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서재로 돌아가 서둘러 샤워를 했다.샤워하는 동안에도 연정훈은 아주머니에게 안시연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10시쯤 되자 안시연은 갑자기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전 외할머니한테 갈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간 안시연은 연정훈과 대치해야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붉은 얼굴을 보고 그녀가 반쯤 취해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연정훈은 참을성을 가지고 안시연을 설득했다.“너 지금이 상태로 가면 외할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어.”“반우희 씨를 찾아가도 돼요!”“그 아가씨는 집에 아이들도 있잖아. 이 밤중에 찾아가서 귀찮게 하려고 그래?”“그럼 호텔에서 묵으면 되죠!”어쨌든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아주머니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둘이 또 싸우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위층의 두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연정훈도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반우희한테 데려다줄게.”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그저 차갑게 얼어붙은 태도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고는 마당에서 연정훈을 기다렸다.연정훈은 직접 차를 몰아 안시연을 아파트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끝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안전띠를 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로 올라갔다.연정훈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안시연을 자극할까 봐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칠흑 같은 복도에서 빠른 걸음으로 반쯤 걸어간 안시연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안시연은 벽을 짚고 서서 주위의 어둠과 적막함을 느꼈다. 혈액 속에서 들끓었던 알코올도 점차 차게 식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당연히 외할머니를 보러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을 외할머니가 본다면 걱정하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단지 연정훈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을 뿐이다.그 집은 둘이 함께 살아온 추억으로 가득하다.침실의 구석구석에도 그들의
“제가 꼬셔서 넘어오게 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네가 정말 안시연을 꼬셔서 넘어오게 만들면 그때 인정해줄게.”양지원은 속으로 어차피 양혁수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양혁수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그래요. 어머니께서 인정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해요.”양혁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양지원은 몸을 곧게 세우며 물었다.“너 뭐 하려고 그러니?”“어머니한테 콩국 좀 사다 드리려고요.”“무섭게 왜 갑자기 안 하던 효도를 하고 그러니.”양혁수는 그저 웃었다.“기다리세요. 이 아들이 콩국 사 들고 돌아와서 효도할게요.”양지원은 양혁수가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릴까 봐 당부했다.“이 늦은 밤에 괜히 찾아가서 재수 없게 굴지 말아라. 이 시간이면 다들 잠들었을 거야.”양지원은 ‘잠들었을 거다’라는 말을 괜히 더 강조했다. 양혁수는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미 잠들었다면 그거야말로 양혁수에게는 그 둘에게 혼란을 주기 딱 좋은 기회였다.양혁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밖으로 나가면서 바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밤에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안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겨 설명해야 했다.양혁수는 전화를 걸면서도 안시연이 과연 받을까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안시연이 바로 받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여보세요?”양혁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놀랄까 봐 황급히 응답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자 듣고 있던 양혁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선배님 우셨어요?”“...”안시연은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물었다.“무슨 일이야?”‘반복재생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양혁수는 잠깐 조용히 생각하다가 말했다.“이 밤에 불쑥 전화를 드린 건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의 어머니께서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이 없었다.말을 마친 양혁수는 뒤늦게 본
양혁수는 안시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짝 냄새를 맡고는 물었다.“많이 마셨어요?”안시연은 몸을 움직여 양혁수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양혁수는 안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이렇게 취하셨는데 연정훈 씨는 선배님이 그냥 나오게 내버려 뒀어요? 늑대가 선배님 물어갈까 봐 걱정도 안 되시나 봐요.”“나 이래 보여도 정신은 맑아.”참 겁도 없다.양혁수는 손으로 가위를 만들어 안시연의 눈앞에서 흔들었다.“이게 몇으로 보여요?”“... 팔.”“어이구 진짜 말짱하네요?”“...”안시연은 온몸이 아팠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안시연을 본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다리를 쭉 뻗고는 말했다.“뭐 좀 먹을래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위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그럼 제가 알아서 주문하고 올게요.”양혁수는 몸을 일으켜 QR코드를 찍어 경인의 지역 특색 음식을 한가득 시켰다. 그중에 콩국 두 접시는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우리 집 아가씨 거예요.”안시연은 콩국을 힐끗 보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연정훈이 아팠던 날, 안시연은 한밤중에 양나비를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연정훈에게 줄 콩국을 샀지만 양혁수의 차에 모두 쏟아버리고 말았다.그때도 밤새 다퉜었다.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하지만 이 짧은 반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한 나머지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 것이다.양혁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이보세요, 선배! 무슨 생각 해요?”안시연은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붙잡아 왔다.양혁수는 혀를 찼다.“지금 저를 앞에 두고 마음속으로는 연정훈 씨를 생각하는 거예요?”“...”안시연은 양혁수가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양혁수는 안시연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맞게 짚었음을 알아챘다.양혁수는 순간 기분이 잡쳤지만 죽 한 그릇을 안시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좀 먹어요. 얼굴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남자랑 싸웠다고 혼도
연정훈은 본인이 충분한 매너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달려들어 가 애송이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건 본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여겼다.안시연에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건 연정훈도 안다.안시연이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원했고 그게 양혁수라는 점도 이해한다.시간이 되면 얌전히 자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연정훈은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이 정말로 양혁수와 무슨 일을 벌일까 의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원래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양혁수가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둘 나오자 새삼 입맛이 돌았다.중간에 닭발 한 접시가 나왔다. 양혁수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닭발의 뼈를 발라냈다. 막힘없는 양혁수의 전문적인 손놀림은 안시연을 놀라게 했다.“... 배웠어?”“우리 집이 전생에 무뼈닭발을 팔던 집이었거든요.”안시연은 또 바람 빠지게 피식 웃었다.“먹어요. 그리고 힘없이 처져있지 말아요. 보고 있는 제가 다 힘들어요.”양혁수는 분명 찻잔을 들고 있었음에도 술을 마시는 모양으로 쿨하게 두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그러려면 양혁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혁수 씨 상처는 어떻게 됐어?”“지금 벗어서 보여드릴까요?”“... 아무래도 그만하는 게 좋겠어.”“그래요. 날씨도 추워서 저도 감기 걸릴까 봐 무섭네요.”...두 사람은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음식을 거의 바닥냈다.양혁수는 안시연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며 밤공기를 마시게 해줄 계획으로 안시연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차에 앉은 안시연은 또다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까 많이 먹은 탓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더 심해졌다.“나 좀 쉬고 싶어...”양혁수는 둘의 좌석을 모두 뒤로 눕히고 선루프를 열어 안시연에게 별을 보여주었다.안시연은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는 외로운 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음은 평온
안시연은 밝은 빛에 놀라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있는 양혁수의 얼굴을 발견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무의식 간에 뒤로 물러났다.양혁수는 쯧쯧 혀를 찼다.양혁수는 손을 들어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닌 차에 시동을 걸고 따라서 라이트를 켰다.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어떤 재수 없는 사람이 이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확인하려 했다.사실 양혁수도 맞은 편의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두 자동차 라이트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마주 보고 밝히고 있으니 시야에는 온통 하얀 빛만이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3초 정도 대치 끝에 상대방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양혁수는 작게 욕을 읊조리며 차에서 내렸다.양혁수는 칼에 찔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난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안시연은 손을 뻗어 양혁수를 잡아 세웠다.“충동적으로 굴지 마.”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안시연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강렬한 빛을 뚫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어렴풋이 확인했다.‘연정훈? 하!’순식간에 침착해진 양혁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안시연에게 더 바짝 붙었다.안시연이 여전히 당황해하고 있을 때 차 문손잡이가 당겨졌다.눈치 빠른 양혁수가 한발 먼저 차 문을 잠갔다.그러고 나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두드리는 힘은 전혀 작지 않았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두 눈을 마주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연정훈이었다.안시연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 뭘 무서워하고 그래요. 저 사람은 전애인과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잖아요. 근데 선배님이 저 좀 만나고 저랑 말 몇 마디 한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요.”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의 말이 맞았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현주의 냄새를 온몸 가득 묻히고 온 연정훈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었다.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참을 대치했다.그러자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
외투에 아직 연정훈의 체온이 남아 있었고 안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결국 다시 삼키고 말았다.연정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안시연에게 옷을 덮어준 뒤, 연정훈은 단호하게 안시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힘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안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집에 가기 싫어?”연정훈이 말하는 집은 당연히 강남을 뜻했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부감을 드러냈다.“난 외할머니댁으로 갈 거예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며 안시연을 억지로 데려가려는 듯했다.“정훈 씨!”안시연이 막 목소리를 높히자 차 안에 있던 양혁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빠르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시연 씨가 정훈 씨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것을 모르겠어요?”양혁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도발적인 태도로 말했다.“연 대표님, 억지로 데려갈 필요는 없잖아요?”연정훈은 양혁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양혁수는 혀를 차며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안시연의 다른 손을 잡아당겼다.안시연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그녀는 거의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날 뻔했지만, 순간 왼손이 다시 연정훈의 손에 잡혔다.순식간에 상황은 민망해졌다.밤이 깊어 길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한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그들은 모두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호화로운 차를 배경으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모습은 지나치게 이목을 끌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안시연의 얼굴은 화끈거렸고 창피함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두 손을 뺐다.양혁수가 미친 듯이 행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연정훈도 평소와는 다르게 안시연을 꽉 잡고 있었다.두 남자가 힘을 세게 주었고 안시연의 두 손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함을 참았다.갑자기, 왼손이 풀렸다.안시연은 잠시 멍해졌다.양혁수가 그
양혁수의 성격을 알면 양혁수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리 부탁해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명령은 더더욱 통하지 않을 것이다.연정훈이 양혁수에게 손을 놓으라고 할수록 양혁수는 오히려 더 태연하게 손을 꽉 잡았다!안시연은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둘 다 손 놓아줘요!”안시연은 최대한 큰 소리로 말하며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양혁수가 고집스러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따라 연정훈까지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며 손을 놓지 않았다.안시연은 직감했다. 이대로 가면 연정훈이 정말로 양혁수에게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세 사람 사이의 긴장은 팽팽한 줄처럼 언제 끊어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웠다.그때 갑자기.멀리서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들 앞에 멈췄다.차 번호판을 본 양혁수가 먼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곧이어 뒷좌석 문이 열리고 양지원이 차에서 내렸다.안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양지원은 그들의 상황을 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지금...줄다리기라도 하는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양지원은 먼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혁수는 워낙 뻔뻔해서 창피한 것도 모른다고 치자. 하지만 너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 아닌가?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양지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잖아요.”연정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오신 거라면 환영하죠. 하지만 편들러 오신 거라면 당분간은 어른으로 모시기 어렵겠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응수했다.좋다.그러고는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안시연은 의아했다.“…?”양지원이 말을 이어갔다.“두 여자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시장이 그들에게 줄다리기하듯 아이를 잡아당기라고 했죠. 이긴 사람이 아이를 갖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사실 시장의 진짜 의도는
차는 이미 멀리 떠났고 다시 돌아가면 그 두 고집스러운 사람을 또 마주해야 했다.양지원은 차라리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 길가에서 바람을 쐬기로 했다.심야였지만, 양지원은 여전히 피곤해 보이지 않았고 무심코 사탕 한 봉지를 꺼내 안시연에게 하나 건넸다.두리안 맛이었다.안시연은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며 사탕을 받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한 번 쓱 보며 말했다.“두리안 안 좋아해요?”“아니요. 좋아해요.”“그럼 먹어요.”“네.”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사탕을 까기 시작했다.양지원은 턱을 괴고 거울로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혀를 차며 말했다.“시연 씨의 아빠는 좋은 사람일 거예요.”안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양지원이 말했다.“그렇지 않다면 시연 씨 같은 딸을 낳을 수 없었을 거예요.”안시연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소현정을 대신해 사과하려 했다.“소현정 대신 사과할 필요 없어요.”양지원은 안시연의 행동을 예상했다.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차 안에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침묵이 길어지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떻게 갑자기 오셨어요?”“갑자기?”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그렇게 딱 맞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양지원이 말했다.“연정훈이 나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하더라고요.”“언제요?”안시연이 놀라 물었다.“대략...15분 전쯤일 거예요?”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렇다면 연정훈은 이미 오래전에 안시연과 양혁수를 발견했다.양지원은 가볍게 물었다.“연정훈이랑 싸웠나요?”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응답했다.“싸운 것뿐인데 한밤중에 위험하게 나와서 뭐 하려던 거예요?”“정훈 씨가 저를 외할머니댁에 데려다줬어요. 제가 멋대로 돌아다닌 건 아니에요.”양지원이 웃으며 말했다.“싸우고도 시연 씨를 데려다줬다니 연정훈은 참 침착하네요. 혁수였으면 분명 문을 쾅 닫고 나갔을 거예요.”“너무 침착한 것도 사람을 힘들게 해요.”안시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창밖의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했다.조수석에 앉은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봐요.”승주는 질색하며 대꾸했다.“정말 오글거리네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반우희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부승원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몇 분 전 연정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함께 좋은 소식도 전해왔다.양시연은 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잔잔한 만족감을 느꼈다.“오늘 밤은 야근하지 말아요...”앞좌석에서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양시연은 장난삼아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운전자는 급히 핸들을 틀었고 단순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차량이 갑자기 속력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양시연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고 안전벨트에 강하게 되감기면서 배에 묵직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운전석에서 운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차가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통제가 안 되면서 옆 차와 부딪쳤습니다!”“그...그러면 빨리 멈춰야죠.”승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양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맞아요. 얼른 갓길에 세우세요!”“멈출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운전사의 한마디에 차 안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양시연을 포함한 모두의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승주와 반우희는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채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동시에 반우희에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