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본인이 충분한 매너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달려들어 가 애송이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건 본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여겼다.안시연에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건 연정훈도 안다.안시연이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원했고 그게 양혁수라는 점도 이해한다.시간이 되면 얌전히 자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연정훈은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이 정말로 양혁수와 무슨 일을 벌일까 의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원래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양혁수가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둘 나오자 새삼 입맛이 돌았다.중간에 닭발 한 접시가 나왔다. 양혁수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닭발의 뼈를 발라냈다. 막힘없는 양혁수의 전문적인 손놀림은 안시연을 놀라게 했다.“... 배웠어?”“우리 집이 전생에 무뼈닭발을 팔던 집이었거든요.”안시연은 또 바람 빠지게 피식 웃었다.“먹어요. 그리고 힘없이 처져있지 말아요. 보고 있는 제가 다 힘들어요.”양혁수는 분명 찻잔을 들고 있었음에도 술을 마시는 모양으로 쿨하게 두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그러려면 양혁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혁수 씨 상처는 어떻게 됐어?”“지금 벗어서 보여드릴까요?”“... 아무래도 그만하는 게 좋겠어.”“그래요. 날씨도 추워서 저도 감기 걸릴까 봐 무섭네요.”...두 사람은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음식을 거의 바닥냈다.양혁수는 안시연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며 밤공기를 마시게 해줄 계획으로 안시연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차에 앉은 안시연은 또다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까 많이 먹은 탓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더 심해졌다.“나 좀 쉬고 싶어...”양혁수는 둘의 좌석을 모두 뒤로 눕히고 선루프를 열어 안시연에게 별을 보여주었다.안시연은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는 외로운 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음은 평온
안시연은 밝은 빛에 놀라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있는 양혁수의 얼굴을 발견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무의식 간에 뒤로 물러났다.양혁수는 쯧쯧 혀를 찼다.양혁수는 손을 들어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닌 차에 시동을 걸고 따라서 라이트를 켰다.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어떤 재수 없는 사람이 이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확인하려 했다.사실 양혁수도 맞은 편의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두 자동차 라이트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마주 보고 밝히고 있으니 시야에는 온통 하얀 빛만이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3초 정도 대치 끝에 상대방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양혁수는 작게 욕을 읊조리며 차에서 내렸다.양혁수는 칼에 찔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난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안시연은 손을 뻗어 양혁수를 잡아 세웠다.“충동적으로 굴지 마.”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안시연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강렬한 빛을 뚫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어렴풋이 확인했다.‘연정훈? 하!’순식간에 침착해진 양혁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안시연에게 더 바짝 붙었다.안시연이 여전히 당황해하고 있을 때 차 문손잡이가 당겨졌다.눈치 빠른 양혁수가 한발 먼저 차 문을 잠갔다.그러고 나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두드리는 힘은 전혀 작지 않았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두 눈을 마주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연정훈이었다.안시연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 뭘 무서워하고 그래요. 저 사람은 전애인과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잖아요. 근데 선배님이 저 좀 만나고 저랑 말 몇 마디 한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요.”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의 말이 맞았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현주의 냄새를 온몸 가득 묻히고 온 연정훈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었다.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참을 대치했다.그러자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
외투에 아직 연정훈의 체온이 남아 있었고 안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결국 다시 삼키고 말았다.연정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안시연에게 옷을 덮어준 뒤, 연정훈은 단호하게 안시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힘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안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집에 가기 싫어?”연정훈이 말하는 집은 당연히 강남을 뜻했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부감을 드러냈다.“난 외할머니댁으로 갈 거예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며 안시연을 억지로 데려가려는 듯했다.“정훈 씨!”안시연이 막 목소리를 높히자 차 안에 있던 양혁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빠르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시연 씨가 정훈 씨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것을 모르겠어요?”양혁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도발적인 태도로 말했다.“연 대표님, 억지로 데려갈 필요는 없잖아요?”연정훈은 양혁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양혁수는 혀를 차며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안시연의 다른 손을 잡아당겼다.안시연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그녀는 거의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날 뻔했지만, 순간 왼손이 다시 연정훈의 손에 잡혔다.순식간에 상황은 민망해졌다.밤이 깊어 길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한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그들은 모두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호화로운 차를 배경으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모습은 지나치게 이목을 끌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안시연의 얼굴은 화끈거렸고 창피함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두 손을 뺐다.양혁수가 미친 듯이 행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연정훈도 평소와는 다르게 안시연을 꽉 잡고 있었다.두 남자가 힘을 세게 주었고 안시연의 두 손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함을 참았다.갑자기, 왼손이 풀렸다.안시연은 잠시 멍해졌다.양혁수가 그
양혁수의 성격을 알면 양혁수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리 부탁해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명령은 더더욱 통하지 않을 것이다.연정훈이 양혁수에게 손을 놓으라고 할수록 양혁수는 오히려 더 태연하게 손을 꽉 잡았다!안시연은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둘 다 손 놓아줘요!”안시연은 최대한 큰 소리로 말하며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양혁수가 고집스러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따라 연정훈까지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며 손을 놓지 않았다.안시연은 직감했다. 이대로 가면 연정훈이 정말로 양혁수에게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세 사람 사이의 긴장은 팽팽한 줄처럼 언제 끊어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웠다.그때 갑자기.멀리서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들 앞에 멈췄다.차 번호판을 본 양혁수가 먼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곧이어 뒷좌석 문이 열리고 양지원이 차에서 내렸다.안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양지원은 그들의 상황을 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지금...줄다리기라도 하는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양지원은 먼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혁수는 워낙 뻔뻔해서 창피한 것도 모른다고 치자. 하지만 너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 아닌가?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양지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잖아요.”연정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오신 거라면 환영하죠. 하지만 편들러 오신 거라면 당분간은 어른으로 모시기 어렵겠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응수했다.좋다.그러고는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안시연은 의아했다.“…?”양지원이 말을 이어갔다.“두 여자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시장이 그들에게 줄다리기하듯 아이를 잡아당기라고 했죠. 이긴 사람이 아이를 갖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사실 시장의 진짜 의도는
차는 이미 멀리 떠났고 다시 돌아가면 그 두 고집스러운 사람을 또 마주해야 했다.양지원은 차라리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 길가에서 바람을 쐬기로 했다.심야였지만, 양지원은 여전히 피곤해 보이지 않았고 무심코 사탕 한 봉지를 꺼내 안시연에게 하나 건넸다.두리안 맛이었다.안시연은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며 사탕을 받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한 번 쓱 보며 말했다.“두리안 안 좋아해요?”“아니요. 좋아해요.”“그럼 먹어요.”“네.”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사탕을 까기 시작했다.양지원은 턱을 괴고 거울로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혀를 차며 말했다.“시연 씨의 아빠는 좋은 사람일 거예요.”안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양지원이 말했다.“그렇지 않다면 시연 씨 같은 딸을 낳을 수 없었을 거예요.”안시연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소현정을 대신해 사과하려 했다.“소현정 대신 사과할 필요 없어요.”양지원은 안시연의 행동을 예상했다.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차 안에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침묵이 길어지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떻게 갑자기 오셨어요?”“갑자기?”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그렇게 딱 맞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양지원이 말했다.“연정훈이 나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하더라고요.”“언제요?”안시연이 놀라 물었다.“대략...15분 전쯤일 거예요?”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렇다면 연정훈은 이미 오래전에 안시연과 양혁수를 발견했다.양지원은 가볍게 물었다.“연정훈이랑 싸웠나요?”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응답했다.“싸운 것뿐인데 한밤중에 위험하게 나와서 뭐 하려던 거예요?”“정훈 씨가 저를 외할머니댁에 데려다줬어요. 제가 멋대로 돌아다닌 건 아니에요.”양지원이 웃으며 말했다.“싸우고도 시연 씨를 데려다줬다니 연정훈은 참 침착하네요. 혁수였으면 분명 문을 쾅 닫고 나갔을 거예요.”“너무 침착한 것도 사람을 힘들게 해요.”안시
이 키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안시연은 숨을 쉬기 힘들고 혀끝이 아프게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밀쳐도 연정훈의 산처럼 단단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가 저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두리안 사탕의 향기를 참지 못해 안시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탕을 안시연의 입 속으로 넣었다.그는 화를 억누르며 사탕의 이상한 맛을 견뎌야 했다. 안시연의 머리를 붙잡고 그녀에게 입을 벌리게 하며 자신의 요구를 강요했다.모르는 사이에 연정훈의 손이 안시연의 손목에서 풀려버렸다.안시연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훈을 때릴 수는 없으니 대신 손가락을 힘껏 사용해 그의 턱을 깊게 긁어버렸다.연정훈은 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 그녀를 놓아주었다.턱 아래가 화끈거리며 아팠다.연정훈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다음 순간 안시연은 몸을 일으켜 다시 그의 뺨에 한 대 때렸다!찰싹!차 안의 공간이 좁아 이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서로 얽힌 숨소리도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연정훈의 맞은편 얼굴을 바라보며 안시연은 침착하게 몸을 일으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에서 비켜 주세요!”연정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천천히 얼굴을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전혀 겁내지 않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말했다.“내가 혁수 씨를 만난 것에 당신이 화가 나서 내게 화풀이하려는 거죠?”연정훈은 입만 뻐끔거렸다.“...”“아니면 또 이런 방식으로 나를 입막음하려는 건가요?”안시연이 연정훈의 말을 끊었다.차 안은 잠깐 고요해졌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충동이 지나고 난 뒤, 연정훈은 후회가 밀려왔다.연정훈은 정말 미쳤다.안시연은 몸을 뒤로 기대고 손으로 눈을 가리며 흐느끼듯이 말했다. “비켜 주세요.”잠시 후, 그녀 몸 위가 가벼워졌다.연정훈은 운전석으로 돌아갔지만, 차 문을 열고 앞쪽을 돌아 안시연을 보조석에서 안고 넓은 뒷좌석으로 갔다.안시연은 긴장했다. 주위가
세 가지 선택은 안시연이 화가 나서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안시연은 당당하게 말했다.“정훈 씨가 소현주 씨와 완전히 정리하면 전 다시 정훈 씨를 믿고 연애를 계속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정훈 씨가 소현주 씨를 놓지 못한다면 저를 아내로 맞아주고 명분과 지위를 주세요. “사랑과 권리 중 하나는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봐, 얼마나 일리 있는 이론이야.’밤에 싸울 때, 연정훈은 안시연이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것이 짜증 났다. 양혁수가 방해하자 연정훈은 질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안시연에게 결혼을 강요받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하지만 안시연은 이렇게 말했다.“부유한 가문의 사모님들은 한쪽 눈을 감고 모른 척 하고 살잖아요. 내가 연씨 사모님이 되면 정훈 씨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규칙을 지킬게요. 양씨나 임씨가 몇 명 더 와도 난 참아낼 수 있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의 이 말은 분명히 연정훈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있었다.안시연의 성격을 보면 그런 일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연정훈이 침묵하자 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재촉했다. “대표님, 하나만 골라보세요.”안시연은 세 번째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연정훈의 아내가 되겠다는 마음을 최근에 서서히 접어두었다.연정훈과의 관계는 마치 도박 같았다. 안시연은 필연적으로 질 것이고 그 끝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저 독이 전신으로 퍼지는 걸 느끼며 차분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이전의 모든 일은 죽음의 시간을 늦추기 위한 것이었다.연정훈은 또다시 안시연을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소현주와의 관계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계속해서 그녀와 연애를 이어가려고 했을 것이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연정훈은 한참 동안 안시연을 응시하다가 얇은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물었다.“나한테 시집오고 싶어?”안시연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곧 입술을 깨물며 등을 곧게 세우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정훈 씨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나와
안시연은 잠시 멈칫했다.‘정훈 씨에게 시간을 주라고?’연정훈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말했다.“충분한 시간을 줘. 내가 그 장애물을 다 해결하고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할게.”안시연의 눈빛이 흔들렸고 어쩔 수 없이 침을 삼켰다.잠깐 머릿속이 멈췄지만, 이내 이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얼마나요?”연정훈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최대한 빨리.”안시연은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정훈 씨는 여전히 날 달래고 싶은 거잖아요.”연정훈은 안시연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안시연은 자신이 연정훈의 아내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결혼은 중요한 일이야. 신중해야 하지 않겠어?”연정훈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처음 정훈 씨가 소현주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도 그렇게 신중했나요?”안시연은 여전히 소현주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이건 우리의 일이야. 계속해서 소현주를 끌어들이지 마.”“소현주 씨만 있으면 이건 우리 셋의 문제예요!”그녀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혼이며 뭐든 다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은 갑자기 강하게 몸부림치며 연정훈의 품에서 빠져나갔다.“세 번째 선택도 하지 말고 두 번째 선택도 하지 마요. 그냥 우리 헤어져요.”연정훈은 어이없어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눈을 감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불가능해.”안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안시연은 일방적으로 헤어지겠다고 선언하면 연정훈이 자신을 붙잡지 못하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뒤에서 안시연을 힘껏 끌어안으며 그녀를 놓지 않았다.“놔줘요!”안시연은 술기운에 화가 나서 어디서 생긴 힘인지 모르게 저항하며, 연정훈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맞히면 때리고 맞히지 못하면 손톱으로 할퀴려고 했다.연정훈은 처음으로 안시연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어쩔 수 없이 그는 안시연의
연정훈이 말했다.“왜 나한테 그래? 저 사람한테 물어봐.”이승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에게 물었다.“안 그래요?”‘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양시연은 이승우를 노려보았다.변백호는 자연스럽게 연정훈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제가 시연이를 대신해서 연 대표님께 사과드릴게요.”연정훈은 아주 쌀쌀맞게 말했다.“그쪽이 대신 사과를 한다고요?”“네.”이승우가 말했다.“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정훈이는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갚으려고요?”변백호가 대답했다.“아내를 갚아줄 수는 없어도 아이는 노력할 수 있죠. 저랑 시연이가 3년 안으로 아이 둘을 낳으면 연 대표님을 친 아빠처럼 모시라고 할게요. 그러면 어떨까요?”이승우가 웃음을 터뜨렸다.‘오. 꽤 치는데?’이승우가 다시 반격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변백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어떻게든 내 사람 다시 데리고 올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는 못 살아서.”“와우.”이승우는 몰래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우리 연 대표님 절대 지지 않아.’그러나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연정훈은 말만 할 뿐이지. 어떻게 다시 양시연을 찾아오겠어?’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그건 댁 마음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변백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연 대표님답네요.”“하지만...”변백호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하나뿐인데 먼저 옆을 채간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그건 저도 동의를 합니다.”그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그때!문이 활짝 열리더니 반우희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시연 언니, 왜 아직도 안 내려와요?”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이승우는 반우희를 발견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우희
“결혼식?”연정훈은 그 단어를 곱씹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만난 지 1년 됐는데 벌써 결혼하려고요?”양시연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변백호가 먼저 한발 빨랐다.“1년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양시연에게 물었다.“우리가 만난 지 1년 되었던가요?”“6개월이요!”“그러니까요.”변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연정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연 대표님은 나이가 저희보다 많아 보이는데 이미 결혼하신 건가요?”“...”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져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연정훈의 상대로 변백호는 아주 제격이었다.연정훈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미혼입니다.”“조급하지는 않으세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감히 그쪽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변백호는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저는 마음이 너무 급해지더라고요. 하루빨리 우리 시연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김세연은 죽상이 되었다.두 사람 사이 튀는 불꽃에 사람들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주시했다.이승우는 구경하러 들렀다가 마침 들리는 대화에 쯧쯧 혀를 찼다.‘우리 정훈이 불쌍하게 됐네.’그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이승우는 웨이터를 불러 몰래 말을 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는 양지원에게 걸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래 연회장 세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회장님을 비롯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지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아래층으로 향했다.그러다가 양지원은 연정훈을 따로 부르며 말했다.“정훈아, 어린 녀석들이 연애하게 내버려둬. 마침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다는데 넌 나랑 손 회장님 만나러 가자.”마치 연정훈이 양시연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처럼 들렸다.김세연이 참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오늘
어머니?양시연은 속으로 변백호의 연기에 박수를 쳤다.변백호는 자신보다도 더 쉽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폈다.‘누가 더 뻔뻔한지 보자는 거지?’‘흐흐.’‘자, 여기 너보다 더 뻔뻔한 사람 등장이야.’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김세연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연정훈은 ‘강강약약’인 사람으로 사건이 복잡해질수록 더 이성적으로 변했다.변백호는 아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양지원은 양시연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시연이는 잠시 저기로 가서 앉아. 우리 백호 여기 앉혀야지.”누군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역시 사위 아끼는 건 장모라고 벌써 딸은 찬밥 신세네요.”양지원이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변백호는 정장 차림이 아닌 편한 캐주얼 복장이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밝고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였다.변백호의 등장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김세연도 몰래 손에 땀을 쥐며 연정훈에게 눈짓했다.‘아들, 큰일이야. 네 경쟁 상대가 많이 잘생긴걸?’“...”외모로 보았을 때 연정훈은 변백호에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면 연정훈은 더 진중하고 짙은 남자의 매력이 흘렀다. 마치 방금 원목 상자처럼 우아한 기풍을 풍겼다.그러나 사모님들은 연정훈을 자주 봐왔고, 하필 변백호는 뉴페이스이자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이다 보니 관심이 그쪽으로 더 쏠렸다.변백호는 가볍게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저 앉으라는 데 빨리 일어나요.”양시연이 힐끗 노려보았다.젊은 커플의 풋풋한 사랑놀이에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김세연은 찻잔을 또 비웠다.그렇게 변백호가 자리를 차지했다.양시연이 다른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변백호가 양시연의 손을 휙 잡아 허리를 감싸더니 의자 손잡이에 앉혔다.“어디 가려고요? 여기 앉으면 되잖아요.”“...”커플 연기이고 뭐고 떠나서 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지금 뭐 하
양지원의 행동은 연정훈의 선물을 무시하는 의미였다.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다.‘두 가문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딸이 생기더니 두 가문 사이에 금이 간 거야?’김세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말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하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시 침착하게 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지원 이모는 넘치는 선물을 받으셨을 텐데 제 선물은 시간이 되실 때 확인해 보셔도 괜찮아요.”“역시 우리 정훈이가 날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까.”양지원은 양시연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정훈이 네가 있으면 앞으로 시연이 부부가 경인에서 지내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연정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시연에게 물었다.“사귄 지는 얼마됐어요?”마치 친척이 아래 사람에게 물어보는 말투였다.양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6개월 좀 넘었어요.”“오늘 이 자리에 오면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그 친구 곧 도착한대.”양지원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아까 연락이 왔는데 연회장 앞까지 왔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빤히 바라봤다.‘엄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엄마만 믿어.’“...”분위기는 살짝 어색하게 흘렀고 참석한 사람들은 꾸역꾸역 대화 주제를 돌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방금까지 양지원은 연회장으로 가야 한다며 연정훈의 선물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또 미래 사위를 기다린다며 자리에 편히 앉아 있었다.그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남자 친구가 좀 늦는 모양인데 재촉하지 그래요?]양시연은 그 내용을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나한테 세컨드가 되어달라면서요. 세컨드가 되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죠.]양시연은 제 눈을 의
“엄마, ‘오빠’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온 김에 모자를 한번 제대로 혼내주자고.”“...”김세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양시연이 연정훈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가 눈에 선했다.‘그건 안되지!’잠시 고민하던 김세연은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이 양지원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동생 사이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그러다가 내가 콱 물고 늘어져 사돈 하자고 매달리는 수가 있어. 네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 거라고!”“...”양지원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김세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다른 사모님들도 김세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두 가문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시연이랑 정훈이랑 맺어주면 되겠어요.”양시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그러자 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쉽게도 그러기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김세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날 겁주지 마!’‘내 아들이 당장 여기로 오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야!’“연 대표님, 이쪽입니다.”그때 문밖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양지원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우리 시연이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곧 날 잡을 것 같아요.”김세연은 김이 빠져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양지원의 말을 들은 제 아들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다 필요 없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다른 사모님들이 연정훈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무슨 일로 우리 대표님이 다 걸음하셨을까?”연정훈은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클래식한 턱시도였지만 연정훈에게 알맞게 제작되어 우아하고 타고난 귀족 분위기를 풍겼다.연정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지원 이모 생일인데 제가 와야죠.”그리고 슬쩍 양시연을
김세연은 양지원의 딸이라면 양민아밖에 몰랐다. 최근 몇 해 동안 양민아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과거 양민아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있었다.그런데 양지원이 또 ‘새로운 딸’을 소개한다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시연이 아래층에 있는 동안 사모님들은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입에 올렸다. 누구 아들이 몰래 여자에게 스폰을 해주고, 누구 딸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 가문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김세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젊은 사람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리 같은 가문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요?”다른 사모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묵묵히 상황을 주시했다.“양 대표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직원이 다가와 양지원에게 속삭였다.양지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여기로 오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직원은 양시연을 위해 문을 열었다.큰 홀이다 보니 정문부터 사모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있었다.김세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양지원에게 몰래 안시연이라는 불여우가 돌아왔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창가 자리라 햇빛에 눈이 부셨던 김세연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시연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지원을 향해 엄마라 불렀고 다른 사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김세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들 양지원에게 양녀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또 다른 딸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겉치레로 예쁘다는 칭찬만 늘려놨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자리로 이끌었다.그러자 김세연은 입을 딱 벌렸고 어느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그러나 김세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지원은 양시연의 손을 만지며 김세연에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