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 가문.양혁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착잡한 기분이었다.그가 자꾸 병실 안을 왔다 갔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자 양지원도 인상을 팍 찌푸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양지원은 국그릇을 밥상 위로 탁 올렸다.“빨리 먹어.”“...”그는 상처 난 부위를 움켜쥐고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양지원에게 다가갔다.“또 어느 눈치 없는 녀석이 우리 양지원 씨 심기를 거슬리게 했을까요?”양지원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쭉 밀었다.“말만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먹고 싶지 않아요. 계속 누워있었더니 입맛이 싹 사라졌다고요. 많이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해요.”“...”양지원이 팔짱을 척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넌 민아와 연정훈이 약혼하길 바라고 있었잖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아들의 고민을 읽은 양지원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계약 약혼에 있어 양지원은 그동안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약혼은 순리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와 직접 가입할 줄은 몰랐다.양지원은 막아서려 했지만 며칠 전 안시연과 소현정의 일로 기분이 상했고 막아설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다.두 가문 사람들이 모두 허락했으나 오직 연정훈만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이 약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좋은 결말이 없었다.양혁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온 건 누가 입김을 불어서 그래요.”양지원도 모를 리가 없었다.“민아는 네 누나야.”양혁수가 쳇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민아가 움직일 거라 양혁수는 미리 예상을 했었다.명예와 권력을 위해 낳아준 부모의 성도 버린 사람이 고마움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더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그런 소리 마세요. 난 외동아들이고 그 누구와도 재산을 나눠 가질 생각 없어요.”“그리고 이번에 결정된 혼사를 어머니는 절대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뱉은 말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부승희는 양씨 어르신이 보내온 모바일 초대장을 안시연에게 보냈다.[이 기세를 보아하니 두 가문이 큰 소식을 공개할 예정인 것 같은데요.][네. 연정훈 씨와 양민아 씨의 약혼 소식이겠죠.]???[안시연 씨, 그걸 지금 그냥 넘어간다고요?]안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남 시티를 한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대화는 적은 편이었다.더구나 안시연은 아직도 연정훈에게 삐진 상태였다. 그리고 연정훈은 아주 느긋하게 그녀와 연장전을 이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내일 밤이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집에 가뒀다.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던 안시연은 갑자기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외할머니가 병원에서 크게 넘어졌다는 소식이었다.외할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에 모든 고민이 다 2순위로 넘어가 버렸다.안시연이 급하게 집을 나서려고 했으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이 전화를 늦게 받자 안시연은 바로 큰소리로 화를 냈다.“외할머니가 다쳤어요! 지금 병원으로 가야 해요!”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정훈은 바로 회의를 중지하고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회의실을 벗어났다.“외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니야. 일단 경호원을 시켜 병원으로 바래다줄게. 가는 길에...”“당장 날 내보내 줘요!”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외할머니를 많이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경호원에게 그녀를 병원으로 바래다주라고 지시했다.“절대 안시연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세요.”“네, 걱정하지 마세요.”연정훈의 허락을 받은 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경호원과 함께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다행히 외할머니는 큰 부상이 아닌 팔목에 작은 멍이 들었을 뿐이었다.
안시연은 양지원이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오르고 마주한 양지원은 말없이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창밖을 내다보니 일렬로 줄을 선 직원들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주변 환경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보니 경인시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온 모양이었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석진의 주거지로 온 것이었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차에서 내리며 양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연정훈의 옆에 붙어있는 건지.”“...”“양 대표님...”“따라와요.”양지원은 안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높은 하이힐로 녹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걸었다. 고풍스러운 별장 앞으로 예쁜 돌길이 있었으며 양편으로는 잘 정돈된 화단이 보였다. 하늘에는 빨간 노을이 졌고 별장 분위기가 신비롭게 느껴졌다.안시연은 어리둥절해서 그 뒤를 따랐다.양지원은 키로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왠지 이 정원으로 들어선 후부터 양지원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중년 보스의 부담을 덜고 조금 편해 보였다.그녀는 문을 열고 전등을 켜더니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편하게 앉아 있어요.”안시연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양지원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얌전히 창가 자리에 잡았다.양지원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한가득 간식을 들고 내려왔다.그중에는 땅콩 치즈 쿠키도 있었는데 양지원은 박스 채로 완벽하게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얼굴을 굳혔다.“이걸 밥이라 생각하고 먼저 먹고 있어요. 물은 주방에 있어요.”그리고 양지원은 다시 가방을 고쳐 맸다.“저만 남겨두시는 거예요?”양지원이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양 대표님!”“다 그쪽을 위한 거예요.”양지원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보탰다.“그쪽과 그쪽 엄마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해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하지만...”안시연
안시연은 양지원이 꺼내준 쿠키를 절반 넘게 비웠다.어떻게 만든 건지 궁금할 정도 맛이 좋았다.그녀는 연정훈에게도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신호가 잡히지 않았고 이제 아예 포기를 했다.오늘 밤은 특별한 날이었고 거물들의 싸움에 자신의 존재가 거슬렸던 것이라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지원의 약혼이 공개되면 아마 이 집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양지원은 아마도 제 딸의 혼사를 그릇칠까 걱정이 되었겠지.안시연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서운한 감정인지 뭔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달콤한 쿠키가 그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거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거실은 별 볼 일 없이 무난했다.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많은 명화가 걸린 복도가 보였다.여러 명화 중에서도 가족사진이 제일 눈에 띄었다.사진 속에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젊은 여자는 당연히 양지원일 테고, 남자는 아마도... 양석진일 것이다.남매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는데 양지원은 다정하게 오빠의 어깨를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봤다면...흠,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안시연은 심심한 나머지 머릿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양지원이 안시연에게 거실에만 있으라고 말 한 적도 없었기에 안시연은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방은 모두 잠겨 있었지만 공용 구역은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었다.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척 여유롭게 구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지금 이 시간쯤이면 연정훈도 연회에 도착했을 것이다.그는 양지원과 어깨를 나란히 서서 사진 속 양지원과 양석진처럼 다정하게 사진을 찍을 것이다.머리가 갑자기 핑그르르 돌더니 하던 생각도 잠시 멈췄다.그녀는 앞으로 두 걸음을 걸었으나 바보처럼 제 자리에서 휘청거리고 말았다.이번에는... 정말로 머리가 어지러웠다.그 순간 시야가 갑자기 흐릿해지고 눈앞에 특수 효과가 생긴 것처럼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음?토끼?호... 호랑이?안시연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호흡
연회장에서.양지원은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바로 손님을 맞았고 이어 연정훈의 옆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와인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난 네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어.”“지원 이모가 내 사람을 데려가고 왜 그런 걱정을 해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렸다.본인이 안시연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걸 연정훈도 알 거라 생각했다.?‘대체 뭐가 문제지?’연정훈은 양지원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이모가 그 사람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데려간 곳도 안전하지만 할머니는 곧 그 사람 데려갈 거예요.”양지원은 말없이 민수희를 살폈다.안시연을 데려가기 전 민수희가 먼저 선수 치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양석진의 구역에서 아무리 민수희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내 판단이 틀린 건가?’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제 사람을 붙였어요.”“그럼 정훈이 너는 할머니 때문에 온 거야?”양지원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곳은 네 할머니면 몰라도 넌 감히 움직이지 못할 거야.”연정훈은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눈인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죠.”“그럴 필요 없어. 합법적으로 내... 혁수 삼촌의 거주지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양석진 레벨이면 그의 거주지는 일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절대 안전을 보장했다.연정훈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굳이 합법적일 필요는 없죠.”연정훈은 안시연만 되찾으면 되었다.납치 사건 그 후로 연정훈은 안시연의 멘탈이 걱정되었다.양지원은 이런 연정훈을 조용히 살폈다.침착해 보이는 겉면과는 달리 겨우 화를 참고 있는 내면이 언뜻 보였다.할머니만 없었다면 아주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그래.”양지원이 남은 와인을 전부 들이켜며 말했다.“어디 한번 기다려볼게.”어느새 손님들도 거의 도착했다.생일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가 되고 약혼 서약은 거의 흘러가는 말로 한번 꺼낼 계획이었다.하지만 그의 한마디 말이면 모든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민수희가 연정
연회장 주차장에서.양지원은 뒷좌석에 앉아 실소를 터뜨렸다.그리고 창문을 내리고 편하게 좌석에 몸을 기댔다.앞좌석의 집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연정훈 도련님이 그렇게 가버렸는데, 큰아씨께서는 왜 기분이 좋아보아 실까요?”“가버린 것에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이 좀 흥미롭네.”“흥미롭다고요?”“그래.”자리를 떠난 타이밍이 너무 제 멋대로였다.양지원이 안시연을 데리고 간 건 그녀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여사님과 연정훈이 모두 다시 그녀를 찾으려 했으니 양지원이 안시연을 그에게 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양지원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여사님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자신을 약 올리는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계약 결혼을 찬성하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 나서서 반대할 필요는 없었다. 안 그러면 어르신의 입장도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양지원이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갈 능력이 있었다면 굳이 연회장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사님은 연정훈의 체면을 챙겨줄 생각이 없었고 연정훈이 여사님을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굳이 연회장에 참석하고 다른 한편 안시연을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니. 그리고 제일 중요한 타이밍에 홀연히 자리를 떠나 여사님의 뒤통수를 제대로 쳐버렸다.쯧쯧.그러고 보니 연정훈에 비하면 양혁수는 정말 순한 양이라 할 수 있었다.그녀는 다시 허리를 펴고 팔을 차창 위로 올렸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폐 끝까지 들이마셨다.집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민아 아가씨께서 많이 속상해하실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대꾸하지 않았다.어머니가 되어 양민아를 응원하는 게 맞았으나 양민아의 행동은 양지원의 관념과 너무 달랐다. 양지원은 양민아가 이해되지 않았다.“민아는 똑똑한 아이이니 며칠 후면 다 정리할 거야.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굳이 연정훈에게 목을 맬 필요가 뭐 있어.”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지원 이모, 저예요.”양지원은 의외라
의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같은 쿠키라고요?”양창수가 미소를 터뜨렸다.“아직도 버리지 않으셨어요?”양창수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의사는 어이가 없었다.양석진은 무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쿠키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잘 보관해 뒀는데 뭐가 문제야?’양석진이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사람이 식욕을 못 참고 그렇게 많이 먹어 댔으니 문제지. 몇 개 남지도 않았던데.’양창수는 양석진의 생각을 바로 읽었고 의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현관까지 같이 걸어가며 양창수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킬러는 여전히 한 사람이네요.”층계까지 걸어왔는데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양창수가 입을 열었다.“킬러 도착.”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만하시고 빨리 마중이나 가세요.”방안에는 안시연과 양석진만 남겨졌고 그도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비록 양석진은 안시연의 아빠뻘이었지만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니 같은 방에 있는 건 부적절했다.그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깊은 잠이 들었던 안시연이 눈을 떴다. 그리고 좌우를 살피더니 갑자기 몸부림치며 끝자리로 움직이려 했다.“우웩!”!!!양석진은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었고 안시연의 구사 물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휴지통이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그는 빠르게 휴지통을 그녀의 옆으로 걷어찼다.안시연은 아까 이미 속을 모두 비웠고 지금은 그저 구역질만 할 뿐이었다.안시연이 바닥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양석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침대에 힘없이 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양석진은 탁자에 놓인 물을 따라 건네려 했다.그리고 방 밖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양지원은 젊었을 적 하늘 아래 무서운 게 없던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고 진중해 보이는 가면을 갖췄으나 사실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양석진의 집으로 들어선 그녀는 너무 급한 나머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문이 열리고 보인 광경에 양지원은 깜짝 놀랐다.양석진이
안시연은 먹었던 모든 걸 토해내고 편하게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편해 보이는 안시연을 보며 드디어 안심했다.그러나 손등에 꽂힌 링거를 보며 또 마음이 아팠다.양주에서도 병원 신세를 졌는데 자신의 구역인 경인에서도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날 밤 그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고민을 길게 할수록 그는 제 가문 어르신들의 수단이 역겹게 느껴졌다.그리고 안시연을 향한 마음에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조금 좋아하는 그런 섣부른 마음이 아니었다.이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마음속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안시연이 잠에서 깨면 이런 말을 직접 전할 생각이었다. 항상 모른 척 넘어가 그녀의 속을 상하게 했었다.안시연이 몸을 뒤척이자 연정훈은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음...”행여나 그녀가 움직이다가 링거 바늘이 움직일까 봐 걱정되었다.안시연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아래층에서.양지원은 진녹색의 소파에 앉았다. 탁자 앞에는 양창수가 가져온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간식은 대부분 쿠키였다.그녀는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양석진은 창문을 열고 그녀를 등진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라이터는 손이 닿는 아무 거치대 위로 올려두었다.뿌연 연기가 그의 옆선을 흐릿하게 가렸다. 그러나 높은 신분에서 드러나는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양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담배 끊었지 않아요?”양석진이 그녀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끊었었지.”“...”“기분이 안 좋으면 가끔 필 뿐이야.”그리고 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꽂고 차를 직접 우렸다.담배 연기는 어느새 저녁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없었다.양지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머릿속엔 양석진이 안시연을 보살피던 그 광경이 잊히지 않았다.그는 결벽증이 심했고 낯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그때 양석진이 찻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양주에서 만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
양혁수는 지금껏 변여름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변여름은 얼마든지 자신의 제가 했던 말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럼, 네 말대로면 시연이도 현실이 상상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그러자 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빠, 계속 그러면 나 정말 질투할지도 몰라요.”“술 마셔 자제력이 떨어진 오빠를 질투에 눈먼 내가 뭐 어떻게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요?”“...”변여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우울함이 반으로 줄었다.그리고 변여름이 뜨개질 거리를 찾아 다시 양혁수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았다.하얀 피부는 투명할 정도였고 가까운 거리에 양혁수는 변여름의 긴 속눈썹까지 보였다.“부모님이 연락이 온 거야?”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빨리 집으로 돌아오라 재촉하진 않으셔?”“아니요. 그것보다 오빠 어디까지 꼬셨는지 궁금해하시던데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가족들한테 날 좋아하는 사실은 언제 밝힌 거야?”“성인이 되는 날 에요.”그리고 변여름을 한 마디 덧붙였다.“오빠네 나라 법에 따른 성인이던 해에요.”“...”‘뜬금없는 곳에서 꼼꼼하긴.’“몇 해 동안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더니 그동안 부모님 사업 돕고 있었어?”변여름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5년 동안 아빠를 위해 일하면 앞으로 가문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을 받았거든요.”“그럼 넌 앞으로 뭘 하고 싶은데?”“의학이요.”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양혁수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 생각했다. 변여름처럼 똑똑한 사람이 의사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그때, 변여름이 스웨터를 내려두고 말했다.“낮에 교수님이 연락을 하셔서 언제 한강시에 돌아올지 물었어요.”사실, 양혁수는 예전에 변여름한테 지도교수한테 연락하겠다고 겁을 줬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변여름이 그걸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흘리자 양혁수는 못 들은 척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콩깍지?양혁수의 추억 속 에든베타는 분명히 따듯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밖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 에든베타는 사실 흐린 날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술잔을 내려놓은 양혁수가 변여름에게 물었다.“빙 둘러 말하더니 지금 나한테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사실 내가 꾸며낸 허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양혁수는 무표정이었고 기쁨도 슬픔도 읽히지 않았다.이에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추억은 아름다운 거죠. 근데 그게 왜 허상이겠어요?”“다른 사람 눈에 별로 일 순 있어도 오빠한테 아름다운 거면 아름다운 추억인 거예요.”양혁수는 말없이 변여름을 바라봤고 변여름은 더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한 여자의 가장 예쁜 순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마음속에 제일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내가 에든베타의 쓸쓸함을 봤다고 해서 과거의 그 사람이 별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야.”“당연하죠.”변여름이 미소를 지었다.“요즘 시연 언니 만나봤어요?”“뭐, 나이가 든 시연이가 과거와 달라졌을 것 같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건 있어요. 시연 언니는 오빠와 4분의 1이 넘는 인생을 같이했고 오빠의 인생에서도 시연 언니는 이미 중요한 사람이 되었겠죠. 그러니 달라진 외모는 오빠한테 큰 타격이 없을 거예요.”양혁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 마신 컵을 돌려줬다.“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오빠가 과거를 직시하는 거요.”변여름은 옆에 내려둔 인형을 안아 들고 양혁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시연 언니가 과거에 예뻤고 지금도 예쁘다고 하지만, 오빠는 아직도 시연 언니만 보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양혁수의 표정이 굳어갔다.“그게 왜 그렇겠어요.”양혁수가 대답이 없어도 변여름이 말을 이었다.“과거의 시연 언니가 50점이었다면 지금 더 완벽해진 시연 언니는 거의 80점에 달하겠죠. 하지만 오빠 마음속에 심어진 시연 언니는 추억 속에서 점점 미화가 되어 100점이 아니라 만
여섯 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왔다.주방에 있던 변여름은 인기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서 주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를 불렀다.외투를 벗던 양혁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이것도 변여름이 예상했던 시나리오이긴 했으나 이런 양혁수를 바라보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오빠, 빨리 와서 앉아요. 밥 다 됐어요.”양혁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변여름은 부지런히 반찬 여섯 가지와 국 하나를 완성했다.“우리 두 사람뿐인데 이렇게 많이 할 필요없어.”“많지 않아요.”변여름이 양혁수의 밥 위로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기운이 빠졌을 거예요. 오빠는 양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밖에서 뭘 사 먹지도 않았을 거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누가 그래? 내가 양식 별로 안 좋아한다고?”“오빠잖아요.”변여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우리 오빠한테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고 엄청나게 투덜거렸으면서.”“뭐. 그렇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양혁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갓 튀긴 돈가스를 한 점 입에 넣었다.집 안에는 향기로운 음식 향이 가득했고 두 사람의 도란도란 얘기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집안을 따뜻하게 데웠다.양혁수는 배가 아주 고팠던 건지 밥을 평소보다도 많이 비웠다.낮에 밖에서 겪었던 쓸쓸함은 어느새 변여름의 온기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샤워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변여름이 술잔을 세팅하고 있었다.“네가 산 거야?”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양혁수는 변여름이 만들어준 칵테일도 마셔봤기에 변여름의 솜씨를 인정했다.“네 마음대로 한잔 만들어줘.”변여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양혁수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화려한 손놀림의 변여름을 바라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오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
밤 열두 시 반.양혁수는 침대 왼쪽 끝에 누웠고 오른쪽엔 변여름이 누워 있었다.아까 변여름은 대화를 하자며 양혁수를 기어코 침대에 데리고 왔다.평소에 말수가 적은 변여름이었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스러울 수 있었다.지금도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최근에 봤던 아재 개그를 알려주고 있었다.“너 예능도 봐?”양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일반적으로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예능 많이 보잖아요.”또 자신을 일반적인 소녀로 묶으려 애쓰는 모양이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왜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여름의 대화에 꽤 흥미가 생겼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래. 무슨 아재 개그인데? 너무 썰렁하면 안 들어줄 거야.”변여름이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딸기가 회사에 잘리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양혁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백수.”“아니요. 딸기시럽이요.”양혁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변여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딸기가 실업했으니까 딸기시럽이죠!”“...”양혁수는 썰렁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어떤 개그보다도 자신을 웃기려 애쓰는 변여름이 가장 재밌게 느껴졌다.“나 다른 아재 개그도 알아요.”변여름은 은근슬쩍 양혁수에게 다가갔고 거의 딱 붙기 직전이었다.양혁수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며 변여름을 다시 원위치로 밀었다.“자꾸 선 넘으면 네 방으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양혁수가 변여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화하자며 데려와 놓고 자꾸 수작 피울래?”변여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너무 멀어서 오빠한테 잘 들리지 않을까 봐 그랬죠.”“나 겨우 서른이야.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정도 아니거든?”“오빠 귀가 먹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변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했고 양혁수는 거의 무감각해졌다.“그만해.”양혁수는 이불을 쭉 당겨 변여름의 얼굴을 가렸다.
양혁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변여름이 마침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나타나 줬다는 것이었다.화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에서 변여름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양혁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이렇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기분은 스물다섯이 넘은 뒤로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스물다섯 전의 양혁수는 출생의 비밀도 몰랐고, 양시연을 만나지도 못했으며 총으로 제 친어머니를 쏴 죽이는 일도 겪지 않았다.변여름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해 주고 아무 이유 없이 옆을 지켜주는 걸 보며, 어쩌면 변여름이라면 최악의 모습을 들켜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자 양혁수도 변여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대체 뭔지 고민하게 되었다.‘내가 정말 여름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닌데...’결국 양혁수는 본인이 변여름의 아낌없는 사랑에 점점 응석받이가 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시간이 차츰 흐르고 변여름의 뜨개질도 점점 스웨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정말 밤을 새우기라도 할까 봐 밤 열한 시가 되자 서둘러 변여름을 제지하며 잠을 잘 시간이라 다독였다.변여름은 아까 호박죽을 끓였고 양혁수를 시켜 가스레인지를 끄고 두 그릇 떠오라고 부탁했다.양혁수가 고분고분 두 그릇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는데 변여름이 제 방에서 꼬물거리는 게 보였다. 옆방의 변여름 침대에 베개 하나가 사라졌고 그건 양혁수의 침대 위에서 다시 포착되었다.‘쯧. 또 시작이군.’양혁수의 발걸음 소리에 변여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 호박죽을 받아쥐었다.그리고 테이블로 걸어가 겉으론 침착한 얼굴을 하고 한 입 떠먹었다.양혁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또 제 침대를 가리켰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변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빠랑 같이 자려고요.”“꿈도 꾸지 마. 얼른 베개 들고 네 방으로 돌아가.”“새벽에 몰래 오빠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건 너무 변태 같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웃음이 터졌다.
화로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오고 거실에는 그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양혁수는 도라미 인형을 베개 삼아 누워 맞은편에서 열심히 뜨개질하고 있는 변여름을 바라봤다.“너 정말 뜨개질할 줄 알아?”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뜨개질하는 방법 다 익혔고 생각보다 쉬워요.”그리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쏘아붙였다.“오빠, 도라미 베개로 쓰지 마요!”양혁수는 상체를 살짝 들며 말했다.“좀 쓴다고 안 망가져.”그러자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를 보였고 양혁수를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인형을 머릿밑에서 빼냈다.변여름은 그제야 다시 자리에 편하게 기대 다시 뜨개질에 집중할 수 있었다.“오늘 밤을 새우면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정말?”양혁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건 굵은 실이라 빠르거든요.”꽤 전문가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양혁수는 긴가민가해졌다.그래서 그 옆에 앉아 모바일 게임을 하며 변여름의 완성품을 기다렸다.변여름은 스웨터 말고 먼저 목도리를 뜨려고 했는데 양혁수는 변여름이 스웨터를 만드는 줄만 알고 이렇게 비아냥거렸다.“이게 스웨터라고? 왜 이렇게 네모난 거야?”“스웨터는 너무 어려워서 담요로 바꾼 건가?”그리고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여름아, 오빠가 하나 조언해 줄까? 차라리 담요 두 장 만들어. 그다음에 가위로 옷 모양으로 자르고 테두리만 꿰매면, 그러면 그게 스웨터잖아.”“...”변여름은 처음으로 양혁수가 말이 많다고 느껴졌다.“담요를 그렇게 자르면 실이 다 풀린다고요!”“본드로 붙이면 되지.”“...”‘정말 못 말려.’양혁수가 말이 많아진 건 꽤 진지해 보이는 변여름의 모습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변여름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연구 실험을 하듯 한껏 굳은 표정이었는데 뜨개질할 때도 그 표정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그리고 양혁수도 변여름이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회색 실을 보아하니 본인의 몫으로 뜨고 있는 것
고작 인형 하나 받았다고 변여름의 입이 귀에 걸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의 옆에 찰싹 달라붙던 변여름은 어느새 인형을 들고 뛰어다니며 평범한 소녀처럼 사진 찍기에 바빴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찍은 사진을 아마 노지혜에게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진을 찍고 변여름은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 도라미를 눕히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줬다.“오빠,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요?”변여름의 관심사가 다시 양혁수로 돌아오고 있었다.양혁수는 베란다에 앉아 국내 회사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양혁수가 변여름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자 변여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옷을 든든히 입고 출입문 앞에 선 변여름을 보고 양혁수가 불러세웠다.“어딜 가려고?”“마트요.”“이렇게 추운 날에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오빠가 소갈비찜 먹고 싶다면서요. 그건 양파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집에 없어요.”양혁수는 아까 일에 정신이 팔려 본인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잊었고 소갈비찜에 양파가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돼.”“안 번거로워요. 마트가 멀지도 않고요.”고집 피우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나 양파 별로 안 좋아해.”“그러면 빵가루 사와 내일 빵 구워줄게요.”‘쯧.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생각이군.’양혁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변여름의 목도리를 풀어 헤쳤고 고개를 숙인 채로 타이르듯 말했다.“집 밖에선 어른 말 들어야 한다고 네 오빠가 안 가르쳤어?”변여름은 순수 무구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고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심심하면 책 보거나 드라마 봐. 교수님이랑 프로젝트 의논을 하든지. 왜 종일 나 뭐 먹일 건지만 고민하고 있어?”“책이나 드라마, 그리고 프로젝트 의논을 해서는 오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잖아요.”양혁수는 목도리를 아예 훌렁 잡아당겨 소파에 곱게 눕혀진 도라미 위로 던졌다