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잠시 멈칫했다.‘정훈 씨에게 시간을 주라고?’연정훈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말했다.“충분한 시간을 줘. 내가 그 장애물을 다 해결하고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할게.”안시연의 눈빛이 흔들렸고 어쩔 수 없이 침을 삼켰다.잠깐 머릿속이 멈췄지만, 이내 이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얼마나요?”연정훈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최대한 빨리.”안시연은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정훈 씨는 여전히 날 달래고 싶은 거잖아요.”연정훈은 안시연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안시연은 자신이 연정훈의 아내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결혼은 중요한 일이야. 신중해야 하지 않겠어?”연정훈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처음 정훈 씨가 소현주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도 그렇게 신중했나요?”안시연은 여전히 소현주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이건 우리의 일이야. 계속해서 소현주를 끌어들이지 마.”“소현주 씨만 있으면 이건 우리 셋의 문제예요!”그녀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혼이며 뭐든 다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은 갑자기 강하게 몸부림치며 연정훈의 품에서 빠져나갔다.“세 번째 선택도 하지 말고 두 번째 선택도 하지 마요. 그냥 우리 헤어져요.”연정훈은 어이없어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눈을 감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불가능해.”안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안시연은 일방적으로 헤어지겠다고 선언하면 연정훈이 자신을 붙잡지 못하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뒤에서 안시연을 힘껏 끌어안으며 그녀를 놓지 않았다.“놔줘요!”안시연은 술기운에 화가 나서 어디서 생긴 힘인지 모르게 저항하며, 연정훈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맞히면 때리고 맞히지 못하면 손톱으로 할퀴려고 했다.연정훈은 처음으로 안시연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어쩔 수 없이 그는 안시연의
안시연은 완강하게 강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결국 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안시연을 다시 반우희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가는 내내 두 사람은 침묵만이 흐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아파트에 도착하자 안시연은 말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이 어두운 계단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결심한 듯 차 문을 열고 빠르게 걸어갔다.계단 입구에서 연정훈은 안시연을 힘껏 안았다.“오늘 밤 여기서 자도 좋아. 하지만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안시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한 걸음 더 양보하며 말했다.“내일 돌아가기 싫으면 여기서 이틀 더 있어도 돼.”그럼에도 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긴 침묵 끝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조용히 놓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들어가.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네...”안시연은 침울하게 대답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연정훈은 그 자리에 서서 안시연이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반우희가 문을 열며 깜짝 놀라 안시연을 맞아들이는 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그제야 차로 돌아갔다.위층에서 반우희는 이미 잠에서 깨어났고 갑자기 찾아온 안시연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침실에서 자라고 권했다.안시연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괜찮아요. 소파에서 자도 돼요.”하지만 반우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손을 휘저었다.“그럴 순 없어요. 시연 씨는 손님이잖아요. 제 침대에서 주무세요.”안시연은 비틀거리며 흔들리는 반우희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감정들이 낯선 공간 속에서 잠시나마 따뜻함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반우희의 침대는 오래됐지만, 매우 컸다. 아마도 이전에 어르신이 사용했던 것 같았다.반우희는 이불을 안고 나와 안시연에게 창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언니, 난 먼저 잘게요. 언니도 빨리 자요.”반쯤 낯선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아들이고는 그
양씨 가문에서.집 밖에서 양혁수는 귀가한 양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서 양지원을 가로막으며 차 창문에 기대어 말했다.“대표님, 어떻게 다른 사람 편을 들어줄 수 있어요?”양지원은 양혁수를 한 번 쳐다본 뒤, 아무렇지 않게 입을 벌려 그에게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강렬한 두리안 냄새가 났다.“아!”양혁수는 눈을 감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무슨 냄새예요? 너무 지독한데요.”양지원은 웃으며 차 문을 두드렸다.“비켜.”양혁수는 자리를 내주며 불평했다.“앞으로 이거 좀 먹지 마세요. 그 냄새가 몸에 배면 품격 없어 보여요.”양지원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품격을 모르는 놈.”“두리안 같은 심오한 과일은 너희 할아버지와 나도 좋아해. 왜 너만 싫어하는 거야?”“내 유전자가 업그레이드돼서요.”“그건 퇴보야.”양지원은 안시연을 떠올렸다. 안시연은 두리안을 좋아했다.에휴.그들은 집 앞에 도착했고 양지원은 밖에서 2층을 한 번 쳐다봤다.양민아의 방 불이 갑자기 꺼졌다.양지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시선을 거두고 양혁수에게 빨리 올라가서 쉬라고 재촉했다.“앞으로 안시연 씨한테 매달리지 마. 안시연 씨는 널 좋아하지도 않아.”양혁수는 손을 깍지 끼고 계단을 올라가며 느긋하게 말했다.“진정한 사랑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에요. 엄마는 못 느끼세요? 안시연이랑 연정훈 씨 이제 곧 끝나요.”“끝나도 네 차례가 아닐 거야.”양혁수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쳐다봤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양혁수를 보내려 했다.“두고 보세요. 내가 안시연을 결국 저에게 넘어올 거예요.”양혁수가 말했다.글렀다.그 ‘넘어온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양혁수가 안시연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지원은 한밤중임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콩국을 먹고 있었다.거실은 조용했고 양지원은 2층 양민아의 방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한강은행 사건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고 양민아의 성격으로 보아
부승원이 갑자기 찾아오자 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안시연이 반우희를 살짝 밀어 깨워주고 나서야 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부 변호사님,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부승원은 이미 아이들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은 의자를 가져다주고 과일을 내오며 차를 따르는 등 바삐 움직였다.부승원은 안시연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안시연은 미소로 답했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말했다.“옹지천 씨의 사건을 내가 맡게 됐어.”옹지천은 바로 그 악명 높은 원장이었다. 그날 그들을 차로 들이받은 사람이기도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부승원은 이미 안시연에게 설명을 마친 듯했다.“연정훈이 저를 보낸 겁니다. 그날 시연 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렇구나.’안시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부승원이 말을 이었다.“연정훈에게 들었는데 시연 씨가 옹지천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더군요. 연정훈이 사람을 보내 해결하려 했지만, 완전히 끝을 보지 못해서 옹지천이 궁지에 몰리자 반우희 씨를 찾은 거예요. 결국 시연 씨까지 피해를 보게 됐죠.”안시연은 당황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부 변호사님, 당신 같은 변호사가 직접 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부승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어렵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안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반우희에게 말했다.“상황을 말해 봐.”“아, 네!”반우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긴장한 듯 들뜬 기분이 들었다.반우희는 갑자기 바빠지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특히 법률 서적들과 소설책들을 한꺼번에 치우고는 작은 노트북을 들고 부승원 맞은편에 집중한 표정으로 앉았다.“부 변호사님, 이제 시작하셔도 됩니다.”말이 끝나자마자 반우희는 두 눈을 반짝이며 펜을 꽉 쥐었다.부승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가 말하고 내가 적
소현주는 온화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에게 말했다.“과찬입니다. 저는 그저 무명 의사일 뿐이에요. 할머님의 외손녀와는 비교할 수 없죠.”안시연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외할머니는 웃으며 눈이 가늘어지더니 소현주의 손에 낀 반지를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소 선생님, 결혼하셨나요?”안시연도 외할머니의 질문에 이끌려 그 반지를 보았다.그것은 지나치게 큰 다이아몬드 반지였다.소현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아직입니다.”“그럼 곧 결혼하시나요?”소현주는 약간 쑥스러운 듯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몇 년 전 연애 기념일에 받은 작은 선물이에요. 그냥 계속 끼고 있었죠.”안시연은 불편한 마음에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더는 볼 필요가 없었다.몇 년 전이라면 분명 연정훈이 준 것일 것이다. 소현주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관계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런 모호한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다.“외할머니, 이제 가요. 소 선생님을 방해하지 말아요.”안시연이 외할머니에게 말했다.“그래, 그래.”외할머니는 안시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소현주는 끝까지 그들을 배웅하며 단정한 태도를 유지했다.아래층에 내려온 뒤에도 외할머니는 계속해서 소현주를 칭찬했다.안시연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들이 떠난 후, 위층 창가에 선 소현주는 안시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눈빛은 어둡고 일그러져 갔다.요즘 며칠 동안 아무리 소현주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도 연정훈은 더 이상 소현주를 만나주지 않았다.대신 연정훈의 비서가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왔고 저택의 설계도와 프로젝트 계획서 같은 것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어마어마한 액수를 의미했다.“연 대표님께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마음대로 고르라니...’그러니 다 고르면 연정훈의 보상도 끝난다는 것이다.갑자기 이렇게 냉정해진 연정훈은 소현주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잔인했다.안시연을 본 순간, 소현주는 그 이유를 깨달
안시연은 조심스레 과자를 챙겨 놓았다.할머니는 안시연의 기분이 좋은 걸 눈치채고 참지 못해 물었다.“누구셔?”“상사예요.”안시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할머니는 안시연의 회사 상사인 줄 알고 말했다.“정말 좋은 사람이네”몇 마디 하시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안시연이 출발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깜빡였다.안시연은 슬쩍 휴대폰을 살폈다. 놀랍게도 이메일 회신이 온 것을 발견했다.[발신자: N.S.]안시연은 약간 흥분되었고 빨리 집에 돌아가서 메일을 확인할 생각이었다.이 느낌은 마치 잃어버린 청춘이 한순간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양지원은 건너편에서 안시연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패딩을 입었음에도 여전히 메마른 안시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양지원은 문득 연민을 느꼈다. ‘참, 좋은 소녀였는데 운이 따라주질 않아서 안타깝구나.’때마침 양혁수가 병원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며칠 있으면 설인데 큰삼촌 오세요?”양혁수가 조용히 물었다.양지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모르겠어.”“전화해서 물어보지 그래요?”“...바쁘신데 뭘 굳이 물어.”양혁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앞좌석에 앉은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양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안 곳곳이 설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번 설을 경인에서 보내시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화려한 장식들이 집 안 곳곳에 걸려 있었다.양민아는 방학을 했고 한강시 특산 음식을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양지원은 2층 테라스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 펼쳐진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모이니 이제야 집안에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사이, 오성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양지원의 좋은 기분을 반쯤 깨트렸다.기분이 울적한 가운데 아래층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사는 난간 너머를 살짝 내다보더니 다시 양지원에게 다가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실수로 접시를 깼습니다.”양지원은 무심
양지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친자 확인이요?”“네.”“누구와 누구의 친자 결과를 확인하려는 거죠?”상대방은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양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나는 인내심을 간신히 붙잡았다.“손문병 씨, 계속 입 닫고 있을거면 앞으로 제 일을 맡지 마세요.”“...”상대방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중 하나는 아마도 도련님의 것일 겁니다.”양지원은 순간 멈칫했다.“뭐라고요?”“도련님의 것입니다.”양지원은 할 말을 잃고 머릿속이 잠시 멈춰 버린 듯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가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풀었다.그럴 리 없다.이미 예전에 친자 확인을 했고 혁수는 분명 오성호의 아이였다.“다른 하나는 누구 거예요?”“샘플 정보를 근거로 저희는 큰아씨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양지원은 얼어붙었다.그녀는 계속 혁수가 오성호의 아이가 아닐지 걱정했지만, 혁수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거로 의심하는 사람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정말 웃기는 일이었다.양민아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양지원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낮게 말했다.“민아가 이걸 조사하는 이유가 뭔가요?”손문병은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다른 힌트를 주었다.“큰아씨, 친자 결과에 문제가 있습니다.”양지원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어떤 문제요?”손문병은 결심한 듯 서둘러 말했다.“양민아 아가씨와 협력했던 사람들은 모두 통제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얼마 전에도 두 개의 샘플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하나는 도련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시연 씨의 것이었습니다.”안시연?양지원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너무 급히 일어난 탓에 격해진 감정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계속 말해요!”“첫 번째는 혈연 확인이었는데 결과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친자 확인이었고 결과는...친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쾅!양지원은 천둥이 머리 위로 내리치는 듯
양씨 가문이 대대로 쌓아온 부와 권세는 양지원 세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양홍두의 와이프는 탄탄한 집안 배경과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그들은 꽤 금실이 좋았지만,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소중한 딸만 두었다. 그 딸이 바로 양지원이었다.양지원이 처음 양석진을 만난 건 겨우 여섯 살 때였다.양홍두가 여러 소년을 데리고 와서 양지원에게 오빠로 삼을 아이를 고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유 없이 한눈에 양석진을 선택했다. 그저 잘생겼다는 이유였다.시간이 흐르면서 양지원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양석진은 단지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매우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양씨 가문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양씨 가문의 진짜 아들보다 더 친아들 같았다.“우리 오빠는 제일 똑똑하고 제일 멋져요!”어린 양지원은 늘 오빠 자랑을 입에 달고 살았다.왜냐하면 양석진은 똑똑하고 능력 있을 뿐 아니라 양지원을 누구보다 아껴주었기 때문이다.양석진이 가진 것이든 상으로 받은 것이든 밖에서 산 것이든 양지원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결국 모두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당시 양지원과 함께 놀던 친구들은 그런 똑똑하고 능력 있는 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양지원은 오빠 자랑을 중학교에 가서도 멈추지 못했다.양석진이 주는 사랑은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빠, 나중에 결혼은 천천히 하세요. 결혼하면 나한테 신경 안 써줄 거잖아요.”어릴 적 양지원은 이런 걱정을 자주 했다.양석진은 항상 차분하게 대답했다.“나는 결혼 안 해.”“정말이에요?”“응. 난 결혼하는 거 안 좋아해.”양석진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양지원은 웃으며 뒤에서 양석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생각이 바뀔걸요.”“안 그럴 거야.”양석진은 차분히 책장을 넘기며 반듯한 자세로 앉아 양지원의 팔을 살며시 떼어내고는 책을 내밀었다.“중요한 부분을 표시해 놓았어. 오늘 다 읽어.”“
부승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네 욕심 때문이야. 욕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너를 노리지 않았겠지.”반우희는 그의 말에서 도덕적 결함을 느끼고 곧바로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피해자 유죄론 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송민재와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이거 보세요.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웃음을 꾹 참으려다 결국 터트리고 말았고 송민재도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하지만 부승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물었다.“그 건담 피규어의 중고 시세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열장에만 있었을 때는...천만 원 정도였어요.”“그래. 그럼 너는 얼마에 팔았지?”“...1600만 원에 팔았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덧붙였다.“근데 그건 그 고객이 먼저 제안한 금액이에요.”부승원은 조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기꾼이 먼저 제안하지. 네가 제안하길 기다리겠냐?”반우희는 눈이 반짝이며 손등으로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이거 보세요. 부 변호사님도 인정했잖아요. 그 고객이 사기꾼이라고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좋아요. 저도 솔직히 살짝 욕심이 났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문제는 그 여자가 먼저 사기를 쳤다는 거죠. 그건 명백히 잘못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불법이에요.”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동의했다.“맞는 말이네요.”송민재는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천천히 덧붙였다.“어쨌든 난 우희 씨 편이에요.”반우희는 송민재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부승원을 바라봤다.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보세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저를 동정한다고요!’그러나 부승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소파 한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부승원의 책상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반우희를 힐끔 쳐다보며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쌍한 우희 씨.’반우희는 아까 그 억지를 부리던 여자 앞에서는 꽤 당당했지만 부승원이 도착하자 마치 목덜미를 붙잡힌 길고양이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지금은 여자가 쫓겨난 뒤 부승원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차갑게 노려보는 중이었다.반면 반우희의 직속 상사인 송민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오프라인에서 1600만 원짜리 건담 피규어를 팔았는데 배송 주소를 변호사 사무실로 적었다고? 너 참 대단하다.”부승원이 비꼬듯 말하자 반우희의 고개는 점점 더 숙였고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을 뒤로 감춘 채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저도 사기를 당할까 봐 겁나서 그랬어요. 주소를 사무실로 적으면 제가 변호사인 걸 보고 상대가 사기 치려는 마음을 접을 거로 생각했어요.”부승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꽤 똑똑했네.”반우희는 침묵했다.“...”‘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감싸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건 우희 씨를 탓할 일이 아니에요. 상대가 딱 봐도 협박하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우희 씨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반우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맞아.’그러나 부승원은 냉정하게 반박했다.“반우희가 원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결과는요? 결과가 반우희가 원한다고 바뀌기라도 했습니까?”양시연은 어이없었다.“...”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부승원이 이렇게 말하자 반우희는 단 1초 만에 고개를 들어 단호히 반박했다.“제가 그 여자에게 가짜를 팔지 않았어요! 그 건담 피규어는 이승우 씨가 승주에게 준 건데 도련님이 가짜를 줄 리 없잖아요.”부승원은 잠시 얼빠진 듯한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후 늦게 경인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세운으로 가서 연정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어야 했지만 연정훈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자 양시연도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혼 무렵이었고 양시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그 모습을 본 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으며 양시연과 연정훈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연정훈이 집을 비운 밤마다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양시연에게 연신 말했다.양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피곤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날 저녁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다.민씨 가문의 큰아들이 직접 민지연과 민지욱을 데리고 와서 양시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다.양시연은 거실에서 나비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하게 굴지도 않았다.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껏 공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분명히 앞으로의 협력을 유지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민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 사이에 미묘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시연은 민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느꼈지만 어린 민지욱을 고려해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밤이 되어 양시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연정훈에게 이야기했다.“당신 할머니께선 아무 반응도 없었나요? 이번 일로 우리가 할머니 친정의 체면을 깎았을 텐데요.”연정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이틀 안에 나랑 정인에 가서 인수인계 준비를 하자.”양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민씨 가문의 반응만으로 이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연정훈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세운에서 민수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말까지 돌았다.이런 상황에서 표세연은 은밀히 양시연에게 조언했다.“할머니 쪽이 어수선한 동안 연정훈이 언제 세운에 가게 될지 모르잖아. 그 전에 합리적으로 연정훈
“알았어요. 저희 지금 갈게요.”연정훈이 전화를 끊었지만 양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똑똑똑.연정훈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연정훈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곤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더워?”“아니에요.”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온도 딱 좋아요.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근데 얼굴이 아주 빨개.”“네. 원래 그래요. 난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래요.”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고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듯 말했다.“그런 거였구나.”식탁 위의 분위기는 다시 평온해졌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양시연은 자신이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잠꼬대는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응. 분명 모를 거야.’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한 양시연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조용히 손을 뻗어 가림막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여보’라고 안 부르는 건 다른 부르고 싶은 호칭이 있어서 그런 거지?”양시연은 당황하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연정훈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를 들면 교수님?”양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 새벽 꿈속에서 몇 번이나 불렀더라.”양시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톤도 아주 가볍더라. 듣기엔...별로 정직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푹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연정훈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알았어. 다음엔 여보라고 안 불러도 돼.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더라.”양시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양석진의 집에 도착하는 동안 양시연은
“정훈 씨, 정말로 염치없는 거 알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양시연에게 입이 막힌 채로 눈에 웃음기를 담았다.양시연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른 손으로 연정훈의 귀를 잡아당겼다.“나이 많은 엉큼한 아저씨.”연정훈은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껴안으며 말했다.“자꾸 나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마.”“당신 나이 많고 늙었잖아요. 완전 늙었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 번 뒤집어 양시연을 아래로 눌렀다.“한 번만 더 말해봐.”양시연은 즉시 기가 죽어 연정훈의 어깨를 떠받치며 작게 외쳤다.“허리 아프다니까요!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그리고는 발로 그를 한 번 툭 찼다.“이 정도로는 당신이 원하는 아들이나 딸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돌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기운을 조금 회복한 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아 걸치고 명령하듯 말했다.“나 샤워 좀 시켜줘요.”연정훈은 기꺼이 수고할 마음이 가득했고 양시연이 허리가 아프다고 했기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웠다.욕실로 들어가자 양시연은 물속에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그녀의 생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사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늦어질수록 몸의 회복이 더디니 차라리 빨리 낳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하나만 낳는다면 왕자님도 좋고 공주님도 좋겠지만 둘을 낳으려면 양시연이 고생해야 한다.‘정말 고민이네. 진짜 인간의 진화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바로바로 낳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연정훈은 먼저 욕조 옆에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그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정훈 씨는 아들이 좋나요? 아니면 딸이 좋나요?”“둘 다 좋지.”양시연은 몸을 일으키
양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반대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부드럽지만 강렬하게 입술을 맞추며 설득했고 양시연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거짓말하지 마세요. 호텔에 없을 리가 없잖아요...”“이 방은 내가 출장 때마다 묵는 곳이야. 항상 나를 위해 준비된 방이지. 여길 여자를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런 건 있을 리가 없잖아.”양시연은 그의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머뭇거리는 사이 연정훈은 그녀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 단숨에 그녀를 제압했다.“아!”양시연의 몸은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가 곧 힘없이 풀어지며 축 늘어졌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어깨를 몇 번 주먹으로 두드렸지만 결국 연정훈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이렇게 살짝 취한 모습을 몹시 좋아했다. 두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미세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도도하고 맑았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촉촉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입술로 바뀌는 모습이 연정훈의 눈을 사로잡았다.그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마치 만취한 사람처럼 끝도 없이 양시연을 갈망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방 안의 공기는 뜨거움으로 가득 찼으며 양시연은 다리가 후들거렸고 연정훈의 팔을 붙잡으며 숨이 찬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연정훈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췄고 숨이 막힐 듯한 순간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양시연에게 쏟아부었다.양시연은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감각에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연정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양시연은 울먹이며 간신히 말했다.“그만...그만해요. 약...약 먹어야 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얼굴을 가까이 댄 채 땀이 번진 둘 사이를 달래듯 속삭였다.“약 안 먹어도 상관없어. 누가 너 보고 약 먹으라고 했어?”“임신하면 어떡하려고요...”양시연의 말을 들은 연정훈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임신하
양시연은 의자에 기대어 연정훈의 입맞춤에 눌려 있다가 잠시 후 온몸에서 힘이 빠져 연정훈의 어깨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낮고 떨리는 신음은 연정훈을 자극해 그녀를 더욱 애틋하고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양시연의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벌어졌고 연정훈의 긴 다리가 가까이 밀려 들어왔다.치마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손바닥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지자 양시연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며 연정훈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졌다.고조된 감정 속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으로 깊게 묻었다. 그러나 연정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려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문득 천장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정훈 씨...멈춰요.”갑작스러운 저항에 연정훈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러는데?”“이 차 안에서는 안 돼요. 이건 아빠 쪽에서 보낸 차라서 혹시라도 기록이 남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곤란해요.”양시연의 단호한 목소리에 연정훈은 이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이 차를 타는 데 문제가 있었다면 보내지 않았겠지.”“그래도 싫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움직임을 막으며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고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여러 번 입 맞추며 설득했다.“호텔로 가요. 아니면 아빠 댁으로 갑시다. 차에서는 하지 말아요.”만약 이 일로 양석진의 체면에 금이라도 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의도를 이해했고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양시연의 허리를 감싸안아 뒷좌석에서 그녀를 살며시 세우며 말했다.“그럼 호텔로 가자.”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러운 듯 연정훈의 목에 가볍게 입 맞추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정훈 씨 말을 따를게요.”양석진의 집으로 가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 작은 집의 방음이 얼마나 허술할지 알 수 없었고
문밖에 서 있던 양시연은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안쪽 상황을 염탐했다.1시간 전부터 연정훈은 양시연이 다리에서 주워 온 딸이라고 놀려대고 있었다.“아버님은 널 만날 여유가 없어.”양시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체면을 구길 수 없어 아니라고 반박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엄마랑 얘기가 끝나면 날 만날 거예요.”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양시연을 찾지 않았다.부모님의 사랑에 양시연은 동떨어진 존재인 모양이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이미 쉬고 계신 게 분명해요.”양시연은 여전히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고 연정훈은 미소만 지을 뿐 굳이 들추지 않았다.연정훈이 노트북을 닫으며 물었다.“우리 산책이나 할래?”“지금요?”“그래.”양시연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너무 늦었잖아요. 그리고 여기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어요?”“시도나 해보자. 안되면 아버님이 구하러 와주시겠지. 그 참에 얼굴도 뵈고 나쁘지 않잖아.”“...”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밤이었고 양시연은 드라이브나 할까 생각했다.그래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양창수는 예상이라도 한 건지 차키를 탁자 위로 올려 두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연정훈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늦은 시간이다 보니 인파가 많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느 레스토랑을 예약해 음식을 주문했다.넓은 공간에 두 사람만 남겨지고 옆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셰프가 있었다. 사방은 어둡고 오직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빛이 비치고 있었다.요리는 아직 세팅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와인 한잔에 얘기를 나눴다.셰프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연정훈은 빠르게 양시연을 품에 안고 키스를 했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와인병으로 시야를 조금이나마 가렸다.입술이 맞닿고 호흡이 가빠질 때쯤 연정훈은 양시연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무기력하게 품에 안겼다.연정훈은 몸을 돌려 또 양시연의 쇄골에 키스했다.“우리 내일 경인으로 돌아갈까?”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