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제는 다 커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 다 알고 있다.”“생신 잔치 날, 넌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발표 일정은 바뀌지 않을 거야.”“그때는 모든 사람이 이 할머니를 비웃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지.”할머니가 나가면서 차분한 어조로 남긴 마지막 말이 연정훈을 충격에 빠져들게 하였다.민수희는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할머니가 말해 줄게. 오늘 같은 계획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어. 혼인 계획을 하더라도 내 아들에게 돌아갔겠지. 그런데 누가 막내아들을 위해 계획할 기회를 가로챘을까? 바로 너야.”“너의 작은아버지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잊지 마라.”오래도록 봉인된 기억이 마치 누군가의 손으로 연정훈의 목을 조이는 듯, 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했다.연정훈은 감정을 억누르며 침실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안시연이 캐리어의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연정훈은 캐리어를 보며 눈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어디 가려는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일어섰다.“정훈 씨 할머니께 들었어요. 약혼한다면서요?”“그런 일 없어.”연정훈은 단호하게 부정했지만, 안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저는 우선 나비와 영준이를 데리고 벚꽃동으로 갈 거예요. 며칠 뒤에 집을 구하면 그때 나갈게요.”그렇게 말하고 안시연은 두 마리 양에게 목줄을 차 주었다.연정훈은 관자놀이가 심하게 뛰고 마음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안시연, 나는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어.”연정훈은 다시 강조했다.안시연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네. 알겠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정훈 씨가 약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혼인에 끼어들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들으며 고통스러웠다. 안시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연정훈의 예민한 신경을 더 괴롭히
연정훈이 너무 강하게 안아서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떠나보내기 싫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목구멍에 맺힌 씁쓸함을 삼키며 연정훈을 밀어내려 했다.“정훈 씨, 놓아줘요.”하지만 남녀의 힘 차이는 너무 컸고 안시연의 힘으로는 연정훈을 전혀 밀어낼 수 없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아래층에서 이 광경을 본 아주머니는 얼른 주방으로 돌아갔다.양 두 마리는 양쪽에 서서 고개를 들고 구경하고 있었다.연정훈은 한참 뒤에야 진정하며 안시연을 놓아주었지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안시연을 서재로 끌고 갔다.안시연은 계속해서 몸부림쳤다.“뭐 하는 거예요?”서재 문 앞까지 오자 나비도 따라가려 했다.연정훈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나비는 침을 뱉었다.서재 안에서 안시연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도망칠 수 없었다.연정훈은 화를 억누르며 안시연의 얼굴을 쓰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안시연의 마음이 아파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헤어지다니요.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냥 제가 교수님한테 약간의 이득을 봤고 일을 안 하고 돈을 받은 것뿐이었죠.”안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교수님이 신경 쓰인다면 시급으로 계산해서 제 월급에서 빼도 돼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좋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 아프게 하였다.“양주에서 내가 한 말은 전부 흘려들은 거야?”안시연은 대답했다.“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다행이네요. 안 그랬으면 교수님 정말 곤란하셨을 거예요. 앞에서는 저한테 같이 있자고 하시더니, 뒤에서는 약혼을 준비하고 계셨다니요.”연정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난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안시연은 고개를 떨구고 깊은 숨을 내
연정훈은 거칠게 안시연의 입술을 탐했고 안시연은 호흡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아까부터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그러자 연정훈은 빠르게 안시연의 허리를 잡고 자기 몸에 기대게 했다.그는 제 멋대로 입술을 탐했으며 안시연이 지금 본인의 기분을 직접 느끼게 하고 싶었다.‘모르겠다면 알 때까지 하면 되지.’“음...”연정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각도를 조정했다.안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으며 머릿속으로 전류가 파고드는 것처럼 온몸이 짜릿짜릿했다.연정훈이 자신을 가두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되자 안시연은 그를 깨물기로 했다.하지만 이미 여러 번 물린 경험이 있었던 연정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빠르게 그녀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읍!”안시연이 고개를 쳐들었다.입을 다물 수 없게 되자 입가로 무언가 길게 늘어져 나왔다.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찾아왔으나 그녀는 저항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고 점점 무게가 연정훈에게 실렸다. 그는 안시연의 자세가 불편하다고 생각되어 살짝 뒤로 물러섰다.키스를 마치고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다시 꼭 감고 인상을 찌푸렸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숨을 세게 들이쉬는 그녀를 보며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어디 불편해?”안시연은 머리만 괜찮았다면 그에게 박치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불편하냐고 물을 수 있는 걸까?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안시연은 연정훈을 세게 밀어내려 했다.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연정훈이 표정을 구기고 그녀를 부축했다.안시연은 그의 품에 기댔고 머리가 윙윙 울리더니 눈앞의 사물이 중첩되어 보였다.그의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또 몸을 뒤로 뺐다.그러나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다시 한
안시연은 너무 심장이 쿵쾅거려 연정훈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 고집을 피웠었다.그런데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에게 입을 맞춰 도망갈 수 없게 했다.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안시연은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당겼다.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연정훈도 얌전히 누워있는 안시연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연정훈은 손을 뻗어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의사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 그동안 좀 쉬고 있어.”안시연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잠이 오지 않았다.연정훈은 아무 말도 없는 안시연의 옆으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시간이 지나고 안시연은 누워있던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리면 연정훈과 마주 보아야만 했다.이제 허리가 점점 시큰거리는데 옆의 연정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나비가 밖에서 작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내가 나가 볼게.”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이 드디어 작게 대답했다.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연정훈이 방문을 나섰다.그가 방을 나서고 안시연은 침대 위에서 찌뿌둥하던 몸을 한참 뒤척였다. 그리고 연정훈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를 등지고 누웠다.민수희가 직접 명령을 내렸으니 연정훈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안시연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오직 그녀만이 그에게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줬다.어지럽던 머리가 진정되고 안시연은 잠이 솔솔 밀려왔다.“큰 문제는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외상 스트레스의 가장 좋은 해결법입니다.”의사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용해야 할 약을 확인했다. 이어 주방으로 가 도우미들에게 안시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방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어느새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가만히 잠에 든 그녀를 지켜보다가 모든 고민을 뒤로 하고 같이 잠에 들기로 했다.두 사람의 핸드폰에는 불이 날 정도로 부재중 전화가 찍혔으나 두 사람은 전혀 관심이
양씨 가문.양혁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착잡한 기분이었다.그가 자꾸 병실 안을 왔다 갔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자 양지원도 인상을 팍 찌푸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양지원은 국그릇을 밥상 위로 탁 올렸다.“빨리 먹어.”“...”그는 상처 난 부위를 움켜쥐고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양지원에게 다가갔다.“또 어느 눈치 없는 녀석이 우리 양지원 씨 심기를 거슬리게 했을까요?”양지원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쭉 밀었다.“말만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먹고 싶지 않아요. 계속 누워있었더니 입맛이 싹 사라졌다고요. 많이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해요.”“...”양지원이 팔짱을 척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넌 민아와 연정훈이 약혼하길 바라고 있었잖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아들의 고민을 읽은 양지원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계약 약혼에 있어 양지원은 그동안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약혼은 순리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와 직접 가입할 줄은 몰랐다.양지원은 막아서려 했지만 며칠 전 안시연과 소현정의 일로 기분이 상했고 막아설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다.두 가문 사람들이 모두 허락했으나 오직 연정훈만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이 약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좋은 결말이 없었다.양혁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온 건 누가 입김을 불어서 그래요.”양지원도 모를 리가 없었다.“민아는 네 누나야.”양혁수가 쳇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민아가 움직일 거라 양혁수는 미리 예상을 했었다.명예와 권력을 위해 낳아준 부모의 성도 버린 사람이 고마움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더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그런 소리 마세요. 난 외동아들이고 그 누구와도 재산을 나눠 가질 생각 없어요.”“그리고 이번에 결정된 혼사를 어머니는 절대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뱉은 말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부승희는 양씨 어르신이 보내온 모바일 초대장을 안시연에게 보냈다.[이 기세를 보아하니 두 가문이 큰 소식을 공개할 예정인 것 같은데요.][네. 연정훈 씨와 양민아 씨의 약혼 소식이겠죠.]???[안시연 씨, 그걸 지금 그냥 넘어간다고요?]안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남 시티를 한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대화는 적은 편이었다.더구나 안시연은 아직도 연정훈에게 삐진 상태였다. 그리고 연정훈은 아주 느긋하게 그녀와 연장전을 이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내일 밤이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집에 가뒀다.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던 안시연은 갑자기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외할머니가 병원에서 크게 넘어졌다는 소식이었다.외할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에 모든 고민이 다 2순위로 넘어가 버렸다.안시연이 급하게 집을 나서려고 했으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이 전화를 늦게 받자 안시연은 바로 큰소리로 화를 냈다.“외할머니가 다쳤어요! 지금 병원으로 가야 해요!”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정훈은 바로 회의를 중지하고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회의실을 벗어났다.“외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니야. 일단 경호원을 시켜 병원으로 바래다줄게. 가는 길에...”“당장 날 내보내 줘요!”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외할머니를 많이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경호원에게 그녀를 병원으로 바래다주라고 지시했다.“절대 안시연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세요.”“네, 걱정하지 마세요.”연정훈의 허락을 받은 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경호원과 함께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다행히 외할머니는 큰 부상이 아닌 팔목에 작은 멍이 들었을 뿐이었다.
안시연은 양지원이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오르고 마주한 양지원은 말없이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창밖을 내다보니 일렬로 줄을 선 직원들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주변 환경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보니 경인시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온 모양이었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석진의 주거지로 온 것이었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차에서 내리며 양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연정훈의 옆에 붙어있는 건지.”“...”“양 대표님...”“따라와요.”양지원은 안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높은 하이힐로 녹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걸었다. 고풍스러운 별장 앞으로 예쁜 돌길이 있었으며 양편으로는 잘 정돈된 화단이 보였다. 하늘에는 빨간 노을이 졌고 별장 분위기가 신비롭게 느껴졌다.안시연은 어리둥절해서 그 뒤를 따랐다.양지원은 키로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왠지 이 정원으로 들어선 후부터 양지원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중년 보스의 부담을 덜고 조금 편해 보였다.그녀는 문을 열고 전등을 켜더니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편하게 앉아 있어요.”안시연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양지원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얌전히 창가 자리에 잡았다.양지원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한가득 간식을 들고 내려왔다.그중에는 땅콩 치즈 쿠키도 있었는데 양지원은 박스 채로 완벽하게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얼굴을 굳혔다.“이걸 밥이라 생각하고 먼저 먹고 있어요. 물은 주방에 있어요.”그리고 양지원은 다시 가방을 고쳐 맸다.“저만 남겨두시는 거예요?”양지원이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양 대표님!”“다 그쪽을 위한 거예요.”양지원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보탰다.“그쪽과 그쪽 엄마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해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하지만...”안시연
안시연은 양지원이 꺼내준 쿠키를 절반 넘게 비웠다.어떻게 만든 건지 궁금할 정도 맛이 좋았다.그녀는 연정훈에게도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신호가 잡히지 않았고 이제 아예 포기를 했다.오늘 밤은 특별한 날이었고 거물들의 싸움에 자신의 존재가 거슬렸던 것이라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지원의 약혼이 공개되면 아마 이 집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양지원은 아마도 제 딸의 혼사를 그릇칠까 걱정이 되었겠지.안시연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서운한 감정인지 뭔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달콤한 쿠키가 그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거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거실은 별 볼 일 없이 무난했다.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많은 명화가 걸린 복도가 보였다.여러 명화 중에서도 가족사진이 제일 눈에 띄었다.사진 속에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젊은 여자는 당연히 양지원일 테고, 남자는 아마도... 양석진일 것이다.남매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는데 양지원은 다정하게 오빠의 어깨를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봤다면...흠,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안시연은 심심한 나머지 머릿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양지원이 안시연에게 거실에만 있으라고 말 한 적도 없었기에 안시연은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방은 모두 잠겨 있었지만 공용 구역은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었다.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척 여유롭게 구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지금 이 시간쯤이면 연정훈도 연회에 도착했을 것이다.그는 양지원과 어깨를 나란히 서서 사진 속 양지원과 양석진처럼 다정하게 사진을 찍을 것이다.머리가 갑자기 핑그르르 돌더니 하던 생각도 잠시 멈췄다.그녀는 앞으로 두 걸음을 걸었으나 바보처럼 제 자리에서 휘청거리고 말았다.이번에는... 정말로 머리가 어지러웠다.그 순간 시야가 갑자기 흐릿해지고 눈앞에 특수 효과가 생긴 것처럼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음?토끼?호... 호랑이?안시연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호흡
연정훈이 말했다.“왜 나한테 그래? 저 사람한테 물어봐.”이승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에게 물었다.“안 그래요?”‘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양시연은 이승우를 노려보았다.변백호는 자연스럽게 연정훈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제가 시연이를 대신해서 연 대표님께 사과드릴게요.”연정훈은 아주 쌀쌀맞게 말했다.“그쪽이 대신 사과를 한다고요?”“네.”이승우가 말했다.“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정훈이는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갚으려고요?”변백호가 대답했다.“아내를 갚아줄 수는 없어도 아이는 노력할 수 있죠. 저랑 시연이가 3년 안으로 아이 둘을 낳으면 연 대표님을 친 아빠처럼 모시라고 할게요. 그러면 어떨까요?”이승우가 웃음을 터뜨렸다.‘오. 꽤 치는데?’이승우가 다시 반격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변백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어떻게든 내 사람 다시 데리고 올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는 못 살아서.”“와우.”이승우는 몰래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우리 연 대표님 절대 지지 않아.’그러나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연정훈은 말만 할 뿐이지. 어떻게 다시 양시연을 찾아오겠어?’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그건 댁 마음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변백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연 대표님답네요.”“하지만...”변백호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하나뿐인데 먼저 옆을 채간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그건 저도 동의를 합니다.”그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그때!문이 활짝 열리더니 반우희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시연 언니, 왜 아직도 안 내려와요?”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이승우는 반우희를 발견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우희
“결혼식?”연정훈은 그 단어를 곱씹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만난 지 1년 됐는데 벌써 결혼하려고요?”양시연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변백호가 먼저 한발 빨랐다.“1년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양시연에게 물었다.“우리가 만난 지 1년 되었던가요?”“6개월이요!”“그러니까요.”변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연정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연 대표님은 나이가 저희보다 많아 보이는데 이미 결혼하신 건가요?”“...”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져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연정훈의 상대로 변백호는 아주 제격이었다.연정훈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미혼입니다.”“조급하지는 않으세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감히 그쪽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변백호는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저는 마음이 너무 급해지더라고요. 하루빨리 우리 시연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김세연은 죽상이 되었다.두 사람 사이 튀는 불꽃에 사람들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주시했다.이승우는 구경하러 들렀다가 마침 들리는 대화에 쯧쯧 혀를 찼다.‘우리 정훈이 불쌍하게 됐네.’그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이승우는 웨이터를 불러 몰래 말을 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는 양지원에게 걸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래 연회장 세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회장님을 비롯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지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아래층으로 향했다.그러다가 양지원은 연정훈을 따로 부르며 말했다.“정훈아, 어린 녀석들이 연애하게 내버려둬. 마침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다는데 넌 나랑 손 회장님 만나러 가자.”마치 연정훈이 양시연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처럼 들렸다.김세연이 참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오늘
어머니?양시연은 속으로 변백호의 연기에 박수를 쳤다.변백호는 자신보다도 더 쉽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폈다.‘누가 더 뻔뻔한지 보자는 거지?’‘흐흐.’‘자, 여기 너보다 더 뻔뻔한 사람 등장이야.’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김세연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연정훈은 ‘강강약약’인 사람으로 사건이 복잡해질수록 더 이성적으로 변했다.변백호는 아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양지원은 양시연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시연이는 잠시 저기로 가서 앉아. 우리 백호 여기 앉혀야지.”누군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역시 사위 아끼는 건 장모라고 벌써 딸은 찬밥 신세네요.”양지원이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변백호는 정장 차림이 아닌 편한 캐주얼 복장이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밝고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였다.변백호의 등장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김세연도 몰래 손에 땀을 쥐며 연정훈에게 눈짓했다.‘아들, 큰일이야. 네 경쟁 상대가 많이 잘생긴걸?’“...”외모로 보았을 때 연정훈은 변백호에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면 연정훈은 더 진중하고 짙은 남자의 매력이 흘렀다. 마치 방금 원목 상자처럼 우아한 기풍을 풍겼다.그러나 사모님들은 연정훈을 자주 봐왔고, 하필 변백호는 뉴페이스이자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이다 보니 관심이 그쪽으로 더 쏠렸다.변백호는 가볍게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저 앉으라는 데 빨리 일어나요.”양시연이 힐끗 노려보았다.젊은 커플의 풋풋한 사랑놀이에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김세연은 찻잔을 또 비웠다.그렇게 변백호가 자리를 차지했다.양시연이 다른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변백호가 양시연의 손을 휙 잡아 허리를 감싸더니 의자 손잡이에 앉혔다.“어디 가려고요? 여기 앉으면 되잖아요.”“...”커플 연기이고 뭐고 떠나서 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지금 뭐 하
양지원의 행동은 연정훈의 선물을 무시하는 의미였다.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다.‘두 가문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딸이 생기더니 두 가문 사이에 금이 간 거야?’김세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말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하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시 침착하게 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지원 이모는 넘치는 선물을 받으셨을 텐데 제 선물은 시간이 되실 때 확인해 보셔도 괜찮아요.”“역시 우리 정훈이가 날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까.”양지원은 양시연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정훈이 네가 있으면 앞으로 시연이 부부가 경인에서 지내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연정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시연에게 물었다.“사귄 지는 얼마됐어요?”마치 친척이 아래 사람에게 물어보는 말투였다.양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6개월 좀 넘었어요.”“오늘 이 자리에 오면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그 친구 곧 도착한대.”양지원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아까 연락이 왔는데 연회장 앞까지 왔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빤히 바라봤다.‘엄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엄마만 믿어.’“...”분위기는 살짝 어색하게 흘렀고 참석한 사람들은 꾸역꾸역 대화 주제를 돌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방금까지 양지원은 연회장으로 가야 한다며 연정훈의 선물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또 미래 사위를 기다린다며 자리에 편히 앉아 있었다.그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남자 친구가 좀 늦는 모양인데 재촉하지 그래요?]양시연은 그 내용을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나한테 세컨드가 되어달라면서요. 세컨드가 되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죠.]양시연은 제 눈을 의
“엄마, ‘오빠’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온 김에 모자를 한번 제대로 혼내주자고.”“...”김세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양시연이 연정훈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가 눈에 선했다.‘그건 안되지!’잠시 고민하던 김세연은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이 양지원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동생 사이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그러다가 내가 콱 물고 늘어져 사돈 하자고 매달리는 수가 있어. 네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 거라고!”“...”양지원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김세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다른 사모님들도 김세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두 가문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시연이랑 정훈이랑 맺어주면 되겠어요.”양시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그러자 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쉽게도 그러기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김세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날 겁주지 마!’‘내 아들이 당장 여기로 오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야!’“연 대표님, 이쪽입니다.”그때 문밖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양지원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우리 시연이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곧 날 잡을 것 같아요.”김세연은 김이 빠져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양지원의 말을 들은 제 아들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다 필요 없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다른 사모님들이 연정훈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무슨 일로 우리 대표님이 다 걸음하셨을까?”연정훈은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클래식한 턱시도였지만 연정훈에게 알맞게 제작되어 우아하고 타고난 귀족 분위기를 풍겼다.연정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지원 이모 생일인데 제가 와야죠.”그리고 슬쩍 양시연을
김세연은 양지원의 딸이라면 양민아밖에 몰랐다. 최근 몇 해 동안 양민아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과거 양민아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있었다.그런데 양지원이 또 ‘새로운 딸’을 소개한다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시연이 아래층에 있는 동안 사모님들은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입에 올렸다. 누구 아들이 몰래 여자에게 스폰을 해주고, 누구 딸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 가문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김세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젊은 사람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리 같은 가문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요?”다른 사모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묵묵히 상황을 주시했다.“양 대표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직원이 다가와 양지원에게 속삭였다.양지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여기로 오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직원은 양시연을 위해 문을 열었다.큰 홀이다 보니 정문부터 사모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있었다.김세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양지원에게 몰래 안시연이라는 불여우가 돌아왔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창가 자리라 햇빛에 눈이 부셨던 김세연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시연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지원을 향해 엄마라 불렀고 다른 사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김세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들 양지원에게 양녀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또 다른 딸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겉치레로 예쁘다는 칭찬만 늘려놨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자리로 이끌었다.그러자 김세연은 입을 딱 벌렸고 어느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그러나 김세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지원은 양시연의 손을 만지며 김세연에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