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아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결과를 받았다.안시연의 신분증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생일은 9월 4일이었고 아버지는 그해 1월에 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안시연은 유복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만약 안시연이 10월에 태어났다면 그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았다.안시연은 오성호의 아이일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양민아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계속해서 조사를 지시했고 오성호와 소현정이 처음 연결된 시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했다.그리고...“어떻게든 안시연의 유전자 검사 샘플을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양민아는 생각해 보니, 유전자 검사만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오성호의 샘플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양혁수의 샘플은 구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오성호의 아들이니, 그와 안시연의 유전적 관계만 확인하면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만약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이라면 양민아에게는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오성호는 이미 양씨 그룹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딸 또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양민아는 깊은 고민 끝에 또 하나의 보험을 들기로 결심했다.양씨 가문의 양녀라는 신분만으로는 결국 너무 불안정했다. 정민아는 반드시 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어야만 했다!그렇게 결심한 양민아는 해외에서 휴가 중인 양홍두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저 민아예요...”...연정훈의 ‘결혼은 안 한다’라는 말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연정훈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자기 말을 이미 고백이라고 생각하며 안시연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네 고백은 잘 들었어,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런 고백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부승희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이승우도 비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안시연 씨가 네 말을 이해한다면 안시연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닐 거야.”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연
안시연은 연정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동의한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벚꽃동의 구조를 좋아한다면 강남시티에 가서 따로 공간을 내서 벚꽃동의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놓을게.”하지만 안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왜 그러는데?”“정훈 씨, 알고 계시지 않나요? 계약을 수정하려면 양쪽의 동의가 꼭 필요해요.”안시연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정훈이 답했다.“...알아.”안시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연정훈은 갑자기 목이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정훈은 눈앞의 화면을 보며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너는 원하지 않는 거야?”“이미 정훈 씨에게 많은 폐를 끼쳤으니,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그 말은 분명 화가 나 있는 듯한 어조였다. 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채,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안시연은 차분하게 말했다.“내년 이맘때쯤이면, 저는 이미 집도 있고 차도 있으며 여유도 생길 거예요. 정훈 씨와의 인맥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경인을 떠날 계획이에요. 외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적당한 시기가 오면 결혼할 사람을 찾을 거예요.”연정훈은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혼은 꼭 해야 해?”안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해요. 결혼하지 않으면 제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 그건 정말 싫어요.”그 말에 연정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시연의 말에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앞으로...”“앞으로 정훈 씨도 결혼하실 거예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아마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사람과 결혼하시겠죠. 그때쯤이면 아이도 낳고 행복
연정훈은 체면을 중시하여 안시연에게 애걸복걸할 수는 없었다.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이상,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할 주제가 없었다.연정훈은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안시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이런 답답함은 연정훈이 태어날 때부터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이불에서 끌어내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안시연은 방금 납치 사건을 겪었고 심리적으로 상처받아 사람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맞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이렇게 자신을 다독인 후, 연정훈은 더욱 불안해졌다.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침대 위에 있던 안시연은 약간 놀랐다.연정훈은 핸드폰을 힐끔 보더니 할아버지 측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찡그린 얼굴로 전화가 온 시간이 적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품었다.최근 안시연은 잠이 얕았고 특히 놀람에 민감해졌다.연정훈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문이 닫히자, 안시연은 눈을 떴다.안시연은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보며 연정훈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에게 다짐했지만,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며 그가 나간 시간을 세고 있었다.연정훈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도련님.”연정훈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집 밖에서는‘연 대표님’이라고 불리지만, 할아버지 측의 사람은 예전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을 ‘신 아저씨’라고 불렀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전화를 주셨나요?”상대방은 공손한 태도로 몇 마디 격식을 차리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강훈 씨가 회장님을 뵈러 몇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을 지경입니다.”연정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께서는 어떤 태도였나요?”“회장님께서는 당연히 도련님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련님, 이번에는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 연강훈 씨뿐만 아니라 L K 은행
안시연은 납치 사건으로 인해 며칠간 결근했다.함풍의 주식 양도 절차는 전면 중단되었고 심사팀은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차라리 긴 휴가를 내고 양주에서 쉬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을 경인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정훈 씨, 바쁘면 먼저 혼자 돌아가세요.”안시연이 말했다.“저는 양주에 남을게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연정훈은 마음이 불편해졌다.“양혁수도 곧 경인으로 돌아가서 치료받을 거야.”안시연은 잠시 망설였다. “전화 한 통만 할게요.”안시연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은 무표정하게 기다렸다.조금 후, 안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혁수 씨도 오늘 밤에 돌아간다고 하네요. 그러면 저도 정훈 씨와 같이 갈게요.”연정훈은 순간 혼란스러웠다.어릴 적부터 배워온 품격이 자꾸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연정훈은 욕설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로 갈까요? 아니면 열차를 탈까요?”안시연이 물었다.“저는 두 마리 양도 데리고 가야 해요.”연정훈은 짧게 대답했다. “...차.”안시연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다행이네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어 두 마리 양을 데려올 시간을 정했다.그리고 바쁘게 짐을 챙겼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양에게만 신경을 쓰고 연정훈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안경을 벗었다.쿵!큰 소리가 났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비가 차 멀미하는 것 같아. 약을 좀 사야겠어.”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정이 소란을 피운 덕분에 다행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양혁수가 안시연과 함께 가겠다는 양지원의 마음을 달래 동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되면 연정훈은 정말로 다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경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넓은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안시연은 맞은편에서 영준을 안고 있었고 연정훈은
안시연은 결국 안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최근 안시연은 자주 어지럼증을 느꼈고 연정훈도 안시연을 무리하게 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이불을 덮고 단순히 대화만 나누는 것도 연정훈에게는 충분했다.물론, 안시연이 연정훈과만 대화할 때 한해서였다.“내일 점심은 저에게 가져다줄 건가요?”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들고 있었지만, 이마를 찌푸린 채였다.안시연은 연정훈 옆에서 대놓고 양혁수와 통화 중이었고 벌써 20분이 넘게 흘렀다.양혁수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그 세 번의 은혜 덕분에 안시연은 양혁수를 향한 관용이 전보다 커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전, 예의 있게 물었다.“혁수 씨가 전화했는데, 받아도 괜찮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안시연이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그녀를 더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너무 오래 통화하지 마.”“네.”안시연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지 않았다.“혁수 씨는 집에 계시잖아요. 저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안시연이 말했다.“네가 오면 내가 뒷문으로 사람을 보내 데리러 갈게.”연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시선을 피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마. 안시연이 잡히면, 네가 안시연을 보호할 수 없을 거야.”양혁수는 웃으며 말했다.“아, 형도 계셨군요.”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을 감지하고 살짝 옆으로 몸을 옮겼다.양혁수는 더 도발적인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저는 목숨 부지하는 처지라, 저희 어머니는 제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셔요. 안시연이 날 보러 오는 건 물론이고 제가 안시연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고려해 보실 겁니다.”연정훈과 안시연은 둘 다 잠시 말을 잃었다.둘은 동시에 양혁수가 병실 밖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다음 날, 연정훈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마당에 경호원들이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전부 다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아주머니는 대문 앞에 벚꽃이 피었길래 보러 갔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물어보았다고 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가실 때는 대표님께 전화해야 한답니다.”안시연은 원래부터 마음이 불편했고 더구나 감시까지 당하는 상황에 기분이 나빠졌다.안시연은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앞에 있는 케이크를 힘껏 찔렀다.아주머니는 안시연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위로하면서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라고 유도했다.안시연은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지금 안시연은 단지 어지럼증이 빨리 나아져서 다시 일하고 싶을 뿐이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운전 연습도 해야 한다.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안시연은 불안했다.점심에는 퀵 서비스를 불러 양혁수에게 음식을 보냈다.아주머니가 두 세트를 준비하며 제안했다.“대표님께도 한 세트 보내드릴까요?”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정훈 씨는 회사에서 잘 먹고 있어요.”“그래도 직접 보내드리는 것만 못하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아주머니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제가 보내드릴게요.”안시연은 침묵했다.“...”됐다.안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두 마리 알파카와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막 낮잠을 자려던 참에,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점심 먹었어?”연정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안시연이 말했다.“벌써 1시 가까이 됐는데요.”‘시간이 몇 시인데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몰라?’연정훈은 마치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나 방금 일이 끝나서 시간 보는 걸 깜빡했어.”안시연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보로 아는 아는 듯했다.이 정도 레벨의 대표라면 시간관념이 가장 철저해야 했다. 설령 그가 까먹었다 하더라
안시연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문을 조용히 닫은 뒤, 침착하게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너는 내려갈 필요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집으로 갈게.”연정훈이 말했다.전화를 끊자, 아주머니가 다시 와서 알려주었다.“여사님께서 차 한잔 같이하자고 부르셨어요.”아주머니의 미묘한 표정에서 안시연은 연 할머니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안시연은 내려가고 싶지 않았고 굳이 내려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상황을 보니, 더 버티면 곧 경호원이 와서 억지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끌려 내려가는 모습은 절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옷 갈아입고 곧 내려갈게요.”“네. 알겠습니다.”아주머니는 급히 내려갔다.안시연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흰색 긴팔 셔츠에 은은한 연보라색 모직 치마를 맞춰 입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예상했던 대로 특별한 환영도 거창한 장면도 없었다. 소파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차를 새로 데워드릴까요?”“두 잔 가져와요. 그 아이도 곧 내려올 것 같아요.”“네. 알겠습니다.”나이 든 아주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계단 위에 있는 안시연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민수희에게 말했다.“안시연 아가씨가 내려왔습니다.”민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의 어머니와는 달리 연 할머니는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안시연을 더 긴장하게 했다.안시연은 작은 거실을 지나 조용히 민수희 앞에 다가섰다.민수희의 외모와 표정을 보면서도 안시연은 민수희의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안시연의 외할머니는 오랜 병상 생활로 얼굴에 기운이 없었고 안시연이 보아온 대부분의 노인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민수희는 달랐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었으며 콧대 위에 걸린 안경이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피부는 다소 처졌지만, 여전히 희고 깨끗해 보였다. 눈매와 얼굴 윤곽을 보면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였음을 짐작할 수
안시연은 민수희를 만나 비로소 말로 사람을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단 두 마디의 간단한 말만으로 안시연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아이, 신분 얘기들.표면적으로 관대하게 들렸지만, 실제로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연정훈의 정식 연인으로서 존재하는 안시연에게 그런 말은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다.안시연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본 민수희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라고 확신했다.안시연은 자존심이 강하고 연정훈의 재산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민수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시연이 가진 것은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별로 없으며 그것마저도 민수희의 눈에는 무모한 야망으로 보였다.“사실 네가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연정훈이 널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를 설득해서 너를 내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냥 여기 계속 있어라.”“나중에 연정훈이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때 우리는 신혼집을 따로 마련해 줄 계획이니, 그때는 준비하렴.”안시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약혼이요?”“연정훈이 네게 말하지 않았니?”민수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안시연은 말이 목에 걸려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민수희는 더욱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양민아는 알고 있지?”“우리와 양씨 가문과 대대로 인연이 깊은 집안이야. 그만큼 적합한 혼사가 또 있을까?”민수희의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처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처럼 들렸다.“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연정훈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너에게도 너의 아이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테니까.”안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안시연은 더 이상 민수희를 보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아직 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습니다.”“그래, 괜찮아. 네 방으로 가서 쉬어.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
10시가 지나서야 양시연은 집으로 돌아온 연정훈을 맞이했다.“안 죽었어요?”양시연이 의아해하자 연정훈은 외투를 벗으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의식이 없어. 그래서 임성원에게 사람을 옮기라고 했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사람들은 책임자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정훈 씨와 연관 짓는 데 집중할 테니까요.”소현주의 사건처럼 연정훈도 사망 원인을 깊이 파헤치지 않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시신도 따로 보관하지 않았다.“하지만...”양시연은 말을 잠시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조재민 씨 일당이 먼저 움직여서 이번 사건을 더 크게 키워 아버님께 압박을 가하려는 건 아닐까요?”“그럴 가능성은 적어. 설령 조재민이 그런 속셈을 품었더라도 직접 나설 인물은 없을 거야. 이런 일들은 보통 결정타를 날릴 만큼 치명적이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발목을 잡는 수준에서 이용될 뿐이지.”양시연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그쪽 사람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버님께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면 그때 서야 일제히 공격할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침대 머리맡에 앉히며 물었다.“소식 들었을 때 많이 놀랐어?”양시연은 살짝 한숨을 쉬며 연정훈의 품에 기대 조용히 말했다.“놀라진 않았어요. 다만 당신이 걱정돼서 자꾸 이것저것 생각하게 돼요.”“아. 참.”양시연은 고개를 들고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면 아버님 쪽은 언제쯤 소식이 올까요?” “이번 주 안에는 결론이 날 거야. 하지만 임명까지는 아직 이르고 최종 결정은 위에서 내려야 해.”결정이 내려진다는 건 곧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양시연은 그제야 양석진이 종적을 감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아빠는 지금 한강시에 계실 거예요. 이번 일은 결국 서운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이겠죠?”“맞아.”“이번 일을 계기로 양원에서는 당신의 직위를 어떻게 조정하려고 해요?”“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양시연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휴직 안 해요?”
새벽이 되어서야 양시연은 사건의 전말을 들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표세연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일곱 명 모두 구조되었고 여섯 명은 이미 의식을 되찾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팀장을 맡은 이가 가장 위독한 상태였으며 아직도 응급 치료 중이라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임성원이 보고했다.“깨어난 사람들 모두 책임자가 오후에 연 대표를 만나 서명을 받은 승인 문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증언했습니다.”“그럼 그 승인 문서는 어디 있나요?”“없습니다. 모두 봤다고는 하지만 문서는 책임자가 보관하고 있었고 현재 그가 응급실에 있어 찾을 수 없습니다.”양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승인 문서도 없이 그냥 입 맞추고 연정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죠?”“그 사람들의 말이 일관되게 똑같아서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죠. 그 책임자는 그냥 가짜 승인 문서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요. 그러면 직원들은 실제로 봤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증언할 테고. 하지만 승인 문서가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죠?”‘한심하다. 이렇게 조잡한 수작을 부리다니.’이 사람들은 연재혁이 패배할 거로 생각하고 양시연의 아버지가 위중하다고 생각하니 막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 책임자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임성원은 사실대로 말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상태가 위독했습니다.”양시연은 욕이 나올 뻔했다.세상이 참 잔혹하다. 해당 라인의 최고 책임자는 연정훈이었고 규칙에 따라 사고가 발생하면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그 책임의 경중이 다를 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승인 문서도 없이 증거도 없이 오직 입을 맞추고 연정훈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표세연은 냉정하게 말했다.“그 책임자가 살아 있기만 하면 조사를 통해 연정훈과의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걸 밝힐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죽으면 비록 연정훈이 주범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억울한 오명을 쓸 가능성이
옛집에 도착하자 표세연은 서둘러 양시연을 맞이하여 앉히고 다양한 간식들을 차려주며 소파를 정리해 편안하게 앉게 했다.“이쁜 얘기야, 한 달 넘으면 할머니랑 만날 수 있겠네.”표세연은 양시연의 배를 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옆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간식을 놓으면서 말했다.“도련님, 요즘은 사모님과 함께 집에서 지내시면 좋겠어요. 도련님께서 오시면 사모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요.”양시연은 표세연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챘고 표세연이 불면증에 걸린 것 같다고 느꼈다.표세연은 아줌마를 보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아주머니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는데 어머니께서는 아직 심리적으로 훈련이 덜 된 거 같네요.”표세연이 연정훈을 가볍게 째려보았다.“그 전과는 달라. 예전엔 할아버지가 도와주셨지만 지금은 여기서 할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어.”양시연은 위로하며 말했다.“사실 더 승진하지 않더라도 다른 기회는 있을 거예요.”표세연은 고개를 저었다.“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지. 무승부는 없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아기의 이름으로 전환했다.표세연은 확실히 기뻐하며 말했다.“성씨는 네가 선택할 권리를 줬으니 이름을 지을 때는 아이의 할아버지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좋아요. 이름은 아버님께서 정하게 하세요.”양시연은 여유 있게 말했다.표세연은 다시 양시연의 배를 만졌고 거실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연정훈은 전화를 받고 회사에 가야 했다.“주말인데 전혀 시간이 없네.”표세연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으며 연정훈에게 차 조심히 운전하고 저녁에는 최대한 일찍 돌아오라고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이자 표세연도 기뻐했다.연정훈이 떠난 후 양시연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분위기도 완벽했다.부승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우희에게 입을 맞췄다.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반우희가 발끝을 들자 부승원은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깊게 키스했다.반우희의 몸에서 오래 스며든 듯한 강한 딸기 향이 났고 부승원은 그 향이 가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반우희는 식사 후 화장실에서 거의 반병을 썼고 혹시 음료처럼 한 통을 다 마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고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핥으며 부승원의 입술도 스치듯 지나갔다.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자 반우희는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부승원의 가슴에 묻었다.“이제 가야 해. 승주가 널 찾을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반우희는 가볍게 대답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불빛은 어두웠지만 부승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정말 좋다.’반우희는 부승원을 마주 보며 뒷걸음치자 부승원이 말했다.“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네.”반우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두 걸음 더 뒤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다.부승원은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고 입안의 딸기 향이 한층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갑자기 멈추자 부승원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부승원 씨.”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몸을 숨겼다.부승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뭐 하는 거야?”반우희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만들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오늘 밤에 문제집 다 풀 거예요.”부승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적당히 해. 문제집이 너한테 질려서 도망가겠어.”반우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부승원은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로 향했다.차에 다가가자 그는 잠
두 사람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운전사는 이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반우희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반우희는 부승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없이 매달렸다.부승원은 마음이 약해져 반우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집에 가기 싫으면 한 바퀴 더 돌면서 간식이라도 사줄까?"“싫어요.”반우희는 부승원을 더욱 꼭 안았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재빠르게 그의 턱에 가벼운 키스로 응답했다.주변은 어두컴컴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부승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평소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너그러움만이 남아 있었다.“마라 새우를 많이 먹으면 원래 이렇게 집착하게 되나?”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새우 탓이 아니라 달이 문제에요.”“달이 뭘 잘못했는데?”“나는 인정해 이건 전부 달 때문인 것을.”반우희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승원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조용한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 구절을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음성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달빛이 너무 아름다웠고 너는 너무 다정했어. 그 순간 오직 너와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부승원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정도면 달이 욕을 좀 먹어도 억울하지 않겠네.’“부승원 씨.”반우희가 그의 품 안에서 부르자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흔들리지 마세요. 부모님께 휘둘리지 말고 날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마요. 난 당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반응 없이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아닌데? 너 승주한테 돈만 많이 주면 나랑 헤어지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