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가 부승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눈치 없긴. 안시연 씨 마음속엔 연정훈밖에 없거든.”“그게 뭐? 정훈 오빠 마음속에 안시연 씨는 있고?”“그래. 그게 문제이긴 하지.”이승우는 연정훈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어쩔 수 없이 네가 양보해야겠다. 두 사람이 죽고 못 사는데 네가 놔줘야지.”연정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무섭게 이승우를 노려보았다.이승우는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며 안시연을 보러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가 떠나고 이승우가 바로 진지한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지금은 무슨 상황인 거야?”“시간이 필요하대.”“아니. 너랑 안시연 씨가 무슨 상황이냐고!”이승우는 어이가 없어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러자 이승우가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지금 내가 보기엔 안시연 씨와 양혁수 사이 언젠가 불이 붙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야.”연정훈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리고 안시연이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날 밤이 다시 떠올랐다.과거 소현주의 배신에 연정훈은 역겨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안시연이 자신을 떠나고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부승희 말도 틀린 건 아니야.”이승우가 다시 말을 돌렸다.“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니야? 네가 뭐 안시연 씨를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았잖아.”연정훈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누가 그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이승우는 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반짝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자!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이승우는 카메라를 켜고 그의 얼굴을 촬영했다.“안시연 씨가 얼마나 좋은지 말해봐. 소현주랑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있어?”연정훈이 핸드폰을 퍽 밀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소현주랑 비교하지도 마.”이승우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안시연이 소현주랑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 아니면 소현주가 안시연이랑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
저녁에.연정훈은 안시연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양씨 가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양석진의 오른팔인 양창수만 병원에 있었다. 양창수는 안시연을 막지 않았고 대신 시간만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큰아씨께서 곧 저녁을 가져오실 겁니다.”안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이미 양혁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 나 배고파 죽겠어.”안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혁수 씨, 점심 안 먹었어요?”“먹기는 뭘 먹어. 오늘은 내가 새 삶을 살며 처음 먹는 식사잖아.”그제야 안시연은 양혁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안시연이 준비한 만두는 속이 거의 없고 반죽도 흐물거려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양혁수는 만두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네가 직접 만든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맞아요.”양혁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안시연을 바라봤다. “사실은 배달 음식이에요.”안시연이 결국 고백했다.양혁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배달 음식이면 어때.”양혁수는 입을 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 입만 먹여줘.”안시연은 뒤돌아 밥상을 찾으며 양혁수 혼자 먹기를 바랬다.“내 손에 힘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어!”양혁수가 투덜댔다.“제가 그릇을 들고 있을게요. 혁수 씨는 숟가락으로 드시기만 하면 돼요.”“그럼 안 먹어.”안시연은 어이없었다.“...”병실 밖.양창수는 유리창 넘어 병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안시연 씨께서 먹여 줄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병실 안을 보지 않았다.하지만 양창수는 연정훈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네. 먹여 주네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양창수의 이런 태도는 이제 익숙해진 연정훈에게 더 이상 놀라운 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연정훈은 양석진의 짓궂은 유머 감각까지 알게 될 정도였다.안시연 때문에 양혁수가 칼을 맞았으니, 당연히 양지원이 안시연을 탐탁지 않게 여길 줄 알았지만
안시연이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연정훈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바로 추궁하지 않고 사람을 조용히 뒤따라가게 했다.양혁수의 병실 근처는 이미 철저하게 경비가 서 있었다.안시연은 소현정이 갑자기 찾아와 꼭 지금 만나야 한다고 고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시연이 계단 쪽으로 가니, 그곳에 소현정이 엄숙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왜 여기까지 오셨어요?”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안시연을 때릴 뻔했다.오성호가 급히 귀국하자, 소현정은 양혁수가 안시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세 번이나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소현정의 귀한 아들이었다.목숨을 잃을 뻔한 것도 모자라서 상대가 하필 양지원의 딸이라니 더욱더 충격이었다.소현정은 속이 타들어 갔고 밤을 새워 양혁수를 보려고 양주로 달려왔지만, 오성호에게 거절당했다.소현정은 안시연을 통해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너에 대해 조금 들었어. 그래서 특별히 널 보러 온 거야.”안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어요?”소현정의 눈빛이 흔들리며 답했다.“너의...오성호 삼촌이 말해줬어.”안시연은 최근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져 있었고 이 말을 듣고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소현정은 다급히 다가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앞뒤로 살피며 말했다.“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전 괜찮으니, 이제 돌아가세요.”안시연이 말했다.소현정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정은 안시연이 양혁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안시연 역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안시연을 통해 양혁수를 몰래 만나보려 한 것이다.“시연아, 넌 몇 호 병실에 있니? 엄마가 저녁에 먹을 걸 챙겨다 줄게.”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입원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넌...”“저는 혁수 씨를 보러 온 거예요.”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기뻤다.“네가 양혁수를 만날 수 있어?”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소현정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
양지원은 막 원장에게서 양혁수의 상태를 듣고는 가까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위층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양지원의 귀에 들어왔다.소현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엄마'라는 단어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양지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안시연은 당황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으로 무의식적으로 소현정 앞을 막아섰다.“양 대표님...”양지원은 천천히 다가가며 차갑게 물었다.“안시연 씨, 혹시 혁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요?”“아니에요!”안시연은 즉시 부인했다.양지원과 많은 교류는 없었지만, 양지원은 김세연처럼 안시연을 깔보지 않았다. 그래서 양지원 같은 당당한 어른 앞에서 비굴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안시연 씨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면, 둘이 왜 몰래 만나는 거죠?”양민아는 끼어들어 말했다.양민아의 말이 끝나고 양지원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양지원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결코 드러낼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였다.양혁수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양지원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했고 안시연에 대한 적대감은 한없이 커졌다.안시연은 급히 해명했다.“어머니는 제가 여기 입원한 줄 알고 저를 보러 오신 거예요.”당황스러웠던 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소현정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양지원을 향해 도전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 병원이 양 씨 소유도 아니고 네가 올 수 있으면 나도 당연히 올 수 있는 거 아니야?”이 말에 양지원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인데 자신은 보지도 못하고 이 여자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원망과 질투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소현정은 양지원과 안시연이 마주한 상황의 위험성을 잠시 잊었다.양지원은 이런 여자와 말싸움하는 것조차 가치 없다고 느꼈다. 양지원은 안시연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전에는 안시연 씨를 불쌍한
연정훈과 오성호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욱 수습하기 어려워졌다.소현정은 크게 울며 소리쳤다.“난 그저 내 딸을 보러 온 것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오성호는 양혁수 때문에 급히 돌아와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몰랐지만, 연정훈이 안시연을 보호하는 모습과 안시연의 얼굴이 양지원을 닮은 것을 보자마자,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그 순간, 차가운 기운이 발끝부터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갔다.오성호는 재빠르게 소현정을 노려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소현정은 그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자존심에 물러서지 않았다.그녀는 연정훈이 안시연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연정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연 대표님, 공정하게 말씀 좀 해주세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했나요? 그저 딸을 보러 온 것뿐인데, 양 대표님이 저를 쫓아내려 하시네요.”이 명백하고도 저열한 이간질에 안시연은 더욱 어지러움을 느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소현정 씨, 불쌍한 척할 필요 없어요.”양민아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아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해요. 당신과 당신 딸이 이긴 사람들이라고 하셨죠. 당신은 제 엄마의 남편을 빼앗았고 당신 딸은 연 대표님을 사로잡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정말 대단하네요, 당신네 모녀.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죠. 그렇죠?”“난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명분만 차지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제삼자인 거 모르시나요?”“그만둬!”오성호가 묵직하게 소현정의 말을 끊었다.“아직도 창피한 것을 모르겠어?”소현정은 바로 입을 닫았다.소현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채 연정훈을 쏘아봤다.양민아가 더 말을 던지려 했지만, 그때 연정훈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당신이 안시연의 어머니인가요?”연정훈이 소현정에게 물었다.소현정은 원래 오성호를 두려워했지만, 연정훈은 젊고 고귀해 보여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연정훈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소현정은 갑자기 겁이 났다.“네...”“안시연에게서 들
시립 병원에서.양지원의 기분은 극도로 나빴고 결국 양혁수를 보러 가지 않았다.사건 담당자가 양혁수가 사고 당일 현장에 남긴 물건을 전달하러 왔을 때, 양지원은 심한 두통으로 양민아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양민아가 막 떠나자마자 양창수가 도착했다.“큰아씨.”양지원은 양창수를 보자마자 양석진이 떠올랐다.순간적으로 양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왜 왔어요?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아닙니다.”양창수는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석진 씨께서 급히 돌아가셔야 해서요. 그곳에서 석진 씨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요.”“이렇게 빨리 떠나신다고요?”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양혁수가 사고를 당했을 때, 양석진은 밤새 달려왔고 양지원은 그가 오성호보다 먼저 와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양혁수를 돌보느라 양석진과 제대로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요즘 석진 씨가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양창수가 말을 이었다.양지원은 실망했지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감정을 억눌렀다.“오빠에게 건강 잘 챙기라고 전해주세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으며 나무로 만든 보석 상자를 건넸다.“아씨께서 건강하시면, 석진 씨의 걱정도 덜어지고 석진 씨도 건강해지실 겁니다.”양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말이 불편하게 들렸다.이제는 더 이상 어릴 때처럼 그에게 말썽을 부리지도 않는데 무슨 걱정을 하게 한다는 말인가.그래도 참자.양창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양지원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양지원이 좋아하는 자색 진주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진주의 품질은 부드럽고 뛰어났지만, 최고급은 아니었다.“오빠가 사준 거예요?”“네. 석진 씨께서 우연히 보시고 아씨에게 어울릴 거로 생각하셔서 사신 겁니다.”양지원은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침착했다.“오빠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러 양지원의 얼굴을 두어 번 더 살폈다.양지원은 자신이 품은 감정이 들킨 듯한 느낌에 살짝 눈살을 찌푸
양민아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결과를 받았다.안시연의 신분증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생일은 9월 4일이었고 아버지는 그해 1월에 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안시연은 유복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만약 안시연이 10월에 태어났다면 그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았다.안시연은 오성호의 아이일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양민아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계속해서 조사를 지시했고 오성호와 소현정이 처음 연결된 시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했다.그리고...“어떻게든 안시연의 유전자 검사 샘플을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양민아는 생각해 보니, 유전자 검사만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오성호의 샘플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양혁수의 샘플은 구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오성호의 아들이니, 그와 안시연의 유전적 관계만 확인하면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만약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이라면 양민아에게는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오성호는 이미 양씨 그룹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딸 또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양민아는 깊은 고민 끝에 또 하나의 보험을 들기로 결심했다.양씨 가문의 양녀라는 신분만으로는 결국 너무 불안정했다. 정민아는 반드시 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어야만 했다!그렇게 결심한 양민아는 해외에서 휴가 중인 양홍두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저 민아예요...”...연정훈의 ‘결혼은 안 한다’라는 말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연정훈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자기 말을 이미 고백이라고 생각하며 안시연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네 고백은 잘 들었어,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런 고백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부승희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이승우도 비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안시연 씨가 네 말을 이해한다면 안시연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닐 거야.”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연
안시연은 연정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동의한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벚꽃동의 구조를 좋아한다면 강남시티에 가서 따로 공간을 내서 벚꽃동의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놓을게.”하지만 안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왜 그러는데?”“정훈 씨, 알고 계시지 않나요? 계약을 수정하려면 양쪽의 동의가 꼭 필요해요.”안시연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정훈이 답했다.“...알아.”안시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연정훈은 갑자기 목이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정훈은 눈앞의 화면을 보며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너는 원하지 않는 거야?”“이미 정훈 씨에게 많은 폐를 끼쳤으니,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그 말은 분명 화가 나 있는 듯한 어조였다. 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채,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안시연은 차분하게 말했다.“내년 이맘때쯤이면, 저는 이미 집도 있고 차도 있으며 여유도 생길 거예요. 정훈 씨와의 인맥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경인을 떠날 계획이에요. 외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적당한 시기가 오면 결혼할 사람을 찾을 거예요.”연정훈은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혼은 꼭 해야 해?”안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해요. 결혼하지 않으면 제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 그건 정말 싫어요.”그 말에 연정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시연의 말에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앞으로...”“앞으로 정훈 씨도 결혼하실 거예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아마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사람과 결혼하시겠죠. 그때쯤이면 아이도 낳고 행복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연정훈의 품에서 턱을 치켰다.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의 콧등에 짧게 키스하고 말했다.“이젠 일어나. 우리 시내 구경이나 가자.”양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 급해.”연정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그러는 넌 양혁수 보러 온 거잖아. 마침 시간도 되겠다 온 김에 나도 양혁수 보러 갈까 봐.”양시연이 눈을 부릅 떴다.‘삐진 거 참 오래도 가네.’“나보고 잘 삐진다고 그러더니, 정훈 씨야말로 삐돌이네요.”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신경이 쓰인 연정훈은 행여나 두 사람이 따로 만날 까 안절부절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연정훈은 오늘 양혁수의 앞에서 깨소금을 볶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참 속 보이네.’하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는 네 오빠잖아. 그러니 보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참나. 그럼 혁수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던가요.”연정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나쁘지 않은데?”“...”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정훈을 살짝 밀어냈다.“빨리 일어나서 옷 좀 챙겨줘요. 나도 씻어야겠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옷을 챙겨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이 직접 옷을 입혀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았다. 연정훈에게 맡겨버린다면 아마도 또 한바탕 사달이 날 것이다.어젯밤 일이 있은 뒤로 양시연은 많이 뻔뻔해졌고 연정훈의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갈아입었다.갈아입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두 다리가 흐물거리고 허리가 엄청 시큰거렸다.그러자 연정훈이 빠르게 양시연을 부축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지금 정훈 씨도 멀쩡한 척하는 거죠? 사실은 엄청 피곤한데 말이에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끌어안고 직접 화장실로 데려갔다. 양시연을 내려놓은 연정훈은 또
“거짓말...”“나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그냥 내 얼굴이랑 몸만 좋았던 거잖아요...”정신은 흐릿해지고 땀으로 온몸이 젖어갔다. 그리고 양시연의 두 볼도 붉게 물들었으며 두 사람은 이따금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양시연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그래서 양시연을 달래며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졌다.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시연은 이제 손가락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훈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기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오고 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제 화해하는 거로 어때?”‘화해?’‘무슨 화해?’양시연이 머리를 굴리다가 연정훈이 과거 연애 시절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풉...”그래서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정신이 흐릿할 때 서둘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서서히 잠이 들었고 어느새 연정훈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꿈 깨요...”연정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에 키스를 했다.몇 시간 뒤면 해가 뜰 시간이었지만 연정훈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버리고, 소현주 사건도 말해줬으니 이제 마음이 편했다.그래서 잠에 들지 않고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아침.양시연이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맞은편 소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양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고백이 떠오른 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등을 휙 돌려버렸다.그러자 입꼬리를 올린 연정훈이 노트북을 내려 두고 양시연의 등 뒤로 앉았다. 이어 몸을 숙여 양시연의 목에 키스를 했다.입술의 말캉한 촉감이 유난히 선명했다.양시연은 두 눈을
“꼭 그렇게 날 상처 줘야겠어?”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양시연을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이건 모두 정훈 씨가 자초한 거예요.”“삼촌이 정말 깨어나지 않았다면 정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로 살았을 텐데.”그리고 양시연이 몸을 돌려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어디 보자. 설마 지금도 바보인가?”“...”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속수무책이었고 양시연이 내키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고작 이런 말로 내 믿음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 소현주 씨를 제외하고 정말 다른 사람은 없어요? 난 믿을 수가 없는걸요. 그때 호텔에서...”양시연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주 익숙해 보였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날 놀리는 거야? 내가 뭐가 익숙해 보였다고 그래.”“...”“네가 멍청한 거지.”‘어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양시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어쨌든 모두 정훈 씨 탓이에요. 어떻게 교수씩이나 돼서 수업 듣던 학생한테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연정훈은 과거에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그러자 연정훈은 이불을 위로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의 위로 올라타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했다.시선이 얽히고 연정훈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양시연의 귓불에 키스하며 말했다.“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양시연은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연정훈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양손으로 연정훈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는데 머릿속에는 그동안 연정훈과 함께 지내던 추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처음 만남을 이어가던 그 시절 연정훈은 너무 양시연을 몰아붙여 양시연을 힘들게 했었다.양시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아요? 정훈 씨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자 양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말이 맞죠?”“...”양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나랑 소현주는 가벼운 교제였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양시연은 믿지 않았다.“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면서 해본 적 없다고요?”“없어.”연정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훑었다.그러나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겨 등을 돌려 누웠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을 품에 넣었고 양시연은 팔꿈치로 연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나 건드리지 마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다시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뽀뽀하고 달래도 효과가 없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공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양시연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더 자세하게 알려줄게.”“...”양시연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질색하며 말했다.“누가 듣고 싶대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말해줄 필요 없어요.”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은 드디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소현주는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공휘를 만났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한 말이지, 소현주는 아주 많은 남자들과 돈으로 된 만남을 이어갔다.그러니 성폭행으로 몰아간 영상은 진짜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했다.소현주는 연정훈과 같이 지내며 과거가 들킬까 걱정이 많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유학을 변명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회복 수술도 받았다.공휘 주변에는 널린 게 여자였고 소현주에게는 이미 질려버린 터였다. 그러나 연정훈의 여자가 된 소현주를 보며 다시 관심이 생겼다.이 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