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건 다 줄 수 있어.”연정훈은 너그러운 어조로 말하며 품에 안긴 안시연을 내려다보았다.“네가 얌전히만 있으면 모든 게 네 거야.”안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연정훈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얌전히 있으라니요. 제가 정훈 씨가 기르는 강아지라도 된다는 거예요?”연정훈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강아지?”“네!”연정훈은 셔츠 목깃의 단추를 하나 더 풀며 목에 난 손톱자국을 가리키며 농담조로 말했다.“어느 집 강아지가 이렇게 힘이 세?”안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그 자국은 지난번 안시연이 남긴 것이었고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안시연은 그의 셔츠를 살짝 당기며 다른 곳도 확인하려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리고 위층을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외할머니가 아직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셔.”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연정훈의 가슴을 살짝 때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그는 안시연의 귓가에 속삭이며 입가에 키스를 남겼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말에 아무 일 없으면 점심에 나한테 와.”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그의 말뜻을 이미 알아차린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연정훈의 머리카락을 살짝 꼬며 대답했다.“점심에는 쉬어야 하잖아요...”“응. 우리 같이 쉬자.”연정훈의 말이 끝나자 그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차 안의 온도는 서서히 높아졌고 안시연은 참지 못한 듯 몇 번이고 신음을 내뱉었다.다행히도 연정훈은 외할머니가 집에 혼자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촉촉해진 입술이 떨어졌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얽힌 채로 있었다.15분쯤 지나서야 연정훈은 안시연을 놓아주며 올라가도록 허락했다.안시연은 위층으로 올라가며 검은색 벤틀리의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천천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안시연의 마음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였다.다른 한
“반우희 씨?”안시연이 반우희를 부르자 반우희는 잠시 눈길을 주고는 지난번처럼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반우희를 따라 올라갔다.안시연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반우희는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안시연 언니, 무슨 일이세요?”안시연은 말없이 자신의 입가와 눈가를 가리키며 반우희를 바라보았다.반우희는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일하다가 실수로 넘어졌어요. 괜찮아요.”안시연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몇 명의 아이들은 저녁 학습반에서 식사와 자습을 하고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안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안시연은 더 묻지 않고 말없이 돌아서서 내려가려 했다.반우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안시연을 불렀다.둘이 눈을 마주쳤을 때, 반우희는 조심스레 안시연을 집으로 초대했다.같은 건물이라 구조는 비슷했지만, 반우희의 집은 훨씬 더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집안 곳곳에 아이들의 생활 흔적이 묻어 있었다.안시연은 반우희가 겨우 19살인데 이렇게 가녀린 어깨로 이 집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참 힘들겠구나 싶었다.안시연은 자신도 외할머니와 함께 의지하며 자랐기에 반우희의 상황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문을 닫고 안시연은 반우희에게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 부드럽게 물었다.처음엔 말없이 있던 반우희는 이내 등을 돌리고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반우희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조용히 위로했다.반우희는 한참을 울다가 결국 진실을 말했다.반우희는 보육원에서 자랐고 12살 때 홍 할머니에게 입양되었다고 털어놓았다.“우리 보육원 원장님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몇몇 여자아이들을 괴롭혔지만, 다른 아이들은 두려워서 신고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용기를 내서 신고했어요.”“원장님은 몇 년간 감옥에 있다가 얼마 전 출소했어요.”안시연은 상황을 이해했다.“원장님이 지금도 반우희 씨를 괴롭히고 있나요?”반우희는
안시연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연정훈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연정훈은 출장으로 며칠 집을 비워야 했고 출발 직전 뭔가를 잊은 듯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그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목걸이가 목을 불편하게 눌렀다.본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였다. 이전에 점쟁이가 준 반지도 김세연이 억지로 끼우게 해서 며칠 착용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서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으면 안시연이 불안해할 것 같았다.급하게 나가려다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정원에 도착하자, 연정훈은 빠르게 걸으며 셔츠 단추를 풀어 목걸이를 조정하려 했다.그러나 목걸이가 그렇게 튼튼하지 않았던 것인지 힘을 주어 당기자 목걸이가 끊어지며 반지가 잔디밭으로 날아가 버렸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대표님, 시간이 조금 촉박합니다.”진수빈이 말했다.어쩔 수 없이, 연정훈은 정원사를 불러 반지를 찾아달라고 지시했다.“찾으면 거실에 두세요.”정원사는 걱정하지 말라며 즉시 대답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연정훈이 없는 동안 안시연은 일과 학업에 몰두했다. 운전 면허도 거의 따고 있었고 바쁘지만 알찬 나날을 보냈다.오후에는 드물게 운전사를 불렀다. 반우희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연정훈 쪽에서 아직 일이 해결됐다는 소식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반우희가 혼자 퇴근하는 것이 불안했다.“언니, 정말 고마워요.”길에서 반우희는 계속해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차 안에 있던 간식을 반우희에게 건넸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의외로 양혁수였다.“여보세요?”“어디야?”도련님의 여유롭고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와 안시연은 양혁수가 길거리 어딘가에 있음을 알아차렸다.“밖이에요?”“빨리 주소 보내줘. 밥 사줘.”여전히 명령조의 말투였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잠시 고민하다 외할머니가 사는 단지의 주소를 알려주
소현정은 처음에 양혁수를 보지 못했다. 최근 안시연의 엄마 역할에 몰입해 있던 터라 안시연을 보자마자 바로 웃으며 다가왔다.“시연아, 퇴근했는데 왜 집에 안 가고 있어?”안시연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서 양혁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이 무슨 사이야?”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이제야 기억났다. 양혁수는 소현정을 극도로 싫어했고, 양혁수의 반응을 보니 아직 소현정이 안시연의 엄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소현정도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를 보자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현재 신분이 떠올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반우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황을 살피며 말없이 서 있었다.‘대체 무슨 상황이지?’양혁수는 다시 한번 안시연에게 물었다.“안시연, 소현정 씨와 무슨 관계야?”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머릿속을 정리한 후, 양혁수에게 설명하려 했다.그러나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맞은편에 서 있던 소현정이 갑자기 안시연 뒤쪽을 보며 무서운 표정으로 외쳤다.“조심해!”안시연이 반응할 새도 없이 소현정이 달려들었지만, 안시연에게 다가오지 못했다.안시연을 밀어낸 것은 바로 그녀 뒤에 있던 반우희였다.안시연과 반우희, 소현정과 양혁수는 각각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고 그 사이로 작은 픽업트럭이 빠르게 지나갔다.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안시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손바닥이 뜨겁게 아파졌다.작은 픽업트럭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반우희는 안시연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안시연 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맞은편에 있는 양혁수와 소현정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땅에서 일어나 얼굴이 굳어 있었다.소현정은 잠시 얼어있다가 맞은편을 보더니 빠르게 반응해 안시연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안시연은 멍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소현정은 안시연의 손을 꼭 잡으며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엄마가 너무 놀랐어. 원래 널 밀어내려고 했
‘소현정은 양혁수를 밀려고 한 거야!’양민아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차가 지나가던 순간, 소현정 역시 무의식적으로 양혁수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하마터면 그의 상태를 확인할 뻔했다.소현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제야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와 양민아는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양민아의 머릿속에 평안 부적과 출생일이 떠올랐다. 그건 안시연의 것이 아니었지만, 안시연이 가지고 있었다.양민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대담하고 황당한 가설이었지만, 어찌 보면 나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이건 너무 미친 생각이다.아니. 그럴 리가 없다.양민아는 자기 생각을 연이어 부정했지만,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저녁 바람이 불어왔고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양민아의 머릿속은 한층 맑아졌다.양민아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으니 양민아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양민아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더니 길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나 양혁수는 이미 차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양혁수?”그는 양민아를 전혀 보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며 운전사에게 명령했다.“출발해.”양민아는 차에 오르며 반대편에 있는 안시연과 소현정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다짐했다.‘서두를 필요는 없어. 시간은 충분히 있어.’길 건너편에서 안시연은 오랫동안 굳어 있었다.양혁수와 안시연의 관계는 목숨을 건 사이였다. 안시연은 양혁수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며 부모 세대의 원한을 알면서도 여전히 희미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안시연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는 화가 나서 떠났고 더 이상 안시연을 괴롭히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소현정은 안시연의 곁에 서서 양혁수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쓰렸다.친아들이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의 편을 들며 친엄마인 소현정을 쓰레기 보듯 바라봤다.
안시연은 반우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다행히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언니, 나 상처만 금방 치료할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줘요.”진료실 안에서 반우희가 고개를 내밀고 안시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반우희는 안시연을 부르는 호칭부터 친근하게 변했다.안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안 가요.”반우희는 웃으며 돌아서더니 의사에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안시연은 복도에 앉아 연정훈에게 오늘 밤 집에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문자를 보냈다.[곧 도착할 거야.]안시연은 그 몇 글자를 보고 마음속의 어둠이 절반 이상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전에 겪은 위험한 일은 굳이 말하지 않은 채 답장을 보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응.]답장을 받은 안시연은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훈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밤 8시가 지났고 반우희의 상처는 깔끔하게 치료되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안시연은 약을 챙기고 반우희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양원장을 마주쳤다.양원장은 안시연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반우희의 상처를 먼저 걱정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재단 건은 안시연 씨 덕분이에요. 의료 사업에 대한 안시연 씨의 큰 지원에 제가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안시연은 의문스러웠다.“네?”양원장이 말했다.“덕분에 연정훈 대표님이 이미 저희와 연락을 취하셨어요. 이제 저는 이 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네...”안시연은 예의상 간단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이 이 재단에 투자한 것은 아마 안시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날 그녀가 제안했을 때 이미 연정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양원장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이 회장님 일행이 이미 밖에 계십니다. 안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시면 같이 가서 차 한잔하시는 게 어떨까요?”안시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8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차를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재단에 대해 말했을 때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주며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본인의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사실 연정훈은 진작에 재단 전체를 소현주에게 맡기겠다고 소현주와 약속한 상태였다.연정훈은 매일 집에 돌아가 밥을 먹고 안시연의 옆에서 잤다. 하지만 안시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시연이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연정훈은 어쩌면 이미 소현주의 집을 드나들었을지도 모른다.과연 집이 맞긴 한 걸까? 어쩌면 호텔일지도 모르겠다.얼마나 친밀한 사이길래 소현주가 좋아하는 냄새까지 묻혀온단 말인가.“시연 씨,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원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안시연에게 말했다. 반짝이는 눈은 안시연을 속이 메스껍게 만들었다.소현주는 이미 몸을 돌렸지만 안시연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안시연은 표정 따위 없는 무념무상이었지만 소현주는 옅은 미소를 짓는 것도 모자라 안시연을 향해 살짝 고개도 끄덕였다.“웩!”안시연은 구역질을 하며 황급히 풀숲으로 달려갔다.반우희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저녁도 먹지 않아 공복이었으므로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위는 여전히 경련이 일어나 진짜 토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반우희는 재빨리 물을 사다 안시연에게 주고 조심스레 등도 토닥여줬다.“위가 불편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갈까요?”반우희는 잔뜩 걱정하며 물었다.텅 빈 공허한 눈으로 풀숲을 바라보던 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그럼...”반우희가 보기에 안시연은 영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안시연은 애써 진정하고는 반우희에게 말했다.“우리 경찰서도 가야 해요.”“오, 그러네요.”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는 저 혼자 가도 되니까 언니는 불편하면 안 가도 돼요.”“괜찮아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눈만 바라보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팔을 내밀었다.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남자는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안시연과 이마를 맞대고 물었다.“갑자기 술은 왜 마신 거야?”안시연은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 연정훈의 목을 감싸며 가볍게 속삭였다.“정훈 씨가 하도 안 와서 기다리다 짜증이 나서 그랬어요.”“이런 식으로 성질을 부린다고?”남자는 안시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조금 늦은 것뿐이잖아.”안시연은 입꼬리를 당겨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연정훈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떨어지며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목에도 키스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가끔 보여주는 주동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술을 마신 후의 나른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연정훈을 금방 달아오르게 했다.연정훈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도 안시연의 옆모습을 감상하면서 그녀를 달랬다.“조금만 기다려 줄래? 금방 씻고 올게.”안시연은 대답 대신 조용히 연정훈의 목 부근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무슨 냄새 맡는 거야? 나 오늘 담배 안 피웠어. 요즘은 담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안시연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차디찬 냉담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정훈 씨 몸에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던 중이었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정도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귀를 작게 꼬집고는 말했다.“또 멋대로 생각한 거야?”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딘가 잘못됐음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안시연의 눈동자를 마주한 연정훈은 말없이 눈썹만 꿈틀거렸다.둘을 감싸던 묘한 흥분감은 모두 사라졌다.“왜 그래?”연정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
이튿날 아침, 비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비춰왔다.악몽에서 벗어난 양혁수는 그제야 어제 충동으로 벌인 일이 떠올랐고 왠지 이제는 후회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반항하는 걸 포기한 듯한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이 떠보듯 말을 걸었고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한 뒤에는 다시 악동으로 변했다.변여름은 아침 댓바람부터 서양식 브런치를 먹겠다고 난리였다.변여름에게 오냐오냐 귀여움을 받던 양혁수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부탁하는 변여름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그동안 변여름의 차려준 음식을 실컷 먹었으니 자신도 한 끼 정도는 기꺼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서양식 브런치야 식재료를 구우면 그만이었다.그렇게 첫째 날 아침을 무사히 마치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 변여름은 어제 먹은 브런치가 너무 맛있었다고 또 졸랐다.‘그래, 뭐. 맛있다는 데 해줘야지.’그러나 세 번째 아침엔 변여름이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난도를 높여 버렸다.‘음... 그것도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점심이 되자 변여름은 스테이크와 소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졸랐다.양혁수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말없이 스테이크를 구웠고 그 옆에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는 변여름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쭈, 지금 복수하는 건가?’‘평생 밥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한테만 요리해 주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야.’‘어쩌면 밥은 물론, 언젠간 뜨개질도 해달라고 할지도 몰라.’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양혁수의 등 뒤를 꼭 껴안았다.양혁수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한 소리 하려 했지만, 스테이크 기름이 튀어나오려 하자 먼저 변여름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변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불이 너무 세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잘하면 네가 하지 그래?”그러자 변여름은 쏙 빠져나와 등 뒤로 숨었고 양혁수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싫어요.”“난 오빠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맛이 엉망이어도
잠을 잘 때에는 변여름도 얌전한 편이었다. 양혁수에게 찰싹 들러붙긴 해도 기껏해야 팔이나 안고 잘 뿐이었다.가끔 양혁수가 밀어내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팔베개할 때도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에게서 향기로운 향이 난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변여름에게서 끈적한 허니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향기에 본인도 취해 버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다.낮에 하염없이 에든베타를 돌아다녔던 건 양시연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양혁수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싫었고, 오늘 밤 변여름이 옆에 있어 너무 다행이라 느껴졌다.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 팔을 베고 자는 변여름이 보였고, 어깨가 너무 시큰거렸지만, 양혁수는 손목을 돌려 살짝 스트레칭만 할 뿐 팔을 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변여름에게 잘 덮어줬다.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변여름이 깜짝 놀라 깨버렸다.변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양혁수의 품을 파고들었고 양혁수는 자연스레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냥 바람일 뿐이야.”변여름은 용기를 내어 창밖을 바라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눈을 비비며 이미 잠에서 깬 양혁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빠 빨리 자요...”양혁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귓가에는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창밖에는 거센 바람 소리에 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무 그림자까지 방안에 비춰오자 양혁수는 심기가 거슬렸다.그래서 침대 헤드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양혁수는 음침한 무덤 앞에 섰다.짙은 안개에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몇 번이고 양혁수의 이름을 불렀다.“혁수야, 혁수야!”“내가 네 엄마잖아. 혁수야!”피를 쏟으며 쓰러지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양혁수는 온통 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오빠?”“혁수 오빠!”그때, 변여름
두 사람이 소파 위로 함께 쓰러지듯 누울 때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양혁수의 무게가 실리자, 변여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그 소리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고 변여름은 목을 꽉 껴안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양혁수는 키스 도중에 눈을 떴고 마침 눈을 깜빡거리는 변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끈적하게 이어졌고 양혁수는 점점 변여름에게 이끌렸다.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니 지금 양혁수의 행동을 별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운 에든베타에서 변여름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변여름을 품에 안고 있으면 양혁수는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양혁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변여름의 호흡에 맞췄다.사랑에 서툰 부분에 있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변여름은 용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그동안 양혁수가 협조하지 않은 탓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그때 윗입술을 스치더니 입술 끝이 가볍게 빨렸다.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지자 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들렸지만 양혁수의 다리에 눌려 다시 꼼짝 못 하고 그의 품 안에 갇혔다.그렇게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느새 온몸으로 번져갔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꼭 껴안고 싶다가도, 온몸이 힘이 빠져 그저 그의 품으로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양혁수가 몸을 낮추고,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다.호흡마저 뺏겨버렸지만 변여름은 점점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양혁수를 믿었다.서툴던 키스는 점점 익숙하고 완벽해졌다.양혁수는 처음으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자세를 바꿔 더 깊게 변여름에게 다가갔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처음엔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 판단이 되었어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그렇게 밀어내던 변여름에게 키스를 쏟아붓다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