사이의 긴장은 팽팽한 줄처럼 언제 끊어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웠다.그때 갑자기.멀리서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들 앞에 멈췄다.차 번호판을 본 양혁수가 먼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곧이어 뒷좌석 문이 열리고 양지원이 차에서 내렸다.안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양지원은 그들의 상황을 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지금...줄다리기라도 하는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양지원은 먼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혁수는 워낙 뻔뻔해서 창피한 것도 모른다고 치자. 하지만 너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 아닌가?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양지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잖아요.”연정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오신 거라면 환영하죠. 하지만 편들러 오신 거라면 당분간은 어른으로 모시기 어렵겠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응수했다.좋다.그러고는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안시연은 의아했다.“…?”양지원이 말을 이어갔다.“두 여자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시장이 그들에게 줄다리기하듯 아이를 잡아당기라고 했죠. 이긴 사람이 아이를 갖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사실 시장의 진짜 의도는
차는 이미 멀리 떠났고 다시 돌아가면 그 두 고집스러운 사람을 또 마주해야 했다.양지원은 차라리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 길가에서 바람을 쐬기로 했다.심야였지만, 양지원은 여전히 피곤해 보이지 않았고 무심코 사탕 한 봉지를 꺼내 안시연에게 하나 건넸다.두리안 맛이었다.안시연은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며 사탕을 받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한 번 쓱 보며 말했다.“두리안 안 좋아해요?”“아니요. 좋아해요.”“그럼 먹어요.”“네.”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사탕을 까기 시작했다.양지원은 턱을 괴고 거울로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혀를 차며 말했다.“시연 씨의 아빠는 좋은 사람일 거예요.”안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양지원이 말했다.“그렇지 않다면 시연 씨 같은 딸을 낳을 수 없었을 거예요.”안시연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소현정을 대신해 사과하려 했다.“소현정 대신 사과할 필요 없어요.”양지원은 안시연의 행동을 예상했다.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차 안에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침묵이 길어지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떻게 갑자기 오셨어요?”“갑자기?”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그렇게 딱 맞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양지원이 말했다.“연정훈이 나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하더라고요.”“언제요?”안시연이 놀라 물었다.“대략...15분 전쯤일 거예요?”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렇다면 연정훈은 이미 오래전에 안시연과 양혁수를 발견했다.양지원은 가볍게 물었다.“연정훈이랑 싸웠나요?”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응답했다.“싸운 것뿐인데 한밤중에 위험하게 나와서 뭐 하려던 거예요?”“정훈 씨가 저를 외할머니댁에 데려다줬어요. 제가 멋대로 돌아다닌 건 아니에요.”양지원이 웃으며 말했다.“싸우고도 시연 씨를 데려다줬다니 연정훈은 참 침착하네요. 혁수였으면 분명 문을 쾅 닫고 나갔을 거예요.”“너무 침착한 것도 사람을 힘들게 해요.”안시
이 키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안시연은 숨을 쉬기 힘들고 혀끝이 아프게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밀쳐도 연정훈의 산처럼 단단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가 저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두리안 사탕의 향기를 참지 못해 안시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탕을 안시연의 입 속으로 넣었다.그는 화를 억누르며 사탕의 이상한 맛을 견뎌야 했다. 안시연의 머리를 붙잡고 그녀에게 입을 벌리게 하며 자신의 요구를 강요했다.모르는 사이에 연정훈의 손이 안시연의 손목에서 풀려버렸다.안시연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훈을 때릴 수는 없으니 대신 손가락을 힘껏 사용해 그의 턱을 깊게 긁어버렸다.연정훈은 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 그녀를 놓아주었다.턱 아래가 화끈거리며 아팠다.연정훈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다음 순간 안시연은 몸을 일으켜 다시 그의 뺨에 한 대 때렸다!찰싹!차 안의 공간이 좁아 이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서로 얽힌 숨소리도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연정훈의 맞은편 얼굴을 바라보며 안시연은 침착하게 몸을 일으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에서 비켜 주세요!”연정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천천히 얼굴을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전혀 겁내지 않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말했다.“내가 혁수 씨를 만난 것에 당신이 화가 나서 내게 화풀이하려는 거죠?”연정훈은 입만 뻐끔거렸다.“...”“아니면 또 이런 방식으로 나를 입막음하려는 건가요?”안시연이 연정훈의 말을 끊었다.차 안은 잠깐 고요해졌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충동이 지나고 난 뒤, 연정훈은 후회가 밀려왔다.연정훈은 정말 미쳤다.안시연은 몸을 뒤로 기대고 손으로 눈을 가리며 흐느끼듯이 말했다. “비켜 주세요.”잠시 후, 그녀 몸 위가 가벼워졌다.연정훈은 운전석으로 돌아갔지만, 차 문을 열고 앞쪽을 돌아 안시연을 보조석에서 안고 넓은 뒷좌석으로 갔다.안시연은 긴장했다. 주위가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